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4화 카세트테이프
이재무는 속으로 갈등했다.
아버지의 복귀가 그룹의 과연 미래에 이로울까? 인식하지 못한 사이 그의 마음에는 먹물이 드리우고 있었다.
‘그래 아버지는 날 장기 말로만 생각하시지 않았나. 지금까지 한 번도 날 후계자로 생각해 보신 적이 없어.’
솔직히 이재무로서는 맺힌 게 많았다. 반대하는 결혼을 한 이후 그는 아버지와 소원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형 대신 빵까지 다녀온 입장에서 뭐라도 챙겨 줘야 하는 것 아닌가. 형 밑에서 따까리만 하던 것도 사실 기회가 없어서였다.
그룹을 위해 희생하랄 때는 이제는 자기가 못 미더우니 새파랗게 어린놈을 불러온다고?
그러잖아도 한 번 눈 밖에 날 뻔했던 그로서는 언제 또 팽 당할지 불안하기 그지없었다.
형이 실각한다면 자기까지 개털이 되지 않겠는가. 게다가, 재희 그 자식이 껄끄러운 손위 형을 두고 볼 성격도 아니고.
‘그래 이건 대의를 위한 거다.’
잠시 정신을 고른 그는 펜을 들고 일필휘지로 탄원서를 써 내려갔다. 비자금 조성해 반출한 과정부터 오성제당과 오성 물산이 탈세한 내역 등 이렇듯 부정한 일을 저질렀으니 오성그룹 회장직 복귀는 부적절하다는 내용이었다.
“적당한 때 강철완 중령이 받도록. 아니 내가 해야겠군.”
일이 일이다 보니 직접 하지 않으면 안심이 되지 않는다.
육군본부 인사참모부에 들렀다.
눈치를 보던 그가 서둘러 고이 접힌 봉투를 집어넣으려는 찰나 나지막하게 소리가 들려왔다.
“거 도둑고양이처럼 뭐 하십니까, 그래?”
“강 사장, 여기서, 뭐 하는 거요?”
소스라치게 놀란 이재무가 돌아보자 강태준이 있었다. 낮도깨비처럼 소리소문없이 나타난 불청객에 이재무가 더듬거렸다.
“자, 자네가 어떻게 여길.”
“저도 그게 의문이군요. 업무차 육본에 들렀다가 낯익은 분이 있길래 반가워서 뒤를 밟아 보았는데. 이거 희귀한 장면이네요. 대 오성그룹 차남께서 뭐가 아쉬워서 투서 같은걸?”
강태준의 비아냥에 이재무가 변명하듯 대꾸했다.
“투서라니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이건 개인적인 편지야.”
“도둑 발로 들어와서는 신빙성이 없네요. 굳이 둘러댈 필요 있겠습니까?”
“자네가 뭘 안다고 떠들어?”
“내용이야 뻔하죠. 현충사를 지을 때 경비를 부풀리기를 했다든지 오성제당에서 100만 달러 비자금을 만들었다든지 뭐 그런 내용이 아니겠습니까?”
마치 손바닥에서 사건을 들여다보듯 제 하는 꼴을 알고 있는 강태준에 이재무에 숨이 턱 막혔다. 막연한 공포감에 등골이 쭈뼛하다. 금붕어처럼 뻐금거리던 이재무에게서 목 졸린 소리가 흘러나왔다.
“어떻게? 내 뒷조사라도 했나?”
“뭐 뻔한 일 아닙니까? 요사이, 꽤 입지가 넓어지셨다면서요. 빵 다녀오고 권력을 놓기는 싫겠죠?”
급해진 이재무의 목에서 애원하는 말투가 나왔다.
“이봐, 강 사장? 누가 듣겠네, 여기서 시끄럽게 떠들지 말고 딴 곳에서 이야기합시다.”
“그러면 저기 가까운 데서 차 한 잔 정도 어떻겠습니까?”
이재무는 이를 갈았다. 피하고 싶지만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그가 안내한 곳은 어느 한적한 샬롱이었다.
각종 미술품들이 걸린 액자는 범상치 않아 보이는 장소
종업원이 따뜻한 커피를 내오자 맛을 본 강태준이 다리를 꼬며 중얼거렸다.
“맛이 왜 이래. 손님 대접이 박하군요. 분위기도 그렇고 재벌들 모임 장소치고는 별론데요?”
“더럽게 까다롭구먼. 프라이빗한 이야기라 이곳으로 모셨네. 이제 털어놓게. 원하는 게 뭔가?”
수도권 사령부에서 떨어지자 안심한 듯 풀어진 이재무였다.
