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3화 악마의 속삭임
탁!~
칼로 메추리만 한 오르톨랑의 머리를 으깬 장관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선정 과정상 투명성에 문제가 있었다 말씀하시고 싶은 겁니까?”
“저 역시 이제껏 산업 역군으로서 일선에서 활약해 온 것을 감안해 주셔야 하지 않을까요? 열심히 투자한 입장에서는 유감스러운 일이라서요.”
“물론 그러시겠습니다. 하지만 애국은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강 사장님께서는 외화벌이를 많이 하고 계신 걸로 압니다만 우리나라의 외화 보유고 상태가 현재 심각합니다. 외화 보유액이 9,000만 달러로 떨어진 상황이지요. 국내 부담금, 만기 상환금 등 확정 부채를 빼고 나면 쓸 수 있는 외화가 전혀 없다고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가당찮은 소리를 지껄이는 상대에 강태준이 차분하게 물었다.
“그래서요?”
“돈은 순환이 필요합니다. 경제환경이 어려워지고 있는 만큼 같이 고통은 분담해야지요. 예를 들면 CD(양도성 예금 증서) 매입하신다든지 하는 방식으로 말입니다.”
잠시 침묵하던 강태준이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얼마를 원하십니까?”
“적어도 200만 불 정도는 되야 하지 않겠습니까? 백경그룹의 위치와 사회적인 기여도를 따져 볼 때 그 정도 액수가 바람직하지 않나 사료되더군요.”
“아니, 저희 같은 작은 회사가 그만한 현찰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건 좀 너무 많군요.”
“그렇다면 더 드릴 말씀이 없군요. 암튼 찬찬히 생각해 보세요.”
더 이상의 대화가 이어지지 않았고 협상은 결렬이었다. 한술 더 떠 상공부에서는 월남 진출에도 태클을 걸었다. 자초지종을 들은 광필이 등은 기막혀했다.
“미쳤군요. 20만 불도 아니고 200만 불이라니. 그 돈이 그게 뉘집 개이름입니까? 그만한 돈을 어떻게 구해요.”
“걍 사업을 하지 말라는 소리지. 그건.”
“의도한 바가 다른 데 있지 않겠나. 꺾기를 해 달라던가?”
“차라리 꺾기가 훨 낫지요. 이건 뭐 대놓고 남의 돈으로 장사를 하겠다는 거 아닙니까. 말도 안 되죠. 이건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입니다.”
“논리가 너무 확고해서 문제지. 문제는 월남 진출을 하는 데 제대로 된 법령이 없다는 거야.”
월남 진출 문제는 아직 확정된 게 아무것도 없었기에 무역 거래법이나 군납 관련 법안으로도 규정할 수가 없었다. 국회에서 해외 투자법을 만들자는 제안이 있었으나 아직 입방정만 떠는 상황이었다.
“코에 걸면 코걸이고 귀에 걸면 귀걸이니 해석하기 나름이지. 지금 상태로는 해외 지사도 세우기 힘들어.”
“아니 일본에서 차관이 들여오기로 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 돈은 없는 돈입니까?”
“돈보다는 현물이 더 많아. 게다가 용도가 정해진 돈이 대부분이라 그림의 떡이지. 실제 운용할 수 있는 자금이 얼마나 되겠나?”
만성적 국제 수지 적자로 외화 부족에 시달린 한국에서는 외환규제를 통해 대외 준비금을 유지할 당위성이 있다. 그런 만큼 작정하고 조지기 시작하면 규제를 피할 방법이 마땅찮았다. 춘삼이도 중얼거렸다.
“골치 아프네요. 거, 은행이 돈 장사를 대놓고 하다니 전당포도 아니고.”
“어디 먼저 사업을 선점한 놈들이 수작을 부린 걸지도 모르지.”
“그냥 적당히 촌지 좀 바치고 해결하면 안 되겠습니까? 부족한 돈은 일단 사채라도 써서…….”
“그건 안 될 말이야. 그렇다고 요구사항이 크게 바뀌지도 않을 거고. 게다가 그 담은 어쩔 건가. 한 번 얕보이면 그 뒤는 골치 아파져. 추가로 해외 송금이나 외국 투자액에 각종 제한을 두거나 한도를 두게 할 수도 있네.”
한번 호구 잡히면 영원히 잡히는 게 이 바닥 생리. 게다가 한번 굴복하기 시작한다면 온갖 승냥이들이 각지에서 압력을 넣어 올 텐데 그렇게 되면 온갖 곳에서 삥 뜯을 여지가 다분했다.
“그럼 김필중 부장을 찾아가 보는 건 어떻겠습니까?”
