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5화 말라리아
그제서야 광필이가 뭔가를 깨달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러면 나중에 문제가 되면 납품업체가 바뀔 수도 있으니…… 보안이 중요하겠군요. 한국에서 제조한 전투식량을 먹인다고 하면 다른 놈들도 개떼처럼 달려들 테니까요.”
“그래. 이제야 머리가 좀 돌아가는데? 그러니 비밀리에 알아보도록 해. 거제에서 운용하는 식품공장이 있으면 인수하는 것도 방법이니까.”
“근데 통조림 업체를 인수하면 들키지 않겠습니까?”
“통조림 제조공장이 아니라 부품제조 공장으로 전용할 목적이라 하면 되지 않나. 애초에 지금 잘나가는 사업도 아니고 말이야.”
눈 가리고 아웅 하기지만 지금으로서는 그것만 해도 경계심을 불식시키기엔 충분할 것이다.
오재갑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알겠습니다. 그러면 뭐부터 추진하는 게 좋을까요?”
“통조림 하면 캔 품질이 우선이지. 카발 쪽 품질 인력들을 투입해서 김치 산도를 견딜 수 있는지 부식 시험을 해 보게.”
김치의 산도는 pH4 가량으로 꽤 낮은 편이지만 당시로써는 녹이 슬지 않게 만드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즉, 김치를 담아도 부식이 안 되는 캔을 만드는 것이 그 당시 기술력으로는 그리 쉽지 않았던 것이다.
‘아무리 애국심으로 포장해도 파월 장병들한테 녹물이 질질 흐르는 통조림 김치를 먹이는 것은 좀 아니지.’
애국 마케팅도 정도 것이지 시제품 통조림에선 시뻘건 녹물이 나와 도저히 음식을 먹을 수 없을 정도라면 당장 버려야지, 그런 걸 먹이는 건 고문 아닌가.
다행인 것은 면도기 제작을 하면서 최대한 날에 녹이 슬지 않게 만들어야 했기 때문에 이 분야 기술에는 꽤 일가견이 쌓였다는 것이다.
‘아니 잠시만 김치 자체는 그냥 여기 월남에서 재배할 수도 있지 않나?’
채소류 같은 경우는 현지에서 재배하는 편이 최고다. 다시 생각해 보니 유일하게 세계에서 사시사철 배추 생산이 가능한 곳도 있지 않나. 한번 우순해 박사한테 연락해서 알아봐야겠군.
강태준이 그런 생각을 하며 다시 막사로 돌아갔을 때였다.
갑자기 마스크를 쓴 의료진들이 몰려오더니, 주위를 통제하고 있는 중이었다. 하얀색 분무기 같은 것으로 연막 약을 뿌리고 있었는데 펄스제트 엔진 때문인지 방귀 뀌는 소리가 났다……
“자자, 물러서 주세요. 들어오시면 안 됩니다.”
흰 가운을 입은 방역 요원들이 우주복 같은 것을 입고, 통제하는 모습을 본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무슨 일입니까?”
“부대 내에서 학질 환자가 발생했습니다. 지금 추가 확진자가 있는지 검사 중이니 불편하시더라도 참아 주시기 바랍니다.”
당연하겠지만 안에 있는 짐이나 침구 같은 것은 가져올 방도가 없었다. 강태준은 다시 예전에 머물던 호텔로 들어와 체크인을 하자 광필이가 말했다.
“아니 이런 참변이 있나? 전염병이라니 어떻게 된 겁니까?”
“아무래도 갑작스럽게 너무 많은 사람들이 도착하는 바람에, 위생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은 것 같아.”
강태준의 기억으로도 이런 일은 듣도 보도 못한 일이다. 원래 생각했던 인원보다 3배가 넘는 인원이 한 번에 도착해 땡볕에 삽질까지 하면서 집단으로 막사 생활을 하다 보니 모기에 물려 전염병이 터진 것이다. 강태준이 복만이에게 물었다.
“환자들 상태는 어떤가?”
“일단 환자는 격리하고 약을 투여했습니다만, 예후가 좋지 않은 것 같습니다. 환자가 어느 정도 되는지는 수를 조사를 해 봐야 할 거 같습니다.”
“그럼 우리도 전염될 수 있으니 당장 작업장과 숙소에 소독 작업을 준비하게.”
“예?”
“환자가 발생했으니 어디까지 오염되었는지 알 수 없지 않은가.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방제 작업을 해야지.”
