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양재벌 강태준-200화 (200/361)

200화 선박 구매

꽤 헤맨 듯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힌 남자. 손수건으로 이마를 닦은 사람이 약간 숨이 찬 얼굴로 연신 고개를 숙였다.

“아이구 죄송합니다. 벌써 오신 줄 모르고. 엉뚱한 곳에서 기다리고 있었군요.”

“아닙니다. 저희도 이 지역이 초행이라. 지리에 익숙지 못해서요.”

“오시느라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박재우입니다, 여기 제 명함입니다.”

상대가 명함을 꺼내자 처음 보는 생소한 사명이 적혀 있었다.

“명진물산 박재우 사장님?”

“예. 양 사장님과는 몇 번 뵈었는데 부사장님과는 초면이죠. 미쓰시오와는 협력사 관계라 이번에 중책을 맡게 되었습니다.”

“아, 양 사장님께 종종 들었습니다. 이렇게 직접 나오시다니요. 수고가 많으십니다.”

“하하. 큰 고객이신데 당연히 제가 와야죠. 이렇게 만나 뵈어서 영광입니다.”

“강태준입니다. 태동산업 부사장을 맡고 있습니다.”

악수를 나눈 강태준은 새삼스럽게 상대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사장답게 서글서글한 눈매가 호감이 가는 인상이었지만 강태준은 속으로 적잖이 놀랐다.

‘이거, 생각보다 거물이 나왔군.’

박재우가 중개업자라니. 대중적으로 알려진 이름은 아니지만 박재우는 꽤 유능한 로비스트다. 63년, 미쓰시오가 대선을 앞두고 빌려준 100만 달러의 대선자금을 중개한 것도 이 박재우였던 것이다.

미쓰시오 후지노 주지로 사장과 박정명 양측에 커넥션이 있다는 것도 대단하지만 후일 만도 호텔을 비롯해서 굵직굵직한 이권 사업에 개입했던 점으로 볼 때 충분히 요주의 인물이다.

유심히 살펴보는 강태준이었지만 이런 사실을 꿈에도 모르는 박재우는 쾌활하게 말을 건넸다.

“그럼 아침 식사는 하셨는지요.”

“네, 간단히 요기하였습니다. 그보다 매물부터 볼 수 있겠습니까?”

“아니, 지금 당장 말입니까?”

“예. 가능하면 빨리 보는 게 서로 편하지 않겠습니까?”

강태준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 박재우가 웃는 낯으로 되물었다.

“하하. 마음이 급하시군요. 죄송하지만 조선소 측과 잠시 연락 좀 해 보겠습니다.”

잠시 후, 조선소와 연락을 마치고 온 박재우가 미안한 얼굴로 통화내용을 전했다.

“아무래도 선박이 도착하지 않은 듯합니다. 일정상 차질이 빚어진 것 같아서 죄송하군요.”

“그런 언제 볼 수 있습니까?

“선박을 양도하려면 인수검사가 필요해서요. 대신 준비되는 대로 최대한 빨리 말씀드리겠습니다.”

“흐음…….”

“그 대신 조선소 견학부터 하시는 건 어떻습니까? 여기 조선소가 그래도 나름 역사가 있는 명소라서 볼거리가 많거든요. 미쓰시오 쪽에는 견학 허락을 받아 두었습니다.”

“뭐 좋습니다. 아쉽지만 그렇게 하지요.”

시간을 끌려는 수작이긴 하지만, 사양할 이유는 없었다.

강태준으로서도 조선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참고할 부분이 있을 테니.

보폭을 맞추어 걷던 일행 앞에 커다란 물체가 나타났다.

“와. 이건……. 엄청나게 크네요.”

일명 자이언트 타워크레인.

메이지 정부 시절 설비 기계화에 맞춰 일본에서 최초로 건설된 전동크레인이다.

