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2화 대양을 넘어
“그러니까 그말 아니여. 전쟁 특수에 숟가락 얹어서 꿀은 달달하게 빨고 싶은데 대놓고 반대하면 모양새가 안 좋으니 반전운동을 일부러 방치한다는 거.”
“맞아. 일본이 직접 반전하겠답시고 나대면 코쟁이 큰형님한테 대가리가 깨지겠지만, 시민들이 반대해서 어쩔 수 없었다고 하면 명분이 서지 않나. 미국은 엄연히 민주국가니까. 여론 상 압박을 가할 수도 있을 테고 말이야.”
“합리적이긴 한데 뭔가 기분이 많이 더럽군요.”
“뭐, 그게 외교라는 거지. 그러니 일본으로서는 협의하면서 해결은 하겠지만 그렇게 적극적이지 않을 확률이 높아. 잇속을 챙길 때까지는 사태를 관망할 테니 사태가 수습되려면 몇 개월이 지날지 모르고.”
“그야말로 고래등에 끼인 새우 꼴이네요. 그럼 우리는 이제 어떡하나요?”
어찌 되었든 백경 입장에서는 배를 수송해야 하는 입장이 아닌가.
다들 걱정이 태산이었지만 오히려 강태준은 평안했다.
“어쩔 수 없지. 예인선 없이 남태평양을 넘어가는 수밖에.”
“예? 그건 너무 위험하지 않습니까?”
터그보트로 대양을 항해하자는 소리에 모두들 깜짝 놀랐다. 대양을 넘을 때는 큰 배를 띄우는 것이 상식 아니던가. 그러자 강태준이 오히려 되물었다.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 예전에 대항해시대 때는 200톤짜리 카락으로도 대양을 넘었다고. 원양어선이라 봤자 고작해야 100톤급이 넘은 것도 얼마 안 되었지 않나.”
“아니 그거랑 이거랑 같습니까. 예인선 같은 경우에는 흘수가 낮아서 침수의 위험이 훨씬 높은데?”
“그렇지만 부력은 더 좋지. 솔직히 포기할 수도 없지 않나. 하루 지체상금이 지불해야 하는 금액이 1만불이야. 유지비까지 포함하면 하루 오천 불은 더 손해라고.”
강태준이 전장에 난입하는 똥꼬쇼까지 하면서 사업권을 따낸 이유가 뭔가.
첫 단추를 잘못 끼우면 웨스트모어랜드 장관에게 기껏 좋게 쌓아 놓은 첫인상이 완전히 나가리가 될 수도 있었다.
“우리가 실수하면 딴 놈들이 치고 들어온다. 그것만큼은 용납 못 하지.”
“그러면 터그보트도 없이 그냥 가겠다는 겁니까?”
“뭐 없다고 못 넘을 이유야 없잖은가 시간 없으니 바지선을 연결시켜.”
대부분이 압항부선으로 바지선 중에는 아예 선미 부분부터가 압항선이 도킹해서 밀기 좋도록 디자인된 것들이란 점이 불행 중 다행이었다.
육상의 탄탄한 길이 아닌 거친 풍랑이 곳곳에 잠복해 있는 바닷길을 바지선으로 끌고 가겠다는 발상이었다. 바지선 위에는 파병 장병들에게 보급할 쌀과 군수품들까지 바리바리 실었다. 기차처럼 연결된 바지선을 항구에 늘여 놓고 나니 그것만으로도 눈요기가 되었다.
“이건 뭐. 마치 조조가 적벽대전에 나서는 거 같군요.”
“그 양반은 수전 비전문가라 실패했지만 우리는 전문가잖은가?”
“이왕 이렇게 된 거, 그럼 보험이라도 넣는 게 어떻겠습니까.”
“보험? 보험은 의미 없네. 어차피 다 뒤지던지 아님 파산하는 걸로 끝일 테니. 보험 대신 태풍으로 해난 사고가 나더라도 최대한 오래 떠 있도록 격벽 보강에 신경 쓰게.”
혹여 바지선이 전복되거나 충돌 사고를 겪게 되면 그건 그냥 실패로 안 끝난다.
강태준이 한 번 결정한 이상 참모들도 더 토를 달기는 어려웠다.
강태준도 그냥 생각이 없지는 않았다. 김요한을 비롯해 최고의 선장들을 죄다 불러들인 것이다. 강태준의 지휘 아래 바지선이 첫 번째 항해를 시작했다.
“자 출발!!”
다행히 출발 후 초반 20일은 다행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처음에는 걱정하던 사람들도 20일간 순풍이 계속되자 모두들 풀린 분위기였다. 화투를 치면서 장난을 치기도 하고, 함께 탄 쉽캣과 숨바꼭질을 하기도 했다. 며칠간 항해도를 보던 광필이가 무료한지 밖으로 나왔다.
“생각보다 순조롭군요. 형님. 괜히 걱정했나 봅니다.”
