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3화 전설의 큰손
설마 백 할머니?
1960~80년대 풍미한 한국 증권가의 대모가 여기 있을 줄이야. 수줍은 듯한 미소를 지으며 부인이 말했다.
“자네 명성은 익히 들었지. 자연스럽게 만날 기회가 없어서 말이야.”
“저도 증권가에서 백 여사님. 명성을 익히 들었습니다.”
영국 타임스(The Times)를 든 채 증권사 객장에서 시세판을 바라보는 모습으로 유명세를 떨친 거인이다. 강태준의 반응이 의외였던 듯 이번엔 상대가 놀랄 차례였다.
“자네가 어떻게 날 아나?”
“증권 쪽에 관심이 있어서 좀 주워들었습니다.”
그 말에 백 영감이 농을 했다.
“이거 우리 동생이 출세하긴 했구먼 그래? 강 사장 이 사람이 알아주다니.”
“이거 영광이구먼, 호호호.”
“그럼 실례지만 백 영감님과는 무슨 관계가?”
“내 동생이네. 정확히는 사촌 동생이지. 백성엽 장군 알지 그쪽 가계라고?”
“정말입니까? 그게?
“그래. 이쪽은 나름 유서 깊은 명문가라고. 나야 찌끄레기 수준이지만.”
“오라버니도 참…….”
강태준은 그제야 이해가 되었다. 참모총장 백성엽과 인척이라니.
백 영감을 건달들이 건들지 못한 것도 나름 이해가 될 법했다.
“근데 사업에 관심이 있으시다니.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왜인지 여쭐 수 있겠습니까?”
“사실 크게 관심은 없지. 엮인 일이 없었다면 사실 내가 카발자동차의 최대 채권자거든.”
“예?”
이 사람, 저평가 우량주 위주로 투자하는 사람 아니던가?
“놀랐나 보군.”
“의외라서요.”
“뭐 의뢰가 엮였다 하면 이해하겠나?”
“의뢰라면?”
“카발이 망하기 고사를 지내는 사람들이 많아서 나보고 의뢰한 사람이 있어. 그래서 내가 이렇게 온 거지. 저격수를 하라는 건지. 세상에 별난 사람들이 많아. 하하.”
“그거참 어이없군요. 그래서 대가가 얼마였습니까?”
“5억 정도를 약조하더군.”
“말이 되는 금액입니까?”
“올해까지 들여온 차량을 대당 13만 원씩 남겨서 2,000대를 팔아먹었다면 순이익만 2억 6천만 원이야. 거기에 세금 혜택 등 각종 이권까지 고려하면 더 되지 않겠나?”
“허어, 그걸 믿으십니까?”
“카발이 없어지고 시장을 독식하면 못할 것도 없지. 몇천 대 정도 더 뽑아 먹는 게 어렵지는 않을 거 같고.”
강태준의 이마가 절로 찌푸려졌다. 설마 했는데 이런 치졸한 짓을 벌이다니.
“적은 돈이 아니군요. 헌데 그렇게 행동하시면 될 걸, 왜 절 찾아오셨습니까?”
“신뢰의 문제지. 정치하는 놈들은 달면 삼키고 쓰면 언제든 버리는 양반들이라서……. 게다가 자네 같은 기업가가 운영한다면, 앞으로 사업성이 생길 거 같아서 말이야.”
깍지를 낀 백 할머니가 찻잔을 빙그르르 돌렸다.
“어차피 자네도 면도기 사업을 정리할 정도면 지금 당장 현찰은 없을 거라는 소리 아닌가. 그렇게 무리를 하면서까지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잘라 내려는 거라면 그 이상을 노린다는 생각이 들어서. 들어보고 싶더라고. 카발을 인수하려는 이유가 뭔지?”
“그건 제 영업비밀인데요. 더욱이 제 말 여하에 따라서 결과가 바뀔지도 모르잖습니까?”
“사업가는 이윤을 좇는 게 원칙이지 들어보고 경우에 따라서는 5억 이상의 가치가 있다면 갈아탈 수도 있는 일 아니겠나? 안 그래?”
사업성 평가를 위해서 브리핑을 하라는 말인가?
“뭐 그럼 단적으로 말씀드리죠. 그게 더 돈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게 더 돈이 된다?”
“면도기는 솔직히 성장 포화 상태입니다. 시장을 확장하려면 기술개발을 위해 막대한 자금을 투자해야 합니다.”
“자동차 시장이라고 별다를 건 없지 않나?”
