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8화 온천 개발
계속되는 학생 시위와 야당의 공세에 대처하기 위해 공민당 중앙위원회는 전면 개각을 단행했지만, 승기를 잡았다 생각한 야당의 총공세에 시위는 되레 격화되었다.
박정명은 학생들과의 면담을 통해 일시적인 진화를 시도했지만 한일회담 재추진 소식이 들려오자, 6월 초, 한국대학교와 연희대학교 학생 3,000여 명이 경찰과 유혈 충돌을 빚었다.
하루 뒤 정오를 전후하여 서울 시내 1만 2,000여 명의 대학생들은 곳곳에서 도심으로 집결했다. 학생들은 교내에서 이케다, 김필중의 화형식을 거행하는 한편 일장기를 불태우고 교문을 나와 종로, 을지로, 청계천까지 행진하는 퍼포먼스를 벌였고 각 지방에서 8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시위에 동참했다.
시위가 이 지경에 이르자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박정명 대통령은 그날 하오 8시로 소급하여 서울특별시 전역에 비상계엄을 선포하였다.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오늘 8시를 기점으로 정부는 수도 서울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게 되었습니다.
합헌적인 절차에 의해 수립된 정부에 대하여 전면적인 부정하며 민생문제를 타개하려는 정부의 행정기능마저 마비시키고 대외적으로는 국가의 위신을 추락시키는 사태를 묵과할 수 없습니다.
학생들의 시대적 감각으로 보아 현실에 대해서 욕구가 불만함은 수긍하나 조국의 미래에 대해 심려하거나 구체적인 방안 없이 정권을 무너뜨려 놓고 보자는 비지성적이며 무책임한 행동은 앞으로의 헌정질서를 위해 단호히 근절시킬 것입니다!
이 일은 버거 미국 대사와 하우즈 유엔군 사령관의 묵인하에 6월 3일 오후 8시 비상계엄령을 전국에 선포하고 경찰들 외에 4개 사단 병력을 서울에 투입하여 진압에 나섰다.
이와 동시에 일체의 옥내외 집회와 시위의 금지, 대학의 휴교, 언론, 출판, 보도의 사전 검열, 영장 없는 압수, 수색, 체포, 구금, 통행 금지시간 연장 등의 초법적 조치가 취해졌다.
강력한 무력 탄압에 사태는 일시적으로 진정되었지만 얼어붙은 경기는 좀처럼 회복되지 못했고 그것은 경기에 영향을 미쳤다. 평소와 다르게 한산해 보이는 부여 거리의 모습에 광필이가 추운 듯 몸을 떨었다.
“거참, 으스스 하구먼요. 다들 어디 숨었나?”
“뭘 어딜 가겠어. 검문 때문에 다들 못 움직이는 거지.”
강태준조차 여기까지 오면서 3번이나 검문을 거쳤으니 알만하지 않은가. 시위에 크게 데인 정부는 편집증적인 반응을 보였고, 덕분이 시장 상인들만 울상이었다. 그러자 옷깃을 여민 광필이가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
“다들 고생이네요. 괜찮으십니까? 그보다?”
“밑도 끝도 없이 무슨 소리냐?”
“장인 어르신 말입니다. 듣자 하니 그 양반 집에도 공수부대가 찾아왔다던데? 거 혹시 해코지라도 당하셨나 해서요.”
“아, 그거? 뭐 대충 해프닝으로 끝났지. 마침 설 중령님께서 오셨거든.”
사태가 계엄이라는 사태까지 비화된 것은 법원과 정부의 갈등도 한몫했다. 법원서 학생들의 구속영장이 기각을 계속하자, 완전무장한 8명의 공수부대가 법원에 난입해 영장 기각에 대해 항의하는 사태가 일어나기까지 했다.
심지어 영장 발부 담당 판사의 집에 찾아가 협박까지 하는 일이 벌어졌는데 그 피해자 중 하나가 하필 설홍규 판사라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그래두 그렇지, 무장단이라니 하마터면 진짜 큰일 날 뻔했습니다요. 뻔하게 정권에서 발작할 걸 알면서 영장을 대놓고 기각하시다니 그 양반도 참 강심장입니다요…….”
“원래 대가 센 분이시니 뭐, 그 정도로 눈 하나 까딱하겠나. 그런 치졸한 협박에 굴할 분이 아니지. 설 중령님께서 다급히 들어와 보니 한바탕 훈계를 하시던 중이었다는군. 놈들도 완전 무개념은 아니었던 모양이야.”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뭐 다행히 유혈사태는 없었다네. 원래대로라면 특수 주거 침입에 공동 재물 손괴까지 걸릴 게 많았지만 장인어른께서 선처해 줘 주모자를 방면하는 선에서 흐지부지되었지 뭐.”
