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양재벌 강태준-230화 (230/361)

230화 백지수표

그 앞에 들어 있는 것은 백지수표였다.

“고개 들게. 이 할미가 무슨 갑질하는 사람도 아니고. 무슨 대권에 나가는 사람처럼 비장하나. 거기 필요한 대로 적어 보게. 원하는 만큼 빌려줄 테니.”

“감사합니다! 이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감사는 무슨……. 솔직히 자네 실적이면 팥으로 메주를 쑨대도 믿어야지.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네.”

“정말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아닌 게 아니라 강태준으로서는 천우신조였다. 백 할머니가 투자한다는 말이 돌자 주식시장에서 때아닌 소문이 돌았던 것이다.

“아니 백씨 그 할망구가 담보도 없이 돈을 빌려줘?”

“그냥이 아니라 백지라는군. 백지수표. 자네 들어보았나. 그 할마시가 백지를 줬어.“

“허어. 그 짠돌이 할망구가 어디. 어디 귀신에 홀리기라도 했나?”

“세상 오래 살고 볼 일일세.”

안전 투자로 유명한 백 할머니는 정석 투자로 이름을 알린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제대로 된 계약서나 담보도 없이 거액을 선뜻 빌려준다는 것은 그만큼 강태준이 신뢰할 만하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백 할머니가 백지수표를 줬다는 소문이 돌면서 강태준의 몸값은 더 뛰어올랐다. 의구심을 갖고 있던 사람들도 이제는 완전히 믿게 된 것이다.

“한해만 1,200만 달러? 물릴 걱정도 없고?”

“이 주식을 무조건 사야 돼! 어떻게든 쓸어 담게!

우량주라는 소문이 퍼지자 한 달 새 백경그룹의 주식은 2배에서 3배가량 폭등했다. 일부 눈치 빠른 사람들은 백경이라는 이름을 딴 회사 주식을 구하려 혈안이 되면서 자금이 일제히 몰려든 것이다.

덕분에 백경 기계 공업사과 오앤비(O&B) 인터내셔널 등 관련 주식이 크게 뛰어올랐고 덕분에 관련주로 천경과 오성 주가도 상승세를 탔다.

사정이 이렇게 되니 사채업자 중에는 백경에 직접 찾아와 이자를 낮춰 준다 이야기하면서 제발 돈을 써 달라 사정하는 경우까지 있었다.

외화 획득이란 매 명제 앞에서 정부 역시 팔을 걷어붙였다.

보조를 맞추어 백지 신용장이 발급되었고 부총리와 경제 기획원 장관 명의로 약식의 보증서까지 발급되었다.

“일본에서 미쓰시오를 통해 선주문한 바지선 대금은 어쨌나.”

“아직인데. 신용장을 연장하기 위해 재무부 장관께서 도와주신답니다.

대통령 특명으로 한국은행 이사회에 연락해 미국 JP모건 은행을 설득한다고 한 것이다.

“홍콩에서 건조하는 대로 바로 터그보트랑 함께 실어 보낼 예정이랍니다.”

“바지선 문제는 그걸로 되었고. 다른 장비는?”

“그게 트럭이 제때 도착하지 않는 것이 제일 문제입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사업 시작할 때 바로 포드랑 크라이슬러, GM에 전부 발주를 넣었잖아?”

“그게 위에서 출고가 늦춰진 모양입니다. 요새 자동차 시장이 호경기라 디트로이트에서만 출고하는 데 무려 120일분이 밀렸답니다. 그쪽에서도 어쩔 수 없다고 하더군요.”

“뭐, 배짱장사야. 우리에게 약속한 딜리버리가 100일인데 100일을 넘으면 어떡하나?”

당시 미국에서는 바이 아메리카 정책을 피고 있어서 미국 관급 계약을 수주할 경우 무조건 미국 장비를 사용해야 한다는 룰을 적용하고 있었기에 사정은 심각했다. 강태준은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돌렸다. 하역작업이 늦어질 경우 매일 만 달러씩 배상하기로 지체 상금이 정해진 계약 조건이라 강태준으로서는 초조할 수밖에 없었다.

“법무 담당관에게 일본 트럭은 안 되냐고 이야기를 해 봤나?”

“네. 절대로 바꿔 줄 수 없다는군요. 요지부동입니다.”

새 트럭이 도착할 때까지만 임시방편으로 일본 트럭을 쓰는 게 어떠냐 문의했지만 운송계약 담당관은 단무지였다.

일본 트럭은 운전석이 오른쪽에 있으니 사고가 날 수 있어 안 된다는 이유까지 내세워 시비를 건 것이다. 명백히 뒤끝 있는 행동에 강태준으로서는 골이 아팠다.

“계약관도 그렇고 미국 놈들은 참 원칙을 좋아하는군. 대체 왜 그러는 건데?”

“2차 세계대전 때 일본군 손에 부모가 죽었다는군요. 그래서 저리 완강한가 봅니다.”