“그러려면 좋으련만……. 나도 좀 편하게 가고 싶구먼.”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강태준은 긴장을 풀지 않은 채 아네로이드 기압계를 쳐다보았다. 기압계는 990밀리바을 가리키고 있었는데 저기압이 꼬리를 달고 동진하고 있었다.
배와의 거리가 멀지 않은 곳이었다.
’곧 바람이 사나워지겠군. 예사롭지 않아.‘
그 뒤로 아래쪽에서는 고기압이 꼬리를 달고 북동진하고 있었다. 배는 살짝 삐딱하게 운행을 하고 있었는데 그건 바람이 세어진다는 증거였다. 강태준은 기상도를 면밀히 분석하며 생각에 잠겼다.
‘최대한 선로를 그대로 유지한다면 3일 내 도착하겠지만 잘못하다 저놈과 마주치면 큰일인데,’
기압도는 두 개의 고기압 사이 작은 저기압이 맞물리고 있었다. 기압 차는 별로 크지 않았지만 저기압 중심 풍속이 37m/s짜리가 등선이 아주 좁게 형성되어 있는 것이 예사롭지 않았던 것이다.
위에서 큼직한 고기압이 버티고 있어 바람이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 곧 고기압이 사라져 길이 열리면 좋겠지만 반대로 1,040밀리바의 고기압이 저기압에 밀린다면 바다 상태는 걷잡을 수 없게 될 것이 확실했다.
“통신장, 30분 후에 기상도를 받아오게.”
강태준은 인터폰으로 이야기하고 당직사관인 초사를 찾았다.
“듣자 하니 어젯밤에 낚시를 갔다던데 야간에 밥값 좀 했는가?”
“그닥요. 신통찮더군요.”
“그래? 아쉽군. 보아하니 파도는 어떤가?”
“어제보다는 제법 크게 일고 있지만 아직 우려할 수준은 아닌 거 같습니다. 다만 백파가 눈에 띄게 많아졌습니다.”
초사 명석한은 해양대를 졸업한 지 몇 년 안 된 녀석으로 항차를 두 번 마친 재원이었다.
영도회 소속으로 초년부터 실무 경험을 쌓은 덕에 기본기가 탄탄하다고 할까.
녀석이 그렇게 바깥 상황을 점검하는 동안 선장 사무실에 노크가 들리고 무뚝뚝한 통신장이 기상도를 가져왔다.
“여기 있습니다.”
기상도를 다시 펼친 강태준의 눈빛의 달라졌다. 본선의 아래쪽에 돌발성 저기압이 보이는 것이 예사롭지 않다. 저기압의 반경 아래 나란히 사이좋게 똬리를 트고 있는 쌍동 저기압이 북진하고 모양새였다.
‘이런 젠장 할!’
강태준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위쪽 고기압이 사라진다면 동서남북으로 저기압에 포위당할 위기다. 저기압의 진행 방향과 속도를 계산해 본다면 피하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한참을 고민하던 강태준이 초사를 불렀다.
“부르셨습니까. 선장님.”
“선원들을 소집하게. 초사. 만찬을 준비해야겠어.”
다소 이르게 샤롱보이의 점심 식사 연락을 받고 내려온 사람들은 간만의 만찬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스테이크랑 포도주라니, 오늘 식사가 좋은데.”
“와, 뭔 일 있나?”
“뭔 일 있겠나. 배에 기름칠 좀 하자는 거지. 자 어여 들어.‘
볼트 글라스에 넣어 둔 물이 찰랑거리는 모습에 경력자들은 뭔가를 예감한 듯 조용히 자리에 앉아 수저만 움직였다.
그에 낌새를 눈치챈 후배들도 아무 말 없이 수저만 움직였다.
식사를 끝낸 후 강태준이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박진환이 믿기 어렵다는 듯이 물었다.
“그러니까 태풍이 올지도 모른다고?”
“예. 동서남북에서 한꺼번에 몰아칠지도 모르니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할 거 같습니다. 가장 가까운 항구로 피항할 준비도 하고, 선내의 이동물이 없도록 단단히 여미고 혹시나 모를 충격에 대비해야 합니다.”
선장의 입에서 피항 소리가 나오자 선원들의 표정이 더 나빠졌다. 그 말에 광필이가 호기롭게 말했다.
“왜들 쫄았소. 태풍 한두 번 보나? 뭐 다 죽을상을 하고 그래.”
“뭐 세상일이 이렇게 잘 풀릴 수야 없지요. 바다가 변덕을 부리는 것 정도야 예상하지 않았습니까? 한번 제대로 붙어 봅시다.”
“어차피 매도 먼저 맞는 게 낫지 그래!”
이왕 이렇게 된 거 마음을 다잡고 전의에 불타는 선원들이었다. 강태준은 저기압의 진행 방향과 풍속을 보고 본선이 속도로 항해했을 때 영향을 적게 받을 장소를 계산했다.
기관실에 연락한 강태준이 명을 내렸다.
“RPM 최고로 올리게. 지금.”
바람이 높아지고, 파고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이미 선수 쪽에는 백파가 휘날리고 있었다. 기관장이 목소리를 높였다.
