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9화 구충제 사업
“우욱…….”
“오 마이 갓. 이게 사람 몸에서 나온 거라고요.”
“1kg 정도 나왔습니다만 큰일 날 뻔했어요.”
회충이라니. 어이가 없구만.
“이런 미친 애미나이를 봤나……”
누워 있는 녀석을 툭툭 치며 말했다.
“야 깨 봐라. 자는 척하는 거 다 알고 있으니까. 깨끗한 척은 혼자 다 하면서 아주 쌤통이다. 내가 동네방네 다 소문내 줄게. 거, 동네 사람들 들어 보세요. 덕배 야가……”
“아 누나 그건 좀!”
“뭐 하시는 거예요. 병실에서!”
간호사에게 불려가 한바탕 훈계를 듣고 난 후에 쫓겨났다. 강태준이 다시 갑슨에 전화해 상담했다.
“거, 큰일 날 뻔했군요. 늦지 않아서.”
“이런 게 종종 많이 일어납니까?”
“심심찮게 일어나는 일이죠. 작년인가도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전주에서 장폐쇄증으로 내원한 어린 여자아이를 수술하던 중 회충 수백 마리가 나왔던 일이 있지요.”
“아 그거 저도 기억합니다. 그런데도 별로 변화가 없었단 말입니까?”
20kg짜리 여아의 몸속에서 5kg이나 되는 회충이 나온 사건으로 전 국민에게 충격을 안겨 주었던 사건이었다. 그 말에 갑슨이 대답했다.
“그것도 사실 묻힐 뻔했습니다. 한국 외원 단체 협의회(Korea Association of Voluntary Agencies, KAVA)에서 기생충 박멸 협의회를 결성해 여론을 환기시켰기 때문입니다.”
“이거 정말 창피한 노릇이군요. 개선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선생님 말씀대로, 전 국민의 80프로 이상이 기생충 감염자라는 건 좀 심하죠.”
“그러니까요. 한국이 발전하려면 이 문제는 꼭 짚고 넘어가야 한다 생각합니다.”
사업성뿐만 아니라 국민 보건의료의 측면에서도 당위성이 있는 일이다. 하지만 구충제를 사업화하기에는 너무 장르가 다른 점이 걸림돌일 수밖에 없다.
더욱이 당시 한국의 제약회사들은 대부분은 해외 원료 물질을 수입하여 조합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었기에 쓸 만한 업체를 찾기가 더욱이 까다로웠다.
그렇게 막막하던 때 마침 덕배의 주치의를 맡은 의사가 소식을 듣고는 귀띔을 해 주었다.
“그렇다면 천풍제약 쪽을 찾아가 보시죠. 그쪽이 구충제를 회사의 주력으로 삼고 있으니까요.”
“그런 회사가 있습니까?”
“예. 최근에 설립한 제약사라 영세하긴 하지만 이쪽에서는 나름 인지도 있는 회사입니다. 자체 합성 원료를 쓰거든요. 그 회사 다니는 지인이 있어서 확실합니다.”
“이런 귀한 정보를 감사합니다.”
“감사하면 나중에 혹 좋은 약을 얻게 되면 저희 병원에 우선적으로 공급해 주십쇼. 허허. 서로 돕고 사는 일 아니겠습니까?”
미팅을 위해 별다른 노력을 할 필요는 없었다. 알고 보니 설립자인 장금용은 한국 대학교 약대 출신으로 노기철과도 잘 아는 사이였다.
장금용과 노기철은 제품 개발 전에 기생충 학교실이나 다른 유기화학자들과 인연을 맺는 와중에 서로 친분이 생겼던 것이다.
“이거 노 선생한테 이야기만 듣다가 이렇게 뵙는군요. 구충제에 관심이 많으시다고요.”
“예 국민 보건 건강상 중요한 문제 아닙니까. 요새 큰 사건이 있기도 했고요. 그래서 저도 투자해 보고자 합니다.”
강태준은 투자 제안서를 내놓았다. 한참을 살펴본 그가 고개를 저었다.
“투자라……. 저도 말씀을 고맙지만 솔직히 저희 회사는 이 정도 물량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어째선지 여쭈어도 될까요?”
“일단 원재료 문제입니다. 피르비늄 파모에이트 합성이 그렇게 쉬운 문제가 아니라서요.”
청풍에서 만든 제칼은 필비늄 파모에이트를 합성해 만든 약인데, 일본의 뽀킬(ポキ?ル)을 모델로 만들었다고 했다.
“그렇다면 해인초나 산토닌 같은 물건은 어떻습니까?”
“전통적인 방법은 그렇죠. 하지만 해인초는 일단 약효가 너무 약한 데다 별 도움이 안 돼요. 산토닌이 해인초보다는 효과가 좋긴 하지만 문제는 원료 수급입니다.”
