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4화 평화선과 기국주의
“네, 우리나라는 이런 버거를 판매한다면 상당히 고가라. 못 만들지는 않겠지만 일반 서민이 사 먹기 힘들지 않을까 합니다.”
“그래 자네 말대로 서민이 먹기에는 부담스럽겠지, 헌데 일본은 다르더군. 충격적인 것은 식육 판매장에 가 보니 고기를 등급, 브랜드, 품종에 따라 가격 차등을 두고, 동일 등급에서는 브랜드에 따라 차이가 있다는 걸세. 이거 기가 막히지 않나?
“일본이란 나라는 무려 1,200년간을 채식주의를 택한 나라였던 걸 생각하면 대단한 건 맞죠. 거기에 품종별로 육고기를 등급화할 정도니 행정 제도가 선진적이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겠군요.”
김필중이 숨을 몰아쉬듯 뒷맛을 곱씹으며 반만 남은 햄버거를 노려보았다.
“듣자 하니 일본의 농촌 인구가 천만이 조금 넘는다는군. 인구 대비로 치면 한국의 절반 수준이지만 식량 자급률이 80프로가 넘는다네. 근데 우린 뭔가. 보리죽에 피죽도 못 먹는 사람들이 대다수고. 소고기래 봤자 농경을 위주로 한 역우가 전부고 돼지도 잔반으로 사육하는 정도. 양계도 방사나 다름없지 않나.”
한국의 현실을 생각하니 씁쓸하기 짝이 없는 일. 어쩐지 이 햄버거를 먹는 것이 죄를 짓는 기분이라고 할까. 입맛이 떨어진 강태준이 조용히 대꾸했다.
“이 모든 성과는 계열화를 통한 효율성이 극대화된 결과지요.”
“계열화?”
“계획 생산, 수급 조절, 시장 통합 이걸 다 계열화라고 부르지요. 일본은 메이지 시절부터 정책적으로 농업을 육성해 왔습니다. 팽창주의 노선을 채택하면서 생산성을 극대화시키기 위해 국가적인 노력을 기울였지요. 부화장, 사료 회사, 도계장, 육계 농가 등등 너나 할 것 없이 정부 정책자금에 편승해 발전한 거지요.”
“1910년대라. 까마득한 차이로군. 그때부터 육종 개량을 시작했다라.”
“지금도 현재진행형이죠. 일본 정부는 정부가 주도적으로 시장 활성화를 도모하고 교통이 좋은 도로변에 직판장을 설치해 직거래를 장려하고 있지 않습니까. 힘들지만 우리도 그 과정을 따라가야 합니다. 밑바닥에서부터. 차근차근.”
“그래 자네 말이 맞아. 지금이 바로 그럴 타이밍이지.”
김필중은 다시 햄버거를 우물우물 삼켰다.
“현재 미국은 일본을 중심으로 아시아 경제 질서를 재편하려 구상하고 있어. 냉전이 본격화되는 지금 공산 진영으로부터의 방파제가 되어 줄 일본과 그 최전방인 한국과의 관계 개선이 필요한 시점이고.”
“일본 입장에서는 과거의 유산을 싸게 청산하는 한편 한국을 배후 시장으로 확보할 생각에 골몰해 있겠지요.”
“고깝긴 하지만 한국도 경제 발전을 위해서는 수교가 절실한 시점이지. 아무리 원수가 미워도 국교부터 정상화해야 뭐라도 물꼬가 트이지 않겠나? 받을 빚이 있으니 말이야.”
“대일 청구권 협상 말입니까?”
“그래. 언젠가는 매듭지을 일이 아니겠나? 그간 시일이 너무 지났어. 더 이상 정치적인 부담이 있다 해서 미룰 수는 없는 일일세.”
“하지만 정치적으로 민감한 문제일 텐데요. 어떤 방식으로 결론을 짓던 그건 욕을 먹을 수밖에 없겠죠.”
60년대 일본에 대한 국민 정서는 최악의 수준이었다. 반일주의가 극에 달해 있는 현재 수교를 강행한다는 건 반발을 각오해야 하는 일. 그러나 언젠가는 겪어야 할 피할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하하. 나도 알아. 하지만 어쩌겠나. 내가 이완용이 소리를 들어도 일단을 자본부터 확보해야 빨리 공장을 세우고 기술을 배워 나라를 발전시킬 수 있지 않겠는가? 난 그게 혁명의 대의라고 생각하네.”
“어깨가 무거우시겠군요.”
