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양재벌 강태준-227화 (227/361)

227화 보급 용역

‘하지만 이 사람은 해낼지도 모르지.’

그러나 강태준의 말에는 무게감이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 고작해야 기능공이었던 사람이 맨주먹으로 여기까지 올라왔다. 이 사실을 아는 스튜어트로서는 어디까지 올라갈지, 뭔가 응원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이었다.

“결심이 그러하시다면 응원하겠습니다. 그럼 연결할 곳은 찾으셨습니까?”

“일단 미 8군 수송부장을 했던 마이클 장군으로부터 추천서도 얻었습니다.”

강태준이 자신 있게 서류를 내려놓았다. 광필이를 먼저 보내 놓고 준비했던 서류였다. 이걸 받으려고 얼마나 돈을 썼는지. 하지만 서류를 본 스튜어트의 눈매가 살짝 휘어졌다.

“뭔가 문제라도……”

“음……. 이건 뭔가 잘못 알고 계시는 게 있는 것 같아서요. 월남지역 육군 수송감은 앵글러 중장이고 하인케스 중장은 전투 담당 장성입니다. 전투 담당에게 알선해 달라고 하면 좀 곤란할 거 같지 않습니까?”

강태준이 옆을 돌아보자 당황한 광필이가 서둘러 시선을 회피했다.

.“이거, 엉뚱한 곳에 가서 떼를 쓸 뻔했군요. 그러면 전혀 추천서가 소용없는 건가요?”

“없는 것보다야 낫겠지만 아무래도 관할이 달라서요. 부서 간 경쟁 관계에 있으면 오히려 역효과가 될 수도 있지요. 차라리 수송 장교들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연결하는 편이 좋을 겁니다.”

“조언 감사합니다.”

“저도 좋은 정보가 있으면 도와드릴 테니 너무 심려하지 마십시오.”

밖으로 나온 강태준이 광필이를 돌아보자 죄지은 듯 고개를 푹 숙였다.

“거, 정신을 어따 두고 다니는 거냐. 그렇게 호언장담하더니만.”

“죄송합니다. 내 근무하던 시절에는 그런 게 일상이라 행정상 수송부대끼리는 모두 다 통하는 줄 알았제.”

“어쩔 수 없지. 그럼 연결할 사람들부터 찾아봐. 일단 주한미군 내 문산이랑 의정부 쪽 수송부대 장교들 출신 있나 문의 좀 해 봐, 아마 몇몇은 있을 테니.”

“옙.”

부리나케 밖으로 나갔다. 호텔 방을 나선 강태준은 친분 있는 수송 장교들이 있을 곳을 찾아다녔다. 월남전은 규모가 큰 전쟁이고 파견된 미군의 수도 엄청나게 많으니 한국에서 안면을 튼 장교를 찾아야 했다.

하지만 문제가 하나 있었다. 민간인 신분으로서는 월남 내에서 한국군은 몰라도 미군 부대 안까지 들어갈 수가 없었던 것이다. 쓸데없는 제약에 광필이가 투덜거렸다.

“이거 무슨 군대에 재입대를 할 수도 없고.”

“어디 거, 재수 없는 소리를. 임마. 진짜 보내 주랴?”

“농담이라 그런 말 하지 마소. 내 군대면 지긋지긋하니까……,”

“그러게. 복만이 그 자식 깜냥이면 이럴 때 투입하기 제격인데. 하필 거제에 짱박혀서는…… 참.”

“왜요?”

“연애 사업에 공사가 다망하신지라. 못 온단다.”

그냥 주둔지 근처 바로 가서 시도할 수도 있겠지만 군속 출신인 복만이가 없어지자 미군 쪽으로 자연스레 침투할 녀석이 마땅치 않았다.

“그럼 다시 불러옵시다요. 이기 얼마짜리 판인데 지금 그게 중요합니까?”

“임마, 안 돼. 무슨 원망을 들으려고. 어차피 안 올 생각이면 죽어도 안 와.”

“그럼 외삼촌께 일러바치죠. 잘하면 눈 푸른 손주 보실지 모르겠다고. 그럼 바로 베트남으로 쫓아낼 거 같은데.”

“악마냐?”

그렇게 티격태격하는 동안 춘삼이가 미군부대에서 보낸 쪽지를 가져왔다.

-미스터 강, 좋은 소식입니다.

강태준은 베트남군 고문으로 있던 윌리엄 대령이 사이공 부두 항만 사령관으로 부임했다는 소식이었다. 곧바로 강태준은 그날 짐을 싸서 사이공의 항만 사령부 정문으로 찾아갔다. 웬 수상쩍은 동양인이 나타나 경례를 하자 젊은 일병은 위아래로 그를 훑으며 물었다.

“왓 더?”

