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2화 가발 사업
“이건?”
뜻밖의 상자에 아이의 눈이 동그래졌다.
“옛다. 이건 선물이다. 아버지 갖다 드리렴.”
“이건 못 받아요.”
“어른이 주면 감사합니다. 하는 거다. 기특해서 주는 거야.”
“감사합니다.”
선물을 받은 아이는 해맑게 웃자, 아이의 순수함에 함께 있던 어른들도 절로 미소를 지었다. 마음이 가벼워진 강태준이 돌아서자 아이가 꾸벅 큰 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사장님! 이 빚은 나중에 커서 꼭 갚을게요!”
“오냐.”
멀리서 아이가 손을 흔드는 모습에 춘삼이가 흐뭇한 듯 중얼거렸다.
“비싼 거 아닙니까? 그거 시계?”
“뭐 돈이야 언제든지 벌면 되니까. 거 애가 똑부러졌네.”
“그러게요. 이쁘장한 게 뉘집 자식인지 몰라도 애 키울 맛 나겠군요.”
“그러게. 딸 하나 있어도 좋을 거 같아.”
왜인지 모르게 기러기 아빠가 된 기분에 강태준이 기분도 환기할 겸 주위를 둘러보았다.
흰 삼각모를 입은 여공들이 바가지에 담은 머리칼에 열심히 염색약을 바르고 있었다.
작업에 열중인 여공들을 둘러보며 하나하나 안부를 물었다.
“불편한 점은 없습니까.”
“괜찮아요. 사장님.”
“밥도 잘 챙겨 주고, 공장장님도 친절하시고, 참 좋으신 분들이세요.”
약품이 독한지, 복지는 어떤지 시시콜콜하게 챙겼다. 표정이나 몸 상태가 괜찮은지 세심히 살펴본 강태준은 나름 안심했다. 상태를 확인한 강태준이 새로 뽑은 공장장에게 덕담을 건넸다.
“관리 잘해 줘서 고마워요. 직원들이 다들 활기차네요.”
“아휴, 다 사장님 덕분이죠. 여기가 근로 조건이 좀 좋습니까. 경쟁률도 20 대 1이 넘어서 커트하느라 힘들었습니다.”
고민 끝에 부양할 형제자매가 많은 순서대로 뽑았다고 했다.
강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머지 명단도 잘 관리하고 있으십시오. 수출허가가 나서 규모가 커지면 또 뽑을 수도 있으니.”
“저…… 제품은 어떠셨습니까?”
“전 만족했습니다. 마감이 아주 좋더군요. 기존 유수 제품에 뒤지지 않습니다.”
그제야 안심한 듯한 공장장이 기쁜 듯이 흰 치아를 드러내며 웃었다.
“다행이네요. 다들 경력자들이라 그런지 이 정도는 기본으로 하더라고요. 눈치 안 줘도 잘합니다.”
“제가 의뢰드린 건 만들었습니까?”
“네네. 여기 앞부분에 얇은 피부 막을 덧댄 ‘신 스킨(thin skin) 가발’입니다.”
“흠…… 확실히 감쪽같군요.”
“네. 빛이 투과되는 재질이라 햇빛 아래서도 피부톤이 자연스럽게 표현되지요.”
강태준이 머리에 얹어 보니 약간의 이물감 정도는 있지만 가볍게 밀착되는 것이 착용감이 괜찮았다. 초박형이라 그런지 자연스러운 연출이 가능하다는 점이 장점이랄까.
’이거 광필이한테 하나 챙겨 줘야겠군.‘
요새 급속하게 앞머리가 쇠퇴 중이라 신경이 곤두선 광필이에게 꼭 필요한 물건이다. 역시, 비싼 돈을 주고 스카웃해 온 보람이 있었다.
“꽤 맘에 듭니다. 다만 출시 전에 실전에서 후기를 보고 고객의 소리를 듣는 편이 좋겠네요.”
“그러잖아도 착용감이 어떤지 설문 조사를 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미군부대에 심한 곱슬머리여서 머리 손질이 어려운 흑인들이 있으니 불러서 함 시험해 보지요.”
흑인들은 태생적으로 곱슬이 굉장히 심하기 때문에 머리를 짧게 자르고 다닌다. 하지만 패션템으로써의 역할도 만만찮았다. 수요로 따지면 흑인 여성, 백인 여성, 남성 순이었다.
“이왕 가발 외에 손재주 좋은 애들은 따로 뽑는 것도 좋겠습니다.”
“아니 또 생각이 있으십니까?”
“건강 팔찌나 비즈 같은 액세서리도 만들 생각입니다. 애들 완구나 스웨터도 좋을 거 같고요.”
모두 다 임금이 낮고 노동력이 풍부한 공업화 초기의 나라가 경쟁력을 보이는 제품이다
“흠……. 그렇게 되면 인원이 많이 필요하겠는데요.”
“일단 가발이 주력이지만 차차 늘려 갈 겁니다.”
