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화 미쓰시오의 사정
“조센징 놈들, 설마 그쪽까지 로비를 했다는 말인가?”
“정부에서 공식 입장을 밝히지는 않았지만, 요카이치 대기오염까지 구체적으로 언급한 걸로 봐서는. 심도 있는 조사가 진행된 게 틀림없습니다. 아무래도 모종의 커넥션이 있는 것 같습니다.”
“맹랑하긴, 태동에서 믿는 구석이 있었군요.”
“이즈마 상, 그러니 혹 손해를 보더라도 그냥 원칙대로 하자고 하지 않았습니까?”
“와타나베상! 이건 말이 다르지오 그때는 분명 먼저 동의하지 않았습니까? 이제 와서 말을 돌리시니 서운하군요.”
“허허. 제가 언제요. 원인이 뭔지부터 따져 보실까요. 환경정화용 집진장치를 가동하지 말라고 한 건 그쪽입니다.”
“제가 언제 말입니까?”
“아니, 물타기 하는 것도 아니고, 지금 책임을 떠넘기시려는 겁니까? 그쪽이 기안까지 해 놓고 발뺌하시다니 확인해서 보여 드릴까요?”
서로 책임 전가를 하던 임원들의 목소리가 커졌다. 미쓰시오로서는 미국이 이번 일을 꼬투리 삼아 외교 문제 수준으로 비화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휩싸일 수밖에 없었다.
논의가 길어지자 논쟁을 방치하던 이와사키 부사장이 주위를 진정시켰다.
“자자 조용. 이번 건은 단순한 선박 수출 문제가 아닐세. 외교적인 문제로 비화되면 득보다 실이 많아. 거기에 환경문제 시위까지 격화된다면 기업 이미지에도 득 될 거 없네.”
“그럼 어쩝니까?”
“어떻게든 태동문제부터 마무리 지어야 하니 저쪽이 원하는 중고선부터 준비하게.”
“하지만 잘못하면 위약금 문제가…….”
“어쩔 수 없어. 이건 평판이랑 직결되는 문제일세. 다소 손해를 보더라도 잡음 없이 처리하는 편이 낫네. 더욱이 이번 일은 꼭 짚고 넘어갈 수밖에 없어. 선박 구매 실무 책임자가 누구였지?”
그러자 임원중 하나가 서둘러 답했다.
“아소 과장입니다.”
“그럼 아소 과장은 당분간 병가로 처리하고 대기 발령해.”
“네? 하지만 아소 씨는 오히려 배 인도에 반대하는 입장이…….”
“그러면 사태를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고 어쩌라는 건가. 누군가 책임은 져야 할 게 아닌가? 자네가 대신 쉴 텐가?”
“아, 아닙니다.”
“어쩔 수 없지. 않겠나. 그럼 그쯤에서 정리하고 통보하게. 강 사장에겐 정중히 사과드리도록. 앞으로 이런 일이 없을 거라고 말이야.”
아소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어쩔 수 없다. 강태준이 어떤 패를 들고 있는지 몰라도 미군을 움직일 정도라면 싸워서 좋을 게 없다는 촉이 섰던 것이다.
미쓰시오 입장에서 볼 때 이 정도에서 손절하는 편이 훨씬 유리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며칠 후, 미쓰시오 측에서 정중하게 유감 표시를 전해 왔다.
“거, 쏘리는 되었고 그래서 언제 섭외해 온다는 거요?”
“자, 여기 준비한 선박을 검토해 보십시오. 여기 총 세 척입니다.”
최종 후보로 오른 것은 470톤급, 370톤급. 550톤급 세 척. 회의실로 돌아온 강태준은 선박 규모와 스펙에 고개를 끄덕였다.
“흠. 꽤 많이 준비했군요. 간단히 스펙을 브리핑해 줄 수 있습니까?”
“먼저 이 물건부터 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370톤급. 선령은 20년쯤 된 물건이지요. 본체는 미쓰시오에서 만들었지만 엔진은 니가타 철공소에서 만든 물건입니다. 마력은 640~650마력쯤 됩니다.”
서류를 보던 강태준이 유심히 첫 선박부터 상세히 살폈다. 출조 실적이 꽤 좋았던 물건으로 선박 내부에 100kW짜리 발전기가 있었고 안전 항해를 위해 최신 레이더까지 설치되어 있었다. 딱히 나무랄 데 없는 스펙이긴 했지만 애초에 연승식 어선이 아니라 탑재 모선식을 노렸던 만큼 강태준으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야기였다.