포구 안벽에 웅장하게 선 거대 크레인. 설치한 지 반세기 가까운 세월이 흘렀음에도 현역으로서 존재감을 발하고 있는 모습이 실로 위풍당당하다 그 모습을 올려다본 최선종이 감탄했다.

“와…… 대단한데요. 남산타워보다 더 높네요. 멀리서 봤을 때는 이렇게 큰 줄 몰랐는데 말입니다.”

“이거 아직도 현역인가요?”

“예. 현재는 대형 원동기와 선박용 프로펠러 선적용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보일러 등의 대형기계를 선박에 싣거나 내리는 데 유용해서요. 크레인 밑은 수심이 깊은 대형 선박도 옆에 붙일 수 있게 만들어져 있습니다.”

크레인을 유심히 살피던 강태준이 흥미롭다는 듯 중얼거렸다.

“흠. 이건 높낮이를 조정할 수 있는 탈착식이군요. 배에도 탑재할 수 있는 구조라 실용성이 높겠는걸요. 이런 50년도 더 된 장비가 현역이라니.”

“하하. 말은 50년이지 중간에 개보수를 많이 했지요. 이번에 장소를 옮겨 설치하면서 주요부품은 싹 교체했거든요.”

“아마 이대로 계속 유지보수하는 식으로 쓰면 한 100년도 거뜬하겠는걸요?”

“설마요. 그때쯤에는 골동품으로 전시되지 않겠습니까 하하.”

“그렇겠죠?”

말도 안 되는 헛소리로 치부하는 일행이었지만 강태준은 속으로 웃었다.

설마가 사람 잡는다고 실제로 이 크레인은 50년 뒤에도 여전히 현역으로 가동된다.

‘일본이 확실히 이런 부분은 확실히 부럽다는 말이야.’

국민적인 감정을 떠나 배울 것은 배워야 하지 않은가.

이왕 이렇게 된 김에 제대로 견학을 할 요량으로 강태준은 조선소 도크의 형식이나 배치 구조부터 선착장과 목형장과 영빈관까지 샅샅이 뒤졌다.

강태준의 그런 자세에 감명을 받아서인가 일본인 기술자들도 꽤 호의적이었다.

배우는 자세에 진지한 사람에게 동질감을 느꼈던 것이다.

박재우 역시 꽤 깊은 인상을 받았는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야, 다들 학구열이 정말 대단하십니다. 이렇게까지 열정적으로 공부하는 분은 처음 봤습니다.”

“하하. 애초에 조선소 쪽에도 관심이 많아서 말이죠. 언젠가 한국도 이런 조선소를 운영하지 않겠습니까? 미쓰시오 같은 대기업도 출범 당시 이와사키 야타로가 세운 작은 상회였지만 어쩌다 보니 이렇게 커진 것 아니겠습니까? 한국인들 손재주도 일본인에 뒤지지 않습니다.”

“맞는 말씀입니다. 자본만 있으면야 우리도 이런 조선소를 못 세울 리가 없지요.”

잠시 후, 귀엣말을 하는 비서에 시계를 본 박재우가 슬쩍 주제를 돌렸다.

“자, 곧 배가 도착할 시간이군요. 구경은 잘하셨습니까?”

“네. 대충은요.”

“그럼 다 둘러보셨으면 이제 매물을 보러 가시죠. 충분히 여유를 줬으니 지금쯤이면 준비되었을 겁니다.”

과연 부푼 마음으로 도착한 부두는 수리 중인 중고선과 신규건조 선박으로 꽉 차 있었다.

헌데 이건 웬일, 매물용 선박 도크는 텅 비어 있는 게 아닌가.

도크에 정박 되어 있어야 할 선박이 존재하지 않자 수군거리는 사람들. 전혀 예상치 못한 돌발 상황에 박재우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이게 어떻게 된?”

“이거, 황당하구만, 인도받을 배가 없다고?”

