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화 한일 국교 정상화
속이 타들어 가는 이억수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어졌지만 이미 벌어진 일. 내친김에 눈을 질끈 감은 송규익이 말을 덧붙였다.
“사실 그게 끝이 아닙니다. 수리조선 부두 임대 기간이 끝나가고 있어서. 수리가 추후 지체될 경우엔 이제 갓 방파제 공사가 끝난 남부민동 해안가를 빌려 수리조선 접안시설로 활용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임대료가 추가로 더 들지도 모른다?”
“네…….”
완전히 굳어 버린 이억수의 표정은 그 말에 같이 있던 이억기가 궁시렁대었다.
“그러니까. 일본에서 그냥 막 가져오는 게 아니라니깐요. 형님? 태동 놈들 엿 먹이자고 이게 뭔 헛짓거리인지. 허.”
“이 자식이 진짜? 그걸 말이라고 해? 이게 누구 하나 잘못이야? 이 식충이 자식이 빨랑 안 꺼져?”
“형님, 말씀이 심하십니다요. 여기 송 부장도 있는데 정말.”
“그럼 당장 나가서 정보라도 물어오던지 새끼야. 이거 확 똥대가리 깨 버리기 전에.”
불난 집에 부채질을 하는 동생에 이억수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깨갱대는 이억기가 도망치듯 밖으로 내쫓기고 나자 남은 비서들과 임원들의 표정이 바싹 얼었다.
표정을 가다듬은 이억수가 낮은 목소리로 명령했다.
“그럼 2개월. 아니, 1개월 반으로 땡겨.”
“예? 하지만 그건 물리적으로 정말 어렵습니다.”
수산부장인 송규익이 다시 총대를 매고 나섰지만 이억수는 단호했다.
“해 봤어? 응? 인간을 갈아 넣든 밤을 새우든 어떻게든 기간 안에 끝내. 아니면 니들 다 모가지야.”
“하지만. 사장님! 그건.”
“나가!! 지금 당장 작업 재개해!”
창문 밖을 보던 이억수가 초조감에 담배를 태웠다. 이미 태동에 내정된 배를 빼돌리는 건 그렇게 순탄한 일이 아니었다. 선가에 웃돈으로 지불한 금액만 12만 불, 어구나 수리 비용, 거기에 부두 임대료까지 포함하면 무려 100만 불이 넘는 거금이 소요된 것이다.
‘아니 그래도 어쩔 수 없지. 태동 놈들에 배를 넘길 바엔 다소 손해를 보는 게 나아.’
이거 쓸데없는 출혈경쟁이었나? 문득 후회가 되는 이억수였지만 스스로 불안감을 억눌렀다. 애초에 견제구를 날리려면 제대로 날려야 하지 않나. 추후 수산진흥기금 배정과 관련한 중고선 도입 실적을 위해서라도 불가피한 선택이다. 하지만 그렇게 이억수가 마음을 진정시키려는 찰나 불의의 소식이 먼저 전해졌다. 서둘러 들어온 비서가 다급하게 소식을 알렸던 것이다.
“사장님, 큰일입니다. 태동에서 원양어업 증설 차원에서 신규선을 띄웠답니다.”
“아니, 그게 뭔 개떡 같은 소리야? 그놈들이 구매할 중고선은 우리 쪽에서 선점했잖아. 게다가 은행에서 외화대출까지 죄다 막혔을 텐데, 무슨 수로 돈을 구해?”
“그게 정확한 사정은 모르겠습니다만 미쓰시오사에서 새로 중고선을 구해 넘겼다는군요. 벌써 사모아 쪽에 출항시켰답니다,”
“뭐? 대체 어떻게 된 건지 제대로 알아봐 지금, 당장!”
닦달하는 이억수의 불호령에 발등에 불이 떨어진 비서들이 부리나케 전화기를 돌렸다. 이억수로서는 황당하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설마 강태준 그 자식이 또 무슨 개수작을 벌인 건가? 어디선가 압력을 넣지 않고서야 없던 배가 생겨날 수야 없는 일 아닌가?
만약 진짜로 태동이 신규원양어선을 구했다면 자기는 완전히 삽질만 한 꼴.
‘설마 그럴 리가 없다. 그럴 리가. 뭔가 착오가 있는 거겠지. 아니면 분명히 고리의 사채라도 써서 틀어막았을 거고.’
그게 아니라면 천하의 이억수가 그런 병신 삽질을 했다는 것. 사태를 인정하고 싶지 않은 이억수가 현실부정을 하는 그때, 얼굴이 하얗게 질린 이억기가 벌컥 사무실 문을 열었다.
“형님! 형님! 큰일 났습니다.”
