240화 괴짜 감독
하버드.
인지도 면에서나 실력에서 최고라는 평을 듣는 대학.
아이비리그의 최상단에 위치한 세계 최고의 대학이자 학문의 상아탑.
그 대학가에서 멀지 않은 사설 주택 안에서 실랑이가 벌어지고 있었다.
“진짜. 오늘도 소개팅 정말 안 갈 거야?”
“흥미 없어. 난 임자 있다니까?”
“그게 뭐 어때서 그런가. 한번 재미로라도 만나 봐. 얼굴만 비추면 된다잖아. 그쪽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대두.”
“난 흥미 없어. 바쁘다니까. 너 혼자 놀고 와.”
극동의 아시안 미녀는 누구에게나 인기 만발이었지만 철벽으로 유명했다.
아무리 애원해도 꿈쩍도 하지 않고 판례만 보고 있던 설유하에 라니가 투덜거렸다.
“흥 비싸게 굴긴. 친구 부탁도 못 들어줘? 난 니 베프잖아.”
“예예. 원래 나 비싼 여자란 거 몰랐어?
“그러지 말고 제발 한 번만! 같이 가 줘. 제발!”
“그럼 절 사설로 고용하시던지요. 전 수임료 없이는 외출하지 않는답니다. 너 나 데리고 나오는 값으로 200달러 받기로 했다며?”
“그건 어디서 들었는데?”
“나도 눈이 있고 귀가 있어요.”
“하루 일탈의 대가로 200달러면 싼 거 아니야. 반띵하자고.”
“라니. 나 그렇게 싸구려 아니야.”
아무리 설득해도 요지부동이자, 포기한 라니가 뾰로통해진 어조로 말했다.
“흥. 아주 정절녀 납셨네. 그 남자 여기는 한 번도 안 왔다며?”
“사업해서 바빠서 그렇겠지. 편지는 꼬박꼬박 왔는걸.”
“그거야 대필일 수도 있지 않나.”
“태준 씨는 그럴 사람 아니야.”
“흥. 요새 편지도 뜸해졌다며, 뭔가 마음이 변한 거 아니야? 남자는 다 똑같아.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지는 법이라고.”
조잘거리는 목소리가 신경을 돋구었다.
판례집을 읽던 설유하가 탁 하고 책을 접자 움찔하는 라니.
설유하가 조곤조곤하게 충고했다.
“라니, 거기까지. 자꾸 자극하면 나 화낼 거야.”
입가는 웃고 있었지만 눈은 절대로 웃고 있지 않다.
목소리에서 냉기가 뚝뚝 떨어지는 태도에 라니가 움찔했다.
“흥. 내가 틀린 말 했나.”
“라니!”
“알았어! 알았어. 나중에 후회하지 말라고.”
입을 비죽거리던 라니가 문을 닫고 밖으로 나갔다.
잠시 후 드레스룸을 들여다본 설유하는 한숨을 쉬었다.
침대 위로 온갖 옷들이 널브러져 있었던 것이다.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속옷을 주섬주섬 옷을 챙기던 유하는 이상함을 눈치챘다.
옷장 안을 살펴보니 아니나 다를까. 자기 옷을 빌려 입고 간 것이다.
-하루만 봐줘. 빚은 나중에 꼭 갚을게.
메모 위에 터키식 과자인 로쿰 한 통이 놓여 있는 모습에 피식 웃었다.
“이거 봐, 머리만 컸지 아직도 애라니까.”
홈스테이를 하던 설유하는 JD 과정에 들어가면서. 주택에 나와 룸메이트랑 같이 살고 있었다. Harvard University Housing이라고 해서 로스쿨 학생들에게 우선적으로 임대되는 집이 있었지만, 배정 방식이 기본적으로 선착순이라 아쉽게 얻지 못했던 것이다.
로쿰과 함께 차를 홀짝이던 그녀는 문득 외로움을 느꼈다.
생각해 보니 강태준과 통화를 해 본 지도 오래되지 않았나. 아까 한 말이 뇌리에 남아서일까 갑작스레 떠오르는 불안감. 혹시나 생각에 머리가 복잡해지려던 그때 딩동 하고 벨 소리가 울렸다.
“손님?”
길게 쫙 빠진 리무진 옆으로 선글라스를 낀 양복 두 명이 마치 맨인블랙처럼 좌우로 시립해 있다. 머리 하나는 커 보이는 핸더슨이 양옆으로 쇼핑백을 들고 서 있었다.
의문도 잠시, 차 문을 나온 강태준이 손을 흔들었다.
“서프라이즈!”
“태준 씨? 여기는 어떻게?”
“뭐 물어보고 왔지요. 혹시 안에 객 있나요?”
“아니요. 조금 전에 나갔죠.”
“그럼 잠시 실례해도 되죠.”
“그럼요, 모두들 어서 들어오세요.”
“잠시 기다려요.”
영차영차~ 트렁크를 열자 엄청난 양의 옷이 더미로 올려져 있었다.
“어머 이게 다 뭐예요?”