“아니 그렇다고 이따위로 나오면 어떡하나?”

위에 압력을 넣어서라도 확 짤라 버릴까. 열불이 터지는 와중이었지만 여기서 트러블을 만들어 봐야 시간만 낭비다 그때 불현듯 연락이 있었다. 복만이가 오고 있다는 것이다.

퀴농으로 나가 보니 거대한 미군 수송선이 하역하는 중이었다.

복만이를 본 강태준을 얼싸안았다.

“아 형님!!”

“여기는 웬일이야.”

살이 홀쭉하게 빠진 복만이가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미소를 지었다.

“트럭 필요하다면서요. 몇 대 가지고 왔지요.”

“뭐?”

4,000톤급 미국 수송선 갑판 위로 제무시 트럭이 끝도 없이 늘어서 있었다.

강태준의 입장에서는 놀랄 수밖에 없는 일. 잠시 해후를 나눈 광필이가 실실대며 농을 걸었다.

“노랭이한테 빠져서 어디서 뒤져 자빠졌나 싶었더니, 억수로 반갑고마.”

“에이, 말 한 번 심하게 하시네. 형님도 저 보고 싶었죠?”

“반갑다마다. 근데 이게 어떻게 된 건가?”

“감사는 우리 진환 형님한테 하십쇼. 진환 형님이 낸 아이디어니까? 나는 그냥 시킨 대로 한 거밖에 없어요.”

박진환이 같이 왔다고? 그걸 들은 박진환이 쑥스러워하면서도 대신 답했다.

“우리 카발에서 완성차를 팔면서 그래도 여기저기 거래처를 만들어 두지 않았나. 일본 중앙 자공 쪽에서 갑자기 플라이휠이랑 서스펜션 판매량이 급증하지 뭔가. 알고 봤더니. 일본 자위대에서 운송 차량을 이스즈로 교체를 하는 중이라는 소문이 들리더구만.”

“그러니까 자위대에서 땡처리를 한다는 거더라고요. 쓰던 군용 차량을 민간에 불하한다길래 이거 기회다 싶어서. GMC를 최대한 모두 수거해 왔습니다. 중앙 자공 쪽이랑 거래한다니까 믿던데요. 혹시나 소문날까 싶어서 일본어 잘 아는 애들한테 홍콩 상인인 척 하고, 떼오라고 했습니다. 죄다 외상값으로 떼왔고요.”

이 와중에 팽호상이 큰 도움을 줬다고 했다. 잔머리에 감탄하던 강태준이 물었다.

“그래서 총 얼마 준다고 했는데?”

“한 150대 정도 됩니다. 물량이 많아서 좀 실랑이를 하긴 했는데 그놈들 얼마나 깐깐한지, 후려치기 어렵겠더라고요. 박재우 씨가 도와줘서 한 대에 1,500달러 정도로 퉁쳤습니다. 거기다 형님 이름을 팔기는 했지만 괜찮죠?”

“거, 잘했다. 어차피 일제 트럭을 샀어도 웃돈 주고 사 왔을 테니 말이야.”

강태준은 진심으로 칭찬했다. 당시 이스즈 트럭이 3,400달러 선이었음을 생각하면 최소한 턱없이 싼 가격 아닌가. 더욱이 지난 60년대 70년대 초 우리나라 산업 기반의 건설 주역이 되었던 트럭이다. 춘삼이가 홀가분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제 남지나 해를 넘어오기만 하면 되겠군요.”

“그렇긴 하지. 배는 어떻게 되고 있는지 다시 한번 확인해 봐.”

일이 제대로 진행되고 있는지 확인해 볼 필요가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이런 일을 하면서 예상대로 잘 풀리기를 기대하는 건 무리였다는 생각에서였다. 생각보다 순조롭게 흘러갔지만 그걸 고깝게 보는 눈이 있었다.

천진그룹.

베트남 진출을 시도했던 천진그룹에서는 그야말로 침통한 분위기였다. 앵글로 장군으로부터 추천서를 받아 재진출을 타진하는 과정에서 백경그룹에게 선수를 빼앗겼기 때문이다.

다른 곳도 아니고 백경이라니.

오성이나, 미래 같은 대기업이나 하다못해 발해 같은 대그룹이라면 이해가 간다.

듣도 보도 못한 기업이 튀어나올 줄이야.

그 다음으로 천진의 대표인 조호중을 열받게 하는 것은 백경으로부터 온 서신이었다.

“우리보고, 하청을 담당하는 게 어떻겠냐고? 우리보고 부스러기나 주워 먹으라는 말인가? 건방진…….”

“그냥 타협을 보시죠 형님. 이미 백경으로 무게추가 넘어갔습니다. 사업가는 포기할 줄도 알아야지요.”

“이런 굴욕을 참으라는 말인가. 나보고.”