“면도날 시장을 장악한 글로벌 기업들은 워낙 괴물들이라서요. 결국 같은 아이템으로 경쟁하는 꼴 아닙니까. 그럼 덩치 싸움이 될 수밖에 없죠. 하지만 자동차는 한 번 판매하고 나면 꾸준한 유지 보수와 소모품 공급이 지속적으로 10년 이상 팔아먹을 부품이 많지요. 조만간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되고, 도로가 확장되면 자동차 수요는 늘어날 건 분명한 사실 아닙니까? 일단 단일 제품으로 경쟁하는 게 아니니, 상대적으로 비빌 구석이 많다는 거지요.”
“하지만 수입 차량 땜시 카발이 고전하고 있잖은가? 외국에서 들여온 반제품에도 비실댈 정도면 별로 가망 없어 보이는데.”
“우선 완성 차 말고 부품사업으로 가야지요. O/E 비지니스를 할 겁니다.”
약간 생소한 개념에 백 할머니가 되물었다.
“O/E? 그게 뭔가?”
“Original Equipment 사업 말입니다. 어차피 완성 차를 만들려면 자동차 핵심 부품인 엔진, 변속기, 현가장치 등등을 국산화를 선도적으로 추진해야 않겠습니까.”
“주력 제품으로 생각해 둔 것은 있나?”
강태준이 자신 있게 말했다.
“엑슬 샤프트입니다.”
“어째선가?”
“국내 자동차가 많이 들어왔다고는 하나 대부분 최대 적재 중량을 초과한 짐을 싣는 경우가 많지 않습니까. 야트막한 오르막이라도 오르게 되면 엔진에 과부하가 걸려서 자주 차축을 망가트리지요.”
“흐음. 일리가 있는데 그렇게 되면 전국 정비 공장과 부품상에 직접 공급만 해도 수요가 상당해서 안정적인 사업 모델을 구축할 수 있겠군.”
“그렇지요.”
강태준의 답을 들은 백 할머니가 슬쩍 옆을 돌아보자 백 영감이 어깨를 으쓱했다.
“보게, 대충 이 정도일세. 내 말이 맞죠.”
“오라버니 말씀이 틀리지 않네요. 앞으로 계획이 확고하군요.”
주름진 얼굴에 언뜻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그럼 합격입니까?”
“그런 계획이 있다면 나도 숟가락을 얹어야지. 좋네. 그럼 사채 부분은 투자금으로 전환하는 걸로 하지. 설마 거절하지는 않겠지?”
“저야 오히려 환영이죠. 근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저쪽도 만만찮아 보이는데, 그렇게 되면 의뢰인 측과 척을 지는 게 아닌지.”
“뭐, 의뢰주가 요구했다고 해서 꼭 그대로 해 줘야 하는 법이 있는 건 아니잖나. 사정이 바뀌면 대응책도 바뀌는 법이지. 거기다 우리 집안이 그렇게 만만한 집안이 아닐세. 그럼 언제부터 시작할 건가?”
“바로 착수해야죠. 곧 대격변이 올 테니까요.”
악수를 한 둘은 훈훈하게 헤어졌다. 강태준이 그 말을 하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기사가 떴다.
[축!, 수출액 1억 달러 돌파]
한국의 수출액은 50년대 말부터 빠르게 증가하기 시작해 60년대 2천만 달러를 넘어섰고. 정부의 강경 수출정책 드라이브에 힘입어 1억 달러를 돌파한 것이다.
“고맙습니다. 황 사장님. 장소 구하기도 뭣했는데 말입니다.”
“어차피 어묵 장사한다고 쓸 일도 없었는데 뭘, 그래두 여길 떠난다고 생각하니 시원섭섭하구만.”
황철득은 슬쩍 이를 드러내고 허허거렸다. 새로 들이기로 한 대장간과 단조 설비 때문에 소음공해가 심해 강태준으로서는 새로이 부지를 구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황철상이 고물상을 할 때 쓰던 부전동 부지가 새로운 보금자리였다.
공장 터를 흙으로 메우기 위해 덤프트럭들이 드나들었는데 흙을 한 번씩 퍼 나를 때마다 엄청나게 많은 고철이 쏟아져 나왔다.
“거참, 탄피 한번 오지네요. 이건 다 어디서 뽀린겝니까?”
“그걸 말로 하나. 이 양반아 적당히 넘어가지 그래.”
그 순간 일하던 작업자가 놀라 엎어졌다.
“히익!”
“뭐? 왜 그래.”
“아니, 대인지뢰가 여기…….”
“아 그거? 걱정 마, 불발탄이여. 화약도 다 빼 논 거니 터질 염려 없어.”
