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화 사세보의 조력자
따라서 국제계약상 제3국 법원을 관할법원으로 하는 것이 통상적인 만큼, 법리논쟁은 곧 파워게임이 될 수밖에 없지 않은가. 미쓰시오에 비하면 덩치가 현저히 작은 태동산업이 절대적으로 불리했다.
“설사 소송에서 이기더라도 시간을 오래 끌면 의미가 없어. 애초에 이런 소송은 기간이 오래 걸리는 만큼 10년도 넘게 끌 수 있으니까.”
“그래서 상대가 배를 가져올 때까지 이렇게 하염없이 기다려야 한다는 겁니까?”
“일단은. 저쪽도 매물용 중고선이 없지는 않을 거야. 일단 노후 선박 퇴출을 위해 국가적으로 신조선 건조를 장려하는 상황이니까.”
“허. 골치 아프군요. 이번에 신규 선박 구매를 전제로 확보한 조업쿼터량이 얼만데요? 여기서 쿼터량을 채우지 못하면 우리 쪽 손해가 극심합니다.”
태동에서 원양어업으로 개가를 올린 직후 현 원양어업 업계는 빠르게 춘추전국시대로 접어들었다.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어획 고갈 속도가 빨라지자 이에 위기감을 느낀 나라들이 과도한 경쟁을 막기 위한 규제를 강화한 것이다.
선사의 선박 규모와 실적 등에 따라 각국이 조업쿼터량을 배정하기로 한 것도 그런 흐름 중의 하나.
심 사장의 사망으로 제대로 로비를 못한 태동은 적은 척수와 엔진 마력이 낮다는 이유로 예상보다 적은 쿼터를 배분받았지만 이번에 양재문이 뒤늦게 전배(쿼터량을 사고파는 행위)로 500톤의 조업 쿼터를 추가로 확보해 한숨을 돌린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럼 큰일 아닙니까? 추가 선박 투입이 늦어지면 발해나 삼호 쪽에 어장을 선점당하게 될 수도 있으니 말입니다…… 미쓰시오의 대응만 기다리며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지 않습니까?”
“걱정 마. 일단 도움을 받을 사람이 없지 않으니까.”
“그게 누굽니까?”
“스튜어트 소령, 마침 사세보항에서 근무 중이라는군.”
일이 꼬이기는 했지만 강태준도 혹시나 사태가 망할 때를 대비해 보험 정도는 들어 놓았다.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 볼 생각이었다. 이번에 영관급으로 승진한 만큼, 구시도 충분하지 않나.
며칠 내, 일행이 찾아간 곳은 일본 나가사키현 사세보시에 있는 해군 기지. 45년 제5해병사단이 진수부를 접수한 이래 역사를 이어 가고 있는 지역이었다.
입구는 1km에 불과하지만 내해는 3천 헥타르에 달해, 요코하마나 고베 보다는 서너 배, 나가사키보다는 열 배나 넓다. 이런 천혜의 지형 덕에 사세보를 탐낸 미군은 2차 세계대전 말기까지 이 지역을 폭격하지 않았고 곧 이어진 한국 전쟁 때로 요긴하게 쓰였다.
호리병처럼 특이한 모양의 만입에 깊은 인상을 받은 듯 박재우와 오재갑, 선종만, 핸더슨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여기는 만입구가 특이하군요. 입구는 1km인데 내해가 훨씬 넓다니.”
“안쪽 바다가 3천 헥타르 정도라는군. 메이지 유신 때부터 개발했다고 하니 꽤 오래된 곳이긴 하지.”
“생각보다 울퉁불퉁한데요. 근데. 오랫동안 항구를 개발한 것 치고는 그렇게 예쁘지는 않군요.”
“그게 다 산을 부수고 매립한 흔적이지.’
미군 때문에 망한 지역이었지만 6.25 때 보급창이 된 덕에 경제가 부흥했으니 아이러니하고 할까. 주위를 둘러보던 최 부장이 찬탄하듯 말했다.
“근데 이런 천혜의 항구를 미국에 뺏기다니 일본놈들도 꽤 배가 아프겠군요.”
“그래서 매번 돌려 달라. 시위질을 일삼는 게 아닌가. 표면상 자위대와 함께 일부 기지를 함께 쓰고는 있지만 바다를 매립한 평지인 1급지는 미군이 차지하고 있는데 경사지인 2, 3급지를 일본인이 사용하고 있거든.”
차별은 노골적일 정도였다. 사세보항의 중심지는 주일미군 군용차량 외 출입이 엄격하게 금지되었고, 아스팔트 위에 마치 계급을 가르는 선처럼 노란 실선이 통행까지 구분되어 있다. 배려 예산이란 이름으로 시설 유지비와 기지 내 종사자의 급료, 군함공장 건설비, 급유 시설 및 탄약고 설치, 매립지 공사비용까지. 모두 일본인의 세금에서 나왔던 것이다.