“유하 씨 선물입니다. 빈손으로 올 수 있어야죠. 아, 이거 받아요.”
트렁크와 차 두 대 뒤에서 끝도 없이 옷이 쏟아져 나왔다.
“이거는 여름용, 이거는 겨울용, 이거는…… 나 볼 때만 입을 용도고.”
“뭘 이렇게 많이 샀어요?”
얼떨떨했다. 한눈에 보기에도 죄다 명품으로 보이는 옷들이었다. 태그를 다 떼 놨지만, 기품을 숨길 수 없었다.
“펜던트에 맞는 옷을 고르다 보니 다 사 버렸지 뭡니까?”
“펜던트?”
“짜잔!”
“어머 이게 뭐예요?”
강태준이 보여 준 보석에 호들갑을 떨었다.
“늦었지만 시험 합격 선물이에요.”
이야기를 듣던 그녀가 감동한 듯 눈을 깜빡였다.
“엄청 예쁘네요. 윤기가 흐르는 게 진짜 깃털인 거 같아요.”
“은으로 세공한 물건이에요. 백금에 로듐으로 도금한 거라 변색되지 않을 겁니다.”
“이런 거 처음 봤네요.”
유심히 보석을 들여다보는 그녀가 아무 말 없자 강태준이 물었다.
“뭐가 맘에 안 들어요?”
“그게 아니라. 맘에 들어요. 근데 좀 무리한 거 아녜요?”
원래 부족함 없이 자란 아가씨긴 하지만 눈치 정도는 있기 마련.
약간 부담스러워하는 것을 눈치챈 강태준이 아무렇지도 않게 재촉했다.
“뭘, 제가 이번에 얼마짜리 계약을 땄는지 신문 안 봤어요?”
“그래도…….”
“살 만하니 산 겁니다. 신경 쓰지 말고 한번 입어 봐요.”
“여기서요?”
“당연하죠. 어서! 자!”
경호원들을 밖에 세운 강태준의 재촉에 옷방에 들어갔다 나온 설유하가 새 옷을 갈아입었다.
“요새 살이 쪄서 이건 사이즈가…… 좀 달라붙는 거 같은데 어때요, 괜찮아요?”
그녀가 고른 것은 슬림라인 핏의 여성 정장이었다.
약간 부끄러운 듯 엉거주춤한 모습에 강태준이 박수를 쳤다.
“잘 어울리네. 역시.”
“좋아요?”
“엄청 잘 어울리네. 사모님. 역시 패션의 완성은 얼굴이군요.”
과장되게 물개박수를 치며 엄지를 추켜세웠다.
처음에는 몹시 부끄러워했던 설유하였지만 리액션이 워낙 좋다 보니 신이 나서인지 과감한 블랙 드레스와 원피스, 수영복까지. 패션쇼를 선보였다.
상기된 표정의 그녀가 새 옷을 보고는 싱글벙글했다.
“아 촉감도 좋고, 이거 정말 편하네요.”
“그래서 요새는 공부는 잘돼요?”
“힘들긴 하지만 재밌어요. 편집 일도 재미있고, 다양한 사례를 많이 배울 수 있어서 좋아요.”
“공부가 재미있다니, 완전히 법조인 체질이네요. 미국법은 대륙법이랑 좀 다른 걸로 아는데?”
“계란이 먼저냐 닭이 먼저냐죠. 판례가 모여서 규범이 된 거니, 본질적으로는 똑같거든요. 그보다 우리 강 사장님께서 아무런 일도 없이 여기까지 날아오셨을 리는 없는데?”
“하하 그건 오해입니다.”
“내가 그쪽을 모르면 간첩이지. 솔직히 털어놔 봐요. 뭔 일이 있어요?”
그간 어떤 일이 있었는지 털어놓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니, 원작자 허가도 없이 저쪽이랑 무단 계약을 했다고요? 간도 크네.”
“위임장이야 나중에 받으면 되지 않습니까? 마침 여기 법률 전문가도 있으니 말입니다.”
“무슨 사람이 그렇게 무데뽀예요. 걸리면 어쩌려고…… 역시 뇌물엔 다 이유가 있었군요.”
눈을 샐쭉하게 뜬 설유하의 타박에 강태준이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죽을죄를 지었사옵니다. 마담. 소인이 탐욕에 눈이 멀어서.”
“흠……. 뭐 어쩔 수 없군요. 그럼 가 봐야겠죠. 가요.”
“네? 지금요?”
“마침 지금 방학이기도 하니. 이런 문제는 빨리 해결해야지요!”
서둘러 트렁크를 챙겼다.
“잠시만요!”
잠시 나가기 전 룸메이트한테 경고장을 써 놓았다.
-며칠 나갔다 올게. 나 돌아오기 전까지, 옷장 만지면 죽을 줄 알아.
만족스러운 듯 종종걸음으로 나선 설유하를 보며, 강태준이 의문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흠, 그걸로 되나요?”
“뭐 괜찮아요. 머리채 뜯기기 싫으면 절대 안 그러겠죠.”