강태준은 일단 등유에 모기 살충제를 타서 소독차로 마구 뿌리기 시작했다. 다행히 제무시 차량 가운데는 등유 차가 상당했기 때문에 행동은 신속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베트남 주둔 미군들 사이에서도 말라리아 환자가 속출했다.
날이 더워지기 시작하면서 환자 수가 폭증하기 시작한 것이다. 근 한 달이 지나자 감염자들이 우후죽순 나타나면서 들불처럼 번지기 시작했다.
“이게 말이나 됩니까. 전쟁에서 부상자보다 말라리아 환자 수가 많다니?”
“병동이 이미 만실이랍니다. 아무래도 사태가 점점 악화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초비상이 걸린 미군에서는 급하게 전 지역에 연막 소독을 시행하고, 물웅덩이를 죄다 갈아 버리는 등 적극적으로 대처했다. 심지어 모기가 나타난다는 이유로 근처 숲을 화염방사기로 태워 버리기까지 했지만 뒤늦은 대처일 뿐이었다.
제대로 전쟁을 하기도 전에 드러눕는 환자들이 빈발하면서 전군에 비상이 걸렸다. 결국 주월 파병군사령부에서 대책회의를 논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피해는 어느 정도인가?”
“현재까지 확인된 말라리아 환자는 3,000명을 넘어섰습니다. 이 추세라면 다음 달에는 일만 명이 넘을 것으로 추산되고 있습니다.”
“아니, 어떻게 그렇게 전파 속도가 빠를 수가 있다는 건가? 치료 약 투여가 늦었나?”
“그게 약이 통하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악성 변종의 경우에는 삼일열 말라리아와 달리 클로로퀸, 키니네를 비롯한 관련 파생 약물들은 모기가 내성이 있어 효과가 없습니다.”
그 말에 웨스트모어랜드 장군의 표정이 급하게 굳어졌다.
“약이 효과가 없다니. 그럼 어쩌라는 건가?”
“일단은 격리 후 치료 외에는 다른 방법이…….”
주저리주저리 변명을 늘어놓는 군의관에 분노한 사령관이 책상을 때렸다.
쾅!!
“이보게 군의관! 이렇게 한심한 소리를 하다니, 병사들 목숨을 하늘에 맡기라는 건가. 그전에 장병들이 다 뒤지게 생겼어! 당장 어떻게든 해결책을 내놓게.”
“옙!”
발등에 불이 떨어진 미국에서는 난제를 해결하기 위해 말라리아 위원회를 파견, 대량의 연구 인력을 투입했다. 사이공 호텔로 피신해 있던 강태준 일행 역시 감염사태의 심각성에 대해 재논의했다.
“형님, 이러다가 진짜 큰일 나는 거 아닙니까? 벌써 사망자가 수십 명입니다. 사태가 진작될 때까지 피신을…….”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따위 짓을 했다가는 겨우 얻은 신임을 다 깎아 먹게 된다고.”
전쟁이 뒷전으로 밀릴 정도로 상황은 매우 심각했다. 수송이 올스톱되는 상황만큼은 어떻게든 피해야 한다.
“임마 수송은 단년 계약이라고. 실적 없이 어떻게 따?”
“그래요. 치료제란 게 어디 그렇게 쉽게 개발되는 것도 아니고. 일단 소나기는 피해야죠.”
당시로써는 의료 기술이 훨씬 후진적인 데다 컴퓨터 같은 것도 제대로 발달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훨씬 실험 역시 아날로그적인 방식에 의지했다.
메플로퀸이 개발하기 위해서 무려 25만 개의 약품을 뒤져 보았다고 들었던 강태준으로서는 골 때리는 일이었다.
‘그딴 식으로 무식하게 뒤져서 어느 세월에 찾겠나. 이거 큰일인데.’
뭔가 기억이 날 법도 한데. 생각이 나지 않는다. 강태준 역시 예전에 조업을 하다 선원 하나가 열대지방에서 말라리아에 걸려 사경을 헤맸던 일이 있었던 것이다.
그래 그때 약 이름이 뭐였더라?
중의약 치료제라고 했는데…….
강태준이 머리를 굴리는 사이,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철민이가 들어왔다.
“사장님 큰일 났습니다. 복만 형님이! 복만 형님이 쓰러지셨어요.”
덤덤하던 강태준의 얼굴에 처음으로 큰 균열이 생겼다.
“아니, 멀쩡하던 놈이 어떻게 된 건데.”
“소독 일을 하느라 밤을 새우시다가 갑자기 픽 쓰러지셨습니다.”
“멍청한 놈, 얼굴을 좀 봐야겠어.”
곧바로 군 병원으로 달려간 강태준이었지만 하지만 의료진은 출입을 막았다.
