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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양재벌 강태준-206화 (206/361)

206화 발해의 역풍

몇 번이고 강태준에게 애원하는 눈빛을 보내는 박재우였지만 강태준이 잠자코 외면했다.

결국 항복한 것은 박재우였다.

“하, 알겠습니다. 노력해 보지요.”

“감사합니다. 부디 좋은 결과 있으시길 바랍니다.

하릴없이 물러나는 어깨가 축 처져 보였지만 불쌍해 보이지 않았다.

그걸 본 강태준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시간은 겨우 벌었네.”

“형님 말씀대로 했습니다만 진짜 괜찮겠습니까? 수리가 정말 늦어지면 우리 쪽 일정에도 차질이 생기는데요.”

“그건 저쪽에서 일부러 약한 소리를 하는 거니 걱정 말라고. 아마 두 달 안에는 충분히 다 수리하고도 남을 거야.”

하지만 상황은 그렇게 쉽게 풀리지 않았다. 시중 은행들에 자금이 마르자 갑이 된 쩐주들도 이때가 기회라고 생각한 듯 쉽게 돈을 꿔 주지 않았던 것이다…….

자금을 구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녔지만 마땅한 답이 없다.

강태준의 얼굴은 며칠 새 중병을 앓다 온 사람처럼 핼쑥해졌다. 상황을 살펴본 오재갑이 강태준에게 말을 건넸다.

“이거 안 되겠는데요. 부산 쪽은 아무래도 시중에 자금이 씨가 마른 것 같습니다.”

“다른 곳은?”

“지방 은행들 쪽을 알아봤는데 예대 마진을 너무 높게 불러서 협상이 어려울 거 같습니다.”

그 말에 강태준이 다시 물었다.

“보진당 쪽에는 알아봤나? 백 영감님은 어떻대?”

“춘삼이 통해서 접촉해 봤는데 신용으로 대출 가능한 금액은 총 15만 불이 한계라네요. 더 원하면 추가로 담보를 걸라 하시더군요.”

“담보? 그 양반도 참. 그래서 이자율은.”

“연이율 180% 랍니다.”

180프로라니 15만불 이상은 절대로 불가능하다는 소리.

그쪽으로서는 내심 생색을 낸 금액이었지만 강태준으로서는 섭섭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돈도 많은 양반이 쩨쩨하긴. 그 돈 아주 무덤까지 가져가려고 그러나?”

“그보다 미래나 오성 같은 대기업들이 사채를 다 쓸어가서요. 이미 눈치 까고 먼저 움직였던 것 같습니다.”

“성가시게 되었군.”

“이제 어쩌실 겁니까? 본사에서 어음할인까지 해서 추가로 확보한 금액을 합해도 고작 20만 불인데요.”

“뭘 어쩌겠나. 일단 급한 대로 돌려막기 해야지. 인도 즉시 근저당이라도 설정하는 수밖에.”

최악의 경우에는 사재를 털어 넣는 수밖에 없다 결심했던 강태준이었지만 그건 최대한으로 지양하고 싶은 일이었다. 어찌할까 고민을 거듭하던 강태준에게 연락이 왔다.

“사장님, 박 사장님 전언인데 단풍호 수리가 완전히 끝났다고 합니다.”

“벌써?”

“아무래도 미쓰시오도 작정을 하고 철야 작업을 한 모양입니다. 아무래도 인도금을 바로 준비해야 할 것 같은데 어떡할까요?”

“허. 골치 아프네……. 벌써 그걸 다했다고?”

강태준의 이마에 깊은 골이 파였다. 남은 돈을 긁어모아도 최소 30만 불이 모자라는 상황,

“어쩔 수 없네. 일본에서 사채를 쓸 수밖에. 지금 당장 한창오 사장한테 연락하게. 내가 직접 찾아뵙겠다고 전하고.”

“한 사장이라면 파칭코 사업가 말입니까? 한순호 이사의 먼 친척이라는?”

“맞아. 파칭코 사업으로 돈을 많이 벌었다고 하니. 현찰이 꽤 있지 않겠나? 그 양반에게 비벼 봐야지.”

한창오는 호세이 대학 경제학부를 나온 인텔리다.

허나 좋은 머리를 가지고도 조선인이라는 출신 덕에 취직에 어려움을 겪던 중 운영난을 겪던 매형의 가게를 헐값에 인수에 사업을 키운 것이다. 그러나 오재갑으로서는 좀 못 미더운 모양이었다.

“한이사가 자랑스럽게 떠벌리긴 했지만 그 인간 허풍이야 알아주지 않습니까? 과연 돈 빌려 달라는 소리가 통할까요?”

“그래도 일면식도 없는 일본 업자한테 빌리는 것보다야 좀 낫지 않겠나. 나름 친했던 사이라 장담까지 했으니 매몰차게 거절하지는 않겠지.”