그러자 그 말을 듣고 있던 공장장이 작심한 듯 말했다.
“저 비용 문제 관련해서 말인데, 정부에서 학습지원에 대해서 세제 지원 혜택이랑 소정의 보조금이 나온다고 합니다. 그래서 말인데 가능하다면, 자원하는 아이들에 한해서 야간 교육 혜택도 제공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교육이라……. 일하고 피곤할 텐데 과연 가능하겠습니까?”
“그 반대일걸요. 애들도 배우자는 열의는 누구 못지않습니다. 오히려 교육을 지원한다고 하면 다른 곳보다 더 좋은 인재들이 몰려들 겁니다. 오히려 체계적인 학습을 하는 것이 작업 능률이나 만족도도 훨씬 높았습니다.”
학습의 기회가 없었을 뿐. 사실 공장에 다니는 아이들이라고 공부 욕심이 없는 게 아니었다. 그런 애들한테 공부를 시킨다면 사회적으로도 선순환이 되지 않겠다는 취지였다.
“좋아요. 그럼 운영에 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한번 진행해 보세요.”
“예! 알겠습니다.”
공장장을 본 강태준이 중얼거렸다.
“잘 뽑았네. 일도 하고 공부도 한다니, 생각해 보면 참 열심히 사는 애들이야. 안 그래?”
“저도 겸허해지는군요. 근데 이렇게 이번 사업은 너무 빨리 확장하는 게 아닌지 좀 걱정되네요.”
“걱정 마. 이번 베트남전이 있잖아. 전쟁을 진행하려면 뭐가 제일로 필요한지 아나?”
“뭔가요?”
“바로 보급이지. 일단 전쟁은 돈으로 하는 거거든. 미국은 고작 베트남 하나를 노리고 싸우는 게 아니야. 그 뒤의 공산 세력을 견제하려는 거지. 그렇다면 북베트남을 지원하는 중국의 자금줄을 끊어야 하지 않겠나.”
“그래서 가발 사업이 전망이 좋을 거라는 말씀입니까?”
“가발만 아니라 수출품 전반에 대한 규제조치가 있겠지. 아마 조만간 중국산 원모로 만든 홍콩산, 일본산 가발에 대해 수입금지 조치가 취해질 거야. 그전에 일단 대충이라도 실적을 만들어 둬야 하지 않겠나?”
“아 그래서…….”
연신 감탄하는 춘삼이에 불쑥 나타난 점례가 고개를 까닥였다.
“역시 우리 강 사장님은 두뇌 회전이 비상하다니까. 머리카락은 계속 자라니 원료 걱정도 없고, 돈을 쓸어 담기만 하면 되겠네요. 역시 사업 수완이 대단해요.”
옆에 있던 점례가 엄지를 추켜세웠다.
“아니, 점례 니가 여기 왜 있어?”
“현장학습 겸 견학 나왔죠. 패션을 하려면 현장을 알아야지 않겠어요.”
“현장학습? 학교 공부는?”
“걍, 때려치려고요. 사람이 세상 공부만 해서 된다는 건 아니라는 걸 깨달았어요.”
“임마, 그게 뭔 말 같잖은 소리야. 공부도 다 때가 있는 거지.”
“그래. 공부해야지.”
“그럼 춘삼 오빠는요?”
말문이 막힌 춘삼이가 강태준을 바라보자 강태준이 한숨을 쉬었다.
“공장 다닌다고 하면 니 할아버지가 날 죽이려 들 거다.”
“그건 할배 희망 사항이고요. 저 대신 살아주는 건 아니잖아요. 지도 지 인생이 있는 거라고요. 걱정 마세요. 폐 안 끼치고 열심히 일할 테니.”
기가 찬 강태준이 한마디 하려고 하는 순간. 밖으로 나갔던 철민이가 안으로 들어왔다. 안 좋은 소식을 표정이 몹시 좋지 않았다.
“사장님. 공문이 도착했는데 수출허가가 거부되었답니다.”
“응? 가발 수출을 거절해? 상공부에서 원모 수출에 대해 긍정적인 답변을 받았다고 들었잖아?”
“그게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이유가 뭔지 물어봤지만 딱히 속 시원한 대답을 해 주지 않아서…….”
수소문을 해 보니, 상공부에서 태클이 들어간 게 원인이라고. 사정을 전해 들은 공장장은 몹시 당황해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아니 이를 어쩝니까? 원료랑 견적까지 다 뽑아 놨는데, 이렇게 수출길이 제한되어 버리면?”
“침착해. 완전히 끝난 건 아니니. 저쪽에서 원하는 게 있지 않겠나. 일단 상공회의소 쪽에 연결해 보도록 해. 책임자가 누구인지 알아야 대책을 찾을 게 아닌가.”
“그냥 만나 줄까요?”
“그렇게 만들어야지. 이원석 대표님께 연락을 드리는 게 좋겠어.”
