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양재벌 강태준-225화 (225/361)

225화 오앤비(O&B) 인터네셔널

공테이프를 만지작거리던 이재무가 의문쩍은 어조로 물었다.

“그래서 다른 회사가 먼저 움직일 가능성은?”

“이 부사장님께서 모르시는 걸 다른 업체에서 알 리가 있나요? 게다가 이건 베를린 전시회에서 공개된 게 전부라서 아직 대중의 관심에서 벗어나 있습니다.”

“포텐셜은 높지만 아직 큰 관심을 불러일으키지 못하는 상황이다?”

“그렇지요. 오히려 우리가 제안하면 반가운 쪽은 그쪽일 수도 있겠죠.”

고개를 끄덕이는 이재무였다.

“확실히 일리가 있군. 근데 왜 오성이지? 사실 그렇게 잘 안다면 그쪽도 혼자 추진할 수 있는 일 아닌가?”

“대기업인 오성이 보증하는 쪽이 더 신뢰도가 높지 않겠습니까? 아무래도 인지도 면에서 압도적이니까요.”

그러자 이재무가 빙긋 웃으며 물었다.

“허허, 엄청난 자신감이로군. 반대로 이쪽이 혼자 꿀꺽하면 어쩌려고?”

“그렇게 되면 우리는 불가피하게 적이 되지 않겠습니까. 제가 먹지는 못해도 금성사랑 협력하여 똥탕 튀기기 정도야 할 수 있죠. 이번엔 학교를 또 한 번 다녀오는 것 정도로는 끝나지 않을 겁니다.”

“이 자식이…….”

강태준이 다시 득의의 미소를 짓자 주먹을 쥔 이재무가 부르르 떨었다. 성격 같아서는 면전에 물이라도 끼얹을 이재무였지만 쉬이 경거망동하지 못했다.

상대의 말이 단순한 협박으로 들리지 않은 탓이었다.

저번에도 오성을 상대로 대놓고 엿을 먹인 인간 아니겠나.

문제는 어떤 패를 쥐고 있는지 모른다는 것. 그러자 강태준이 다시 그를 달랬다.

“이왕이면 형님의 그늘에서 사는 것보다 직접 제왕이 되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이병구 회장님은 실리주의자인 것으로 들었습니다. 지금이야 홀대하시지만 사업으로 성과를 내기만 한다면 아버님께서도 분명 재고하실 겁니다.”

“으음…….”

이재무는 신음했다. 논리적으로는 틀림이 없지만 태생적으로 거부감이 솟는다고 할까.

도움을 받는 입장이라고 하지만 강태준이 내심 꺼림칙했던 것이다.

하지만 후계자가 된다는 생각이 머리를 잠식하자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 힘을 얻고 나서 다시 생각하면 되지!‘

생각을 굳힌 이재무가 손을 내밀었다.

“좋네…… 이번 한 번만 협력하지.”

“판단 잘하셨습니다. 그럼 신뢰 관계를 다지는 목적으로 선행해야 할 일이 있을 것 같네요.”

“뭘 말인가?”

“후계자가 되려면 방법이 뭐겠습니까? 우선 쓸데없는 장애물은 치워야죠.”

* * *

오성그룹, 사장실.

이재철이 뒤늦게 정황 보고를 받고 있었다. 사정을 다 들은 기가 막힌 듯이 중얼거렸다.

“아니, 재무 그 자식이 청와대로 투서를 보내?”

“예. 똑똑히 확인했습니다. 아무래도 회장님을 저격하려는 것 같습니다.”

“이놈이 결국 일을 냈구먼. 차 준비해.”

“예?”

“대책을 마련하려면 일단 자초지종을 들어 봐야 할 거 아닌가.”

차 안에 탄 이재철은 굳은 안색이었지만 속으로는 미소를 지우지 못했다. 강철완을 통해 부추긴 것은 사실이지만 동생 성격상 이렇게 흘러갈 거라는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모르는 척 동생을 찾은 이재철은 엄하게 꾸짖었다.

“어떻게 된 거냐? 투서라니, 경거망동하지 말라 하지 않았느냐?”

“형님.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강철완 중령님께서 귀띔을 주시더군요. 저도 많이 생각하고 내린 결정입니다.”

이재철이 멈칫했다. 본인이 시켜서 한 일이긴 했지만 영 찜찜했던 것이다.

“그래도 한 번 내게 상의라도 해야지?”

“저도 그 정도 눈치는 있지요,”

“네가 어려운 일을 했구나! 이 형이 미안하다.”