“아이고 급하셔라. 전 어디까지나 협력차 방문했을 따름입니다.”
“나랑 자네가 협력을? 우린 악연으로 아는데.”
“거참 서운하게. 사람 인연이란 게 모르잖습니까. 허심탄회하게 말을 나눌 시간이 없었던 것뿐이죠.”
이재무가 어이없다는 듯이 코웃음을 쳤다. 사실 이렇게 강태준과 대면한다는 것 자체가 그로서는 대단한 참을성을 발휘하는 셈이었다. 밀수 사건으로 빵까지 다녀오지 않은 입장에서는 씹어 죽여도 시원찮을 상대를 두고 협상이라니,
굴욕감을 느끼는 이재무로서는 자연히 말이 딱딱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쓸데없이 협박할 생각은 관두고, 도대체 육본까지 내 뒤를 캔 이유 좀 들어 보자구?”
“협박할 의도는 없었습니다. 애초에 그럴 거 같으면 슬쩍 투서를 중간에서 가로채는 편이 수월했겠죠. 사실 저를 만난 게 천운인 줄 아십쇼. 어차피 그 투서는 안 받아들여졌을 테니까요.”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는군. 자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그럼 역으로 박통이 그쪽 편을 어떻게 들어 줄 거라 확신합니까?”
“그거야 비리 사건이…….”
“하하. 순진하시네요. 이렇게 생각해 보죠. 개싸움에 투견을 내보낸다고 하면 실력이 검증된 개랑 그렇지 않은 그 개 가운데 누굴 쓰겠습니까?”
강태준의 비아냥에 이재무의 표정이 썩어들어 갔다.
“비유가 좀 그렇군.”
“권력자가 보는 재계는 투견판이나 다름없다는 소리죠. 경제 발전을 국시로 삽은 정권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검증된 인력을 쓰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이병구 회장이야 어쨌든 이뤄 놓은 게 많으니까요. 반면 현 총수님은 대내외적인 평가가 좀 그러니까요.”
“형님께서 아직 총수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적응할 시간이 필요할 뿐이야.”
“예에. 그렇다 칩시다. 실적은 경기 침체를 원인으로 치죠. 근데 아무리 그래도 인화력이 문제가 있다는 건 확실하지 않습니까.”
뭐라 변명하려던 이재무는 말문이 막혔다. 개인적으로야 온화하고 나무랄 데 없는 형이었지만 이재철은 저돌적인데다 성급해 창업 공신들과 갈등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황태자로서 떠받들며 자라온 탓일까, 별로 개선의 의지는 없어 보인다는 걸 모르지 않은 이재무였다.
“정부에서도 규제를 때리기는 했지만 오성 같은 큰 기업을 말아먹는 걸 바라지 않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투서가 온다? 이건 대놓고 오성에 목줄을 죌 방법이 하나 더 생긴 것이죠.”
“해 봐서 모르지. 그렇다고 해도 내가 손해 보는 건 없지 않나. 잡아떼면 그만이니.”
“그게 안 될 텐데요. 수도경비 사령부로 투서를 넣으면 그건 누가 봐도 의도한 것으로 보이지 않겠습니까? 강철완은 이재철과 동기 동창이기도 하니, 사건이 일어나면 장남도 의심받을 것이 분명하고요.”
“자네가 뭘 안다고? 위에서 아버지를 꼭 지지하리라는 보장은 없잖은가?”
“이건 누가 봐도 좀 아닌 행동이죠. 위법 사항을 떠나 심리적으로도 아들이 아버지를 고발하는 것 자체가 천륜을 어기는 일이니 동정표를 받을 여지도 없고요. 누가 부추겼는지 모르지만 이 부사장께서 독박을 쓸 겁니다.”
생각해 보니 그렇다. 반대로 해당 탄원서와 관련 없이 강철완으로는 손해 볼 것이 없었다. 잘되면 잘되는 대로 안 되면 안 되는 대로, 결국 자기 실적만 올리는 셈이니 말이다.
‘강철완 그 개자식이!’
상대 뜻대로 움직였다는 생각에 대번에 울컥한 이재무가 파르르 손을 떨었다. 강태준이 말했다.
“대충 상황 파악이 되십니까?”
“오지랖이 넓구먼. 그래서 그게 날 찾아온 거랑 무슨 상관인가?”
“그 쪽에게 다른 기회를 주고 싶어서지요. 그래서 도와드리려고 왔습니다.”
“내가 자네 뭘 믿고……?”
“제 실력은 믿을 만하지 않습니까? 이것부터 함 보시죠.”
“흐음…….”
이재무는 영 내키지 않은 투였지만 적어도 자리를 박찰 생각은 없어 보였다.