강태준 역시 사실 기대랄 것이 없었지만 일단은 지푸라기라도 잡아 봐야 하지 않겠나? 강태준이 교토까지 몸소 찾아갈 결심을 마친 그때, 요란하게 문을 열고 들어선 최선종이 숨을 몰아쉬며 외쳤다.

“부사장님, 됐습니다! 경제기획원 쪽에서 자금 지원 승인이 떨어졌답니다!”

“정말인가, 그게?”

“예. 국책은행이 매수 대금을 전액 지원하기로 했습니다. 급한 대로 일단 매수금 50만 불까지 단기 외화대출이 가능하다고 합니다!”

1년 만에 상환 만기가 돌아오는 단기 대출 조건이었지만 강태준으로서는 희소식이었다. 곧바로 대금을 지급하고 인도받은 단풍호는 그야말로 삐까뻔쩍했다. 홀린 듯 배 주위를 둘러보는 강태준이 박재우가 상기된 목소리로 물었다.

“어떻습니까. 부사장님. 이 정도면 만족하시겠습니까?”

“와, 이건 거의 신규 선박이군요. 이 정도까지 선박 정비사 분들이 정말 고생했겠네요.”

“알아주시니 감사합니다. 로터는 물론이고 베어링을 교체하고 밸브시트, 오링까지 싹 새 걸로 죄다 갈아엎었습죠. 인터쿨러 튜브 파공까지 별도 검사했어요. 부품을 하나하나 분해한 다음 스케일 걷어 내고 경유로 씻어 내고……. 난리도 아니었습니다.”

“수고 많았어요.”

“아후 아닙니다. 당연히 해야 될 일인데요.”

너스레를 떠는 박재우의 말에 강태준은 그간의 고생을 알고도 남았다.

기관장과 기관부원이 지켜보는 가운데 시운전 테스트를 했다. 낮게 부들거리는 엔진음과 함께 부드럽게 선회하는 배의 모습에 오재갑이 부러운 듯이 감탄을 거듭했다.

“와. 이거 물건인데요. 누가 캡틴이 될지는 몰라도 참으로 부럽습니다.”

“허허 그래? 그럼 굳이 부러워할 거 없겠구먼. 이제 재갑이 자네 배야.”

“네? 제 배요?”

오재갑이 눈을 끔뻑이자 강태준이 당연하다는 듯 대꾸했다.

“뭐 당연하지 않나. 이런 배를 운용할 만큼 실력 있는 선장이 몇이나 있다고.”

“그게 형님도 있지 않습니까?”

“하하. 나는 당분간 뭍에서 할 일이 많아. 게다가 이제 자네도 짬이면 어디 뒤지지 않지 않나. 그래서 내가 추천했는데 혹시 자신 없는 건 아니겠지?”

“그럴 리가요. 절대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

결연한 목소리로 고개를 끄덕이는 오재갑의 표정은 은근히 상기되어 있었다.

사실 역사에서 탑재 모선식 선박을 처음 도입한 사람이 바로 오재갑인 만큼 이보다 더 적합한 인선은 없다고 생각하는 강태준이었다.

양도된 배 상태가 문제없음을 확인했으니 이제 출항 준비만 하면 된다. 하와이 쪽에서 회신이 오기 전 며칠 더 체류하기로 한 강태준. 조업 연습을 하는 배를 유심히 살펴보는 사이, 부둣가 옆으로 인영 몇이 나타났다.

“김 부장님!”

“아직 출항 안 해서 다행이군. 구매한 선박은 문제없고?”

“예. 힘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고개를 수그리는 강태준의 행동에 김필중이 손을 휘휘 저었다.

“뭘 그렇게까지. 애초부터 내정된 금액 아닌가. 양 수석이랑 경제기획원 쪽에서도 원양어업의 사업성에 대해 꽤 긍정적으로 평가하더군. 다만 단기 대출 건은 지금으로선 최선이었네. 일단 일본에서 청구권 자금이 들어오면 추후 장기 대출로 전환할 수 있을 거니 걱정 마시게나.”

“이거 몸둘 바를 모르겠군요. 근데 청구권 자금이라니 협상이 벌써 끝났습니까?”

“하하. 자네 덕분에 협상이 잘 풀렸어.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꽤 유리한 조건으로 협상을 타결할 수 있었네. 공식적인 비준 발효는 8개월 뒤로 정했네.”

“그렇다면 이제부터 시작이군요.”

“그래. 일단 국내적인 소요부터 각오해야지 이제부터가 진짜 아니겠나?”

한일수교 후 청구권협정을 시행하기 위해서는 국내적으로 자금 관리, 운용을 위한 기구와 법령을 정비하고, 구매사절단 설치 및 거래은행 지정과 같은 각종 미합의 사항에 대한 실무협의가 필수다.