“그건 안 돼. 호의에는 대가가 필요한 법이야. 세상에 공짜는 없어. 이번에 온천 문제만 해도 지분을 얼마나 줘야 했는지 잊었나?”
“하지만 최영재 그놈도 보통 놈이 아니잖습니까?“
“그러게요. 뒷조사를 해 봤는데 아직은 뭔가 책 잡힐 게 잘 안 보이더군요. 개인적으로 치부가 있나 살펴봤는데 생각보다 깨끗합니다.”
상공부 행정 사무관에서부터, 상역 국장, 상공부 차관에 이르기까지 소위 부서 내 엘리트 코스만 차곡차곡 밟아 온 최영재는 내부적인 지지도나 신뢰가 두터웠다. 그 말에 김광필이 맘에 안 든다는 얼굴로 투덜거렸다.
“골때리네요. 신념 따지면서 결벽증 부리는 놈이 제일 상대하기 힘든데 말이죠.”
“그럴 리가. 정치하는 놈들이 구린 데 없다면 그게 정상인가. 다른 부서도 아니고 상공부에서 말이야. 그 자리까지 올라간 데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야.”
“그러믄요?”
“아직 잡음이 없는 걸 보면 용의주도한 놈이야. 먹어도 탈 없는 돈만 먹었겠지.”
“그러면 어떡하나요?”
“일단은 더 찾아봐. 혼자서 상대하기 힘들면, 더 쎈 놈을 데려와야지.”
이런 놈과 상대하려면 결국 정공법으로 가야 한다.
힘 대 힘.
이익이라는 그물로 엮을 파트너를.
* * *
“사장님 나이스 샷!”
한양 컨트리 클럽. 오성그룹의 사장 이재철이 자주 찾는 곳.
늦은 오후, 홀은 카트와 자동차 등의 헤드라이트를 켜 페어웨이를 대낮처럼 밝혔다.
16번 홀을 돌 때쯤에 티샷을 치기 어려워지자 골프장 전체에 불을 밝힌 것이다.
공이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더니 페어웨이에 착지하자, 사장의 동행인인 최강유 프로가 박수를 치며 말했다.
“이거 못 이기겠는데요. 드라이브가 예술입니다. 이제 어지간한 프로는 명함도 못 내밀겠습니다.”
“농담은. 최 프로가 봐줘서지. 요사이 스트레스가 많았는데 속이 확 풀리는군.”
평소보다 공이 쭉쭉 나가서일까 기분이 꽤 개운해 보인다. 그 모습에 혓바닥을 놀리는 동행인이었다.
“그보다 언제까지 이런 구멍가게에서 노실 겁니까. 골프장 하나는 있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천하의 오성을 물려받으실 분께서 전용 골프장 하나 없어서야 가오가 살지 않잖습니까?
“하하.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러잖아도 아버님께서 안양에 봐 주신 땅이 있긴 한데 이번에 첫 삽을 떴다지. 아마 일본의 고베 300cc만큼이나 괜찮은 곳이 될 걸세.”
“오오. 그렇습니까? 개장하면 꼭 한 번 불러 주십시오.”
“하하. 자네를 첫 번째 손님으로 맞겠다 약속하지.”
이재철은 호언장담했다. 골프광인 아버지가 세울 안양 컨트리클럽은 부친 소유겠지만 어쨌든 나중엔 자기 것이 될 게 아니겠는가. 그렇게 화기애애한 대화를 나누던 둘 퍼팅 준비를 하는 사이. 카트 하나가 곡예를 하듯 달려오더니 웬 남자 하나가 내렸다.
“형님! 여기 계셨군요.”
“뭔 큰일이라고 여기까지 왔나?”
“형님 보통 일이 아닙니다. 아버지가 재희를 한국에 불러들였다지 뭡니까. 게다가 장인인 홍진욱을 회사인 새한매스컴의 이사로 앉혔답니다.”
도착한 것은 이재무였다. 꽤 급하게 달려왔는지 숨찬 기색이었지만 아무렇지도 않게 티샷 칠 준비를 마친 이재철이 페어웨이에 섰다.
“재희가? 난 또 뭐라고. 아버님께서 하고 싶다면 하시는 거지.”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형님. 이건 절대로 그냥 넘어가서는 안 되죠. 저희에 대한 견제입니다.”
“견제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이건 아버지께서 경영에 복귀하시려는 밑 작업 아니겠습니까? 더욱이 장인까지 경영에 참여시킨다는 건 재희 그놈한테 힘을 실어 주겠다는 의중 아니겠습니까?”
