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양재벌 강태준-221화 (221/361)

221화 개량종 배추

강원도 영월, 산간지역.

푸른 하늘 아래 청록색 물결이 굽이친다. 배추들이 무럭무럭 자라는 모습을 보던 강태준이 뿌듯한 어조로 말했다.

“이거 돈다발이 쑥쑥 자라는군.”

“말로만 들었지 어마어마하군요.”

회충 문제가 부각되면서 그동안 간과해 왔던 비료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이 원인이었다. 인분 비료가 기생충 감염의 주원인으로 지적되면서 화학비료로 키운 청정 채소 판매량이 급속히 늘어난 것이다.

“외삼촌!”

“간만이구나. 태준아.”

“이게 죄다 배추밭입니까?”

“그래. 이번에 새로 구매한 부지야.”

“근데 부지가 생각보다 넓은데요. 한 만 평만 산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게 이쪽까지 떠넘기지 뭐냐. 원래 대마가 자라던 곳인데 이번 메사돈 파동 때문에 마약 단속이 강화되는 바람에 덕분에 헐값에 나왔지 뭐냐. 덕분에 거저로 얻었지.”

“간이 엄청나게 큰 놈들이죠. 세상에 마약을 진통제에 섞어 팔다니.”

“세상에 사기꾼들이 좀 많나. 돈에 욕심이 생기면 선 넘는 놈들이 있기 마련이지.”

메사돈 사건은 제약회사에서 주사제에 합성 마약인 메타돈을 섞어서 진통제로 속여 팔아먹었던 사건이다. 주무 부처에서도 한동안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딱히 잡을 방법이 없어서 골머리를 썩던 중, 소속 약무사 하나가 자비로 메타돈 검출법을 개발한 덕에 덜미를 잡혔던 것이다.

더 큰 문제는 그렇게 잡힌 회사가 무려 16개사, 23개 의약품에 달했다는 것 덕분에 마약 단속이 강화되면서 고산지 대마밭에까지 불똥이 튄 것이다.

“암튼 저희 입장에서는 나쁠 것 없지요. 근데 보아하니 무도 키우나 보네요.”

“하하. 그렇게 보이나 무처럼 생겼지만 토종배추야. 맨날 개량종만 봐서 모르나 보군.”

강태준이 무잎처럼 생긴 녀석을 보며 의심쩍은 듯 되물었다.

“이게 배추라고요? 온통 푸른색인데요.”

“하하, 원래 그래. 함 먹어 보겠나?”

떼어 낸 포기에서 이파리를 하나 떼어 건넸다. 잎줄기가 질긴 듯하지만, 아삭한 게 식감이 좋고. 씹을수록 깊은 맛이 느껴졌다.

“어때?”

“매콤한 게 알싸하네요. 갓이랑 비슷한 맛이 납니다.”

“그래. 많이 다르지? 우리 땅의 사람들이 정작 우리 배추의 참맛을 모르고 사는 사람들이 많아. 자네 생각은 어떤가?”

“음……. 수분 함량이 적어서 오래 보관해도, 무르지 않을 거 같군요.”

“정확하이. 생으로 먹기도 좋고 배춧국에 넣어도 시원한 맛이 일품이지. 게다가 토종배추 씨는 크기가 작아서 반말 정도만 있어도 수백만 평을 심을 수 있어. 꽃이 이뻐서 관상용으로 보기 좋거든. 아마 양만 확보하면 꽃축제도 할 수 있을 거야.”

“배추꽃 축제라 묘한데요. 이상하게 구미가 당기는군요.”

그렇게 토종의 우수성에 대해 열변을 토하는 동안, 불쑥 우순해 박사가 나타났다.

“그게 장점만 있는 게 아닐 텐데요. 토종은 개량종에 비해 속은 실하지 않습니다…… 노란 속잎이 없고, 전부 푸른 잎 일색이지요.”

“그게 뭐 어때서 원래 채소는 파란 거야.”

“부드럽지 않잖아요. 게다가 냉해를 입을 때가 문제죠. 호배추는 둥글게 겹으로 감싼 형태니 냉해를 입어도 겉잎을 떼어 내면 그만이지만 토종은 결구가 아니라서 통으로 버려야 하지요.”

“하지만 개량종은 그만한 맛이 없지.”

“그건 취향 차이 아니겠습니까? 상업성도 생각해야죠. 호배추가 토종배추보다 감칠맛이나 씹는 맛이 떨어지긴 하지만 더 부드럽고 시원하죠. 더욱이 수확량이 좋지 않습니까?”

“물러 터져서 버리는 걸 어따 쓰라고? 비료 없이는 못 자라는 놈 아닌가. 이왕이면 튼튼한 놈이 낫지.”