“냉전 때문에 동구권에서 원료 수출이 중단되어 버렸거든요. 게다가 산토닌은 회충을 마비시키는 기능만 할 뿐이지 배출하기 위해 하제를 별도로 복용해야 해요. 게다가 영유아에게 치명적인 독성이 있어 사용에 제약이 있습니다.”
“그건 좀 심각하군요. 독성을 다스릴 방법은 없습니까.”
“카이닌산을 섞어 개선한 제품이 출시되긴 했지만 비용이 워낙 비싸서 별 의미가 없습니다. 로얄티를 지불하면서 만들 수는 없으니까요. 물량도 제한이 있고요.”
심지어 약품의 품질이 고르지 못해 산토닌 가운데 1/5이 불량품으로 판정될 정도였다고 하니 그 심각성을 알 수 있었다.
“대안은 없겠습니까?”
“알코파가 있기는 하지만 그건 전량 수입이라 그 외에 대안이라고 하면 피페라진(Piperazine)이 있긴 합니다. 회충뿐 아니라 요충에도 효과를 보이는 물건인데 손쉽게 합성할 수 있고, 인체 독성이 낮아 안전한 집단 투약이 가능하죠.”
고농도 광범위 구충제로 모든 장내 선충에 효과가 우수한 물건이라는 것이다.
“탁월한 효과에 제조 단가가 매우 저렴하거든요. 확실히 과립형으로 만들면 투여하기가 편리하지요.”
“그렇다면 그걸 수입해서 합성하면 되지 않습니까?”
“하하. 그렇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정부에서 수입을 제한하고 있거든요.”
“수입을 제한을 둔다고요? 어째서?”
“일단 정부에서 다른 기간 사업에 투자하기 위해서 외화 유출 제한하고 있어서 말입니다. 저희도 몇 번 뚫어보려고 했지만 제약용으로 수입하는 건 거의 불가능했습니다.”
원료가 마약이나 부정의약품에 사용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통관 과정상 제한이 심했다고 했다. 통관에 오래 묶이게 되면 약품이 변질될 확률이 높아지기 때문에 불가능하다고.
“그렇다면 제가 한번 해결해 보지요.”
“그쪽 담당자가 워낙에 단무지라서. 쉽지 않을 겁니다.”
어찌 되었든 강태준 입장에서는 밑져야 본전 아닌가.
복만이를 보내 통관에 대해 문의했지만 전혀 통하지 않았다.
“또 안 된다나?”
“예. 쇠귀에 경 읽기입니다. 무조건 원론적인 말만 되풀이하는데 참. 거의 이건 수입하지 말라는 수준인데요? 아예 씨알도 안 먹힙니다.”
“뭐라도 찔러보지 그랬어? 솔직히 갸들 박봉인데 깨끗한 놈들만 있는 건 아니잖냐?”
“그게 절대 안 된답니다. 자초지종 들어 보니까 정권 바꿨을 때 수입처에서 뭔 일이 있었나 보더라고요. 윗대가리들이 마약 밀매 땜시 물갈이되고 군기가 바짝 들어서요. 아무래도 당분간은 얄짤없어 보입니다.”
“허어, 겁을 어지간히 먹었나 보네.”
“너무 실망하지 마십쇼. 돈 벌 아이템이 그거 한가지입니까. 다른 상품도 많은데 굳이 구충제에 연연할 필요 없지 않겠습니까?”
노기철이 위로의 말을 건넸지만 강태준은 미련이 남았다.
그러던 중 어디선가 솔솔 냄새가 풍겼다.
복만이가 들어오더니 푸진 냄비를 하나 들고 온 것이다.
“뭐야 이건?”
“성질나는데 걍 야식이나 먹자고요. 돌아다닌다고 밥도 안 드시지 않았습니까?”
“그래요. 먹고 합시다 사장님. 먹다 보면 혹 좋은 생각이 날지도 모르잖습니까?”
양은냄비 한가득 끓여 온 라면에서 닭 육수 냄새가 풍겼다.
소고기를 탈탈 털어 넣어서 끓인 호화 라면에 강태준도 마지못해 젓가락을 들었다.
‘잠깐만, 라면도 솔직히 처음엔 공업용 우지를 수입하지 않았나?‘
문득 그렇다면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해답이 있을지 모른다.
“노 이사 혹 다른 곳에 피페라진이 쓰이는 제품이 있는지 알아볼 수 있겠나?”
“예, 충분히 가능은 합니다. 그런데 왜.”
“한번 알아보게. 그게 단가가 그렇게 저렴한 데는 분명히 이유가 있을 거 아닌가? 약재 외에 범용적으로 쓰이는 물건이기 때문인지도 몰라.”
알아보니 강태준의 생각은 바로 적중했다.
“플라스틱, 수지, 살충제, 브레이크액 등에도 사용된다는 군요.”
“그래 바로 그거야!”
“정부에서 약제 수입을 막는다면 브레이크액에 쓴다고 하면서 수입하면 되잖은가?”