’공사가 끝나면 돌려준다고들 말하지만 물론 한 번도 돌려준 적은 없지.‘
유지비용까지 철저하게 전가하는 걸 보면 미군도 꽤 뒤끝이 있다.
강태준은 그런 생각을 하며 민가와 가까이에 있던 마에하타 지구로 향했다.
마침 방문일정을 전달받은 스튜어트 대위가 강태준 일행을 환영하며 융숭하게 맞아 주었다.
“아니, 미스터 강. 오랜만입니다. 이게 대체 얼마 만입니까?”
“벌써 찾아 봬야 하는데. 사업상 일이 바빠 오랫동안 뵙지 못했습니다.”
“무슨 말씀을. 자 이쪽으로.”
승진의 기쁨인가 얼굴에는 평소보다 여유가 묻어나는 스튜어트는 표정이 활짝 피어 있었다.
카페에 있는 널찍한 소파로 일행을 안내하자, 눈치 빠른 고용인이 차를 내왔다. 입안을 가득 올라오는 캐모마일 향을 음미하며 강태준이 입을 열었다.
“간만이지요?”
“벌써 우리가 만난 지 10여 년 되어 가니 세월이 참 빠르군요. 카발 쪽 사람들은 어떻게 지냅니까? 아직 연락 중에 있습니까?”
“물론입니다. 종종 만나고 있지요. 다들 소령님 이야기를 합니다.”
“그립군요. 그때가.”
카발 자동차에서 있었던 일을 상기하며 둘은 지그시 미소를 지었다. 그때 대위였던 스튜어트는 강태준이 사업 초창기 군용 차량과 설비 불하 과정에서 결정적으로 기여했던 은인이기도 했다.
이 일로 수수료를 챙긴 스튜어트는 일본에서 부동산 투자를 통해 상당한 부를 축적했다.
인연이 서로 윈윈이 된 셈. 추억을 되새기던 강태준과 여러 대화를 나눌 기회가 생겼다.
“그래서…… 윌리엄 대령님께서는 월남으로 전출 가신 거군요.”
“예. 그쪽에서 군사고문 역할을 하고 계십니다. 사실 저도 조만간 전출기일이 되어서 저도 베트남으로 따라갈까 생각 중입니다. 대령님 요청도 있고, 요사이 남베트남 사정이 심상치 않아서요.”
이미 짐작한 일이었지만 강태준이 모르는 척 다시 물었다.
“베트남 상황이 그렇게 심각합니까?”
“아무래도 그렇죠. 응오딘지엠이 죽고 국정 공백이 심각하거든요. 문제는 지엠 이후 지도자들이 지리멸렬해서 북부의 호치민처럼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감이 없다는 것이 문제죠.”
지엠이 쿠데타로 사망하기 전까지 미국은 뉴딜 정책을 모델로 남베트남을 개조하려고 했다.
그러나 개인적인 야심이 상당했던 지엠은 꼭두각시로 만족하지 않았고. 족벌정치를 강행하면서 자문관들과 마찰을 빚었던 것이다.
급기야 지엠과 호치민 사이 물밑 교섭까지 진행된 정황이 포착되자, 미국은 결국 지엠의 제거를 결정하고 CIA를 동원해 쿠데타를 사주했던 것이다.
응오딘지엠은 별 저항도 못 해 보고 제거당했지만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부패하긴 했어도 지엠만 한 정치력을 가진 인물이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덕분에 남베트남의 정국은 급속히 혼란으로 빠져들었다.
“아무래도 지엠 외에는 죄다 고만고만한 인간들만 남았다 보니 문제죠. 북베트남으로서는 지금을 베트남을 일통할 호기라고 보는 모양이지요.”
“남 좋은 일만 한 셈이군요.”
“원병을 요청하는 걸로 봐서는 남베트남 정치인들이 무능하긴 해도. 주제 파악 정도는 하는 모양입니다. 그렇다면 민주주의의 수호자인 미국이 나서 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전쟁이 일어난다면 무고한 사람들이 많이 죽을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게 좀 슬프군요.”
“그래도 피할 수 없겠지요. 전력 차가 심하니 전쟁이 그리 오래 끌지는 않을 겁니다.”
스튜어트 소령이 대수롭지 않은 어조로 말했다. 사실 장교들 입장에서는 전쟁은 출세의 기회다. 이제 영관급이 된 스튜어트 역시 이제 슬슬 경력 관리를 할 시점인 만큼 촉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베트남이라……. 슬슬 한국도 개입할 타이밍인가?‘
사실 베트남전쟁은 진정한 의미에서 한국경제에 밑천이 된 전쟁이다. 약 50억 달러에 해당하는 거액의 외화가 한국으로 들어왔고 1965-75년 베트남전 관련 해외 발주사업(OSP)과 MAP로 확보한 금액만 총 10억7천6백만 달러가 넘을 정도.
