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6화 퀴농항으로
그로부터 몇 시간 후, 청와대.
‘대통령께서 부르시다니. 이 시간에 무슨 일로?’
이런 야심한 밤에 호출이라니. 갑작스런 호출에 놀란 최영재였지만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약간 냉기가 느껴지는 집무실에는 박정명이 심각한 얼굴로 서류를 읽는 중이었다.
“부르셨습니까?”
“자네한테 투서가 들어왔더군. 탄원서야.”
“네? 탄원서라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자네가 더 잘 알 거 같은데? 그간 꽤 많은 업체로부터 꺾기를 빙자한 예적금을 받아 왔더군. 업체들이 원성이 아주 많아.”
수북이 쌓아 올린 서류 더미를 본 최 장관은 말문이 턱 막혔다.
갑자기 이 타이밍에 누가 이런 간 큰 짓을 벌였단 말인가.
하지만 지금은 어떻게든 면피해야 했다.
“그건 그야 관행적으로 받아 왔던 부분이라.”
“관행이라니. 그건 누가 만든 건가? 이만승이? 상공부 쪽에서 부당한 압력을 행사해서 사업을 돈좌시키고, 협회 밥그릇 챙겨 주기를 한다던데? 게다가 이건 또 뭔 허깨비 같은 소리야. 공기업과 유관단체 임원 자리를 사고팔다니?”
“각하 그건 모함입니다. 저는 소신껏 일했을 뿐, 부당한 압력을 행사한 적은 없습니다.”
“그러면 가발 사업에 압력을 행사한 건 자네가 아니라는 건가?“
“네?”
“200만 불을 예치하지 않으면 수출 면장을 내주지 않겠다고 멀쩡한 백경을 탈락시켰다면서. 그뿐만이 아니더군, 오성건설 측에서 짓기로 되어 있던 공단건설 사업은 왜 보류시켰지?”
“그건…… 적법한 심사가 필요한 상황이라.”
“이미 다 알아봤네. 임자, 사람이 선이란 게 있는 거야. 언제부터 은행이 기업인에게 대놓고 삥 뜯는 존재가 되어 버린 건가? 내가 임자에게 주문한 게 뭔지 잊었나. 기업인을 도와서 경제를 키우라고 했지 언제 이런 짓 하라고 했어? 이러니까 상공부가 관피아라는 소리를 듣는 게 아닌가?“
“각하, 전 특별히 부당한 압력을 행사한 적은 결단코 없습니다. 뭔가 오해가 있는 모양입니다.”
“오해? 그럼 이건 뭐지?”
집어던진 서류 앞에는 이순신 동상 사진이 보였다.
“현충사 문제는 왜 임자가 임의로 처리했나? 동상 건립에, 작가들 심사까지 관여한 건 너무하지 않은가?”
“그건 사실관계랑 많이 다릅니다. 저는 결단코…….”
“임자, 이번 일은 참으로 실망이야.”
최영재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실망이라니…… 실망이라니.
도돌이표처럼 그 한마디가 청천벽력처럼 다가왔다.
“자, 잘못했습니다. 각하.”
“아니 내 실수지. 근래 무리수를 두는 걸 보니 자네도 스트레스가 많았나 보군. 물러나고 좀 쉬게.”
“각…… 각하.”
“물러나게나. 나중에 다시 부를 테니.”
혼이 빠진 것 같은 표정으로 집무실을 빠져나온 최 장관은 그날로 해임 통보를 받았다.
이후 정보를 입수한 광필이가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최 장관이 실각하다니. 앓던 이가 빠진 기분이군요.”
“오성에서 정보를 줬어. 설마하니 부인 명의로 개인 회사까지 만들어서 뒷돈을 빼돌리다니, 동상 건립비를 뻥튀기하는 건 아주 몰랐군.”
“그러게요. 등잔 밑이 어둡다고, 설마 충무공 동상까지 손을 대다니……. 거 몹쓸 놈이군요.”
전격적인 수사로 밝혀진 정황은 몹시도 체계적이었다. 조형물 공모에서 심사 정보를 빼돌린 다음. 평소 자신들이 관리하던 대학교수들이 심사위원으로 들어가게 하고, 특정 작품에 주관적으로 높은 점수를 부여했던 것이다.
“조형물 제작업체 대표와 건축사가 짜고 쳤다고 실토했다는군. 당선금을 분배하고 로비 활동에 들어간 비용을 조형물 제작비용으로 충당했다고 했다고 불었어. 이익금 분배까지. 횡령금이 무려 10억 원대라더군.”
“거참. 간도 크네. 합법적인 세금 도둑이네요.”