청구권 집행 첫해부터 어느 규모로 어떤 물자들을 도입할지는 미정인 만큼, 자금의 집행 추이와 관련된 부분에 있어 기 싸움을 피할 수 없는 법.

그 기나긴 협상과 필연적으로 이어질 분쟁을 생각하니 정신이 아찔해진다. 돈을 주는 일본 입장에서 얼마나 생색을 내며 거드름을 피울지, 대충 예상되는 부분이었던 것이다.

‘더럽고 치사하더라도 어쩔 수 없다. 경제발전을 하려면. 어떻게든 빨리 대가를 받아 내는 수밖에.’

산업보국이라는 글자를 되새기며 김필중이 결기를 불태우는 사이. 수평선을 가로지르는 적란운이 빛무리에 반사되고 있었다.

붉게 노을이 진 하늘에서 빛이 꺼질 무렵,

부산 사하구 감천동의 수리조선소.

부산에서는 힘차게 들려오는 망치 소리. 휘황찬란한 집어등을 광원 삼아 발해원양 쪽에선 밤새도록 수리 작업이 계속되고 있었다.

구슬땀을 흘리는 작업자들을 돌아보며 이억수가 여기저기 훈수를 두고 있었다.

“임마, 거기 왜 그렇게 손이 느리나. 똑바로 못 해?

“죄송합니다.”

“비루먹은 강아지도 아니고, 작업 한두 번 하나? 땜질 그따위로 할 거야?”

사장이 하루 종일 눈에 불을 켜고 감시하고 있으니 부담감에 죽을 맛. 그러던 중 눈에 다래끼가 난 작업자가 실수를 했다.

메인 데크 선실 철판 절단 작업을 하던 중 불이 번진 것이다.

“불이야 불~!!”

놀란 노무자들이 사방에서 난리법석을 떨었다. 소방요원들이 출동해 불은 곧 진화되었지만, 머리끝까지 화가 난 이억수는 울분을 참지 못했다.

“야 썅놈의 새끼들아 정신 못 차려! 배 홀랑 태워 먹을 거야?”

쌍으로 싸대기를 갈기며 훈계하는 이억수었지만 지은 죄가 있는 작업자들은 아무 말도 못 했다. 길길이 날뛰는 송규익과 이억기가 그를 말렸다.

“사장님, 피곤하실 텐데, 이쯤 들어가십시오.”

“예. 형님. 들어가시죠.”

“참나, 니들……. 다 두고 볼 거야.”

보다 못한 송규익 부장이 이억수를 모시고 자리를 피하자 얼굴이 뻘게졌던 이억수가 열을 식혔다.

“아니, 쌍. 선박 수리 작업이 왜 이렇게 오래 걸리는데?”

“생각보다 고칠 부분이 많습니다. 보일러가 누수되고, 덱크 머시너리랑, 상하 터널부 부식, 타기실 등 선내 누수나 발청이 있어서 강재 공사 및 보수도장 작업도 필요하고요.”

“스벌. 그래서 다 뜯어 봐야 한다는 건가?”

“조업 컨디션 유지 관리를 위해서는 불가피한 부분이라서…….”

“잔말은 됐고, 그래서 얼마나 걸리는데?”

도움을 청하듯 옆을 돌아보는 송규익에 딴청을 피우는 이억기.

송규익이 눈을 질끈 감고 대답했다.

“최소로 봐도 3달은 더 소요될 거 같습니다.”

“뭐야? 3개월씩이나. 왜 자꾸 말이 바뀌는 건데?”

사나워진 이억수의 눈빛이 다시 살기등등해진다. 사람 하나 담가 버릴 거 같은 살벌한 눈빛에 송규익이 서둘러 선수를 쳤다.

“그게. 사장님. 부산항서 항만 정비공사가 진행되는 와중이라. 쓸 만한 숙련공들이 없습니다. 북항 정비가 끝나려면 최소 몇 개월은 소요되서 그때까지 인력 수급이 어렵습니다.”

“사람이 부산에만 있나. 여기 인력이 없으면 딴 데서 수급하면 되잖아? 울산 쪽, 그래 장생포 쪽에 꽤 좋은 기능공 인력들이 많다는데 데려오면 되지 않나?”

“그쪽도 이미 가호 안 공사에 돌입해서요. 펌프식 준설선까지 도입해 항로 및 박지 준설 시행작업 중이라. 인력 수급이 어렵기는 매한가지입니다.”

일시적이지만 수급 부족 현상 덕에 근래 숙련공 몸값이 배로 뛰었단다. 기가 막힌 이억수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이건 숫제 배보다 배꼽이 큰 꼴이 아닌가.

-다음 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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