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양재벌 강태준-239화 (239/361)

239화 히트작을 건져라

로스앤젤레스, 할리우드.

로렌스 터먼 프로덕션. 간판이 붙은 곳. 갑론을박이 벌어지고 있었다.

“투자자요? 아니, 이제 와서 무슨 투자를 새로 받습니까?”

“이봐, 돈은 언제라도 좋은 거 아닌가…… 자네도 좋고 회사도 좋은 거지.”

“어디 사람인데요?”

“한국에서 온 큰손이야.”

“코리아? 거건 전쟁으로 폐허 된 동네 아닙니까? 게다가 빨갱이 밭으로 아는데?”

마이클 니컬스의 말에 한숨을 쉬었다.

“그게 언제적 이야긴데 그래. 그리고 노스코리아랑 착각하지 말게. 사우스코리아는 자유 진영이야. 이보게 아무리 관심이 없어도 그 정도는 알아야지.”

“전 베를린 태생입니다. 그보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런 코리안한테 투자를 받자 이겁니까? 마피아 같은 놈이면 어쩌려고요.”

“그런 사람은 아니야. 무려 US ARMY로부터 베트남전에서 독점 수송 계약을 따냈다고. 만나서 나쁠 것 없네.”

“그렇다면 신용은 있겠습니다만 투자할 여력이 있겠습니까?”

“놀라지 말게 50만 불. 옵션으로 100만 불 더.”

“네?”

“제작비를 50만 불이나 지원하겠다는군. 게다가 동아시아 마케팅 비용까지 전담하겠다는데 안 들어 보면 그건 바보 아닌가?”

말도 안 되는 제안에 니컬스 감독이 귀를 의심했다.

“아니, 돈지랄도 아니고, 그거 미친 거 아닙니까? 그보다 코리아에 그런 부자가 있었습니까?”

“이 사람을 잘 모르는군. 그 양반 보통 사람이 아니야. 군수품 수송 사업 건으로 한 해 버는 1,000만 불이 넘는다는군.”

“그렇게 많이요?”

“그뿐만이 아닐세. 식품 사업부터 자동차 부품, 원자재 거래, 원양어업까지 암튼 사업을 많이 벌이는 양반이야. 자네 팬이라더군. 굳이 자넬 콕 찍어서 말한 걸 보면, 뭔가 있어 보이지 않나?”

“그러면 설마하니, 다른 의도가 있는 거 아닙니까?”

“뭐…….”

“그쪽 성향 같은…….”

꺼림직한 감독의 태도에 사장은 피식 웃었다.

“이봐 자신감 과잉이군. 그러면 뭐 어때?”

“예?”

“눈 딱 감고 만나 보게. 자네 팬이라는 양반인데, 적어도 해코지는 하지 않을 거 아닌가.”

“말 참 쉽게 하시는군요.”

“솔직히 나라면 악마랑도 손을 잡을 수도 있어. 세상에 그런 후원자로 만나기가 쉽나. 영화도 결국은 돈이야. 꼭 만나 보게.”

감독은 오랫동안 고민에 잠겼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거절하고 싶었지만 50만 불이라는 말이 귀에서 맴돌았다.

거절하기엔 너무 많은 돈. 예산이 많아지면 더 좋은 영화를 찍을 수 있지 않을까.

결국 약속 장소로 가니 강태준이 기다리고 있었다.

“만나서 영광입니다. 강태준입니다.”

“마이클입니다.”

감독은 솔직히 크게 놀랐다. 한 번은 남자의 세련된 매너와 외모에.

예술인의 본성이랄까 자신도 모르게 니컬스 감독의 평가가 상향 조정했다.

‘옷 입는 센스가 다르긴 하군.’

그냥 졸부는 아니라는 건가. 패션이 범상치 않은 것이 뭐 하나 허투루 맨 것이 없다.

몸에 딱 달라붙는 수트는 몸에 일부인 것처럼 잘 들어맞았다.

여유가 물씬 풍기는 태도에 자신도 모르게 오디션을 보듯 유심히 훑었다.

“그렇게 보시면 부담스럽습니다만…….”

“아, 죄송합니다. 직업병이라서요. 사실 이 자리에 나온 건 투자 계약을 들어 보자는 거지. 확답을 내린 게 아닙니다. 게다가 촬영이 코앞이라…….”

“압니다. 그럼 뭐 간단히 조건부터 보시겠습니까?”

슬쩍 서류를 내미는 강태준에 니컬스 감독이 안경을 올렸다.

뭔가 하자가 있나 매의 눈으로 살펴보았다.

잠시 후 눈을 동그랗게 뜬 그가 강태준과 서류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어디 보자, 흥행 성적에 따라 수익 분배를 받되, 극장 매출이 1억 달러 이상 나지 않으면 수익 분배를 받지 않는 조건이라.”