강태준이 꺼낸 물건은 네모반듯한 모습의 플라스틱 모형이었다.
처음 보는 물건에 이재무의 눈빛이 가늘어졌다.
“이게 뭔가?”
“사업 아이템입니다. 카세트테이프라고 하는데 굉장히 어렵게 구한 물건이죠. 뭐 음악이나 녹음을 재생하는 역할을 합니다.”
“이걸로 음악을 듣는다고?”
이재무의 반문은 당연했다. 대형으로 된 릴 테이프는 언뜻 본 적이 있지만 이렇게 작지는 않았기에 관심이 가는 것도 당연했다.
“자기 테이프에 자성 물질을 도포해 데이터를 저장하는 물건인데 최근에 개발되었습니다. 픈 릴 테이프랑 비슷하지만 이렇게 탄창 형태의 틀에 수납해서 들고 다니기 편리하도록 만든 거죠.”
시범 삼아 가져온 카세트를 틀자 스피커에서 음악이 흘러나왔다.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연주한 모차르트 교향곡이었다. 소리에 집중하는 이재무를 보며 강태준이 중지 버튼을 눌렀다.
“음질이 그렇게 좋지는 않은 것 같군. 잡음도 있고 말이야.”
“하지만 가성비 면에서는 압도적이죠. 이건 고작해야 PE 필름 원단만 있으면 됩니다. 게다가 휴대성은 어떻겠습니까? 레코드판과 비교하면 이건 작고 콤펙트하고 가볍죠. 게다가 제작비도 적게 듭니다.”
레코드판에 비해 이렇게 작고 편한 테이프로 음악을 들을 수 있다면? 하지만 이재무는 여전히 못 미더운 듯했다.
“흐음, 과연 장점만 있는 것은 아니지 않나? 아직 대중적인 물건이 아닌 듯한데.”
“예. 문제가 하나 있긴 하죠. 아직 표준화된 규격이 없거든요. 지금은 서독의 라디오 회사인 그루비히와 엑실풍켄, 음반 회사였던 RPA 캡터와 영국 베카 레코드, DC-인터내셔널 규격을 두고 경합하고 있지요.”
“좋다 말았구먼. 아직 승자가 정해지지 않은 게임이라는 건데. 그런데 어떻게 돈을 번다는 건가?”
이재무가 바로 질색했다. 선도주자보다 패스트팔로어 역할을 자임하던 오성의 사업 방식과는 정반대 아닌가. 그러자 강태준이 이미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지금까지 그랬다는 것이지 앞으로는 아닐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제가 아는 정보통에 의하면 산니의 책임자인 오가 노리호가 펠립스 아시아 지부 사장이었던 비스 디커를 비밀리에 만나 회동 중이라는군요.”
“산니가 말인가?”
이재무의 눈에서 그제서야 관심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예. 그렇습니다. 근래까지 산니의 휴대용 트랜지스터 라디오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지 않았습니까. 산니의 점유율을 생각한다면 충분히 해 볼 만한 게임이 아니겠습니까?”
“산니랑 합작이 성사되면 펠립스가 규격 경쟁에서 유리할 테니 펠립스 쪽에 배팅하겠다 이 말인가?”
“그냥 유리하는 게 아니겠죠. “Winner takes all.” 규격에서 승리하는 쪽이 이익을 독식할 거란 말입니다. 하지만 펠립스 입장에서는 아직 규격 경쟁에서 승기를 잡은 상황이 아니니까요. 그 틈을 파고들자는 것이죠.”
그 말에 이재무도 내심 혹했다. 펠립스의 카세트테이프 규격이 대세를 장악하기 전에 펠립스 측과 독점 계약을 맺는다면?
“그게 펠립스도 순순히 협의하겠나?”
“펠립스사 입장에서는 오히려 환영할 만한 일이죠. 일본 업체들이 독점적으로 동아시아 시장 전체를 먹는 건 별로 달갑잖은 일일 겁니다. 한쪽에 의존도가 너무 커지니까요. 또 다른 이유도 있습니다.”
“그게 뭔가?”
“이건 사실 공장만 있으면 복제가 쉽거든요. 커버랑 회전부 롤 몇 개 외에 부품이 많지 않아, 테이프 원단만 좋은 것으로 확보하면 그리 고급 기술이 필요하진 않으니까요.”
이재무는 나이를 헛먹은 사람이 아닌 만큼 촉이 왔다. 이 공테이프 사업은 단순한 제작 공정과 저렴한 재생 기기라는 점에서 매력적이다. 더욱이 한국은 인건비 면에서 일본보다 가격 경쟁력이 있지 않은가.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