“이건 규모가 너무 작네요. 캐처 보트도 없고. 무엇보다 연비가 좋지 않군요. 타축이 타의 전면에 배치된 것도 좀 그렇고 말입니다.”
“아. 그렇다면 이 550톤급은 어떻습니까? 출력은 1,500마력입니다. 엔진은 얀마 엔진으로 500마력짜리 셋이 달려 있습니다. 힘이 좋고 방향전환이 빠른 녀석이죠. 길이 잘 들어 있습니다.”
그러자 먼저 서류를 보던 최선종 부장이 문제점을 지적했다.
“부사장님, 이거 기록이 좀 그런데요. 징발용 선박으로 쓰다가 중간에 군선으로 설계 변경을 한 정황이 있습니다.”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설마 또?”
강태준의 눈매가 매서워지자, 박재우가 황급히 변명했다.
“오해입니다. 인도양과 태평양 해역에서 배선되었던 선박은 맞아요. 하지만 보급선으로만 기능한 데다 징발 이후 종전이 되는 바람에 교전 경험은 없어요. 게다가 몇 번씩 개수한 물건입니다.”
“흠. 최 부장 말대로, 이건 좀 꺼림칙하네요. 선령이 30년 이상이라면 너무 노후선 아닙니까? 게다가 2차 세계대전 당시 징발되었다면 솔직히 말해 엄한 곳에 총알이 박혀 있을지 누가 압니까? 그거 보증할 수 있습니까?”
오재갑 역시 지원사격에 나섰다. 조목조목 들어오는 논리에 진땀을 빼던 박재우가 마지막 카드를 내려놓았다.
“그럼 남은 건 이거뿐입니다. 470톤급. 선명은 코요마루(紅葉丸) 한국으로 직역하면 단풍호.”
“감성적인 이름이군요. 이건 생각보다 선령이 오래되지는 않아 보이네요. 튼튼해 보이고.”
“보는 눈이 있으시군요. 일본이 패전 후 장기저리의 정책금융을 배정받아 건조한 선박입니다. 최신예 기술로 건조했지요.”
강태준이 흑백으로 찍힌 사진의 선수를 상세히 살펴보았다. 날렵한 선수 뒤로 우현에 설치된 양승기가 달려 있는 구성이었다.
‘골조의 양쪽에 강판을 붙여 복판타 설계를 했군. 밸런스가 좋은걸.’
강태준은 대충 성능을 가늠했다. 유선형의 타면에 전부 면적 대비 전면적 비율이 0.28 정도. 타판의 면적은 배의 선회성능에 관계가 깊은 만큼 조종에도 우위성이 있어 보인다. 외관상으로도 깔끔한 모습이 맘에 들었다.
“이건 탑재 모선식이군요. 오 이사, 자선은 몇 톤이지?”
“네, 사양을 보니, 20톤 정도 됩니다. 특히 이 배는 엔진이 끝내주네요. 독일 만(MAN)사와 기술 제휴로 만든 850마력급 디젤 엔진을 두 개나 달고 있습니다. 근데 선박 가격은 좀 비싸네요.”
“얼만데?”
“대략 55만 불입니다.”
강태준의 눈이 가늘어졌다. 만(MAN)사의 전신인 아우크스부르크 기계공작소는 2차 세계대전 시 이미 전차와 탱크를 개발했을 만큼 기술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곳이었다. 하지만 그게 가격을 정당화할 정도인지는 의문부호가 있었다.
“너무 비싼 거 아닙니까? 중고선 가격이 톤당 1,150불인데 시가보다 비싼 이유가 있습니까?”
“선령은 10년이지만 실제 운용 기간은 고작 3년 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게다가 자선은 거의 새것이나 다름없어서……. 사실 원래 가격대라면 적어도 100만 불은 줘야 하는 선박입니다.”
“그렇다면 더 이상하군요. 왜 이 가격에 매물이 나온 겁니까?”
그 말에 박재우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뭐. 솔직히 말하면 여러 불운이 겹쳐서지요. 출항 직후 불의의 사고를 몇 번 당했거든요. 달려오는 배에 추돌하였던가 태풍에 쓸려가 닻이 풀리던가. 속선을 타고 자망 그물이 스크루 밑에 들어가 사고가 발생한다던가. 노후화한 닻이 파손되면서 쫑대가 풀려나와 선박 상단을 가격하기도 하고 말이죠. 그러다 보니 이상한 소문이 돌아서 아무도 안 타게 되었습니다.”
뱃사람들 입장에서는 꺼릴 법도 하다. 강태준이 옆을 돌아보며 물었다.
“흠. 오 이사, 생각은 어떤가?