“이봐, 경비병, 사령관에게 한국인 미스터 강이 면회 왔다고 전해.”

“예…… 옜썰.”

고급 영어를 구사하는 모습에 바짝 쫀 일병이 곧바로 안으로 들어갔어 들어간 지 3분 후에 위관급 전속 부관이 나와 그를 데리고 갔다. 윌리엄 대령이 기다리고 있었다.

“오, 자네가 강 사장이로군. 예전에 축구 할 때 한 번 봤던 얼굴인데…….”

“오랜만에 뵙습니다. 저는…….”

“하하. 자네 설명은 됐네. 스튜어트 중령과 박 여사한테 귀가 따가울 만큼 많이 들었으니. 나를 찾아온 이유가 뭔가?”

“그렇다면 저도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헬기를 좀 빌릴 수 있겠습니까?”

“헬기를?”

“현재 퀴농에 전쟁 보급 물자를 만재한 배가 50여 척식 하역을 기다린다는 것은 전쟁 수행에 막대한 지장 아니겠습니까? 현지 수송 장교들을 만나고 싶어 찾아왔습니다. 하지만 제가 민간인이라 들어가기 어렵지 않겠습니까?”

“흠. 그래도 군용헬기를 빌려달라는 건 좀 무리한 일이야. 좀 어려운 요구라는 것은 알지?”

“개인적 용무가 아니라 미국의 국익을 위한 일이기도 하지요. 항구에 묶인 물자만 있으면 뭐 합니까? 보급이 되어야지. 이대로 3, 4개월 이상 하역이 적체되면 전쟁 수행에도 막대한 지장을 초래할 겁니다.”

강태준의 말은 제법 논리적이었다.

윌리엄 대령의 입장에서도 사실 하역 지체는 항만 사령관으로서의 실적에도 영향이 없을 수 없었던 사안이었던 것이다. 경우의 수를 따져 본 윌리엄이 느리게 입을 열었다.

“항구에 묶인 물자를 신속히 처리할 방법이 있나?

“네, 제게 운송할 기회를 준다면 신속히 처리할 방안을 찾아보겠습니다.”

“그래, 원칙대로라면 불가하겠지만 수송 작전이라 생각하고 이번만일세. 건투를 빌겠네.”

“감사합니다.”

항만 사령관이 빌려준 전용 헬기를 타고, 전속 부관을 대동한 강태준은 사이공에서 퀴농의 기지로 직행했다. 중간에 기름 보급을 여러 번 받을 정도로 먼 거리였다.

강태준은 도착하자마자 퀴농의 미군 장교들을 열심히 만나고 다니면서 이야기를 해 나갔다.

“하역 문제? 코레아?”

“그렇네. 지금 퀴농에 묶인 배만 수십 척인데, 너희 미군들이 그 많은 하역 작업을 다 할 수 없지 않나. 퀴농에 포트를 운영하게 해 준다면 수송 전문회사인 우리가 와서 너희가 싫어하는 허드렛일을 다 해 주겠다. 그러니 사이공 상관들에게 건의서를 써 주게.”

건의서를 받은 강태준은 이번에는 최종 승인을 맡은 웨스트모어랜드 사령관에게 자필 편지를 써 내려갔다.

-존경하는 웨스트모어랜드 사령관님.

먼저 월남의 공산화 방지라는 대의를 위해 수고하시는 장군님과 장병들에게 경의를 표하는 바입니다. 저는 백경물산 강태준 사장으로 한국전 참전 용사들과 함께 운송회사를 하고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한국전쟁 당시 미군이 한국을 지원해 주지 않았다면 한국은 적화되었을 것이니 실로 감읍할 따름입니다.

하지만 지금 퀴농 지역에 하역 인력이 없어 군수물자를 만재한 화물선이 수개월 간이나 항구에 묶여 작전에 막대한 지장을 준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하여 백경물산에서는…….

강태준은 미군의 위대함에 대한 미사여구와 찬양을 쓰면서도 군수물자 문제에 대한 이야기를 최대한 사실에 입각해서 써 내려갔다. 현지 사령관과의 면담내용은 물론이거니와 필요한 인력과 배, 그리고 운송 중 발생할 수 있는 문제까지 모두 책임지고 군을 위해 봉사하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친화력 좋은 광필이와 인맥을 동원해 이런 문서를 100장씩 웨스트모어랜드 사령관실, 병참 담당 부사령관실, 계약처 등에 무차별적으로 뿌렸다.

이런 정성이 투하했는지 미군 측에서 계약관을 보내겠다고 통보를 해 왔다. 퀴농의 미군 물자 수송계약이 코앞으로 다가온 것 같았다. 하지만 미군은 그렇게 녹록지 않았다. 계약관으로 나온 중령은 깐깐하기가 바늘도 들어가지 않을 정도였다.