그 말에 광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불행 중 다행입니다만 그거 의심쩍네요. 위쪽에서 시키지 않고서야 그런 일을. 게다가 알게 모르게 불이익이 있지 않겠습니까? 대놓고 정부 시책에 반기를 든 셈인데…….”
“검찰 들락날락해 봤다고 그쪽 생리를 아는구만. 맞아 원래는 아버님께서 법원행정처장 인사에 물망이 오르는 와중이었는데 덕분에 나가리 돼 버렸지. 거기에 검사 출신을 법원행정처장으로 앉히겠다고 하니 법원으로서는 목줄이 채워진 셈이지.”
그러자 제법 머리가 굵어진 춘삼이가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설 판사님께서는 지방으로 좌천을 당하셨으니 그렇다 쳐도, 어째서 법원 입장에도 뼈 아픈 일인가요?”
“아 그건 내부적으로 복잡한 사정이 있지. 1, 2공화국 때만 해도 법원행정처장은 법원장급 인사가 맡는 게 관례였거든. 근데 5.16 이후 이후 이 자리는 한동안 육군 대령이 겸직했다가 유화책을 쓰는 입장에서 돌려주자는 이야기가 나왔었거든. 근데 검사를 법원행정처장으로 선임한다는 말은 법원이 못 미더우니 계속 감시견을 심겠다는 소리나 다름없지.”
법원행정처장은 송무에서는 배제되지만, 부대법원장이라는 말이 나올 만큼 대법관 주재 회의에서의 발언권이 강한 직책이다. 박정명이 정식 대통령으로 취임하면서 법원으로서는 오매불망 그 자리를 언제쯤 돌려받을까 기대하고 있었는데 이번 기각 사건이 터지면서 보직을 돌려받는 일이 요원해진 것이다.
그 말에 광필이가 고개를 흔들었다.
“일종의 보복 인사지. 뭐. 근데 생각해 보니 진짜 아쉽네요. 형님. 핵심 요직을 대놓고 걷어차시다니 설 판사님도 별난 분이십니다요.”
“근데 원래 대가 센 분이지 않나. 자리에 연연하셨다면 전 정권 때에 기회가 많았지.”
“에이, 본인은 그렇다 쳐도 가족들은 사정이 다르잖습니까? 저라면 많이 아쉬울 거 같은데요.”
“뭐 승진이 반쯤 내정되었다 지방으로 옮기게 생겼으니 장모님 속이 부글부글 끓으시더군. 뭣보다 이번에 종로 쪽에 대출까지 받아 집도 마련했는데 곤란하게 되었지. 덕분에 집안이 한바탕 뒤집어졌지 뭐야.”
하긴 이 일이 유학 전에 터졌다면 어땠을지. 상상만 해도 아득한 일이다. 판사였던 설유하 입장이 입장이 매우 난처했을 테니, 오히려 이쯤에서 유학 간 게 최선의 선택이었을지 모른다. 잠시 생각을 정리하던 강태준이 어깨를 으쓱했다.
“뭐 각자 자기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신 결과 아니겠나. 암튼 그쪽 이야기는 그쯤에서 접어 두고 수산진흥자금 배분 결과는 나왔나?”
“아 예. 일단 워낙 여론이 안 좋다 보니 어업협정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지역어업인과 수산업의 경쟁력 강화를 위해 이번 분기 내로 농어촌진흥기금 200억 원을 긴급 지원하기로 했다는군요.”
하지만 강태준은 별로 만족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우리 백경 쪽에서는 경영안정자금과 수출촉진자금 겸해 연당 2억 정도는 확보할 수 있을 거 같습니다. 장성량 의원이랑 이원석 의원이 힘을 썼지요.”
“고작 2억밖에 안 돼? 생각보다 너무 적은 거 같은데…….”
“다음 해까지 수산진흥기금법 등 관련 법률이 차례로 법제화된다고 하니 추가액은 그때 가서 조율하자고 하더라고요.”
“그럼 뭐. 그건 그렇다 치자고. 일단 확보한 금액의 상환조건은 어떤데?”
“연리 2.2%에 3년 거치 5년 균등분할 상환조건입니다, 양식장 개발과 시설 장비 현대화사업을 포함한 금액이라 용도가 좀 제한되어 있긴 합니다.”