이 피의 대가로 얻은 외화 덕분에 극동의 최빈국이던 한국은 중진국으로 도약했고, 미국을 중심으로 한 반공동맹의 일원으로 세계시장에 진출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말인즉 출진이 기회라는 소리지.‘
베트남에 한 발만 얹을 수 있다면 지금과는 차원이 다른 규모의 도약이 가능할 것이다.
그렇게 동상이몽을 하던 그때, 차를 내려놓은 스튜어트가 슬쩍 주제를 바꿨다.
“그보다 여기까지는 어인 일로 오셨습니까? 강 사장님 같이 바쁜 분께서, 아무 이유 없이 방문하시지는 않았을 텐데 말이죠.”
“사실 갑자기 선박 구매계약과 관련해 미쓰시오 쪽과 불미스러운 일이 생겨서 말이죠.”
잠시 후, 강태준의 이야기를 경청한 스튜어트 소령이 가볍게 이맛살을 찌푸렸다.
“허어. 이 사람들 보게? 이미 인도하기로 한 선박을 사전에 동의 없이 매도했다니, 그거참. 이거 상도덕이 없는 사람들이네요.”
“그래서 지금 저희 회사가 아주 곤란해진 상황입니다.”
“문제가 많은 사람들이군요. 하지만 이 부분은 제가 어떻게 해 드릴 수 있을지……. 저도 딱히 민간 기업에 손을 쓸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서요. 게다가 미쓰시오는 꽤 대기업이라서. 저도 명분 없이는 손을 대기 어렵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걸 준비해 봤습니다.”
강태준이 내민 봉투 안에는 여러 가지 사진이 찍혀 있었다. 초점이 없는 눈에, 비틀어진 몸과 병색이 완연한 채 입으로 거품을 흘리는 모습들.
기괴하기 짝없는 모습에 스튜어트도 눈을 찡그렸다.
“이게 뭡니까?”
“사실, 최근 재일 교포 출신들로부터 암암리에 탄원 비슷한 게 있어 알아봤는데요. 공해병 문제가 불거지고 있더군요.”
“확실히 요새 그런 뉴스가 많이 늘어났다 듣기는 했습니다만.”
“예. 최근 일본 전역에서 폐수나 대기오염 같은 공해 문제로 인한 피해가 보고되고 있습니다. 일부 지역에선 환경문제로 인한 소송이 잇따르고 있을 정도죠.”
공해병 문제가 본격화되는 시점이 바로 이 시점. 가만히 이야기를 듣던 스튜어트 역시 사태의 심각성을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환자 가족 모임이 발족할 정도면 꽤 심각한 수준인데요?”
“네. 이 지역들은 대부분 재일 미국인들도 상당수 거주하는 지역이니, 충분히 환경문제가 이슈화될 수 있는 부분이라 사료됩니다.”
잠시 고민하던 스튜어트가 턱을 괴며 생각에 잠겼다. 공해병과 인권 문제라.
미국으로서는 꽤 모양새 좋게 일본에 개입할 수 있는 명분이 생기는 셈 아니겠는가.
“좋습니다. 그 부분은 제가 한번 검토하여 따끔하게 주의를 주도록 하지요.”
“감사합니다. 정말.”
“허허. 저야말로 이런 정보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일단 관계자를 불러서 몇 가지 사안에 대해 확인 좀 해 보고 최대한 방법을 찾아보도록 하죠.”
스튜어트 소령의 행동은 빨랐다. 미쓰시오 담당자를 불러 최근의 공해병 문제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 것이다. 치부가 들추어진 미쓰시오에서는 처음엔 변명으로 일관했다.
“오해입니다. 공해 문제는 국지적이며 한시적인 문제일 뿐입니다.”
“그게 미쓰시오의 공식 입장입니까. 본국 피해자에 대한 배상을 거부하겠다는?”
“그건 아닙니다만. 실제 공해와 결과 발생에 연관 관계 입증이.”
“비단 한 가지가 아니지 않습니까. 미국은 지금 한일수교 정상화에 꽤 정성을 쏟고 있는데 최근 선박 매매와 관련해 꽤 부당한 차별이 있다 들었습니다. 혹여 이런 부분이 외교 정상화에 장애로 작용할까 저어되는군요.”
스튜어트는 정중하게 유감을 표명했고 그 일로 미쓰시오는 한바탕 뒤집어졌다. 영관급 장교의 한마디는 일반적인 협박과 차원이 다른 수준으로 들렸던 것이다.
결국 전보를 받은 미쓰시오 상사 쪽에서는 대책회의에 돌입했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