“하하, 뭐 일단은 얼굴마담이지. 사실 군바리가 세부적인 부분이 뭔지 뭘 알겠나. 나야 실무진 의견에 잡음이 생기면 의견만 조율할 뿐이고.”
“사공이 많으면 산으로 갑니다. 그게 진짜 중요한 일이죠. 저도 별로 아는 것은 없지만, 혹시 도움 될 만한 것이 있다면 도와드리겠습니다.”
“고맙네. 사실 그래서 강 부사장을 만나 보고 싶어 찾아온 걸세.”
“제가 아는 거야 바다와 관련된 일뿐인데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무슨 소리를. 사실 이번 협정에서 제일 큰 이슈는 어업권 분쟁일세. 아무래도 해양영토 문제랑 평화선 등이 걸려 있으니 말이지.”
“골치 아프네요. 그거.”
“그래. 하지만 일본과의 국교 정상화를 위해서는 피할 수 없는 부분이야. 그쪽에서는 어떻게든 이참에 이 부분을 매듭짓고 싶어 하니까. 다만 협상의 주도권을 잡으려면 상대의 약점과 의도를 파고들 수 있어야 하는데, 우리 쪽에는 영 그런 포인트를 집을 전문가들이 없더군. 그래서 자네 조언을 얻고 싶어서 말이야.”
“조언이라면 어떤 점이 궁금하신지요?”
“거두절미하고, 이것부터 봐야 할 거 같네.”
품에서 만년필을 꺼낸 김필중은 아까 펼친 냅킨 위에 상세하게 그림을 그렸다.
한반도 모양과 일본 해역이 그려진 모식도에는 동해 북부의 원산만과 웅기만까지 포괄하는 권역에 동그라미가 처져 있고 그 안이 파란색으로 빗금이 처져 있었다.
“북한 쪽 권역은 협상에서 배제했군요.”
“그래. 여기서부터가 협상의 시작점일세. 사실 여기까지 합의를 보는 데만도 시간이 오래 걸렸네. 여기 검은 선이 이견 없이 합의한 부분이고. 이 파란 선이 이번 분쟁에서 논의의 쟁점이 되는 분쟁지역일세. 여기 본토와 제주도를 이은 직선 기선은 한국 측 주장이고, 이 붉은 색이 일본 측의 주장이지.”
지도 위에 새로 붉은 볼펜으로 빗금을 치는 김필중. 울릉도를 기점으로 삼아 안쪽은 공동규제수역으로 표시되어 있었고 그 안에 독도가 들어있었다.
“흠. 보아하니 일본 측 주장은 제주도와 본토를 분리한 다음 저조선에 기초하여 전관수역을 설정해야 한다, 이렇게 주장한 거 같군요. 제가 이해한 게 맞습니까?
“역시 척하면 척이군. 맞네. 일단 육지로부터 12해리까지 배타적 관할권을 행사하는 전관수역을 설치하고 그 외는 잠정적으로 공동규제수역을 설정하자는 주장이지. 공동수역 내 어선 단속 및 재판권에 대해 기국주의를 채택하자는 것이 이번 어업협정을 핵심 골자지.”
강태준이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이건 날강도인데요. 공동규제수역이 이렇게 넓어서야. 기국주의를 택하면 거의 서해를 안방으로 내주는 셈이겠네요.”
“그래도 완강해. 한국의 동해안은 오랫동안 자기네들 생활 터전이었기 때문에 12해리를 넘으면 국내의 정치세력이나 국민들을 설득할 수 없다더군.”
“흠……. 그거야 그쪽 사정이고. 이건 받아들일 수 없는데요.”
기국주의란 공동규제수역 내에서의 어업에 관한 단속 및 재판 관할권이 오롯이 어선이 속하는 체약국만 행사할 수 있게 하는 배타적인 권리를 말한다. 다시 김필중이 말했다.
“그래서 많이 싸웠지. 우리도 맨입으로 양보할 순 없잖은가. 그러니까 저쪽에서 별도의 금전적 보상을 제시하더군.”
“보상으로 내겠다 한 금액이 얼맙니까.”
“일단은 민간차관 형식으로 7천만 달러 정도야. 일단 우리 측에서는 1억 1천 4백만 달러를 요구하여 네고 중이지만 현실적으로 협상이 타결되더라도 아마 9천만 달러 선이 한계일 걸세. 공여 기간은 3년, 이자 3.5%에 3년 거치 후 7년간 균등상환이 조건이지.”
