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7화 합작회사 설립
일본 중앙 자공이 품질 간섭이 까다롭다는 점은 정평이 나 있었기에 강태준도 나름 각오한 부분이 있었지만 뜻밖에도 우에노 사장은 거기서 이렇게 선언했다.
“뭐, 우리의 의결권 전체는 강태준 사장에게 위임하겠소이다.”
“저에게 말입니까?”
“왜 싫소? 내 볼 때 쓸데없이 선장이 두 명이여 봐야 일이 제대로 굴러가지 않거든. 싫으면 무르는 것도 좋고.”
“아닙니다. 신뢰를 주신다면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품질만 보장되면야 나는 만족하네. 그렇다고 방심하지 마시게. 빡세게 굴릴 테니까. 품질이 맞지 않으면 무조건 아웃이라고.”
우에노는 계약했으니 식사나 하자는 말에 밥 먹을 시간이 없다며 사라졌다. 그 말에 강상구가 어이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말이랑 행동이랑 뭔가 다르구먼. 저 양반.”
“뭐랄까. 말은 툴툴대는데 은근 쿨하다고 해야 되나?”
긴장이 풀린 박재우가 웃으면서 말했다.
“그런 면이 좀 있으시죠. 말은 저렇게 하시지만 한 번 상대를 인정하면 저만한 분도 없어요. 사실 저 양반이 저렇게 말하는 건 최고의 찬사입니다.”
“뭐, 츤데레군요.”
“네?”
“아닙니다. 그럼 고주파 열 처리기부터 가져가도록 하죠.”
합작 직후 강태준은 곧장 고주파 열처리기를 수입했다. 설비 덕에 볼 조인트의 국산화가 가능해지면서 부품업계에서는 또다시 지각변동이 일었다.
백경에서 새로 이너 샤프트를 출시하면서 가격 단가를 확 떨어뜨린 것이다. 거기에 하이로드 엔드 같은 신규 부품을 출시하면서 부품 시장을 잠식하기 시작했다.
중앙 자공의 기술력과 노하우가 더해지면서 시너지 효과가 나자 부품업체들도 다시 백경 기계 공업사로 찾기 시작했다.
물론 그 타격은 고스란히 신나라자동차로 돌아왔다.
* * *
“이번 분기 매출이 50% 감소했습니다. 카발에 비해서 무려 30%나 매출 차이가 납니다.”
분노를 참지 못한 남형욱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런 미친. 카발이 망한대며? 망하긴 뭘 망해. 이 빌어먹을 자식아. 이제 어쩔 거야?”
“좀만 기다려 주십시오. 제가 다 해결하겠습니다.”
“뭘 어떻게 말이야.”
“제가 실망시켜 드린 일 있습니까? 좀만 기다려 주십시오. 제 목을 걸겠습니다.”
“임마. 이번에 잘못하면 진짜 모가지 따 버릴 거야!”
일단 부랴부랴 봉합하기는 했지만, 박노태의 입장은 매우 난처해졌다.
’이렇게 되면 진짜로 나가린데. 백경이 일본 중앙 자공과 제휴하다니.‘
긴장한 녀석은 이빨을 딱딱거리며 깨물었다. 설마 이렇게까지 일이 안 풀릴 수 있나.
사실 신나라의 수익성은 점점 악화되고 있었다.
깡통차를 받아 관세 없이 파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카발에서 일부 2진급 인력을 빼돌리긴 했지만 공장을 돌리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것이 문제였다.
시스템상 품질관리가 엉망이니 가동률은 처참한 수준.
인력을 늘린다고 해결될 상황도 아니고, 채권연장 문제도 불거질 확률이 높으니 진퇴양난이 따로 없다.
‘이대로 회사가 망하게 되면 남형욱이가 날 살려 둘 리가 없어. 옥관열도 그렇고.’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고민하던 그때 좋은 생각이 났다.
“최 비서, 생산 차량을 일반택시로 용도 변경해 놔. 아시아 영화제에서 다녀올 테니.”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타개책을 찾아야지. 우리나라 사람이 감독상을 수상할 거라는 소리가 있는데 이때를 노려야 하지 않나? 우리 자동차를 홍보할 수 있는 기회야.”
“알겠습니다.”
《붉은 마후라》를 연출한 신옥상 감독이 감독상이 유력하다는 소식이 파다하게 퍼져 있었기 때문에 틀린 소리가 아니었다.
‘2억 6천 정도면……. 충분히 재기하고도 남겠지.’
