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6화 일본 중앙 자공
그 모습을 홀린 듯 지켜본 박효건이 부러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우리나라에도 올림픽 한번 했으면 좋겠군요. 인프라를 구축하는 데도 도움 되고, 국위 선양도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나라도 금방 그렇게 되길 바라야지. 일단 짐부터 풀고, 가자고.”
새로 만난 것은 명진물산 박재우였다. 그간 일이 잘 풀렸는지 신수가 훤했다.
“또 보는군요. 강 사장님.”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그럭저럭요. 과연 시니어들 위주로 볼링 기세가 심상치 않더군요. 귀띔해 주신 덕분에 꽤 재미를 봤지요.”
“잘 되었군요. 말씀드린 건수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지엠비 창업자인 재일 교포 중 하나가 오사카 근처에서 나니세와미츠란 자동차 부품 제조 기업을 세워 일본 중앙 자공에 납품 중이라네요. 나름 중앙 자공과 꽤 오래 관계를 맺어 온 협력사니 그쪽을 통해서 연결을 시도해 보면 될 거 같습니다.”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그럼 일단 저희 쪽 의사를 타진해 보지요.”
다행히 박재우가 미리 운을 띄워서인지 만남은 빠르게 성사되었다.
강태준과 일본 중앙 자공의 우에노 도미조 부사장 앞에서 준비한 차트를 하나하나 짚어 가며 발표를 했다.
“……따라서, 정부에서는 산업 합리화 정책을 시행할 작정입니다. 조립 공장별로 난립 건설하는 건 바라지 않을 겁니다. 공용 부품을 전문적으로 생산할 수 있는 국제 규모의 공장을 만드는 게 목적이겠죠.”
10여 분에 걸친 발표가 끝나자 가만히 듣고 있던 우에노 사장이 박수를 쳤다.
옆에 있던 기술진 역시 함께 갈채를 보탰다.
“인상적이었소. 꽤 준비를 많이 하셨군.”
“회사의 명운을 건 청사진이니까요.”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소이다. 솔직히 말하겠소. 그쪽은 기술력이나 규모로 보나 만족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거든.”
“흠. 그건 인정합니다. 하지만 앞으로는 달라질 겁니다.”
“흐음. 그래도 기술 협력이냐 합작 투자냐 하나만 합시다. 사실 초면부터 너무 많은 요구라고 생각하지 않소? 중장기 계획으로 초기 투입자금이 1억 엔이라니 이건 좀 부담되는군.”
2억 7천만 원 정도. 당시 소비자 물가지수를 기준으로 환산해 보면 2000년대 80억에 달하는 액수의 거액이었다.
“흐음. 중앙 자공에서도 꽤 적극적으로 나올 줄 알았는데 좀 실망스럽군요.”
“우리가 돈이 없지는 않소. 다만 돈을 투자하라는 건 그 정도 실적이 될 때 가능한 일이지. 솔직히 백경기공은 우리 회사 하청이나 할 정도밖에 되지 않소?”
“네? 그건 너무 심한 말씀 아닙니까?
발끈한 강상구가 곧장 나서려고 했지만 강태준이 제지했다.
“뭐, 그 부분은 인정합니다만 저희도 나름 한국에서는 이름있는 업체입니다. 선점 효과를 생각하면 지금 과감히 투자하는 게 이득이 아니겠습니까? 게다가 지금이 시기적으로도 맞고요. 아마 지금보다 늦으면 중앙 자공에서도 후회하실 겁니다.”
“허허 패기가 넘치는군. 뭘 근거로 그런 말을 하지?”
“정부 정책 때문이죠. 한국은 국가적으로 현재 자동차 조립 기술에 관심이 많고 부품의 국산화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특히 볼 조인트 같은 부분은 추후에 수입 제한 조치를 실행할 부분입니다. 기술 격차가 너무 큰 부분은 수입을 열어 주겠지만 조금만 노력하면 금방 따라잡는다 싶은 부분은 아무래도 자력 생산을 추진할 테니까요.”
“볼 조인트가 그렇게 쉽게 만들 수 있는 부품은 아니요.”
“상대적이라는 겁니다. 아무래도 엔진이나 여타 복잡한 장비보다는 구조적으로 단순하지 않습니까? 게다가 지역적으로도 가깝고요.”
의뭉스러운 표정으로 바로 반박하는 우에노 사장이었다.
“흐음. 우리 중앙 자공도 대안이 없는 건 아니지. 굳이 한국 말고 인도네시아나 다른 쪽도 있소이다.”