숨넘어갈 듯한 표정이 몹시도 급박한 이억기였으나 짜증이 머리끝까지 솟구친 이억수의 성질만 돋울 뿐이었다. 동생을 보는 순간 다시 짜증이 솟구친 이억수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뭐야 너는 또? 일하러 보냈더니 또 어딜 기어들어 와!”
“그, 그게 아니라니깐요!”
어버버 거리는 사이, 쾅 소리와 함께 신명부 검사가 건들거리며 모습을 드러냈다.
전혀 예상치 못한 불청객에 뒤로 숨는 이억기. 그런 동생의 한심한 모습에 인상을 찌푸리자, 뒤늦게 달려온 비서들과 경호원들이 이억수를 호위하듯 겹겹이 둘러쌌다.
“아이구야, 우리 이사장님. 간만에 또 보네요. 이거 공적으로 봬서 좋을 사이가 아닌데, 근래 너무 자주 뵙는 게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나도 그닥 반갑지는 않구먼. 남에 영업장에 갑자기 들이쳐서는 이게 무슨 경우 없는 짓인가. 더욱이 자네 관할은 여기가 아닐 텐데 말이야.”
제법 짬이 생겨서인가. 불의의 사태에도 침착하게 말하는 이억수에 신명부가 빙그레 웃으며 이죽거렸다.
“이거 대단하신데요. 그런 것까지 다 아시다니. 공부 많이 하셨습니다.”
“누굴 놀리나?”
“근데 그렇게 유식하신 분이 왜 불법적인 일을 자꾸 하시는지 도통 모르겠습니다. 그쪽에서 미쓰시오 쪽과 선박을 구매하면서 100만 불을 불법 송금했다던데요. 그리고 일부 자금은 조총련 쪽으로 흘러 들어간 정황이 의심되고 있던데요.”
좌우에서 다가서는 형사들의 모습에 홍해 갈라지듯 물러서는 비서진들. 국보법 위반이라는 말에 모두들 당혹스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당황한 이억수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모, 모함이야, 그건! 조총련이라니 난 모르는 일일세.”
그러나 달려온 형사들이 수갑을 채웠다.
“해명은 검찰 가서 하십시다. 당신을 국가보안법 위반 및 외환관리법 위반으로 당신을 긴급 체포합니다. 자 끌고 가!”
거듭되는 해명에도 불구하고 형사들과 검찰에서는 사정없이 끌고 갔다.
* * *
[발해원양, 이억수 전격 구속.]
서울지검 신명부 검사는 13일 발해원양 사장 이억수 씨(47)를 특정범죄 가중처벌법, 외환관리법, 해상운수 사업법 등 5개 종목 위반혐의로 구속 기소했다.
검찰은 이씨가 경영하는 발해원양, 발해출판, 발해 식품 등 3개 법인도 조세법 처벌법 위반 등 혐의로 기소하는 한편, 수산업의 장려 및 진흥을 위한 자금의 융자에 관한 규칙 부당한 특혜가 있었는지. 관련자 20명에 대해 추가 조사 중이다.
검찰은 위장 주주 20명이 전체 주식의 28% 보유하고 있으며 이억수 씨 자신이 51%를, 회사임직원이 15%를 소지하고 있었으며 실제 공개 주식은 6%에 지나지 않는다고 밝혔다.
검찰이 밝혀낸 발해원양의 위장 주주 명단은 다음과 같다 ▲정경태 (발해출판 상무, 이억수 씨의 처남) ▲현옥경 (전 감사원장 이해강 씨의 부인) ▲송규익(발해원양 수산부장, 이억수 씨의 질서(姪壻) ▲채광욱(전 부산은행장) ▲남상동(천하약품 사장) ▲우태규(대명제지 사장) ▲안상정(통해산업 사장) ▲최홍표 (광명학원 이사장) ▲조준혁(천진해운 회장)
이억기의 농어촌특별전형을 이용한 위장전입 문제, 한국수산대 입시 비리 문제가 불거지면서 그야말로 권력형 비리 사건으로 비화되었다. 신문 1면에는 기자들에 둘러싸인 이억기의 모습이 클로즈업되어 있다. 썩은 동태처럼 썩은 눈깔이 된 이억기가 수갑이 채워진 채로 질질 끌려가는 모습에 강태준이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신 검사가 신났나 본데? 영혼까지 탈탈 터는구먼.”
“이거 일이 아주 재밌게 돌아가겠는걸요. 수산대 입시 비리라니. 그 자료는 또 어디서 찾았다나. 그럼 우리 억기 씨는 고졸 되는 건가?”
“고졸이 아니라 중졸이겠지. 특정감사 결과, 고등학교 재학 중 수업일수 미달과 출석 대체 근거자료 미비 등이 확인됐다는군.”