퍼팅을 넣을 준비를 한 이재무가 말을 끊었다.
“그건 과도한 해석이지. 그리고 아버지가 돌아오신다면 자식 된 도리에서 어찌 막겠나?”
“네……? 그게 무슨.”
“맡겨 둔 자리라는 거다.”
홀로 공이 빨려 들어가는 모습에 최 프로가 작게 환호했다. 짜증이 난 이재무가 눈빛을 주자 뜨끔한 최 프로가 얼른 입을 다물었다.
“자, 이제 할 말 다 했으면 라운드 방해 말고. 자넨 이제 내려가 봐.”
“형님!”
“나중에 집무실에서 이야기하자고.”
축객령이었다. 이재철이 아무렇지도 않게 다음 라운드로 향하는 모습에 이재무는 어이가 없었다. 자기는 소식을 듣자마자 허겁지겁 달려왔는데 저렇게 여유를 부리다니.
수심이 가득해진 이재무가 터벅터벅 돌아오는 길. 들려오는 목소리가 있었다.
“여어, 이 부사장님 아닌가?”
이마가 훤히 보이는 모습이 인상적인 남자가 사람 좋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사람은 다름 아닌 강철완 중령이었다.
“아니 강 중령님. 여기는 어떻게?”
“장군님들 모시고 라운딩 좀 했지. 근래 타수가 좀 늘었다면서?”
그새 머리가 더 벗겨졌지만 인상이 훤해 보이는 모습에 이재무는 상대가 승진한 일을 기억해 냈다.
“아, 수도 경비 사령부 제30대대장으로 영전하셨다면서요. 축하드립니다.”
“고맙네. 근데 왜 그렇게 얼굴이 상했나 자네는?”
“밤을 새워서, 별일 아닙니다.”
“별일 아니긴. 마침 나도 몸 풀고 퇴근하는 참일세. 오늘 한잔하는 거 어떤가?”
이재철과 막역지우이기도 한 강철완과 술을 돌리고 나자 술술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술잔을 돌리던 강철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서, 아버님께서 재희를 밀어주는 것 같아 이상하다?”
“예. 요사이 뭔가 심상치 않습니다. 굳이 동생을 본사에 데려다 놓는다는 건 뭔가 의도가 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재계에서도 아버님께서도 이제 슬슬 복권하셔야 하는 게 아닌가 말이 돌고 있는데. 그런데 형님은 저렇게 안일하시니 답답해요.”
사실 MSG 사업이 우그러지고 비료회사까지 날아간 오성그룹은 예전의 성세를 회복하지 못하고 있었다. 경영 능력을 의심받는 중에 저렇게 골프나 치고 돌아다니고 있으니 형에게 줄을 선 이재무 입장에서는 속 터질 일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자초지종을 들은 강철완은 빙그레 웃기만 했다.
“허허허.”
“아니, 뭐가 우습습니까?
“사람 순진하긴. 자네는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군. 자네 형님도 눈이 있고 귀가 있다 이 말이야. 당연히 껄끄럽지 않겠나. 알고도 모르는 척하는 것뿐이지. 아마 신경은 쓰고 있을 거네.”
“예? 그렇게 됩니까?”
“그렇지. 아버지가 하는 일에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건 껄끄러운 게 당연하지 않겠나. 이럴 때일수록 이인자의 역할이 중요한 거야.”
“이인자의 역할이요? 제가 뭘 해야 한다는 겁니까?”
“눈치가 빠르게 행동해야지…… 일인자는 손에 피를 묻히기 싫어한다면 누군가는. 궂은일을 도맡아야 하지 않겠나?”
은근한 재촉에 이재무는 얼굴을 굳혔다.
“설마 저보고 아버지께 반역이라도 하라는 겁니까?”
“나이 때문에 판단력이 흐려지셨다면 바로잡아 드리는 것도 자식 된 도리 아니겠나. 푹 쉬게 해 드리는 것도 나쁘지 않지.”
“어떻게 말입니까?”
“예를 들면, 청와대에 투서를 보낸다든지, 방법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지 않겠나?”
“농담이시죠?”
이재무가 되묻자 강철완이 크하하 웃으며 어깨를 토닥였다.
“당연히 농담이지. 자네가 너무 심각한 거 같아서 농을 해 봤을 뿐 별 뜻은 없다네. 하지만 기회라는 건 자주 오지 않을 걸세. 잘 생각하고 결정하게…….”
강철완과 헤어진 후, 이재무의 마음은 더 복잡해졌다.
사실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한 번 들은 말이 뇌리에 자꾸 맴돌았던 것이다.
‘투서……. 투서라.’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