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5화 오키노토리시마
김필중의 표정이 변했다.
“그래?”
“네. 일본은 경제가 고도성장하면서 이미 선진국 단계에 접어들었지요. 지금 당장이야 일본이 기술적 우위에 있지만 이 차이는 충분히 극복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인건비는 고정비라는 거죠.”
“그러니까 자네 말은? 어선 규모가 대형화되어도 인건비 부분은 극복하기 어렵다는 뜻인가?”
“네, 지금은 불리한 계약으로 보일지 몰라도 아마 어느 순간부터는 우리가 공동수역에서 오히려 기국주의의 혜택을 보게 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실제 한국에서도 평화선이 철폐되는 순간 일본 어선들이 월등한 기술력을 바탕으로 한국 근해의 어업
자원을 말살시킬 것으로 우려했지만 실제 벌어진 상황은 예측을 벗어났다.
협정 당시에는 일본이 절대적 우위를 보이는 것을 보였지만 한국이 정책적으로 어업을 집중 육성한 결과 1977년을 기점으로 어업에서의 우위가 완전히 역전되었고, 90년대 참다못한 일본 스스로가 계약을 파토 내기 전까지 계속 이어진다.
“흠. 그러니까 기국주의는 양날의 검이라는 거군. 그러니 꼭 우리 쪽에 불리하다 볼 수 없다?”
“예. 우리 쪽 기반이 갖춰진다면 협정서에서 제주도 동쪽의 선망 어장과 제주도 서쪽의 이서 저인망 어장을 내주는 문제는 사실 부차적입니다. 하지만 절대로 양보해서는 안 될 부분이 있지요. 바로 어업 경계선입니다.”
강태준이 펜을 들어 동그랗게 칠한 곳은 독도였다.
“어업 경계선은 울릉도가 아닌 바로 여기, 독도가 기점이 되어야 합니다. 최소한 공동규제 수역의 기점으로 말이죠.”
“독도를 기점으로 삼으라고? 그놈의 독도 아주 지겹구먼. 그거야말로 그냥 돌섬 아닌가. 물론 일본에 줄 바에야 폭파해 버리는 게 낫겠지만 말이야.”
강태준의 말에 김필중은 무척 성가시다는 표정을 지었다. 한일관계 개선에 가장 큰 장애물인 동시에 영토분쟁의 최전선인 만큼 엄청나게 민감한 사안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강태준으로서는 반드시 짚고 넘어갈 부분이었다.
“이 독도는 상상 이상으로 경제적인 가치가 훨씬 큰 곳입니다. 여기는 지형상 대량의 해양자원이 매장되어 있을 확률이 매우 높거든요.”
“독도 밑에 자원이 있을 수 있다?”
“생각해 보십시오. 일본 놈들이 독도를 계속 물고 늘어지는 이유가 뭐겠습니까. 지금이야 기술적 한계 때문에 채굴하지 못하고 있지만 중동을 보면 알 수 있지요. 유전이 발견된 후 어떻게 되었습니까? 사막의 유목민에서 완전히 벼락부자가 되지 않았습니까?”
“흠…….”
고민에 빠진 김필중의 표정에 강태준이 거듭 강조했다.
“근해의 해저에 탐사공을 뚫어서 조사해 보면 알겠지만 저는 확신합니다. 독도 역시 환경 조건상 지하자원이 묻혀 있을 확률이 높지요. 그 외 섬 북부를 20m 두께로 덮고 있는 인산염과 해저에 위치한 천연암반수와 생물자원도 얼마만큼의 가치가 있을지 모릅니다.”
“그래, 자네 말이 맞다고 치세. 하지만 당장 개발은 그림의 떡 아닌가?”
“물론 현재로선 상업성이 없겠지요. 하지만 가까운 미래는 다르지 않겠습니까? 최소한 독도를 공동규제수역 안에는 포함시켜야 합니다. 분쟁의 매듭을 확실히 해 두지 않으면 분명 꼬투리를 잡힐 테니까요.”
“그럼 남해 해역과 관련해서 우리 측 요구할 부분이 줄어들게 되네.”
“남해는 어차피 우리 텃밭이니, 잠시 어장을 양보하는 정도야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독도를 규제 수역 내에 포함시키는 것은 단순한 어업문제로 끝날 일이 아닙니다. 그건 국제법상 영유권 논란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부분입니다.”
“거참, 난처하군. 그 부분은 이미 더 이상 서로 언급하지 말자 이야기를 끝냈네. 이제 와 판을 뒤집으면 아예 협상이 결렬될 확률이 높은데 말이야. 더욱이 독도와 관련해서 협상 카드로 삼을 부분도 없지 않은가?”