“맞는 말씀이지만 어차피 외주를 주는 건 단가 때문이 아닙니까. 거리도 짧고 저임금 노동력이 풍부한 한국에서 대량 생산하는 것이 훨씬 합리적이죠. 인니 같은 곳에서는 우리 한국처럼 숙련 노동자를 구하기 어렵지요. 게다가 종교 문제도 있고 한국인처럼 근면하지도 않고요.”
“그거야 사소한 문제지.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나는 기준은 오직 품질이요. 솔직히 그쪽이 그럴 만한 기술력이 있는지 의구심이 드는군.”
“카발자동차는 50년대에 이미 자력으로 엔진을 만들었을 정도로 기술력 있는 회사입니다. 가장 오래된 기업으로 국내 유수 업체들에 부품을 공급하고 있고 자본금도 탄탄합니다.”
그 말에 우에노는 코웃음을 쳤다.
“베껴서 만들었다고 똑같지는 않소이다. 정밀성이 그렇게 높지 않아도 되는 샤프트류와 볼 조인트 궤가 다르지. 볼 조인트에는 고도의 기술이 필요하오. 기계만 있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라니까?”
“회사가 현재 가지고 있는 스펙만 보고 투자한다면 투자할 회사가 얼마나 있겠습니까. 장래성을 보고 판단하지요.”
“난 현재를 보고 판단하오. 더욱이 한국은 외자의 비중을 제한하고 있으니 나로서는 굳이 그 정도 모험을 해야 할 이유를 모르겠군.”
실제로 당시 한국에서는 30%로 엄격하게 제한하고 있었기 때문에 틀린 말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직접 시험해 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게 무슨 소린가?”
“장비를 좀 빌려주신다면 저희가 만들어 보겠습니다.”
“지금 여기서? 자신 있소이까?”
“기회만 주신다면 최선을 다해 보지요. 그 정도 자신감도 없이 오지는 않았습니다. 그쪽이 요구하는 하한선을 충족한다면 저희도 기회를 가질 자격이 있지 않겠습니까?”
강태준의 말에 우에노 사장은 입가를 비틀었다. 니까짓 게? 가소롭다는 표정이었다.
“좋네. 그렇다면 해 보시지.”
강태준이 나오자 바로 볼멘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니, 사장님 무슨 배짱으로 그걸 거기서 한다고 합니까?”
“그래요. 우에노 사장이 얼마나 깐깐한 인간인데, 그 사람한테 빌미를 줄 이유는 없잖습니까?”
“야. 다 믿는 구석이 있어.”
박재우 역시 약간은 못 미더워하는 기색이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우에노 사장이 기술에 있어서는 타협이 없는 사람입니다. 게다가 말 바꾸기도 싫어하고요.”
“어차피 저쪽에서는 우리 실력에 대해 의구심을 갖고 있다면 실력을 입증하지 않고 합작 건이나 기술이전은 어렵지 않겠습니까. 그리고들 자네들은 그렇게 부정적인가. 우리가 배움을 구하는 입장이긴 하지만 그렇게 저자세일 필요 없어. 저쪽도 우리에게 자기네랑 동일한 기술 수준을 요구하지는 않을 테니까.”
“그건 맞는 말이지만 걱정이 돼서…….”
함께 온 정효식, 최팔구 기술자들 또한 보통 부담이 아닌지 표정이 좋지 않았다.
그 모습에 강태준이 기술자들을 돌아보며 격려했다.
“이봐 기술을 이전받을 회사가 여기 하난가? 중앙 자공만 회사가 아닌데 왜 그래? 최선을 다하면 돼. 우리도 나름 비장의 수가 있잖아?”
“예. 근데 그게 실전에서 먹힐지는 잘…….”
“뭐 어때? 실패는 걱정 말고. 나만 믿고 따라오라고.”
약속한 시험 당일의 검사실,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들었다.
검사실에 브리넬 경도계, 각종 게이지, 마이크로미터, 투영기, 인장 시험기, 금속 현미경 등 장비가 동원되었다.
“요란도 하군요. 이거. 부담되는데요?”
“우리도 기대하고 있네. 이 정도 예의는 보여야 하지 않겠나? 어때 고작 며칠 만에 결과물을 만들어 냈다니? 각오는 된 거겠지?”
사흘 만에 볼 조인트를 만들었다는 말에 우에노는 솔직히 탐탁지 않았다.
대충 만들었다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각오가 드러나는 우에노 사장이었다.