“그쪽과 수의계약은 불가하오. 무조건 경쟁입찰로 해야 하오. 그렇지 않아도 일본과 호주, 월남 업체에 경쟁입찰을 띄울 생각이오, 그리고 이번 일은 현지인인 월남 업체도 반드시 껴야 하니. 그쪽에서도 그에 맞게 파트너를 준비해 주시길 바라오.”

“경쟁입찰이라 그것도 나쁘지는 않지만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있습니다. 월남 쪽 회사까지 들어가는 조건은 불가능합니다.”

“아니, 왜 월남의 로컬 회사랑 제휴해서 물류 수송을 하기 곤란하다는 말이오?

“현지인 중 누가 베트콩인지 모를 판에 땅에서 로켓포를 들고 다니며 눈을 부라리는 중인데 뒤통수를 칠 놈들과 합의를 하라니요. 당치 않는 말이지요. 게다가 미군 입장에서는 전투 승리가 중요하지 경쟁입찰로 푼돈을 아끼는 게 중요한 게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도 귀사처럼 영세한 운송사와 수의계약 방식은 곤란할 거 같소만. 혹시나 문제가 생기면 책임질 방법도 없지 않나?”

“보험사를 끼면 되지요. 게다가 경쟁입찰을 하라는 건 저희랑 계약하지 말자는 거지 그게 어디 협상입니까. 아닌 말로 그렇게 되면 인도차이나반도에 일찌감치 진출했던 프랑스나 미국 업체들이 압도적으로 유리하지 않겠습니까? 저희 회사는 그렇게 들러리만 설 수는 없습니다.”

강태준과 계약관은 계속 날 선 실랑이를 벌였다. 강태준의 요지는 수의계약으로 처리하자는 것이고 계약관은 그건 불가하다는 입장이었다. 양측 입장이 평행선을 달리자 불쾌해진 계약관은 노골적으로 얼굴을 구겼다.

“벽창호도 아니고, 어느 하나도 양보를 못 한다면 계약은 어렵겠소이다.”

“저야말로 왜 도저히 월남 업체를 끼라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혹시 다른 이유라도 있는 겁니까?”

“도저히 말이 안 통하는군.”

약이 오른 계약관이 자리를 박차고 떠났지만 강태준은 여전히 미동도 하지 않았다.

긴 회의에 파김치가 된 광필이가 골치 아프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었다.

“이러다가 파토 나는 거 아닙니까?”

“쫄지 마. 퀴농항 배 한 척당 정박료가 5천 달러인데 경쟁입찰을 했다가는 업자를 모으고 선정하는 데만 한세월이야. 설마 그걸 모르고 저러겠나.”

“제정신이 아닌 거죠. 아직 대가리를 깨져 보지 못해서 그런 거지.”

배짱을 부리고 있긴 했지만 사실 강태준도 속이 타기는 마찬가지. 다 된 밥에 재를 뿌려도 유분수지 이렇게까지 징한 건 뭔가 호텔에 돌아와 보니 호텔 카운터에 달갑잖은 메시지가 와 있었다.

-천진그룹, 베트남 진출 가시화. 앵글로 장군과 접선 중…….

노기철이 보낸 메시지였다. 강태준의 눈이 일그러졌다.

“이런 제기랄…….”

“이대로는 우리도 곤란하지 않습니까. 곧 수송업체들이 도착한다는데. 천진 놈들이 오면 완전히 판이 깨질 수도 있습니다.”

“침착해라. 이런 때일수록 냉정해야 해.”

이 타이밍에 천진이 들어와 버리면 수의계약은 백지화될지도 모른다.

수송 경력에서 딸리는 강태준으로서는 죽 쒀서 개 주는 꼴이 될 수도 있었다.

그렇게 걱정을 하는 동안, 군영 내가 크게 소란스러워졌다. 종전과 싹 달라진 분위기에 강태준이 물었다.

“어찌 된 겁니까?”

“큰일이 터졌다는군요. 육군 항공대에서 보급품을 엉뚱한 곳에 떨어뜨려서 지금 난리가 났다네요.”

록히드 폭격기에서 저속으로 공중투하를 하다 엉뚱한 위치에 보급품을 떨구었다는 소리. 그래서 지금 난리가 났다고 했다.

“이런 멍청한 놈들, 음주 비행이라도 한 건가. 무슨 그런 실수를 하나?”

“암튼 그 때문에 물량 회수 문제로 왈가왈부 말이 많은 모양입니다.”

보급품이 오배송된 것도 문제지만 교전 지역에 떨어졌다는 것도 문제였다.

이게 기회임을 직감한 강태준이 항만 부두 사령관인 윌리엄 대령의 집무실로 곧장 쳐들어갔다.

-다음 화에 계속-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