당시 기준으로도 결코 적은 금액은 아니었지만 강태준이 판단하기엔 영 미덥잖은 조건.
애초에 평화선이란 게 고작 그 정도 헐값이 아니지 않은가. 강태준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평화선을 포기하는 대가가 고작 9,000만 달러라니. 미래 가치를 생각하면 좀 많이 부족해 보입니다만.”
“물론 한일 기본 협약상 보상액과는 별도로 받을 금액이네. 다만 자네도 이해해야 하는 게 평화선 문제를 양보하지 못하면 협상 자체가 진전될 가능성이 없다는 걸세. 이미 올해 초 한일 농상 회담에서 12해리 전관수역의 합의가 암묵적으로 이루어진 상황이거든.”
김필중의 말에 반박하는 강태준이었다.
“하지만 평화선을 폐지하고 공동수역이 이렇게까지 넓어지게 되면 성능이 좋은 일본의 어선이 동해의 물고기를 싹쓸이 건 불 보듯 뻔한 일입니다. 어민들이 이해할 리 없지 않습니까?”
“나도 알아. 그러니까 공보를 통해 정부 입장에 대한 국민의 이해를 증진시켜야겠지. 추후 어민들의 경제적 자립을 위해 보상금 책정할 예정이고, 사실 경제적인 관점에서만 본다면 평화선의 존치가 반드시 유리한 것은 아니지 않은가.”
일방적인 통보나 다름없는 말. 그에 강태준이 쓴웃음을 지었다.
“이미 윗선에서는 어떻게든 이번에 무조건 합의를 추진하기로 결론을 내렸군요.”
“그래서 최종적으로 양보할 선을 정해야겠지. 그러니 어업인으로서 뭔가 협상에 놓치는 부분이 있지 않나 자네의 고견을 묻는 걸세.”
“네, 제가 보기에도 일본은 어업협정을 통해 평화선을 무력화하는 게 목적이란 건 확실한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추가로 우리 측이 주장할 부분이 있는지 검토해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강태준이 손으로 그린 지도를 다시 살피며 말을 골랐다.
”맞는 말일세, 그런데 해양분야에 대한 지식이 부족해서 일본 측에 계속 끌려만 다니고 있네.”
“일단 전관수역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을 피해야 합니다. 그 전에 일본이 어떻게 나올지 예상부터 해 보지요. 지금까지 평화선 침범으로 나포한 척수는 얼마나 되는지 혹시 알 수 있습니까?”
“내가 듣기로는 지금껏 나포한 총 척수를 합하면 도합 3,450척이 넘는다고 하네.”
“그러면 십중팔구 일본 정부로서는 우리가 나포한 어선에 대한 배상금을 요구하며 이를 정식 의제로 주장할 가능성이 크겠군요.”
“흠…… 확실히 그것도 생각해 봐야 할 문제군. 나포 선박에 대한 보상문제부터 합의해야 한다 주장할 수 있으니까.”
“네. 그걸 빌미로 보상액을 줄이던지, 아니면 제주도 일대의 어장을 추가로 내놓으라 압박을 하겠죠.”
턱을 괴던 김필중이 표정을 굳혔다.
“그건 우리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이겠군. 일단 평화선까지 양보한 입장에 제주도 주변의 어장마저 전부 양보한다면 한국으로서는 손실이 매우 클 거야.”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도 답은 정해져 있지요. 일단은 무조건 단속 규정을 계속 물고 늘어지는 수밖에요.”
“그게 무슨 뜻인가?”
강태준이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일본이 보상을 요구하는 건 협상을 유리한 쪽으로 끌고 가려는 구실이죠. 사실 일본이 중점적으로 보는 부분은 체약국의 어선 단속 및 재판 관할권입니다. 아마 이 두 개를 얻기 위해서라면 다른 부분은 사소한 문제일 수밖에 없습니다.”
“과연 놈들이 그렇게 생각할까?”
“정치에서 중요한 건 뭣보다 표 아니겠습니까. 일단은 일본도 표면상으로는 민주국가이니만큼 어민들의 표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으니까요. 게다가 일본 정부로서는 일단 자신감이 있겠죠.”
“하긴 일본 측은 저희보다 기술이나 자본 면에서 압도적인 위치에 있으니. 일단 조업만 허락되면 옆 나라의 어업을 고사시키는 건 시간문제라는 판단이 들겠지.”
“하지만 길게 본다면 기국주의가 지금 당장은 손해일지언정 오히려 기회가 될 수도 있습니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