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양재벌 강태준-203화 (203/361)

203화 상업 차관

“그래서 4,000만 달러를 통으로 해 먹었다는 말입니까? 기가 차군요.”

“빌어먹을 일이지. 이때다 하고 언론에서 차관 대금 비리를 대대적으로 보도한 덕분에, 차관 도입과 관련된 비리가 국회에서 수면 위로 떠올라 버렸어. 그래서 지금 분위기가 아주 안 좋아.”

그러나 강태준에게는 되도 않는 변명일 따름이었다.

“수산개발공사가 정치인과 짜고 해 먹은 외화자금이 4,000만 달러라고 해도 민간업체들까지 몽땅 도매금으로 갖다 붙이는 건 너무 불합리하지 않습니까? 사실 민간업체에 배당된 차관분은 고작해야 20프로 정도로 800만 불이 전부인데, 이건 말이 되지 않잖습니까?”

“실질은 그렇지. 근데 우리 외에도 차관에 기대어 배를 수령하려고 준비했던 대기자가 많다더군. 그래서 반출 가능했던 외화 액까지 전액 홀딩 상태야. 더는 따지지 말자고. 나도 짜증 나 죽겠으니까.”

깊은 빡침이 느껴지는 답에 강태준이 한숨을 쉬었다.

“그러면 지금 당장 가용 가능한 금액이 얼마랍니까?”

“지금으로서는 10만 불도 대출받기 힘든 상황일세,”

“허어. 그럼 계약을 왜 했는지. 이거 외통수 아닙니까?”

일이 하필 이렇게 꼬이다니. 정부가 금융지주사 회장이나 시중 은행장 인선에 개입하는 것이 늘상 있는 일이지만 하필 지금이라니. 정권이 교체되면서 시중 은행장들을 대거 물갈이되는 타이밍이 매우 나빴다. 잠시 고심하던 강태준이 아이디어를 냈다.

“양 사장님, 혹 일전에 은행에서 받았던 외화대출 지급 동의서는 있습니까?”

“그건 있지 근데 왜.”

“그걸 토대로 경제기획원 쪽에 인가 신청을 따로 넣어 보십시오.”

“아니 뜬금없이 거긴 왜 쑤시나?”

“그쪽에 외자 도입 심의위원회가 있지 않습니까? 그쪽은 독립성을 갖춘 별도 부서로 이 부분에 대해 심사 권한이 있습니다.”

“그래? 하지만 지금껏 은행에서 직접 판단해 오지 않았나?”

“관행상 그렇긴 하지요. 하지만 이번처럼 큰 문제가 터졌으니 경제기획원 쪽에서 충분히 칼을 쓸 수 있지 않습니까. 그쪽으로서는 개입의 명분을 쥐게 되는 셈이니, 분명 심사 신청을 반길 겁니다. 개입의 선례가 생기는 거니까요.”

경제기획원은 외자도입법 8조 상 사업 타당성 검토를 할 권한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법적으로 공익상 필요에 의해 사업 지원에 따로 예산을 편성할 수 있다는 규정이 있었다. 그 이야기를 전해 들은 양재문은 반신반의했다.

“과연 지금 분위기를 봐서 그게 될까? 이게 괜히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게 아닐지?”

“그래도 할 수 있는데 까지는 해봐야죠. 최소한 은행에 압박을 넣을 수는 있지 않겠습니까? 일단 선수금 10만 불이라도 빨리 보내 주십쇼. T/T(전신환: Telegraph Transfer)를 송금할 수 있게 협의하였으니, 거래은행과 협의해 빠르게 조치 부탁합니다.”

“하아. 일단 최선을 다해 보겠네.”

양재문은 자신 없어 보였지만 어쨌든 못 한다고는 하지 않았다. 강태준은 전화를 끊고 생각에 잠겼다. 배 구매대금 외 금액, 어구, 냉동기 등에 필요한 대금을 정산하려면 적어도 80만 불 이상은 추가로 필요하다.

“혹시나 해서 헤비 테일(Heavy Tail) 방식으로 계약한 게 천만다행이야.”

“그래도. 근데 은행융자가 안 되면, 우리 어떻게 하죠?”

“너무 걱정 마. 최악의 경우엔 대부 금고에서 외화 사채를 차입할 수밖에.”

고리의 금액을 빌리는 것은 부담스럽지만 이 난리를 펴 놓고 대금 지불기일을 연기해 달라 부탁할 수야 없지 않은가?

강태준이 발로 뛰며 다른 수를 수소문해 봤지만 뾰족한 대책은 없었다.

마라톤 회의를 마치고 나니 온몸에 피곤이 몰려오는 강태준 출출한 참에 대충 식사를 때울까 최선종 부장이 강태준에게 소식을 알렸다.