“병충해에는 개량종이 더 강한데요? 아직까지는 호배추보다 토종이 인기이긴 하지만 추후에는 반드시 개량종이 인기를 얻을 거라고 확신합니다.”

“허어 가소롭구먼. 강 사장은 어떻게 생각하나?”

몹시 기대하는 눈빛에 양쪽이 강태준을 쳐다보았다.

뜨거운 시선에 강태준이 난처한 듯 웃었다.

“자자, 어느 쪽도 수요가 있다면 양쪽을 모두 팔면 좋지 않겠습니까?”

그 말에 외삼촌이 김 샜다는 표정으로 투덜거렸다.

“거참, 황희 정승도 아니고. 그보다 복만이는? 또 안 온다냐?”

“거제도가 좋은가 봅니다. 그래도 요새는 꽤 성실해졌습니다.”

“썩을 놈. 오기 싫은 거겠지. 결혼도 해야 할 놈이 통 여자 하나 안 만나니 원. 고자 새끼도 아니고. 어디 선 자리 있으면 하나 알아봐 주게. 그놈도 가정을 꾸려야 할 게 아닌가.”

“하하. 글쎄요. 복만이가 그렇게 재주 없지는 않은 거 같은데 제 앞가림은 잘할 겁니다.”

충격적이게도 거제에 내려간 복만이는 정말로 백안의 의사를 꼬시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

‘세상에 제 눈에 안경이긴 하지만……. 어떻게 그럴 수가 있나?’

곰돌이 푸 같이 푸근해서 좋다나. 암튼 귀엽다고 하니 눈이 단단히 삔 것이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외삼촌에게 푸른 눈의 손자를 볼지도 모르겠다고 하면?

뒷감당할 자신이 없었던 강태준으로서는 얼버무릴 수밖에 없었다.

“우 박사님. 양쪽 장점을 합치는 방법은 없나요?”

“사실 그 때문에 교잡종도 시험 재배 중입니다. 원예 1호가 없었다면 아예 엄두도 못 냈겠죠. 읍내 훈련원과 그 수처에 호배추 종자 채종장을 설치하고 시험 취종하고 있습니다.”

장우춘 박사는 보통 씨 없는 수박 정도로만 알고 있는 사람이 많지만, 품종개량의 선구자였다. 타키이 종묘 회사에 다녔던 장우춘은 감자, 벼, 배추, 감귤 무 등을 외국 것을 능가하는 엄청난 품질로 개량해냈다.

기생충 감염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한국에서 처음으로 청정 재배를 시도한 것도 그였다.

“거인의 어깨 위에 서 있는 셈이군요.”

“다행히 구억 배추라고 개량종보다 길이도 길고 병충해와 기후변화에도 강해 농약이나 비료 없이 자연 재배가 가능한 품종이 있답니다. 그걸 기본으로 삼아서 개량에 나서 볼까 합니다.”

한국에서 새로운 품종의 배추를 생산한다면 그것도 몹시 뜻깊은 일일 것이다.

“그럼 비료 개발은 어떤가?”

“일단 토지 개량제 개발은 순조롭게 되고 있습니다. 아미노산 발효 부산물 비료가 효과가 좋더군요. 일단 유기질 비료 관련해서는 보조금이 상당히 나오는 터라. 일단 최대한 빨리 증산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MSG를 만드는 데 쓰였던 아미노산 기술이 꽤 도움이 되었다.

특히 유기질 비료는 어비가 주요 성분으로 쓰였기 때문이다. 강태준이 노기철에게 물었다.

“얼마나 증산하려고?”

“일단은 한해 300톤 정도는 팔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실 마음 같아서는 완효성 비료를 개발하고 싶은데 사회 여건상 아직 만들기가 어려우니까요.”

“대두박도 꽤 수요가 늘겠구먼. 그럼. 그걸 활용할 방법도 생각해 봐야겠는데? 기름 짜고 남은 건 가축 사료로 쓰면 그만이지 않을까?”

“예. 일단은. 근데 아무래도 농민들도 교육을 시켜야 할 거 같아요. 가시적인 효과만 나는 물건을 선호해서리. 인산이나 가리질 성분을 넣었더니 잡비라고 안 산다지 뭡니까?”

“허어. 그랬나?”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어이가 없더라고요. 우리나라 토양은 사질 토질이 많고 점토 함량이 낮은 편 아닙니까. 계속 화학비료를 쏟아부어서 산성화가 심한 곳이 한두 곳이 아닙니다.”

“그건 정부에서 석회를 공급한다고 했잖나?”