“아 그렇게 공업용으로 쓴다면 통관절차도 단순화되겠는걸요.”
“하지만. 나중에 걸리면…….”
“메탄올을 에탄올에 섞는 것도 아닌데. 무슨 문제야. 공업용이랑 의약용이랑 품질상 순도에서 차이라도 있다던가?”
“그건 아니지요.”
“그렇다면 갸들이 절대 조사 나올 리가 없지. 제약 원료는 영업비밀이니, 함부로 들춰 보기도 어려운 부분 아닌가. 뭣하면 영장 떼오라고 하면 돼.”
나중에 문제 된다면 값이 오를 때를 대비해 미리 창고에 쌓아 뒀다고 둘러대면 그만이지 않나. 솔직히 제품 함량이 얼만지 어떻게 알겠는가.
제품은 청풍제약에서 만들기로 했다. 증산에 들어가기에 앞서 몇 번의 실험을 거친 구충제는 손쉽게 제조하는 데 성공했지만 문제가 하나 있었다.
“그런데 좀 향이 그렇네. 먹을 때 화학 약품 냄새가 너무 나는데, 이거 그냥 먹기에는 메스껍지 않나?”
“그렇긴 하죠. 약재 자체가 애초에 합성물이니 좀 그렇긴 합니다.”
코팅 기술의 문제였는지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입안에 남는 잔여감이 거북한 것이 많이 아쉽다는 평이였다. 약효에는 문제가 없다고 했지만 강태준이 생각하기에도 복용에 거부감을 느끼기엔 충분했다. 그말에 강태준이 손가락을 튕겼다.
“그렇다면 복용 편의 증진을 위해 겉에 캐러멜 코팅을 하는 게 어떤가?”
“캐러멜이라고요?”
“그래, 옛날에 가루약 먹다 싫다고 하면 달달한 사탕을 같이 주지 않았나. 겉에 달달한 코팅을 입히면 애들도 잘 먹을 수 있지 않을까 싶은데. 약효에 문제가 없다면 이왕이면 맛있는 게 낫지 않나.”
“호오. 그럴까요?”
어차피 남아도는 게 설탕이니만큼 카라멜 합성이야 쉬운 일이다.
광범위 구충제가 출현하자 기생충 협회를 비롯한 의료계도 환영했다.
허나 구충제가 좋은 평을 얻은 것에 비하여 판매량은 좀처럼 늘지 않았다.
“배가 아픈데 소화제나 줄 것이지, 와 비싼 약을 처먹으라 하노.”
“의사 놈들이 돈에 눈이 멀어서 그라지. 회충 그까이 꺼 누구나 있는 거 아닌가.”
“하모, 사람이 말을 하는 것도 회가 있기 때문이여. 회충을 전혀 없애면 죽는 거제.”
당시 사람들은 당치 않은 편견이 많았다. 위장 문제로 병원에 오면 오히려 기생충 약을 권하는 의사를 욕할 정도로 기생충을 중한 문제로 인식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50년대 주로 쓰이던 테트라클로로에틸렌(Tetrachloroethylene)도 사태를 악화시킨 주범 중 하나였다. 당시엔 많이 쓰던 약이지만 독성이 있어 환자가 치료를 견디지 못하고 죽는 경우가 종종 있었으니까.
거기에 사망한 사람의 신체에서 다수의 회충이 빠져나오는 꼴을 본 일부 사람들은 회충이 빠져나오면 죽는다고 오해해 약 먹는 걸 꺼리기도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강태준은 뚝심 있게 밀어붙였다.
“더, 더 찍어 내세요. 일단 많이 찍어 내고 나중에 생각합시다.”
“저, 사장님. 재고가 창고 가득한데 이래도 되겠습니까. 아무리 효과적인 약이라지만 그래도 유통기한이 있어서. 이렇게 대책 없이 물량을 찍으면 처리가 곤란합니다.”
“그거야 나중에서라도 어떻게든 처리할 수 있어요. 수요가 없으면 만들면 됩니다. 문제가 생기면 제가 다 떠안을 테니 걱정 마세요. 계약서에도 그렇게 적지 않았습니까.”
“뭐 그렇다면 상관없지만…….”
“일단 제조에만 전념해 주십시오.”
청풍제약에서는 강태준의 투자를 받아들인 설비를 증설하는 와중에도 이렇게 급속도로 규모를 확장하는 것을 못내 걱정스러워했지만, 강태준은 확신이 있었다.
‘기생충 문제는 정부도 인지하고 있는 사항이다. 그렇다면 장작만 지피면 돼.’
늦든 빠르든 간에 전 국민을 상대로 한 보건사업이 시행될 것은 확연한 만큼 쐐기를 박아 주면 될 일 아니겠는가.
강태준의 예상이 들어맞은 것은 그로부터 얼마 되지 않은 일이었다.
사회란에 주목할 만한 기사가 실렸던 것이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