“부사장님, 지금 바깥에 손님이 와 계십니다.”

“손님?”

숙소 밖으로 나가니 범상치 않은 외모의 경호 요원들이 숙소 주변을 에워싸고 있었다.

대체 누가 방문한 거지? 의문도 잠시 강태준의 눈에 반가움이 스쳤다. 나타난 사람은 다름 아닌 김필중이었던 것. 강태준을 본 김필중 역시 살가운 얼굴로 그를 안았다.

“강 사장 오랜만이구만. 아니, 태동산업 부사장으로 온 거니, 달리 불러야 하나.”

“호칭이 뭐 중요하겠습니까. 아무렇게나 편하신 대로 불러주십시오. 헌데 김 부장님께서 여기는 어인 일로?”

“뭐 공무상 일 외에 뭐가 있겠나? 새 정권이 출범했으니 친선도 다질 겸 인사 다니는 거지.”

“일반적인 일은 아닐 것 같고 중정부장님께서 방일하실 정도면 국가적으로 큰 책무이시겠는데요?”

강태준의 그 김필중이 미소를 지었다.

“눈치가 빠르구먼. 헌데 자네는 여기까지 어인 일인가?”

“출장 왔습니다. 선박 구매 계약 건이 꼬이는 바람에 제가 짬 처리 중이랄까요?”

“거 얼굴이 반쪽이 된 걸 보니 고생을 알 만하구만. 그보다 칼 맞은 자리는 어때 괜찮은가?”

“뭐 찬 바람이 불면 좀 시리긴 하지만, 다행히 큰 후유증은 없는 듯합니다.”

그 말에 농을 했다.

“허허. 옆구리가 시려서가 아니고? 그럼 선박 도입 건은 대충 잘 해결되었는가?”

“아니요. 쉽게 끝날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예상보다 일이 복잡해졌습니다.”

“아니 왜? 무슨 일이라도 있는가?”

딱히 비밀로 할 이유도 없었기에 강태준이 돌아가는 사정을 솔직히 털어놓았다.

그 말에 짐짓 혀를 차는 김필중이었다.

“쯧쯧. 거 못된 사람들을 보았나. 그래서 대안은 있고?”

“금융기획원 쪽에 심사를 신청하긴 했습니다만 솔직히 어떻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최악의 경우에는 일본계 대부업체에서 사채라도 땡겨 볼까 하지만 금리가 너무 높아서요. 추후 원금이랑 이자 상환하면 사실상 남는 게 없을 것 같습니다.”

일본계 대부업체의 연체금리는 연리 40~50%에 육박하는 수준이다 이 정도면 일 년 수입은 없는 셈으로 쳐도 좋았다. 허나 그렇다고 구매를 늦추는 것은 실적에 불리하기 때문에, 추후 어업권 협상을 위해서라도 울며 겨자 먹기로 살 판이었다.

그 말에 김필중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퇴양난이라. 고민이 많아 보이는군. 그래 식사는 했나?”

“아직요. 김 부장님께선?”

“나도 아닐세. 마침 출출한데 이참에 같이 식사나 하는 건 어떤가? 아무리 급한 상황이라도 식사는 거르지 말아야 하는 법일세.”

“저야 좋습니다만 바쁘시지 않습니까?”

“오랜만에 타국에서 보았는데, 그냥 가긴 뭣하지 않나. 간만에 만난 김에 내가 한잔 사겠네.”

“오 사양하지 않지요.”

강태준으로서는 마침 출출하던 차에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다. 중정부장에게 얻어먹을 기회가 어디 흔히 오겠는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김필중을 따라 근처를 걷다 보니 곳곳에 펍과 함께 햄버거 가게들이 늦게까지 성황을 이루고 있었다.

은은하게 비추는 달빛 아래 쿠주쿠시마 섬들이 희미하게 보이고, 밤바다에 대비되는 도시의 불빛들이 번쩍인다.

하늘의 별무리가 내려앉은 듯 총총하게 빛나는 가운데, 화려하지는 않지만 잘 정돈된 시가지의 모습은 은은한 불빛과 맞물려 운치가 있었다.

“이쪽은 밤에도 꽤 장사가 잘되나 봅니다.”

“밤거리가 은근 보는 맛이 있지. 게다가 미군들은 씀씀이가 좋거든.”

미군들이 상주하기 시작하면서 기지 주위 술집과 상점 거리가 형성되었는데 그중 사세보에서 가장 대중화된 음식이 바로 햄버거였다. 처음엔 레시피를 받아 외국인 전용 바 등에서만 제한적으로 팔기 시작했으나 사세보에서 일본인들의 입맛에 맞는 버거를 만들어 팔기 시작하면서 점차 매장 수가 늘어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사세보 하면 군항보다는 햄버거를 먼저 떠올릴 정도로 햄버거는 사세보의 대표적인 명물로 자리매김했다.