“법령이 허술하고 담당 공무원 재량도 강하니 비리가 생기는 거지.”
“그럼 최 장관은 어떻게 되나요?”
“뭐. 부패 혐의로 해임되었으니, 정계 은퇴 수순 아니겠나. 관련자들이 모두 위계 공무 집행 방해로 구속되었으니 부당하게 착복한 재산 몰수는 기본이고…… 특별히 아량을 베풀지 않겠지.”
하필 역린을 건들다니. 박정명은 다른 건 몰라도 자기 권위에 도전하는 인간을 살려 둔 적은 없었다. 최 장관은 구속되지만 않았을 뿐. 사건은 이미 검찰로 넘어간 상황이었다. 모르긴 몰라도 최소 몇 년간은 뺑이 쳐야 할 것이다.
“신 검사가 이번에도 한 건 제대로 했군요. 이러다가 진짜 검찰총장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게. 이 일로 또 승진했다지, 벌써 지검장이라니 세상일은 몰라.”
평검사에서 오래 달았지만 지검장 승진은 동기 중 제일 빨랐으니 굉장한 출세 속도다.
대놓고 밀어주기는 했지만 받아먹는 것도 실력 아니겠는가. 공을 밀어줘도 득점으로 연결하는 것은 운도 운이지만 실력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뭐, 덕분에 천진 놈들도 대가리가 깨졌으니 밥값은 하지 않았나?’
뜻하지도 않은 호재도 있었다. 최영재 상공부 장관이 나가리 되면서 수송 업계에서 1위를 고수하던 천진그룹이 된서리를 맞은 것이다. 수송업무와 관련해 각종 특혜를 베풀었다는 것이 드러나면서 월남전 개입이 늦춰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곧 반가운 소식이 전해졌다.
“형님, 드디어 베트남에서 연락이 왔다고 합니다.”
* * *
베트남, 퀴농항.
찌는 더위가 푹푹 내리쬐는 초여름. 한국 용역 군납 조합 이사장이라는 거창한 직함을 판 강태준은 드디어 월남 시찰에 나섰다.
외화벌이가 목적인 만큼 경제인 출신인 이원석 원내 대표를 주축으로 한 중소기업 사장단에 끼게 된 것이다.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텁텁한 공기에 광필이가 손사래를 쳤다.
“어휴, 더워. 여기가 퀴농이군요. 근데 항구라기보다는 깡촌 아닙니까?”
“깡촌이라고 하지 말고 어촌이라고 해. 너도 촌놈이면서 뭘.”
“에이 무슨 말씀을…… 뭐, 그래도 배는 엄청 많네요.”
비행기에서 내려 보니 어촌 앞으로 화물이 꽉 찬 배가 50척 넘게 몰려 있었다. 마치 항모를 방불케 하는 거대한 수송선들이 짐을 실은 채 대기하는 모습은 그 자체로 장관이 아닐 수 없었다.
“스케일이 엄청나네요. 근데 저 배들은 정박하지 않고 왜 저렇게 둥둥 떠 있습니까?”
“여기가 시설 자체가 워낙 빈약해서 내릴 방법이 없지 그래. 하역할 사람이나 장비도 부족해서 군수물자를 내려놓지 못하고 순서를 기다리는 거지.”
강태준의 말에 춘삼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수송을 전문으로 하지 않고 온 사람들은 대부분 관심사가 다른 곳에 있었다. 항구에 배가 많다는 정도로만 받아들였지만 직접 배를 몰아 보았던 강태준의 눈썰미는 남달랐다.
월남에 파병된 미군 병력이 무려 20만 명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병참이나 보급, 서비스 부문에서 인력이 달려 큰 고생을 하고 있다는 것은 자명했다.
민간인이 수송하다가 총에 맞아 죽어도 할 말이 없는 곳에서 제대로 된 하역 인력을 구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주변을 둘러보던 이원준이 말했다.
“나는 의료지원단 쪽을 알아봐야 할 것 같으니, 그쪽은 그쪽 일 보게나. 원내 대표님과 같이 맹호사단 쪽으로 먼저 가야 돼서 나중에 찬찬히 따라오게.”
“알겠습니다.”
이원준과 함께 온 의료 지원단 130명과 태권도 교관 10명이 동행했다. 비전투원 2천 명으로 구성된 군사 원조단인 비둘기 부대를 지원하기 위함이었다.
후발대가 도착하기 전에 강태준이 숙소로 향했다. 콘크리트로 대충 타설한 듯한 집은 하얀 벽지도 없이 페인트만 덩그러니 칠해져 있었다.
물건이라고는 낡은 책걸상과 타이프 라이터 한 대가 전부. 그걸 보고 곧바로 투덜대는 최 중사였다.