역시 폭력이야말로 훌륭한 대화 수단이었다.
* * *
둘이 그렇게 로스앤젤레스로 향하는 사이《폭주 기관차》 제작사에서는 감독을 맡은 구로사와가 언성을 높이고 있었다.
“아니. 각본을 처음부터 다 바꾸다니 그게 말이 됩니까?”
“아니 그따위로 하면 망한대두?
“그렇다고 앞부분을 다 잘라 먹고 폭주 신부터 가자니 말이 됩니까? 아무 개연성이 없잖습니까?”
“이보게 아서. 어느 관객이 죄수가 탈옥하는 이유를 알고 싶어 하나? 독자가 원하는 건 재미라고! 쓸데없는 개연성이 아니야!”
두 죄수가 탈옥을 감행하여 기차에 올랐다 그 기차가 폭주하는 바람에 생기는 일을 다루는데, 구로사와는 이미 기차가 폭주하는 시점부터 시작하길 원했지만 제작사에서는 그냥 두 죄수가 탈옥하는 부분부터 쓰기를 원했던 것이다.
“현실적으로 스턴트맨들도 아직 준비되어 있지 않습니다. 당장 액션을 촬영하는 건 무립니다.”
“컬러 촬영도 못 해 주겠다, 각본도 못 바꿔 주겠다. 이럴 거면 날 왜 불렀나? 다 때려치워!”
언쟁이 계속되자 구로사와는 폭발했다.
“배우가 스턴트 없으면 영화를 못 찍나! 그게 반쪽이지, 어딜 봐서 영화배우야! 아닌가, 지미?”
“그게 원칙적으로는 맞지만요. 하지만 감독님, 기차에서 떨어지는 신을 찍다가 배우가 다칠 수도 있잖습니까. 제작사 입장도 이해를…….”
“그게 문제야! 미후네라면 기차에서 떨어지더라도 연기를 했을 걸세! 근성이 없어, 근성이!”
“하지만 감독님 여기서 더 지체하면 영화가 엎어질 수도 있습니다.”
“거 엎으면 엎으라지. 이딴 쓰레기 안 찍어도 그만이야!”
화풀이를 하던 구로사와 감독의 행동에 통역은 어쩔 줄을 몰랐다.
이게 대체 몇 번째인가. 제작사에 치이고, 감독에게 치이고.
감독의 비위를 맞추던 통역으로서는 그야말로 죽을 맛이 아닐 수 없었다.
‘내가 이따위 동네북이나 하려고 통역했나?
인격 모독에 가까운 소리에 열불이 뻗치려던 그때 구원투수처럼 나타난 사람이 있었다.
“전적으로 맞는 말씀이십니다.”
“댁은 누구고? 날 아나?”
갑자기 나타난 멀대에 말이 곱게 나올 리가 없다. 강태준이 공손하게 명함을 내밀었다.
“구로사와 감독님 처음 뵙습니다. 저는 이런 사람입니다.”
“B,K 프로덕션? 여긴 또 뭔가?”
“예. 홍콩의 쇼 브라더스 쪽과 협업 중이지요.”
구로사와 입장에서도 쇼 브라더스 정도는 충분히 들어 본 회사였기에 의구심은 금세 누그러졌다.
“흠. 쇼 브라더스라니, 예고도 없이 별일이구먼. 헌데 홍콩 쪽에서 날 어찌 알고?”
“저희 회사가 예술 영화부터 시작한 회사라서요. 특히 해외 유수의 명화를 할리웃 풍으로 재창작하는 리메이크 작업에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강태준은 간략하면서 대충 요지를 완곡하게 설명했다.
“그래서 지금 자네 말인즉 내 법률 대리인을 맡고 싶으시다?”
“예. 엄밀히 말하면 영화 저작권 관리죠. 표절 등의 문제에 적극 대응할 수 있습니다. 추가 수익도 기대할 수 있고요.”
“웬 뚱딴지같은 소린가. 내가 당신을 어떻게 믿고…….”
“그럴 줄 알고 여기 전문가분도 동행했으니 문제없을 겁니다.”
얄상하게 생긴 설유하의 등장에 구로사와의 안색이 찌푸려졌다.
“이 여자가 변호사라고?”
“여기 명함입니다. 설유하 변호사는 판사 출신으로 한국과 미국 등에서 실무경험을 쌓았고, 클리어리 가틀립(Cleary Gottlieb Steen & Hamilton LLP) 소속으로 다국적기업에 법률 자문을 하고 있는 분입니다.”
그에 구로사와가 유심히 명함을 살펴보며 통역에 물었다.
“흠, 이거 유명한 회산가?”
“미국에서 명망 있는 로펌입니다. 나름 탑 클래스에 속하죠.”
귀엣말을 속삭이는 통역에 경계심이 옅어진 구로사와가 고개를 끄덕였다.
“흐음…… 알겠네. 스텝이랑 배우들 잠시 브레이크타임! 한 번 쉬고 가자고.”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