“네. 맞습니다.”

“예. 이런 파격적인 조건은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해가 안 되는군요.”

“뭐가요?”

“아시겠지만 이건 제작비 300만 불밖에 안 되는 영화인데요? 게다가 블록버스터도 아닌 로맨스 영화입니다. 솔직히 이런 영화에 이런 조건이라니…….”

“그래서 딴 의도가 있는 게 아닌가? 찜찜하다는 말씀인가요?”

“솔직히 말해서 그렇습니다. 혹여나 영화 배역에 아시안을 넣어 달라거나 그런 부탁은 들어드릴 수가 없습니다. 워너 쪽과 일하고 싶지 않았던 것도 개입 때문이라서요.”

그간 몹시 시달렸던 모양인지, 경계심이 가득한 눈초리.

그에 강태준은 준비했던 썰을 풀어놓았다.

“그럼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까. 전작을 보고 선택했다면 믿으시려나요?”

“전작이요?”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 그 작품 말입니다.”

“아, 제 전작을 보셨습니까?”

“예. 봤지요.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놀랐지요. 제한된 인원으로 그렇게 긴장감 있는 영화를 만들어 낼 수 있다니 솔직히 충격이었습니다.”

“배우들이 연기를 잘했기 때문이지요. 남녀 배우들이 알아주는…….”

“아니요…… 저는 감독님의 능력에 감탄한 겁니다.”

강태준이 과장되게 손짓했다.

“전통 할리우드의 방식에서 벗어나 현실을 반영하는 그 날카로운 시각. 등장인물이 고작 4명의 등장인물로 영화를 이 정도로 만들 수 있는 감독이라면……. 그분에게 더 많은 자본이 주어진다면 어떤 작품을 만들 수 있을까 하고 말입니다.”

강태준의 찬사에 약간 얼떨떨하면서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자기도 모르게 경계심이 줄어든 감독의 목소리가 누그러졌다.

“과찬이시지만 아직 한 작품 밖에 보여 드린 게 없는데요.”

“하하. 하나를 보면 열을 아는 법이죠. 그리고 이 ‘졸업’이라는 작품은 원작의 작품성도 뛰어나니까요.”

깜짝 놀란 감독이 되물었다. 설마하니 원작을 언급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설마 소설도 읽으셨습니까?”

“찰스 웨브(Charles Webb) 원작 아닙니까? 사실 그 작가를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거든요. 이게 영화화된다는 걸 참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운명이라고 생각해서 달려온 겁니다.”

입에 침도 안 바르고 하는 거짓말이었지만 홀딱 넘어간 감독의 표정이 풀어졌다.

“허허, 굉장히 깨인 사고를 가지신 분이군요. 제가 듣기로 동아시아 쪽은 그런 쪽에 좀 많이 보수적인 걸로 알고 있는데.”

“사회적 금기가 많을수록 일탈에 대한 욕구가 강해지는 법입니다. 유부녀와 연하남과의 불륜 이야기라. 그것도 소꿉친구의 어머니와 센세이션하지 않습니까? 사업가로서의 촉이 말하더군요. 이 작품은 된다고 말입니다.”

강태준이 슬쩍 예열을 하며 숨을 들이켰다.

“결혼식장에 난입해 신부를 탈취하는 파격적인 결말. 모든 역경을 뛰어넘는 사랑의 도피! 팜므파탈의 여인에 꾀인 순진한 어린 양의 어수룩함. 이게 진정 예술성 아니겠습니까? 이 청춘의 바이블을 제대로 다뤄내실 분은 감독님밖에 없지요.”

마이클 감독은 폭탄처럼 퍼부어지는 찬사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60년대에 쓴 코미디 <공원에서 맨발로>(1963), <러브 Luv>(1964), 브로드웨이에 초연한 <마이크 니콜스와 엘레인 메이와 이 밤을>까지.

그에 대해 소상히 알고 있는 것도 모자라 코미디까지 봤다는 말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저도 모르게 강태준의 화술에 흘러 들어가는 감독이었다.

‘내 예술 세계를 이렇게까지 잘 이해하고 있는 사업가가 있다니!’

무대 배치의 미장센까지 좔좔 읊어 대는 강태준을 보며 감독은 크게 감동했다.

이 정도까지 열렬한 팬이 있을 줄이야. 마치 꿈결 같은 기분이었다. 어느새 영화의 캐스팅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주인공은 누구로 낙점되었습니까?”

“사실, 워렌 버티와 로버트레드 포드 중에 고민했습니다만 비티는 이미 영화 보니와 클라이드에 출연 중이라 거절했습니다. 다만 레드포드 측은 좀…….”

감독이 말을 아끼는 모습에 강태준이 슬쩍 운을 띄웠다.