느낌상 위쪽에서 압력이 내려온 것이 분명하다. 예상대로 수출허가에 제약을 강한 상대는 상공부 쪽. 사정을 알게 된 강태준은 이원석을 통해 상공부 장관과의 접선을 수소문했다.
여당에 합류한 이원석은 원내 총무를 하는 등 예결위에서 꽤 굵직한 직책을 맡고 있었기에 무시하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미적지근하게 뜸을 들이긴 했지만 결국 어렵사리 만남이 성사되었다. 만남의 장소로 예정된 곳은 강태준이 섭외한 삼청동 쪽의 어느 프랑스식 레스토랑이었다. 최 장관은 못 이긴 척 자리에 나왔다.
“바쁘신 와중에 자리를 마련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성 장관님 그런데 옆에 분은?”
“산업은행장인 한명성이요. 아무래도 첫 대면에 혼자 보긴 뭣해서 내가 불렀어요. 혹시 내가 실례한 건 아니겠죠.”
“그럴 리가요. 그럼 한 명 더 준비하라고 일러두겠습니다.”
한명성이 능글맞은 얼굴로 악수를 청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우리 강 사장님이 유능하신 분이라고 전해 들었습니다.”
“과찬의 말씀을, 자 앉으시죠.”
처음에는 양파 수프와 프랑스식 육회인 타르타르가 나왔고 부르고뉴식 달팽이 요리가 준비되었다.
‘이게 손님 대우인가?’
기대하고 왔더니 그냥 가정식에 실망하려는 순간,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멧새 요리가 나타났다. 모양을 본 최 장관이 눈을 크게 떴다.
“이건 오르톨랑 아인가?”
“오르톨랑은 아니지만 비슷하죠. 새고기랑 마지팬을 섞어 비슷하게 구현한 겁니다.”
오트톨랑은 멧새를 잡아 가둔 뒤 1달 동안 수수나 포도 무화과 등을 먹여서 토실토실하게 살을 찌운 다음 브랜디에 빠뜨려 먹는 요리다. 그가 프랑스 영사로 나갔을 때 꽤 즐겨 먹었던 요리였던 터, 금세 표정이 편한 최 장관. 하지만 한명성 은행장은 형체가 그대로 남아 있는 모습에 약간 꺼림칙한 모습이었다.
“이게 어떻게 먹는 거요?”
“뼈는 없으니 그냥 통째로 드셔도 됩니다.”
깃털이 죄다 뽑힌 채 구워진 것이 찜찜했지만 여기서 빼기도 뭣한 노릇.
그러나 고기를 입안에 넣는 순간, 은행장의 표정은 곧바로 놀라움으로 돌변했다…… 고기의 육즙과 함께 브랜디의 달콤함. 은은한 무화과 향이 나는 듯한 육고기의 조합은 그야말로 환상적. 맛을 본 최 장관 또한 깊이 감명을 받은 표정이었다.
“오오, 이건. 옛날 그 맛이군. 이거 어떻게 한 건가?”
“식감도 비슷하게 만들려고 요리사가 많이 노력했습니다. 맘에 드십니까?”
“맘에 들고말고. 딱 내 취향이군.”
와인으로 입가심을 한 그가 꽤 만족스러운 듯. 냅킨으로 입을 닦았다.
“식사가 아주 정갈하구먼. 듣자 하니 우리 강 사장이 사업을 여러 가지 한다지요?”
“하는 사업마다 성공한다고 금융계에서도 꽤 주가가 높다고 하더군요.”
“과찬이십니다.”
“참으로 장한 일이에요. 경제가 발전하려면 우리 강 사장 같은 사업가가 많아질 필요가 있지요.”
덕담이 오고 간 후 강태준이 본론을 꺼냈다.
“그보다 우리 강 사장이 뵙자고 한 연유가 뭐지요?”
“이번 가발 사업과 관련해서 허가 신청을 냈습니다. 26개 기업 중 12개사가 수출업체로 선정되었는데 저희가 탈락했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뭔가 심사에 오해가 있지 않았다 해서 말입니다.”
“흐음. 사전에 선정 기준상 문제는 없습니다. 기업의 발전 가능성이라든지 그리고 그 기업의 오너의 의지라던지, 이런 부분을 종합적으로 평가한 것이죠.”
“가발 산업은 노동 집약 산업으로 여성 노동자들의 저임금과 노동력을 이용한 산업입니다. 너무 많은 업자들이 참여하면 과다 경쟁이 되지 않겠습니까. 경쟁이 치열해질수록 노동자들 처우가 악화될 테니 저희로서는 불가피한 선택이지요.”
“그렇다면 좀 의문이군요. 저 말고 한국무역관 부관장 출신인 장호경 씨도 이번 심사에 통과한 걸로 아는데요. 아뢰옵기 송구하지만 애국심이나 국가 기여도는 저도 뒤지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강태준의 지적에 이제껏 미소를 짓던 장관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