“저희도 만족시켜 드렸으면 좋겠네요. 그럼 슬슬 시험해 보시죠.”
“그래……. 자신이 있어 뵈는데 얼마나 잘 만들었는지 함 보지.”
혹여 제대로 만들지 않았다면 개망신을 줄 참이었는지 기술진들의 눈빛은 곱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일본인들의 예상은 빗나갔다. 기술력이 있다고 하지만 그래 봐야 후진국 수준이라고 생각했던 것과 달리 실험결과가 꽤 좋았던 것이다.
“흠흠……. 꽤 하는데?”
“이제 다 된 겁니까?”
“마지막 시험이 남았네. 내구 시험 장치일세.”
곧이어 토크 측정을 위한 장치가 모습을 드러냈다. 딱 보기에도 최첨단처럼 보이는 제품에는 모니터까지 달려 있었다.
“엄청 비싸 보이는군요.”
“환경 내구실험을 위해 들인 기계장치일세. 파지부의 좌우 방향과 지그 케이스의 전후 방향 회전까지 동시에 시험할 수 있는 물건이지.”
설마 이것까지 통과할 수 있을까.
코를 납작하게 해 주리라는 생각에 기계를 켠 기술자들.
토크 산포가 줄어들면서 일정하게 비슷한 수치가 나왔다. 그렇게 되자 오히려 당황한 것은 일본 기술자들이었다. 조악하게 생긴 결과물과 달리 수치가 너무 준수하게 나오자 어이가 없어진 기술자들이 되물었다.
“이거, 내구도도 괜찮고 대체 어떻게 한 건가?”
“볼 스터드와 볼 조인트 모두 스틸 아닙니까. 그리스를 주입해도 실전에서는 마찰이 심하지요. 하지만 한국은 도로 상태가 좋지 않아 마모가 심해서요. 그래서 고심 끝에 볼 시트의 소재를 변경했습니다.”
“소재라니, 어떤 걸로 말인가?”
“볼 시트 소재를 스틸에서 나일론으로 바꾸었지요.”
“이게 나일론 시트라고?”
깜짝 놀란 우에노 사장이 되묻자 그 말에 강태준이 미리 가져온 시트를 보여 주었다.
“이겁니다. 좋은 스프링을 만들기에는 저희 기술력이 부족해서요. 대책을 강구해 보다가 마찰을 줄일 수 있는 소재가 있지 않을까 생각해 넣어 보았습니다.”
“허허, 과연 이런 발상을 하다니. 이렇게 하면 부품의 수명 향상에도 도움이 되겠어.”
생각지도 못한 부분을 배웠다는 생각에 우에노 사장도 꽤 기꺼워하는 기색이었다.
그렇게 되니 곧바로 드는 의문점이 있었다.
“아니 근데, 이정도 기술이 있으면서 어째서 우리 쪽과 거래하려고 하나? 자력으로 생산해도 될 것을?”
“말씀드렸다시피 이건 극히 일부일 뿐입니다. 단조 기술이나 기본적인 주형 제작에서 어려운 점이 많습니다. 더욱이 저희 회사는 아직 이름값 면에서 여러모로 부족한 면이 많죠.”
이런 부분에 일본 중앙 자공같이 건실한 회사라면 저희 백경기공 제작 기술 향상에도 도움을 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말입니다.”
“흐음…….”
은근히 상대를 띄워 주는 말에 우에노 사장의 낯빛이 누그러졌다. 실력이 없는 잡놈들이 찔러보기를 한다고 생각했던 일본인 기술자들도 생각이 바뀌었는지 감탄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우에노 사장도 한결 온화해진 어조로 말했다.
“뭐. 능력도 있는 것 같고, 배울 자세는 되는구먼.”
“감사합니다.”
“합작회사 체결 건은 그럼 오늘 사인하면 되겠나?”
결단을 내리자 행동은 시원시원했다. 중장기 계획으로 일주일 후 주주총회가 소집되었다. 강태준과 일본 중앙 자공이 합작한 주식회사 한국 백경자동차 공업사가 설립되었다.
액면가 오천 원짜리 2만 4천 주가 발행되어 자본금 1억 2천만 원의 회사로 출범했다.
강태준 11,000주, 박재우 2,000주, 일본 중앙 자공 8,000주, 일본 백경 자동차 공업 3,000주로 한 계약을 체결했다. 박재우가 낀 건 외자 제한 때문으로 아무래도 중앙 자공 입장에서는 자기네들과 오래 계약한 박재우가 끼는 편이 안심되었던 것이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