“뭐가 맘에 안 드시는 부분이 있습니까?”

“아니 그게 아니라. 레드포드야 잘생겼고 엄청난 명배우죠 하지만 좀…….”

“좀 루저스러움이 잘 안 나타난다는 거죠? 소설 속 주인공처럼?”

“네. 맞습니다. 맞아요. 그래요. 여기서 주인공은 사회 초년생다운 풋풋함과 어수룩한 느낌이 있어야 하는데. 레드포드는 너무…….”

“잘났죠.”

“네. 그 배우한테 사랑하는 여인을 뺏겨 본 적이 있느냐고 물었는데, 단 한 번도 없다는군요.”

“그건 좀 그런데요? 다른 역할이면 모르겠지만.”

“네. 그래서 많이 고민입니다. 관객들이 감정이입이 될지 모르겠어서요.”

그러자 고민하는 척하던 강태준이 넌지시 던졌다.

“제가 하나 준비해 왔는데 보시겠습니까?”

“예? 준비를요?”

“네. 아직 배역이 정해지지 않았다고 해서. 혹시 몰라 캐스팅할 사람이 있나 저도 알아봤습니다. 월권을 하려는 건 아닙니다. 다만 혹시 도움이 될까 싶어서.”

별로 내키지 않는 감독이었지만 성의라면서 내미는 서류를 예의상 거절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별 기대 없이 프로필을 둘러보던 가운데 눈이 꽂혔다.

“아니, 이 사람이 누굽니까. 더스틴 호프만?”

“아. 그 사람이요. 최근에 주목받기 시작한 배우인데 연기 경력이 꽤 탄탄한 사람입니다.

“호오…… 얼굴이 배역이랑 잘 어울리는데요.”

턱을 괸 감독이 유심히 눈을 살폈다.

우수에 찬 눈빛에 167센티미터의 키. 크게 잘생겼다고는 볼 수 없지만, 사람의 아우라란 게 있다. 이 배역이 딱이라는 감이 왔다.

“그리고 여배우 역에는…….”

“물 좀 갖다주게. 목이 타는구만.”

감독과 헤어진 강태준이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혼신의 연기를 해서인가 진이 빠진 강태준이 소파에 앉아 숨을 골랐다.

“아 좀 살겠구먼.”

“사장님께서 영화에까지 조예가 깊으신 줄은 몰랐네요. 세상에. 로빈슨 부인 역은 어디서 찾으신 겁니까?”

“뭐 어쩌다 보니 아는 사람한테 추천을 받았지 그래.”

“그래도 대단하십니다. 감독이 그렇게 쉽게 넘어오다니.”

“원래 예술가들이란 자아가 비대한 법이거든. 처음에는 까다로워도 가려운 데를 긁어 주면 빨리 넘어오지. 배우 캐스팅도 배역을 알면 모를 것도 없고.”

사실 강태준으로서는 졸업이라는 영화를 절대로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교양 수업 때 레포트를 쓰면서 수십 번은 봤던 작품이니까.

“첫 작품으로 수상한 걸 보니 감독이 실력이 있는 것 같긴 하더군요. 근데 딴 건 모르겠지만 1억 불이 넘지 않으면 수익배당을 받지 않겠다는 건 좀 않습니까?”

“흠. 그렇게 생각하나? 난 수익금이 배는 될 거 같은데?”

“네? 두 배요? 그게 설마 가능할까요?”

“내 감이야.”

반신반의했지만 강태준은 자신했다. 누가 보기엔 터무니없는 수치지만 영화의 포텐으로 보면 그러고도 남음이 있지 않나. 희대의 명화라고 이름을 떨친 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 법. 강태준이 보기엔 이만한 투자도 없었다.

“두고 봐 어떻게 되는지. 그보다 재갑이네는 연락 안 왔어?”

“예. 아직 연락이 없는데 잠시만요.”

재갑이랑 광필이 기분 좋은 표정으로 승용차에서 내리는 모습이 보였다.

서로 하이파이브를 한 광필이가 기세 좋게 외쳤다.

“레오네 감독이 오케이 했습니다!”

“오, 어떻게 했나?”

“소송으로 협박했죠. 처음에는 할 테면 해 보라고 버티더니 소송까지 갈 수 있다고 하니까 바로 꼬리를 내렸다는군요. 차기작 부담 때문에 아무래도 굴복한 거 같습니다.”

오재갑으로부터 자초지종을 들은 강태준이 미소를 지었다.

“잘했어. 그럼 이제 구로사와 감독만 설득하면 되겠군.”

“아, 그럼 바로 갑니까?”

“아니, 대어를 잡으려면 용한 낚시꾼부터 데려가야지.”

“낚시꾼이요?”

“광필이랑 재갑이는 호텔에서 쉬고 있게. 나중에 연락할 테니.”

-다음 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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