“센놈. 센놈이 온다!!!”
“1항사 선수 주시해.”
강태준은 브릿지에서 상황을 주시했다. 항해사를 맡은 초사 명석한은 같이 당직을 서면서 상황을 판단하고 있었다. 파도의 골이 깊어지며 파도를 바라보았다. 컴퍼스의 항로는 의미를 잃는 순간, 방향을 따라 타륜이 움직이면서 검은 먹장구름이 몰려온다.
잠시 후 흩뿌려진 푸른 잉크가 엉키듯이 광란의 춤을 추었다.
“그래, 와라…… 뚫고 간다!!!”
비상하는 갈매기들이 선수에 앉아서 나래를 쉬다가 파도가 치면 도피하기를 반복했다. 파랑 소리가 귀를 후벼 파는 순간순간 파도가 덮치면서 갈매기를 집어삼켰다.
그걸 본 핸더슨은 헛구역질을 했다.
“갓 뎀……. 우욱!”
“임마, 여따가 토하지 마!”
말은 호기롭게 했지만 거대한 물결에 광필이도 파랗게 얼굴이 질렸다. 전쟁에서의 역전의 용사도 흔들리는 배를 상대로는 별수 없었다.
너울이 하늘까지 치솟고 파도는 어린애같이 본선을 잡고 마구 흔들었다.
충격을 받은 터그보트가 끼익거리며 부르르 떨었다.
그 순간 고래 등같이 흰 포말을 일으킨 파도가 부풀어 올라서 본선을 덮쳤다.
퍽~!~~
엄청난 충격. 숨을 쉬기 힘든 충격에 엎어질 뻔한 강태준이었지만 타륜을 붙잡고 온 힘을 다했다.
“갑판원과 항해자들 모두 핸드레일 잡고, 몸을 밧줄로 묶었다, 양발로 버텨. 잘못하면 튕겨 나간다!”
거대한 해일이 숨통을 조일 듯이 솟구치자 파도에 올라탄 스크루가 공회전을 했다.
올올히 치솟은 물벼락이 다시 덮치는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파도가 만들어 낸 계곡으로 선수부가 처박혀 버리는 것이다.
강태준은 순간 아찔했다. 수직으로 떨어지는 배가 수면 위에 처박히면 산산 조각나면서 파도에 삼켜질 것이다. 검은 아가리에 들어가기 전에 배 위로 다시 파도가 솟구쳤다.
퍼억!~~~
스쿠루가 작동하며 배가 움직였다. 큰 파도가 먹잇감을 삼키기라도 하듯 하늘로 머리를 치켜세운 배가 솟구치는 순간, 롤러코스터를 타듯 선수가 아래로 빨려들어 가더니 순식간에 한쪽으로 쏠렸다.
“초사 정신 차리고, 타륜 잘 잡아!”
“광필아 타륜 같이 잡아 줘라.”
“엡.”
스크류에 난도질당한 바다가 신경질적으로 옆구리를 치자 끼이익 터져 나가는 소음이 울렸다. 바다가 추는 칼춤에 솟구친 물줄기. 일전을 불사하듯 손아귀를 치켜세운 배가 갈퀴를 만들었다.
정면으로 날아오는 물의 벽은 회칼처럼 배들을 삽시간에 저며 버릴 기세였다.
“정면으로 맞으면 필패!”
마치 긴 창을 세운 채 돌진하는 중기병을 상대하는 보병처럼 초사 명석한과 김광필, 강태준은 타륜을 함께 붙잡고 버티고 섰다. 극도로 집중해서일까. 귀가 멍멍한 것이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입술을 깨문 채 강태준이 실눈을 뜨고 가늘게 파도를 주시했다.
순간을 피하자. 선수를 피하는 순간 빗맞으면 된다.
살짝 스쳐 지나가게만 만들자.
“형님! 옵니다!”
좌, 우 그리고 가운데선 세 사람 타륜을 쥔 손의 힘줄이 부풀어 오른다. 강태준의 손이 순식간에 왼쪽으로 움직이는 듯하다가 바로 정위치로 돌아왔다. 순간 스치고 지나간 파도는 우현을 타고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가자 온몸의 힘이 쭈욱 빠져나갔다. 위기를 넘긴 것이다.
이미 고문당한 배는 만신창이가 되었지만, 저 멀리 파도가 사라지고 있었다. 시계를 보니 잠깐 하는 사이에 이미 30분이 지나 있었다.
-치지지지직!
“살았나? 피해는? 다친 사람은.”
“없습니다.”
파도의 무리에 이리저리 치였던 배들이 정렬하더니 다시 속력을 내며 바다 위를 달렸다.
너울의 연속이 점점 좁아지면서 빗발치던 비바람이 줄어들고 있었다.
백파가 사라지면서 하늘이 열리더니 태양의 빛이 희미하게 보인다. 빛에 눈을 가리기도 전에 눈앞에 익숙한 광경이 눈에 띄었다.
퀴농항이었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