그간 꿍쳐 놓은 게 어찌나 많은지 정말 별의별 것이 다 나왔다. 고철을 처리하느라 제법 애를 먹었지만 여름이 다 가기 전에 공장 문을 열었다. 강태준은 공장에 백경 기계 공업사라는 이름을 붙였다.
단조 공장부터, 경비실과 사무실 포장 공장과 창고까지. 한 번에 짓기로 한 것이다.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먼지와 약품 냄새에 천 영감이 기침을 했다.
“쿨럭, 페인트 냄새, 독하구만.”
“공간은 어떻습니까?”
“그럭저럭 이긴 한데 보니까 기계들이 완전 구닥다리야. 지금까지 어떻게 이런 기계로 작업을 했는지 원.”
강태준이 슬쩍 물었다.
“심각합니까?”
“프레스기부터 들여야겠어. 선반이랑 밀링도 새 걸로 갈고. 일단 가열 연료는 벙꺼 C유로 하는 걸로 구해 주게. 그리고 인력이 더 필요하니 수용할 장소가 필요해. 검사실 외에 기숙사도 지어 주게.”
“사람이 참. 저번에 약속했다고 아주 뽕을 뽑으려고 하시는군요.”
“나도 좀 그럴듯한 곳에서 일해 보자고. 다 투자라고 생각하시게.”
60년대는 산업화 초기 수많은 농촌 청년들이 일자리를 찾아 대책 없이 이곳저곳 떠돌아다니던 시대였다. 고향을 떠난 노동자들로서는 집도 절도 없이 혈혈단신인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이들을 유치하기 위해선 숙식 문제 해결이 필수였다.
다행히 용당에서 특별히 불이 잘 안 나게 특수가공한 난연 제품이 나와 도움이 되었다.
간단한 취식이 가능하도록 숙소별로 단출한 부엌도 하나 넣고.
바닥에 온돌을 깔고 방염 도료까지 바르고 나자 그럴듯한 거주공간이 완성되었다. 마지막 공중 작업을 마친 황철득이 천장에서 사다리를 타고 내려와 땀을 훔쳤다.
“이거 원 몸이 무거워서 그런가. 간만에 높은 데 올라가니 다리가 후들거리는군. 나도 한물갔어.”
“무슨 말씀을. 아주 가벼우시던데요. 덕분에 빨리 끝났습니다.”
“근데, 이거 숙소랑 작업공간이 좀 너무 가까워서 그게 좀 아쉽더군. 심야 작업할 때는 기계 소리가 막 들리지 않겠나?”
“취침 시간에는 작업하지 않을 테니 걱정 마십시오. 사실 더 멀면 오히려 불편하지 않겠습니까? 동선을 고려하면 작업장이 먼 게 불편해요. 별도의 방음 장치까지 하면 견딜 만할 겁니다.”
“허긴, 요즘 같은 시상에 이 정도 숙소면 호텔이제. 울 때는 기숙사가 무어야. 그냥 숙직실에서 쭈그리고 겉잠만 잤는데. 머리 누일 장소만 있어도 고마운 거지.
졸속이었지만 공장이 처음 문을 열면서 선반 7대와 밀링 다섯 대 그리고 로구로까지 배치했다. 간단한 금속 부품을 직접 자르고 깎고 모양내기 위한 용도였다.
강태준은 기존에 사용하던 중고기계들은 과감히 처분하고 이 모든 것을 일제 신품으로 구했다. 당연하겠지만 재무를 맡은 광필이는 볼멘소리를 했다.
“이거 너무 지출이 큰 거 아닙니까 형님? 그냥 중고로 구하셔도 되잖습니까? 박 여사한테 말했으면 반값에 구했을 텐데요.”
“다 투자야 임마. 좋은 기술자를 유치하려면 투자에 과감해야지. 공고문은 썼나?”
“예. 10리 밖에서도 보이도록 대문짝만하게 찍어 냈습니다.”
“그래. 그럼 길목마다 하나씩 붙여.”
출판사에서 멋들어지게 고딕체로 뽑은 모집 공고문을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길목 곳곳의 전봇대에 붙였다.
“기능인력 모집, 선반 10명, 밀링 7명, 최신형 선반과 밀링 완비. 숙식 보장, 경력자 환영, 업계 최고 우대. 주급 네고 가능. 연락처. 5-132…….”
강태준은 출판사 영업사원들을 이용해 동네방네 홍보에 나섰다. 이 공장 저 공장에서 일하던 기술자들에게 넌지시 모집 공고를 흘렸다. 소문을 들은 기술자들이 삼삼오오 모여들었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