“왜 없습니까? 논의의 평면을 바꾸면 되지요.”
품에서 펜을 꺼낸 강태준이 일본 열도를 기준으로 저 멀리 섬 두 개를 그림을 그렸다.
남쪽에 침대처럼 생긴 모양 한 개와 서쪽에 그려진 섬의 모양에 김필중의 눈이 의문부호를 그렸다.
“이게 뭔가?”
“오키노토리시마입니다. 서태평양 필리핀해에 있는 작은 환초인데. 둘레 10㎞ 정도밖에 안 됩니다. 그리고 이 서쪽 섬은 오가사와라 현에 속하는 미나미토리시마라는 곳인데 태평양 한가운데로 있는 섬입니다. 2차대전 직전 일본인 주민들이 본토로 소개되어 다시 무인도가 된 지역이죠.”
“일본이 여기까지 진출했었나? 둘 다 처음 보는 곳이군.”
김필중이 흥미로운 듯 까칠한 턱수염을 훑었다.
“정략적으로 중요한 곳은 아니다 보니 애초에 알고 있는 사람이 드물죠. 아무튼 현재 이 환초와 서쪽의 섬은 2차 세계대전 후 샌프란시스코 조약에 따라 역시 미국의 통치를 받고 있습니다. 일본에서는 반환 운동을 펼치고 있지만 미국은 오키나와와 그 부속 도서를 반환할 생각이 없고요. 그러니 이 부분을 교묘하게 이용하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미나미토리시마는 이해가 가지만 오키노토리시마는 왜? 자네 말대로라면 고작해야 환초 지대 아닌가? 사람도 살 수 없는 암초인데 말이야.”
“해석의 여지를 남겨두면 혹 모르니까요. 해양법상 암초가 아닌 암석의 지위를 얻는다면 이 일대에서 제주도만 한 크기의 바다를 영해로 보유할 수 있지요. 게다가 미나모토리시마는 지금도 무인도나 다름없습니다. 사실 우리가 이 부분을 쟁점화한다면 일본 입장에서는 골치 아파지지 않겠습니까?”
실 역사에서 일본은 68년 미국으로부터 오키나와와 함께 돌려받는다. 베트남전 개입으로 인해 동맹국의 지지가 필요했던 미국으로서는 불가피한 선택이었겠지만 현재로서는 애매한 구역. 김필중 입장에서는 구미가 당기는 소리가 아닐 수 없었다.
“호오. 그래서 이 부분을 지적하라?”
“네 맞습니다. 반환 압력이 거세지고 있지만 아마 미국도 본심은 오키나와 일대를 돌려주고 싶지 않을 겁니다. 더욱이 일본은 현재 미일 안보 신조약 문제로 내각이 총사퇴한 상황이지요. 새로 선임된 사토정권은 미일 외교 문제에 민감한 만큼 이 부분을 공략한다면 뭔가 해결책이 보이지 않겠습니까?”
“확실히 그렇겠어.”
“참고로 협정문에는 전관수역이라는 명칭과 폭을 구체적으로 언급하기보다 경도나 위도로 표시하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눈 감고 아웅 하기 정도로 보일 수 있겠지만 구체적으로 전관수역이 설정되는 것보다는 어족 보호선 정도로 대충 얼버무리는 게 대내외 여론을 의식할 때 매끄러우니까요.”
“조언 아주 유익했네, 지적한 부분은 꼭 참고하지. 그럼 혹 초안 작성 시에도 도움을 줄 수 있겠나?”
은근한 제안이었지만 강태준은 에둘러 거절했다.
“하하. 저야 대충 골격만 알 뿐이라 별 도움이 안 될 겁니다. 실제 협정과 관련해서는 법률 전문가가 필요하죠. 해양법 관련해 설인모 중령님께서 해양법 연구의 전문가시니 그분을 부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전시 징발과 관련해서 도움을 주신 적이 있었는데 선박과 항만 관련 실무경험도 많다 들었거든요.”
“아, 설 중령? 나도 기억나는군. 같이 축구도 많이 뛰었는데 옆에 두고도 몰랐구먼. 역시 자네랑 만나기를 잘한 거 같아. 이번 일이 잘 풀리면 꼭 보답하겠네.”
“어인 말씀을. 저도 대한민국 사람 아닙니까? 향후 좋은 성과 있으시기 바랍니다.”
김필중과 대화를 마친 강태준은 곧장 호텔로 다시 향했다. 짧은 대화였지만 밀도 높은 대화를 나눠서일까. 심적 소모가 심했던 것이다.
“최 부장, 본사랑 연락해 봤나?”
“네, 아직 기다리라고만 할 뿐, 양 사장님은 아직 말씀이 없으십니다.”