“사람 감질나게. 돈을 찔끔찔끔 푸는군. 수산청이 처로 승격 안 된 탓인가?”
“뭐 그것도 영향이 없진 않겠지만 대통령이 수산행정 강화 연구지시까지 내렸다고 하니 어떻게든 되지 않겠습니까? 너무 심려하지 마십시오.”
이마를 좁힌 강태준의 표정은 나아지지 않았다. 대일청구권으로 확보한 금액이 4억 1천만 달러, 그중 1억 2천만 달러와 어업협력자금에 의한 1억 달러 등 도합 2억 2천만 달러를 투입할 예정이었으나 실제로 집행 가능한 금액은 한정적이었다.
‘이렇게 되면 수산물 처리 가공업 투자랑 유통 구조 개선이 늦어질 텐데……. 돈 먹는 하마인 백화점은 아직 적자 행진 중이고.’
멸치사업 역시 추가로 공장 개편에 들어가 투자비를 회수하려면 멀었다. 강태준 입장에서는 제도개선이 굼벵이처럼 느리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나마 위안인 것은 발해원양의 사정이었다. 사장 구속이라는 초유의 사태에 직면한 발해원양의 주가는 절반 아래로 급락했다.
추가로 막대한 보석금을 지불하고 풀려난 이억수는 법정 다툼으로 두문불출하는 중이었다.
‘이억수는 당분간 신명부가 상대해 줄 테니, 뭐 신경을 꺼도 될 텐가?’
창업과 동시에 신조선 10척을 발주하는 등 승승장구하던 발해원양의 위세는 더 이상 없었다. 남형욱이 반쯤 실각한 데다 공공기관장들이 싹 물갈이가 되면서 라인이 잘려 나가다 보니 당최 힘을 쓰기 어려워진 것이다.
사장이 구속 위기에 처한 발해가 수산진흥기금을 독식하는 것은 물리적으로 요원한 일.
‘김정욱과 심원효는 실미도로 갔다고 하니 뭐 알아서 하겠지.’
살아서 나오기는 힘들겠지만 자업자득이다.
그렇게 생각을 정리한 강태준은 온양전통시장을 지나 공사장으로 향했다.
온양읍 온천리 55번지.
굴착 공사에 감독하던 남자가 강태준을 보더니 손을 흔들었다. 이번에 강태준이 인수한 합천 개발공사 대표인 박형관 사장이었다. 주름살 때문인지 나이가 액면가보다 지긋해 뵈는 박형관이 살갑게 인사를 올렸다.
“아 오셨군요? 사장님?”
“저게 뭡니까?”
“아 저거요. 전기 비저항 탐사입니다. 전류 전극을 통해 전위차를 측정함으로써 지하의 전기 비저항 분포를 파악하는 거죠. 전도성 광체나 지하수 탐사에 유용합니다. 그보다 관할 군부대 쪽이랑 군사시설 보호 협의가 잘 되었나요?”
“일단은 호텔부지 내 존재하는 지방 문화재들 때문에 좀 협의가 오래 걸렸습니다. 군부대 관계자 말로는 작전성 검토 결과 반경 1㎞ 이내에 우선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권한을 주겠다고 하더군요. 물론 그 과정에서 기름칠 비용이 좀 들긴 했지만요.”
그 말에 박형관이 맘에 들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이제 와서 문화재 운운하다니 너무 노골적인데요? 그럴 거 같으면 관리비 지원이라도 해 주던가.”
“그러게 말입니다. 그래도 일단은 급한 불은 껐습니다.”
심기가 불편해진 광필이가 툴툴대며 시비를 걸었다.
“딱 봐도 돈 깨지는 소리가 들리는구먼요. 거참, 근데 여기서 물이 나오는 게 맞습니까? 지반이 엄청 딴딴해 뵈는데?”
“겉으로 보기에는 글킨하죠. 그래도 일제 때 신정관에서 관리하던 지역이니 가능성은 클 겁니다. 6.25 사변 때 포화로 완전히 소실되었지만요.”
“여기에 온천공이 있었다는 말입니까?”
“개발은 안 한 상태니 정확히는 착정 예정지죠. 일제 때 공사 감독이던 데구찌 씨의 자료를 뒤져서 찾아봤는데 용출지점에서 동북쪽 100m 거리인 탕정관에 심도 150m짜리 구멍을 뚫어 온천수가 터졌다는군요. 그러니 아마 이 부근에 원천이 있을 가능성이 크지 않겠습니까?”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