“죄송합니다. 일단 추이를 지켜봐야 해서요. 감염될 수 있으니 안쪽으로는 절대 들어오면 안 됩니다.”
“그럼 상태는 확인할 수 있습니까?”
“아직 초기라서, 지금 뭐라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당분간 안정을 취해야 한다는 말에 반응은 침울하기 짝이 없었다. 몰려오는 죄책감에 강태준도 풀이 죽었다.
“이건 다, 내 탓이야. 외삼촌을 뵐 낯이 없군.”
“형님 탓이 아닙니다. 재수가 없었을 뿐입니다.”
“그래요. 병 걸린다고 다 뒈지는 것도 아니잖습니까. 그냥 성홍열일 수도 있구요.”
“맞습니다. 그놈은 건강체라서 곧 털고 일어날 겁니다.”
“그러면 좋겠는데…….”
강태준으로서는 미안하기 짝이 없었다. 멀쩡히 거제에 있는 녀석이 도와주겠다고 저렇게 되었으니 도의적 책임감을 느낄 법도 한 것이다.
“병원에서 제대로 치료받을 수 있나? 환자가 밀집된 곳이라 더 번질까 걱정이군. 아무래도 옮기는 것이…….”
“마땅한 의사가 없지 않습니까?”
이미 쓸 만한 의사들은 전부 차출해 말라리아 대비에 투입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어째, 전염병 전문 의사라도 어디서 스카웃해 올까?’
그렇다고 돈 주고 이런 험지로 올 사람이 있을까?
주위라고 해 봐야 캄보디아나 라오스 정도니, 지금 당장 의사를 부르기도 쉽지 않다.
강태준이 고민하고 있을 때 강태준에게 소리가 들렸다.
“형님! 의료진이 도착했답니다. 지금 퀴농항으로 나가 보십쇼.”
미국에서 보낸 수송선에서 의료진들이 한가득 짐을 싣고 내리는 중이었다.
국제 적십자사와 UN 마크를 단 의료진은 거의 중대 규모를 넘었다.
갑자기 등장한 구원군에 반가움도 잠시 강태준은 익숙한 얼굴을 마주했다.
“갑슨 씨! 여기는 어떻게?”
“환자 있는 곳이면 어디든 가는 게 사명 아니겠습니까. 어쩌다 보니 제가 또 중임을 맡게 되었네요. 그리고 마리아도 왔습니다.”
뒤따라오는 모습을 보니 완전히 작정하고 온 것 같다.
이미 소식을 들어서일까. 다른 것은 안중에도 없었던 듯 마리아의 목소리는 다급했다.
“복만 씨는요? 지금 좀 상태가 어때요?”
“저는 전문가가 아니라서 잘……. 지금 초기라 오한이나 발열 외에는 딱히 큰 증상이 없습니다.”
“그럼 직접 확인해 봐야겠어요.”
인사도 없이 훌쩍 사라지는 것이 보통 급한 게 아니다.
그걸 본 갑슨이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은 마리아가 하도 보채서요. 월남에서 말라리아가 출몰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복만 씨에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면서 자기 혼자라도 가겠다고 하더군요. 원래는 한 달 이상 더 지체될 텐데, 그거 달래고 의료진 인솔해서 들어오느라 애먹었습니다.”
“그러면 거제 세브란스 쪽은?”
“그쪽은 일단 캐나다 선교부에 맡겼어요. 우리가 도와준 것도 있으니 이번에는 믿고 맡기라네요. 그쪽 인력도 10명이나 충원되었으니 충분히 대응 가능할 겁니다.”
사실은 의료인력 파견을 두고 내부에서 말이 많았지만 거제에서 병원을 세운 일로 업적으로 갑슨의 발언권이 많이 강해진 덕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했다.
사비를 들여 병원 개축에 힘을 쏟은 공이 이렇게 돌아오다니.
역시 사람이 착한 일을 하고 봐야 한다는 건가.
새로 도착한 마리아가 복만이의 치료를 전담하기로 했다는 보고에 광필이가 투덜거렸다.
“스벌, 성녀 납셨네. 남친 구하자고 전장에 뛰어 들어와. 저 자식은 전생에 무슨 공을 세웠길래. 세상 참 불공평해.”
“아 참. 형님, 왜 이렇게 남자가 시끄러워요. 궁시렁대지 말고, 부러우면 부럽다고 해요.”
“아. 진짜. 부러워서 미치겠다 임마! 됐냐?”
툴툴거리면서 사라지는 광필이의 모습에 오재갑이 고개를 저었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