내심 걱정이 되는 강태준이었지만 다행히 며칠 후, 내정되었던 배가 항구에 도착했다.
대체 선박으로 온 배를 발견한 오재갑과 최선종이 매끈한 유선형의 선체에 감탄을 거듭했다.
“이 배가 단풍호군요. 정말 새 배처럼 깔끔한데요.”
“예. 진수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순간 가속력이 좋습니다.”
일부 해풍에 삭은 부분이 있기는 했지만 배의 외관은 아주 깨끗한 수준이었다. 배에 오른 강태준 일행은 조타실부터 냉동창고, 엔진룸까지 샅샅이 살펴보았다.
협약 증서와 서류를 바탕으로 선박과 설비 및 전반적인 상태를 점검하는 작업이었다.
주의 깊게 배 상태를 점검 중인 강태준이 말이 없자 박재우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 뭔가 맘에 들지 않은 부분이 있으십니까?”
“이 배가 운항 중단된 기간이 얼마나 됩니까. 이쪽에 인도받기 전에요.”
“그게 대략 1년 정도 되었지요. 일단 운행 중에 담보로 압류된 물건이긴 한데 정확한 일자는 좀…… 중간에 일이 여러 번 있어서 말이죠.”
강태준이 서류를 보며 지적했다.
“좀 보수할 부분이 있어 보이는군요. 무엇보다 냉동창고 기능이 저하된 게 눈에 띄네요. 냉매 가스 보충과 함께 시스템도 재구축해야 할 거 같습니다. 냉매 탱크도 대대적으로 보수해야 할 거 같군요. 보아하니 여기저기 삭은 부분이 보이는데 혹 암모니아가 용출되면 큰 사고가 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예. 그 부분은 아직 미점검이라 조치하라 명하겠습니다.”
“그리고 키 외에 조타 설비가 약간 문제가 있습니다.”
박재우가 물었다.
“어떤 부분 말이십니까?”
“네! 모든 어선은 최대 출력으로 달릴 때 항해 중에 타를 한쪽 현 타각 35도로 좌우 회전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혹시나 돌발적인 사고를 피하려면 최소 28초 이내에 전타할 여유가 있어야 하는데, 좀 많이 뻑뻑합니다, 또한 조타장치가 고장이 날 경우에 예비도 없어서. 틸러나 쿼드란트도 바꿔야 할 거 같고요.”
예리한 지적이 이어지자 박재우가 땀을 흘렸다.
“그. 그게 예비 부분은 수리 중에 있습니다. 과압을 방지하기 위해 릴리프 밸브가 제대로 동작하지 않았군요, 불편을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그럼 최대한 실제 스펙상 성능과 차이가 없게 조정해 주십시오. 위기 때 대처하려면 1/2 출력으로 60초 내 타각을 30도까지 조정이 가능해야 하거든요. 그게 가능하지 않는다면 위험대처가 어려워요.”
김정욱이 항해사를 맡았을 때 아찔한 순간을 겪었던 강태준으로서는 결코 좌시할 수 없는 문제였다. 강태준의 말이 끝나자 이번에는 오재갑이 말했다.
“추가로 수년 동안 정상 가동하지 않아 선박 엔진 오버홀(Overhaul) 작업도 필요할 거 같습니다. 아까 엔진 소리를 들어보니 영 껄끄럽더군요. 회전부 쪽에 이상이 있는 것 같으니 추가 검수가 필요해 보입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엔진을 완전 분해해야 할 거 같습니다.”
“예? 오버홀 작업을 하려면 육상 작업이 필수인데요. 장비를 해체하고 원인을 파악하려면 추가 비용이 듭니다만…….”
“그거야 그쪽이 부담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하자가 있는지는 그쪽이 점검하는 게 맞을 텐데요.”
“그야 그렇지만 다른 선박 수리 건도 있어서, 시간상 여유가……. 최소 서너 달은 소요될 수 있습니다.”
그 말에 오재갑이 완전히 마뜩잖은 얼굴로 대꾸했다.
“그건 너무 긴데요. 저번에 분명히 말씀하신 바로는 여기가 일본에서 제일 잘 나가는 조선소라지 않았습니까? 견학 때 보니 육상 작업에 필요한 크레인부터 스페어 장비까지 없는 게 없던데. 노멀 공정이 아닌 에머전시로 처리하면 충분히 단축할 수 있을 거 같은데요.”
“가능한지 조선소와 논의할 문제라.”
“아무튼 이 부분은 저도 양보 못 합니다. 최대한 빨리 작업 진행해 주십시오.”
오재갑이 미리 약정했던 대로 강하게 나오자 박재우는 당혹스러웠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