“그게 얼마나 무식하게 때려 붓는지 산성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서 말이죠. 담당 사무관이 와서 창고를 확인했는데 쓰라는 물량도 다 안 채워서 포댓자루로 쌓여 있더군요. 게다가 이런 걸 건설업체에서 싼값에 빼 가는 바람에 말이 많답니다.”

어디서나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다 보니 이제는 딱히 새삼스럽지 않았다.

“허허. 골치로구먼 그거.”

“아무튼 저희도 이참에 거하게 AID 자금이나 들여왔으면 좋겠습니다. 우순해 박사도 연구비 부족하다고 매일같이 성화입니다.”

“뭐 그거 확보는 노력해 보겠네. 심경 다비 기술은 제대로 개발 중이지?”

“예. 아직은 순조롭습니다.”

“일단 성공하는 대로 바로 투입해 봐. 호남 쪽에 논 사 둔 게 있으니까. 그쪽에서 시작해 보고. 이참에 트랙터와 경운기도 추가로 구매해 봐.”

“경운기를요?”

“아무래도 근래 정부에서 농촌 달래기에 나서는 걸 보니 이쪽 관련해서도 전격적으로 투자가 이뤄질 거 같아서 그래. 농민들 빌려주고. 비용은 정부에서 타 먹으면 되지 않나. 이참에 우리 비료도 홍보하고 말이야.”

“호오. 그것도 나쁘지 않겠군요.”

“농업이란 게 원래 사이즈가 커야 되는 거 아니겠나. 우리도 카길 같은 기업이 되지 못할 거 없지.”

일차 산업이라고 경시하는 부분이 많지만 사실 농업만큼 첨단의 선두에 달리는 사업도 별로 없다. 특히 종자 관련 사업의 경우에는 몇 개 업체가 시장을 독식하고 있을 정도로, 폐쇄성이 짙으면서도 수익도 어마 무시한 사업이었다.

강태준이 투자하는 것도 그 미래를 위해서였다.

‘식품 사업을 하려면 생선만 아니라 전반적인 재료 품질이 좋아야지.’

일단 재료의 퀄리티가 좋아야 맛있는 음식이 나오지 않겠는가.

강태준으로서는 추후에 식품 사업을 더 다변화하면서 점점 파생되는 상품을 개발해 나갈 참이었다. 그러던 중 촉각을 곤두세울 소식이 하나 전해졌다.

상공회의소 쪽에서 가발 사업과 관련해 수출 규제가 풀린 것이다.

총대를 멘 것은 가발업계의 선두주자인 김석두였는데 정부와 척을 질 것을 작심하고 찾아가서는 담판을 지어낸 것이다.

“그보다 상공회의소에서의 면담이 성공적이라고 하니 저희도 이제 베트남에 진출할 수 있겠군요.”

“그래. 일단 작은 것부터 시작해야지. 원래 돈이란 건 그런 데서 나오는 거야.”

1964년 중국이 핵실험을 강행하자 미국은 이에 대한 제재로 중국산 제품 및 원료의 수입을 금지했기 때문. 당연히 강태준은 한국산 가발이 유망할 것을 감지하고 발 빠르게 왕십리에 천경물산 출신 종업원 50명을 스카웃해 소규모 가발 공장을 차렸고 이름을 따서 티제이(TJ) 무역이라 지었다.

그렇게 바닷가에 연건평 1980㎡(600평)짜리 4층 가건물이 들어섰다.

가발 공장 앞에는 길게 늘어선 줄이 보이는 것이 다들 머리를 팔러 온 사람들인가.

보아하니 주로 여자들이 많았는데 참빗에 고이 간직해 온 할머니도 있었고, 머리카락을 팔아 반찬값에 보태려는 사람들도 있었다.

강태준이 주위를 둘러보던 중 마침 눈에 띄는 아이가 있었다.

국민학교 일학년 정도 되었을까. 아주 귀엽게 생긴 여자아이였다. 눈에 띄게 키가 작은 아이를 본 강태준이 은근슬쩍 장난기가 솟았다.

“넌 왜 왔니?”

“아빠 선물 살려고요. 내일 생신이시거든요.”

“기특하구나. 근데 어떡하지? 팔기에는 너무 머리칼이 짧은 거 같은데?”

“앗 그런가요? 그럼 어떡하지.”

안절부절못하는 아이가 울상을 짓는 모습에 강태준은 나름 곤란해졌다.

생각해 보니 명절 때 부품업체 사장들한테 돌릴 선물이 남았나?

강태준이 눈짓하자 눈치 빠른 춘삼이가 차 트렁크에서 선물함을 하나 가져왔다.

-다음 화에 계속-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