일단 쉬어 가기로 하면 된다. 달러로 현금화한 자금을 들고 일본으로 도주할 생각이었기에 차는 곧바로 인천항으로 향했다.
그렇게 배를 타려는 순간, 옆 좌석에서 누군가와 부딪혔다.
“임마가. 감히, 잘 보고 다녀.”
“아이고 죄송합니다.”
빵모자를 꾸벅 내려놓은 녀석이 사라지자, 아무 의심 없이 다시 가방을 들었다.
잠시 후 녀석이 일본행 배에 오르자, 빵모자를 쓰고 있던 남자가 모자를 벗으며 기다리던 강태준 앞에 가방을 내려놓았다.
“수고했다. 춘삼아.”
“자, 제가 이겼으니 약속대로 10달러. 주십쇼.”
“아놔, 병신이 여길 진짜로 오냐.”
투덜거리면서 꼬질꼬질해진 지폐를 내놓는 광필이에 강태준이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이 정도면 눈감고도 딱이지. 할튼 간에 저 자식은 항상 형님에 대한 믿음이 없어요. 믿음이.”
“아니 형님이라면 믿습니까.”
“솔직히 저도 긴가민가 했습니다. 근데 정말 여기로 왔네요. 진짜로. 그러지 말고 타이베이에서 도망가지 말입니다.”
“그러게. 어차피 저쪽으로 가면 백 프로 잡힐 텐데 말이야. 왜 사서 병신 짓거리를 하는지.”
“선택의 여지가 없었겠지. 그쪽은 사복 경찰들이 쫙 깔려 있을 테니.”
“그러믄 일단 홍콩을 경유해서 튀는 게 낫지 않습니까?”
“그건 번거롭다고 생각했겠지. 원래 사기꾼 놈들은 자기가 제일 똑똑하다고 생각하거든.”
“여차!”
지렛대로 쇠로 잠긴 자물쇠를 부순 강태준이 가방을 열었다.
마치 게임 속의 미믹처럼 아가리를 벌리는 순간 나타나는 지폐 뭉치들.
환한 얼굴이 서로를 마주 보자 강태준이 윙크했다.
“월척이네. 자, 이걸로 출장비는 뽑았구먼.”
* * *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후,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은 건 남형욱이었다.
“아시아 영화제에 안 나타났다고? 시불 그게 뭔 소리여?”
“대만 쪽에 인력을 배치했는데 아주 딴 데로 샌 거 같습니다. 아무래도 일본 쪽으로 빠진 거 같다고.”
“뭐? 그걸 왜 이제 알았나?”
남형욱의 추궁에 비서들이 진땀을 빼고 있는 사이 옥관열이 모습을 드러냈다.
“지금 큰일 났소이다. 박노태 그노마가 우리 자금 죄다 들고 토꼈어.”
“뭐라고? 그게 말이 되나?”
“사채 만기로 차입금 들어왔다고! 자네가 어떻게 좀 해 보게. 이거 내 힘으로는 못 막아.”
“뭐야? 만기라니. 감히 내 돈을 가져가려고?”
은행장에 전화를 돌려봤지만 안 된다는 소리뿐이었다. 심지어 그간 빼돌렸던 비자금까지 동결되어 있었다.
“이봐 최 은행장. 내가 자네한테 투자한 게 얼만데 이따위로 하나.”
“죄송합니다. 지금 투서가 들어와서 시중 은행장들이 죄다 각하께 불려갔습니다.”
청천벽력같은 소리에 남형욱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런 육시럴!!!~ 당장 그놈, 그놈 잡아 와!”
“고정하십시오!”
“내가 어떻게 이 자리까지 왔는데. 어억!!!”
* * *
“남형욱 그 양반이 혈압으로 입원했다는군요.”
“쯧쯧. 몸조리 좀 잘 할 것이지 신나라는?”
“해체 수순이지요. SKD는 개뿔, 이번에 보니까 부품 조립도 제대로 못 하는 수준이더만.”
김광필이 빈정거리듯이 중얼거린 대로 중정의 조사가 들어가자 충격적인 사건의 실체가 드러났다.
자동차공장 가동률이 10프로 조차 안 되었고, 판매되는 물건 중에 90%는 지금껏 반제품이 아니라 완제품을 팔고 있었다는 점이 만천하에 드러난 것이다.
그야말로 특혜만 믿고 장사를 벌인 셈.
심지어 이 사실을 박노태를 제외한 투자자나 수뇌부는 공장 운영 실태를 하나도 몰랐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가루가 될 정도로 까이고 있었다.