“일단 돈은 벌어야지 않겠습니까. 이미 발주한 트럭이나 배도 처리해야죠. 어차피 백경에서도 우리 회사를 최우선으로 생각합니다.”

조호선은 현실적으로 판단하에 위로했지만 상심한 조호중에게는 동생의 말이 위로로 들리지 않았다. 어떻게 자기가 생각한 아이템을 그렇게 앙꼬만 쏙 빼먹을 수가 있다는 말인가.

분통이 터진 조호중이 분기를 삭히는 사이, 문을 열고 들어온 비서가 조심스럽게 방문객을 알렸다.

“사장님, 발해그룹 이억수 회장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발해에서?”

“뭔 일일까요?”

“뭐 이유가 있을 테니 들어오시라고 해.”

두문불출하던 양반이 외출하다니. 근래 처음 있는 일이지 않은가. 꽤 늙수그레한 얼굴의 이억수는 본 나이보다도 10살은 더 늙어 보였기에 자기도 모르게 일어난 조호중이었다.

예의 차 상석을 양보한 조호중이 의례적인 인사를 건넸다.

“요새 한동안 안 보이더니 강녕하셨소? 아프다고 들었는데?”

“하하. 안녕하겠소이까. 요양이야 충분히 했지요. 한동안 세무 조사로 털렸더니 그렇게 기분이 좋지는 않더군. 표적 수사가 더럽더구만, 세상에 나만큼 사회에 기여하는 사회 사업가가 어딨다고 말이야.”

요양한 사람치고는 혈색이 지나치게 좋아 보였지만 조호중은 그런 걸 티 내는 사람이 아니었다. 알 바 아니지 않나. 백경에 시비를 걸었다 영혼까지 털린 사람치고는 꽤 멀쩡해 보였다. 속으로 고소한 감정을 삼키며 조호중이 차를 내밀었다.

“거 고생 많으셨구려. 그래서 왜 갑자기 찾아오셨소이까.”

“뭐 사업차 들렀지.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리다. 베트남 진출에 함께 협력하고 싶어서 찾아왔소.”

“그쪽이랑 내가? 협력을 말이오?”

혹여 자신 모르게 추진하던 일이 있나, 반사적으로 동생을 돌아본 조호중이었지만 금시초문인 듯. 뭣 잘못 먹었냐는 듯한 얼굴이었다. 조호중은 떨떠름한 표정을 짓자 동생이 나섰다.

“거, 번지수를 잘못 찾아온 거 같은데 말입니다? 그쪽이랑 우리랑은 딱히 인연이 없지 않습니까. 게다가 우리 천진은 지금 수송계약을 백경에 뺏긴 상황이니 뭐라 도와드릴 수도 없습니다.”

“에이 말 돌리지 마시오. 백 프로 하청이라도 받았겠지. 세상에 천진을 빼고 무슨 일을 한다는 거요. 거기 겸사겸사 우리 물건도 껴 달라는 걸세.”

“흠…… 글세 뭐 해 주려면 못 해 줄 것도 없다만, 저희가 왜 그래야 하지요? 그만한 리스크를 질 이유가 없을 텐데요.”

조호선의 답변은 정중했지만 뼈가 있었다. 발해의 이억수가 백경의 강태준과 사이가 나쁘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몇 번이나 사업상 충돌하다 대가리가 깨졌다는 거야 호사가들 입에서 오르내리던 일이 아닌가. 그런데 백경이 따낸 사업에 숟가락을 얹으려고 하다니. 그러나 이억수는 뻔뻔했다.

“적의 적은 동지가 아니겠소. 강태준이가 싹퉁머리 없이 사업 아이템을 빼 갔으니 천진 속이 말이 아니지 않나. 내 알기로 이번에 준비가 많았던 걸로 아는데…….”

“되는 대로 풀리는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분통이 터진다고 비즈니스에 감정을 집어넣을 수야 없지요.”

“그런 면에서는 우리 이 회장님께서 저희와 협력하는 게 딱히 시너지가 날 거 같지는 않습니다.”

“이익이라…… 본론은 그거였구만. 그렇다면 이렇게 하면 어떻겠소? 백경 대신 사업권을 따낸다면 그쪽도 나랑 협조하는 걸로.”

“그게 무슨 소립니까?”

“뭐 강태준이 저렇게 자신 있게 나대는 게 수송권을 따냈기 때문이 아니겠나. 듣기로 100일 안에 물자 보급을 원활하게 끝내 놓겠다고 계약했다던데 하루 늦어질 때마다 패널티가 1만 불이나 된다더군.”

“큰 액수군요. 하지만 성공했을 때는 그만큼 보상도 엄청나겠죠.”

“내 말이……. 근데 반대로 생각해 봅시다. 일단 1년은 간 보기 위한 단년 계약이고 실적을 보고 협상을 한다고 하지 않았나. 그렇다면 일하는 게 시원찮을 경우엔 우들에게도 기회가 있지 않겠나?”

-다음 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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