구실잣밤나무가 녹음을 드리우는 길을 지나,

나타난 것은 블루스카이(Blue Sky ブル?スカイ)라는 간판 하나.

이곳은 강태준에게도 영 낯설지만은 않은 장소였다.

“여기는?”

“혹 아는 곳인가? 일본에 출장 올 때마다 가끔 들르던 곳일세. 원래는 더 늦게 개장하는데 오늘은 운이 좋군.”

강태준이 경호원들을 돌아보며 언급했다.

“자네들은 여기서 대기하도록.”

“예!”

불빛을 본 김필중이 손짓하자, 강태준이 김필중을 따라 계단을 올랐다.

건물의 허름한 외관만큼이나 비좁은 실내.

5명이 앉으면 꽉 차는 수준의 좁은 곳이었지만 아늑한 분위기를 풍긴다.

“여기가 바로 사세보 버거의 원조 격인 가게지. 그래서일까. 개장 시점도 제멋대로야. 낮에 열지 않고 저녁 8시쯤 열고 싶은 때만 열거든.”

“허, 그렇군요.”

새삼스럽게 주위를 둘러보니 소박하기 짝없는 가게 안엔 마요네즈와 케첩 같은 조미료 몇 개를 빼고 없었다. 잠시 후, 무뚝뚝하게 생긴 주인장이 들어오더니 행주에 손을 닦으며 덤덤하게 물었다.

“何ドしますか(뭘 드시겠습니까)?”

“佐世保バ?ガ? 二つ お願いします ビ?ルを追加(사세보 버거. 2개. 베이컨에 맥주 둘 추가.)”

주문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잠시 후 치이익 소리와 함께 철판에 지져지는 패티.

노릇노릇 패티가 익어 가는 모습에 강태준은 가만히 그 모양을 주시했다.

주문에서 완성까지 약 15분 정도.

무뚝뚝하게 동그랗게 잘라낸 햄버거 번을 먹기 좋게 꾸욱 눌러 준 사내가 덤덤히 버거를 내밀었다.

“다 되었소.”

받아든 햄버거를 한 입 베어 문 순간 입안을 메우는 블랙페퍼의 향. 비계와 살코기가 적당히 어우러진 단면엔 고기의 육즙이 자글자글하다. 한 입 깨물자 표면을 뚫고 터져 나오는 육즙. 부드러운 비계와 야들야들한 살코기가 씹는 재미를 더한다.

“어떤가?”

“식감이 좋고 맛있네요. 야채도 신선합니다.”

“이 집 특징이지. 심플하고 담백한 맛이 그만이야. 이게 진짜 햄버거 맛이지.’

말을 마친 김필중 또한 햄버거 번을 한입 크게 베어 물었다. 버터의 풍미와 함께 아삭한 채소의 식감이 입안에서 춤춘다. 특별할 것은 없지만 엄선한 패티와 신선한 채소, 따뜻하게 갓 구운 빵의 삼위일체가 절로 미소를 부른다 할까.

치즈를 끼워 넣어서인지. 풍미가 있고, 번과의 일체감도 높았다.

‘남녀노소 호불호 없이 좋아할 맛이구만.’

식품사업을 하는 강태준으로서는 꽤 감명 깊게 느껴지는 부분이 아닐 수 없었다. 이걸 명동이나 온양 식당가 메뉴로 추가하면 어떨까. 강태준이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김필중이 반절쯤 남은 햄버거를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다.

“사세보 버거는 정해진 스타일은 없지만 대충 비슷한 구성이지. 마요네즈 소스를 충분히 곁들이고 손수 만든 빵에 신선한 야채, 계란후라이가 곁들여져 있다는 거. 항상 전에 왔을 땐 당연하다고 생각했다네. 근데 이 자리에 오고 나니 문득 그런 의문이 들더군.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 가격에 햄버거를 공급하는 데 어떤 노력이 필요할지 생각을 하게 되더군. 이 햄버거 하나의 가격은. 30엔 정도. 저렴하다고는 할 수 있네. 근데 이 햄버거란 것은 치즈와 계란, 우유, 신선한 야채, 그리고 패티까지. 게다가 전부 유명 산지에서 가져온 식재료들 아닌가?”

“원래 맛있는 음식일수록 기본에 충실한 법이죠.”

“그래. 헌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구먼. 한국에서 이런 버거를 공급하려면 원가가 최소 그 열 배는 넘어야 하지 않겠나?”

-다음 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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