“앞으로 오성의 제왕이 될 분이 손에 피를 묻혀서야 되겠습니까? 형님은 꽃길만 걸으십시오. 제가 오명을 떠안을 테니까요.”

그 말에 이재철의 표정에 형언할 수 없는 표정이 떠올랐다. 뭔가 미안함과 애잔함이 뒤섞인, 복잡미묘한 얼굴이었다.

“내 너의 희생은 잊지 않겠다.”

“형님!”

형제가 우애를 다지는 자못 훈훈한 광경이었지만 그 순간은 오래가지 않았다.

잠시 후, 혀 차는 소리가 들렸다.

“쯧쯧, 꼴갑들을 떠는구나. 희생 무슨 희생? 지 아비 죽이려고 투서 쓰는 짓이 희생이냐?”

귀신을 본 듯 하얗게 질린 이재철이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

“아, 아버님, 여기는 어떻게?”

“그게 제가 미리 초대했습니다. 형님. 아버님께서 절 못 믿으시지 뭡니까? 아무래도 이 정황을 직접 들으셔야 할 것 같아서요.”

“뭐?”

“다 들었다. 동생을 부추겨서 애비를 저격하려고 했다고……. 뒤에서 수작도 부릴 줄 알고, 많이 컸구나.”

말투는 조곤조곤한 것이 부드러웠지만 눈빛을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상황을 파악한 이재철은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아버지, 오해입니다. 그게 아니라. 전…….”

“몹쓸 놈!!!”

그 순간 이병구가 벼락같이 소리를 질렀다. 늙은이라고는 도저히 상상하기 어려운 고성이었다.

“이 쓰레기 같은 녀석, 감히 니가 감히 이 애비의 등에 비수를 꽂으려 들어?”

“저도 설마설마했는데…… 실망이군요. 형님. 세상에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있기 마련인데요.”

비아냥거리는 동생의 말이 고막을 자극했지만 머리가 새하얗게 변한 이재철은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극도의 분노한 아버지를 보니 고양이 앞의 쥐처럼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경영진도 모두 동의했으니 오늘 이 순간부터 너는 오성인이 아니다. 내일부터 회사에 나올 필요 없다.”

축출이나 다름없는 명령에 얼굴이 새하얗게 변한 이재철이었다.

“아, 아버지!”

“자, 가시죠. 도련님. 갈 길이 멉니다.”

우락부락한 경호원들이 강제로 끌어내자 발악하는 이재철.

도움을 구걸하듯 주위를 살폈지만 함께 왔던 경호원들은 그 눈빛을 일제히 외면했다.

이재철은 딴청을 부리는 동생을 돌아보며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어떻게 감히 네놈이 날…….”

“형님, 저두 인간인데, 아버질 배신할 수는 없잖습니까? 금수가 아니면 말입니다.”

“뭐? 놔, 이 자식들이…… 놔!! 재무 니가 어떻게?”

개구리처럼 눈이 튀어나온 이재철이 기가 막혔지만 경호원들은 대답할 틈을 주지 않았다.

끌려가는 이재철을 향해 이재무가 소리를 질렀다.

“살펴 가시길, 경영은 걱정 마시고, 형님께서는 푹 쉬십시오!”

* * *

그로부터 얼마 후,

“이것으로 오앤비(O&B) 인터네셔널이 펠립스사의 공식 유통사가 되었습니다. 앞으로 동아시아지역에서 카세트테이프와 관련된 모든 권리와 법적 분쟁은 오앤비 측에서 가져가는 것으로…….”

경기도 반월면 공장 밀집 지대. 공장 문을 밀고 들어가니 기계음 소리가 요란한 카세트테이프들이 쏟아지고 있었다. 이번에 승진한 이재무 사장이 흐뭇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오셨습니까?”

“하하. 강 사장. 이렇게 잘 풀리리라고는 예상도 못 했군. 펠립스가 진짜로 특허료를 포기하고 카세트테이프 시스템을 모든 라디오 회사들에 무료 제공하기로 하다니 말이야.”

“대국적인 시각으로 본 거죠. 어차피 물건을 팔아야지. 특허만 쥐고 있다고 돈이 되는 건 아니니까요.”

“그러게 말일세. 발주물량이 몇 달 새 열 배나 늘다니. 엄청나구먼 엄청나?”

테이블 앞에서 수출용 공테이프가 검수를 거쳐 포장되는 과정을 흐뭇하게 지켜보았다. 오앤비는 오성그룹과 백경그룹의 앞글자를 따서 만든 합작회사다. 강태준이 펠립스와 합작 계약을 따낸 지 얼마 되지 않아 근래 펠립스와 산니의 빅딜이 성사된 것이다.