“사연 있는 배라니 선원들이 그다지 좋아할 거 같지 않습니다만…….”
“아, 배 자체는 아무 문제 없습니다. 제 상인으로서의 양심을 걸고 보장합니다. 사실 이 배를 제외하면 더 좋은 대체재를 찾기는 어려울 겁니다. 바로 실전 투입을 하려고 다른 선박을 기다릴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현재 일본 선사들 가운데 매각용 중고선을 가지고 있는 회사는 없습니까.”
“가와사키 쪽과 연결해 드릴 수는 있겠지만 거기서는 가격대가 다소 높을 겁니다. 지난해부터 선박 발주량이 폭주하면서 신규 선박보다 중고가가 오히려 높아지는 추세에 있어서, 현재로선 이 배가 최선이거든요.”
고민을 거듭했지만 더 뾰족한 수가 없었다. 결국 강태준은 어렵게 결단을 내렸다.
“흠……. 그럼 당초 계약 위반의 패널티와 사양변경 조건을 감안해서, 선용품 창고와 조타실 정도는 따로 개조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 부분은 좀. 미쓰시오 측에 한번 제안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부분은 필요 조건입니다. 저희도 대체선박을 무조건 그냥 양도받을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선박 배치 도면을 보니, 항행 장비에 비해 공간이 너무 협소하더군요. 설마 이번에도 통수를 까진 않겠죠?”
그 말에 박재우가 급하게 정색했다.
“강 부사장님, 저도 신용이 있는 사람입니다. 미쓰시오 측에도 단단히 이야기해 놨으니 조만간 이쪽으로 올 겁니다.”
배 인도 후에 개조에 필요한 설비와 어구, 3개월 치 유류비, 항구 계류비 거기에 직원들 줄 봉급까지 포함하면 상당한 자금이 필요하다.
계속되는 네고 끝에 강태준은 결국 선가를 57만 불 내외까지 깎았다. 출항에 필요한 기름을 꽉 채워 주고, 추가로 계약이 불발될 경우 위약금 조항까지 넣기로 한 것이다. 치열한 네고 끝에 최종 대금이 결정되자 오재갑이 한숨을 쉬었다.
“징하네. 그래도 한 시름 놓았군요.”
“글쎄. 끝날 때까지 봐야지. 최 부장과 오 이사는 당분간 좀 쉬면서 본사에서 일단 회신이 오기를 기다려 보자고.”
협상 직후 바로 서울 본사로 전보를 발송한 강태준.
하지만 며칠 후, 양재문으로부터 전해진 소식은 예상외였다. 양재문이 양해를 구해 온 것이다.
“거 미안하이. 그게 은행이 당장 보증이 어렵다는군.”
“아니 그게 무슨 소립니까. 내정된 차관액이 있다 확신하셨잖습니까?”
“그게 알아는 봤는데……. 이게 어이없게도 정부에서 민관 차관으로 융자할 금액이 남아 있지 않다는구만. 우리 태동도 민간업체 차관분으로 이미 200만 달러를 넘게 쓴 상황이라. 지금 더 대출해 주는 건 힘들다고 해.”
양재문의 목소리는 풀죽은 사람처럼 착 가라앉아 있었다. 어이가 없어진 강태준의 목소리가 커졌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지금 와서 선박 대금이 없다니, 이제 와 말 바꾸깁니까?”
“거 진정하게. 자네가 일본에 있는 동안 큰일이 터졌어. 횡령 배임 혐의로 국책은행 은행장이 구속되었거든. 근래 국책은행에 의한 지급보증에 비해 민간은행에 비해 너무 주먹구구라는 말이 많았거든.”
“그거야 모두 다 아는 사실인데, 새삼스럽게 무슨. 그 정도로 은행 대출이 막히다니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립니까?”
“그게. 수산청에서 부실업체에 추천한 차관액을 대상으로 전수 조사를 실시하는 모양일세. 국회에서는 한술 더 떠서 부실업체가 착복한 손배 대불금을 현실화해야 한다 벼르고 있다네.”
문제의 쟁점은 5.16 직후 남태평양 시장 진출과 고수익에 대한 기대감을 안고 이탈리아와 프랑스로부터 들여온 중고선 도입 자금이었다.
이때 한국 수산개발공사가 들여온 금액이 도합 4,000만 달러. 근데 실제 도입하기로 결정한 중고선을 확인해 보니 모두 근해 운행도 어려운 정크선이었던 것.
덕분에 지급 보증을 한 은행 여신과에서 부채를
대신 갚는 입장이 되어 버린 것이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