“하이구야. 날강도구만. 그러니까 좀 하는 척이라도 하지 그랬나?”
“대통령도 엄청나게 진노했다는군요. 아무래도 정부에서 밀어주다시피 한 건데 이따위가 되었으니 피바람이 불 듯합니다.”
“남형욱이는 이걸로 재기가 힘들겠군. 그래서 설비랑 부지는 누가 인수한다냐?”
“아마 천진에서 인수할 모양인가 봅니다. 코로나자동차랑 합작 조건을 협의 중이랍니다.”
“뭐? 코로나?”
“아 그 회사 문제 있나요?”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뭔가 재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야.”
“어차피 우리랑은 관계없지 않습니까? 누가 되든 말입니다.”
천진처럼 완성차 시장에 진입할 생각은 없으니 강태준은 욕심을 버렸다.
3만여 가지나 되는 자동차 부품을 죄다 자력으로 조달하는 건 일단 무리였다.
과연 한번 홍역을 앓은 이후, 박정명 대통령이 뭔가 깨달은 바가 있는 것인지, 곧바로 새로운 자동차공업 육성계획을 발표했다.
[정부 5년 내 자동차 국산화율 80% 발표. 2차 경제개발 계획의 핵심.]
[경부고속도로 개통으로 인한 기대효과]
자동차 공업 육성을 위해 구체적인 육성계획을 짠 정부에서는 비생산적 차량 수요를 억제하고 최대한 경제적인 차종을 양산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부품 생산과 조림라인을 분리해 육성한다는 것이 골자였다.
“5년 내 국산화율 80프로라고 패기 좋네.”
“일단 전시행정 아니겠습니까. 그래도 기존 업체들 위주로 생산 체제를 합리적으로 재편성한다고 하니 좋지요.”
“그 합리적이라는 게 무슨 뜻인지가 문제지.”
현실론에 비추어 보면 70년까지 부품 국산화율을 80%나 달성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지만 당시에는 통했다.
박진환도 끼어들었다.
“대통령 특별 지십니다. 자동차 문외한이 아니라면 코웃음을 칠 이야기지만 솔직히 밀어준다고 하면 우리도 나쁠 것 없잖아.”
“맞습니다. 그래서 상공부에서 저희 쪽에 수시로 연락하여 자문을 구하는 중입니다.”
“이왕이면 베트남 진출 쪽과 연계해서 이야기를 진행해 보라고. 잘하면 좋은 조건으로 융자받을 수도 있을 테니.”
“베트남이요?”
“그래 통킹만 사건 땜시 이번에 군사 개입 명분을 얻었으니까. 이마 우리나라에도 파병을 요청하겠지.”
통킹만 사건.
통킹만 해상에서 북베트남 소속 어뢰정이 미군의 섬너급 구축함을 공격하여 교전이 벌어진 사건이다. 단계적 확전 정책에 따라 개입을 노리던 미국으로서는 곧장 북베트남에 대한 해상 봉쇄를 실시했고 본격적인 전쟁을 선포했다.
“파병이면 규모가 어느 정도 될까요?”
“그건 알 수 없지만 경제개발을 염두에 둔다면 엄청나게 되지 않겠나? 개발에 성공하려면 돈이 필요하니 말이야.”
일본이 한국전쟁에서 전쟁 특수를 노린 것처럼 군수품 수송이나 납품 정도로 돈이나 벌자는 생각이었겠지만 강태준의 생각은 달랐다.
‘이번 전쟁은 무조건 장기전이 될 수밖에 없다.’
전쟁 초반 파병되는 미군만 20만이 넘는다.
실제로 베트남전에 들어가기만 한다면 돈을 갈고리로 긁어모을 수 있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러려면 정부 보증을 따내야 하는 것이다.
“그럼 병참 담당 지휘관이랑 미리 이야기해 둬야 하는 거 아닌가요. 베트남 현지답사도 필요하고. 누가 갑니까?”
“그거야. 당연히 니가 가야지. 여기서 영어 되는 놈이 어딨냐?”
“아, 형님! 그 무슨.”
“최 부사장한테 이미 말해 뒀으니 걱정하지 말고 다녀와. 수고 좀 해라.”
“아 진짜 XXXXX!”
오만상이 찌푸려진 광필이가 뒤에서 욕을 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어떡하겠는가. 유능한 게 죄지…….
역시 인재가 늘어나니 짬때리기가 좋구먼. 그러고 보니 여기 꿈나무가 하나 더 있군.
강태준이 춘삼이의 뒤통수를 흐뭇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