애초에 체육특기생으로 뽑혔지만 공결 근거가 된 공문서가 허위인 것으로 드러난 것이 문제가 되었다. 교육법상 수업일수(193일) 중 최소 절반도 채우지 못해 졸업요건에 현저히 미달한 것으로 확인되었으니 졸업 취소는 당연한 수순이었다.
“신 검사 뒤끝이 그냥. 끝내주네요. 근데 이거 또 형님 작품입니까?”
“아니, 내가 왜? 내가 한 게 아니라. 박재우 그 양반 작품이야. 난 대충 귀띔만 해 줬을 뿐이고.”
“에? 박재우 그 양반이 말입니까? 호인인 줄 알았더니 그런 면도 있었군요.”
“사람 생긴 거만 보고 판단하면 쓰나. 선박 중개업이라는 게 그리 깨끗한 일이 아니지. 오너랑 혈연도 아닌데 대기업과 줄을 대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대외적으로 이름 높은 인사는 아니었지만 박재우는 전문 로비스트이자 상사맨으로서의 입지가 탄탄했다. 그런 사람이 대놓고 엿을 먹은 셈이니, 이를 갈 만하지 않은가.
이런 통수를 당하고 가만히 있으면 호구 인증을 하는 꼴.
마침 은행장들을 물갈이하는 시점, 이번에 응징도 할 겸 그간 쌓아 온 인맥을 전부 동원해 절묘하게 옆구리를 찔러 버린 것이다.
“근데 조총련 쪽이라. 정말 북한이 개입된 겁니까?”
“나도 모르지 그건. 뭐 꼬투리 잡기 시작하면 어떻게든 엮어 넣을 수 있는 거 아닌가. 일단 조사 들어가면 꽤 피곤해지지 않겠어? 검찰도 수사가 시작되면 어떻게든 실적을 내려고 안달복달할 테니 말이야.“
검찰은 조직 자체가 실적주의가 만연한 곳인 만큼 검사 복무 평가에서 직구속율과 무죄평가가 승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만큼 일단 조사에 들어가면 필사적일 수밖에 없다.
“허어, 순하게 생겨서 무섭네요. 그 사람.”
“아무리 순둥이라도 밥그릇 건들면 빡치는 거 아닌가?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 서리가 내린다지만 사내가 앙심을 품으면 대가리가 깨지는 법이야.”
“하긴, 예전부터 이억수 그 인간이 좀 밉상이긴 했지요.”
“아무튼, 이번에는 쉽게 빠져나가지는 못할걸.”
신명부로서도 윗대가리들이 줄줄이 옷을 벗은 지금이야말로 윗선에 눈도장을 찍을 기회 아닌가.
벌써부터 즐거워지는 강태준이었다.
* * *
해가 바뀐 1964년 3월.
[朴 대통령, 한일 국교 정상화 논의, 양국 해빙에 물꼬]
[이케다-김필중 한일수교는 필수적…….]
하지만 조심스럽게 추진된 한일 국교 정상화 발표는 엄청난 후폭풍을 낳았다. 정부와 여당 그리고 경제계에서는 회담의 결과에 수긍했으나 야당을 포함한 학생운동세력의 극렬히 반대했던 것이다.
“왜놈과 국교 정상화는 제2의 을사조약이다. 피 흘려 나라를 지켜 낸 호국영령이 무덤에서 크게 통곡할 것이다!”
“정부는 반민족 자본을 후원하는 매판적인 매국 행위를 중단하라, 국내 유휴 자본을 생산 부문에 투자해 민족 자본을 육성하자!“
야당과 사회단체 대표들은 배상금 27억 달러, 평화선 폐지 반대 등을 구호로 내세우며 대일 굴욕 외교 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를 발족시켰다. 이들은 전 야당 대표인 윤병선을 구심점으로 구국선언문을 발표, 대규모 시위에 들어갔다.
“국민을 무시하고 일제와 야합하는 사대 매국 정권은 물러가라. 반민족 행위자 박정명은 지금 당장 하야하라!”
“반민 정권의 민낯이 드러났다. 독재정권 물러가라!”
[국교 정상화는 매국 행위이자 경술국치, 정치자금 1억 3천만 불. 사건의 진실은?]
[일제와의 화의는 주권을 버리는 일. 경제 식민지와 일본의 전략은?]
언론에서는 일본 자본 유입은 이중 예속을 강화시키는 행위로 경제 식민지화를 가속화시킬 것이라며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다.
시민당 최고위원이던 최덕화는 군사정부가 대선전에 일본으로부터 선거 자금을 수수받았다는 의혹을 제기하며 여당을 궁지에 몰았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