“아니 사장님. 이건 좀 심한데요. 이게 로얄이라굽쇼?”
“거, 빈정대지 마라. 사이공 최고급 호텔도 이것보다 낫지 않아. 거긴 하루 숙박비가 200달러다.”
“네? 이딴 방이 하루에 200달러요?”
“나한테 묻지 마. 이 동네는 계단 밑에 창고처럼 만든 방도 하루 50달러라니까. 그냥 감지덕지하게 생각해.”
“아. 이 자식들 증말.”
녹물이 나오는 호텔은 극도로 비쌌다.
식사와 서비스가 형편없는 수준이긴 해도 그나마 다른 곳에 비하면 호화로웠던 것이다.
나무 침대를 본 춘삼이가 씩 웃었다.
“그래도 뭐…… 벌레도 없고 전쟁터치고는 평온하군요.”
“여기는 후방이니까. 생각해 보면 한국도 전시 국가 아닌가.”
“하긴. 전쟁이란 게 전선을 제외하면 생각보다 안전하지요.”
강태준은 둘이서 맞장구치는 모습을 보며 웃었다.
“아까 봤지? 군수품 수송 용역을 따내기만 하면 돈이 되겠더군. 맹호부대 주둔지가 퀴농과 가까우니 유사시에 도움을 받을 수도 있고 말이야.”
“하긴 퀴농항에서 2백 마일 떨어진 앙케랑 플레이크 지역에 한국군 맹호사단이 주둔할 예정이라고 하니 멀기 해도 유사시 도움을 받기도 쉽겠군요. 추가로 2개 미군 사단 5만여 병력도 있고요.”
“그래. 지금이야 공병부대와 자체 경비 병력이 전부지만 추가로 전투병력 파병이 이루어지면 보급 역할이 중요하겠지.”
추후에 ‘청룡부대,’ ‘맹호부대,’ ‘백마부대’ 순으로 파견될 예정이었는데 규모는 미국의 동맹국 가운데는 가장 큰 규모였다.
‘이건 기회다. 천진그룹이 나가리 된 지금이 호기지.’
운송업에 있어서는 일인자인 천진이 빠지다니.
이거야말로 천재일우 아닌가.
강력한 경쟁자가 있었다면 어림없었겠지만, 이렇게 되면 해 볼 만하지 않은가. 원래 사업이란 건 먼저 먹는 놈이 임자니까. 그때 소리가 들렸다.
“손님 오셨습니다.”
“누구? 초대하신 분은 없는데?”
“이거 절 잊으셨습니까. 미스터 강?”
모자를 벗으며 나타난 사람은 미 8군 정보부에서 근무하던 스튜어트 중령이었다.
강태준이 나타났다는 이야기에 몸소 찾아온 모양.
오랜 친우의 방문에 강태준 역시 그를 얼싸안으며 반가워했다.
“아니, 제가 여기 오는 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미 정보부에서 매일 해외 입출국 명단을 체크하는데, 낯익은 명단이 있어서 여기 오신 걸 알았지요.”
“이렇게 반가운 일이…….”
간단한 안부를 나눈 스튜어트가 강태준에게 아이템을 듣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후방에 시설 건설이 아니라 수송 용역을요. 그건 좀 위험할 텐데요?
“건설 쪽도 관심이 있습니다만 쟁쟁한 건설사와 경쟁 입찰을 한다면 우리 쪽이 많이 불리하지 않겠습니까. 체급 상 미래나 서아 같은 기업들에 밀릴 테니까요.”
강태준도 건설 쪽부터 투자할까 생각하지 않은 게 아니지만 아무래도 진입장벽이 있었다.
“그래도 물류를 맡으면 여기저기 운행해야 하는데 더 위험하지 않을까요. 베트콩들 보통 놈들이 아니에요.”
“어디에든 베트콩이 존재하겠지요, 세상에 안전하고 돈 잘 버는 일이 있겠습니까? 어차피 전쟁터란 곳은 다 위험하죠. 궂은일을 해야 큰돈을 벌지 않겠습니까.”
“기대가 크면 실망이 클 수도 있습니다. 이번 전쟁은 한국전쟁과는 차원이 다르잖습니까. 그때는 모국이었다면 여기는 일억만 리입니다.”
“하하. 그거야 각오하고 있지요. 하지만 시도도 안 해 볼 이유는 없지 않습니까. 누가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까. 문을 두드려라, 그러면 열릴 것이다.”
허황되기 짝이 없는 말로 들렸지만 스튜어트는 비웃지 않았다. 사실 다른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면 십중팔구 개소리로 치부했을 것이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