펠립스는 규격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저작권을 포기하는 강수를 던졌다.

뒤늦게 사태를 파악한 그루비히에서 엑실풍켄 측과 계약을 맺고 카세트테이프 규격을 발표했으나 이미 한발 늦어 버린 것이다,

때맞춰 산니에서 발표한 테이프용 데크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면서 가라앉았던 오성의 주가도 간만에 솟아올랐다.

덕분에 상장도 하기 전에 신의 한 수라는 이야기가 나오는 상황이었다.

기계로 테이프에 나사를 박고 손으로 일일이 검사를 하는 모습에 강태준이 말했다.

“다 된 밥이라고 방심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은 테이프에서 음원이 나오는 것만도 다행이지만 자성체 개선 노력을 해야 합니다. 앞으로 펠립스 제품이 표준 매체가 되면 더 많은 사람들이 음원의 품질에도 신경 쓸 테니까요.”

“걱정 말게. 우리도 그 부분은 염두에 두고 있으니까. 데이터 저장용 필름에 폴리에스터에 자성 물질을 씌우는 것 정도가 아닌가. 우리도 그런 기술력이 있지 마침 이번에 산니 공장 측에 기술자를 파견하기로 했다네.”

“얼마나 보내기로 했습니까?”

“통역사까지 포함해서 23명 정도일세.”

“23명은 너무 적으니, 시찰단 인원을 두 배로 늘리죠.”

“아니 그렇게 많이? 쓸데없이.”

“생산 공장으로 견학 간다면 산니 놈들이 순순히 생산 라인을 공개할 리가 없을 거 같은데요. 보안이라고 얼버무리고 빡빡하게 굴면 성가시지 않겠습니까?”

강태준의 말에 그제서야 뭔가 깨달은 듯한 이재무였다.

“생각해 보니 그렇군. 일본 놈들이 어떻게 나올지는 생각 못 했네.”

“맞습니다. 생산 라인을 제대로 보고 오지 못하면 말짱 도루묵이죠. 원래 녀석들이 되게들 까다롭지 않습니까. 그냥 육안으로만 보게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이제라도 사람을 늘려야 되겠는데. 근데 시찰단을 늘리는 걸로 되겠나? 사람이 기억력의 한계가 있어 생산 라인을 다 외울 수 없을 텐데.”

“인원을 몇 개 팀으로 쪼개고 담당 파트를 정해 외우게 하면 그런 우려가 줄어들지 않겠습니까? 각자 맡은 분야를 그대로 복기시키면 되지요.”

“그거 묘안이군. 바로 시행하겠네.”

싱글벙글거리는 이재무는 발걸음이 가벼워 보였다. 그 모양을 본 광필이가 꺼림칙한 듯 투덜거렸다.

“저 양반이 우리 편에 들어올 줄이야. 새삼 어이가 없군요.”

“왜? 돈 많은 파트너가 어때서?”

“아, 그냥 껄끄러워서 그렇습니다. 그냥 이유 없이 미운 놈이 있잖습니까? 저놈이 딱 그러네요.”

그러자 노기철이 못마땅한 얼굴로 투덜거렸다.

“이건 숫제 떠먹여 주는 셈 아닙니까? 자선사업가도 아니고. 곰이 재주를 넘으면 돈은 되놈이 번다더니 딱 그짝입니다요. 태도가 간 쓸개 빼 줄 듯이 바뀐 것도 그렇고.”

“하하. 어쩔 수 없지 않나. 혼자 먹기에는 덩치가 너무 큰 파이인데. 적어도 우산 역할은 충실히 해 주니 말이야.”

사실 공테이프용 필름은 산화철과 이산화 크로뮴 등 자성 물질을 도포한 폴리에스터로 만든다. 강태준이 천경을 놔두고 오성을 굳이 찾아간 것도 폴리에스터를 직접 생산할 수 있는 공장이 있는 곳이 하나뿐이었기 때문.

섬유에서의 노하우를 생각하면 공테이프 제조나 라디오 데크 생산에서 한동안 압도적인 우위를 누릴 수 있을 거라는 계산이었지만 그로 인해 기존 업체들과 약간 서먹해지는 것은 피할 수 없었다.

“덕분에 천경 쪽에서 많이 서운해합니다.”

“하하. 그거 미안하구만. 하지만 어쩔 수 없잖은가. 그쪽과도 별건으로 협력할 일이 있으면 해야지.”

“그보다 상공부 쪽 문제는 해결되었나요? 이번에야 오성이 껴서 태클을 걸지는 않았지만 아무래도 불안한데.”

“걱정 마. 그 부분은 금방 해결될 테니 말이야.”

-다음 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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