“아무래도 뭔 착오가 있는 듯합니다. 이, 이럴 리가 없는데.”

도크에서 조금 더 기다려 보았지만 오기로 한 배는 결국 나타나지 않았다. 결국 회의실로 안내된 일행은 몇 시간이 지난 후에서야 박재우로부터 다시 보고를 받았다.

“이거, 정말 송구하게 되었습니다. 아무래도 행정상 착오가 발생한 듯합니다.”

“무슨 착오요?”

“그게, 이미 그 배는 다른 업체에서 인수해 갔답니다.”

강태준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게 무슨 소린가. 점잖은 오재갑의 목소리도 높아졌다.

“뭐라고요. 그건 저희 쪽에 인도하기로 한 물건 아니었습니까? 이미 계약이 내정된 배를 대체 누가 가져갔다는 말입니까?”

“그건, 영업비밀이라 공개가 좀 곤란하답니다. 이미 몇 주 전 인수검사가 끝나고, 매입사에서 잔금까지 치렀답니다.”

양도 후 출항까지 끝났다는 말에 어이가 없어진 최선종이 격하게 항의했다.

“아니 이것 보시오. 배가 팔렸다면 기본적으로 상대 회사에 통보 정도는 해 주는 게 상도덕 아니요. 그럼 지금 와서 이게 무슨 황당한 말씀입니까?”

“죄송합니다. 저희도 이런 상황은 정말 처음이라서요. 일단 어떻게 된 것인지 경위를 파악하는 중이라.”

“경위 파악이라. 이봐요. 지금 누굴 똥개훈련 시키나? 명색이 일본 최고의 조선사라는 곳에서 이런 장난질이라니 그럼 대책을 세워야 할 것이 아닌가 대책을!!”

화가 난 조달부장 최선종의 목소리에 성난 표정이 된 일행들. 어쩔 줄 몰라 하는 박재우가 난감해하자 강태준이 차분하게 중얼거렸다.

“이번 거래는 많이 실망스럽군요. 저희 태동산업은 귀사 측만 믿고 계약을 진행했습니다. 이건 상도덕이 아닌 거 같은데…….”

“죄송합니다. 저희가 어떻게든 수습을…….”

“지금은 대화할 시간이 아닌 거 같군요. 배도 없는 마당에 회의는 의미 없을 듯하니, 여기서 취소하겠습니다. 최대한 빠른 시일 내 동일한 스펙의 배를 구해 오십시오. 당분간 호텔에서 기다리지요. 기간은 2주입니다.”

박재우의 얼굴이 뜨악 하는 표정으로 변했다.

“예? 그건 너무 촉박한.”

“그건 그쪽 사정이지요. 비자 갱신 문제도 있고, 안에 제대로 준비가 되지 않을 경우에는 이번 일은 정식으로 문제 삼을 수밖에 없습니다.”

매몰차게 말을 끊은 강태준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따라온 일행도 말없이 뒤를 따랐다. 호텔로 들어오자 분위기는 급속히 가라앉았다. 뜸을 들이던 오재갑이 입을 열었다.

“골치 아프게 되었네요. 미쓰시오에서 인수할 선박을 이미 넘겼다니?”

“미쓰시오 같은 대기업이 이런 말도 안 되는 실수를 하다니 믿어지지 않습니다.”

최 부장의 그 말에 강태준이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거 순진하긴. 자넨 그 말을 정말 믿나? 계약 용어상(Terms and Conditions) 문구가 모호한 점을 이용한 거지. 레이터(Later) 처리로 인도 일정이 불분명한 상황이니 분명 알면서 미리 팔아먹은 게 분명해.”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종합상사를 물로 보지 말라는 거야. 이런 실수는 백 퍼센트 의도적인 거 아니겠나. 심사장 일로 태동이 휘청한다 싶으니 선박 인수가 어려울 수도 있겠다 생각하고 방향을 튼 거겠지. 혹시나 문제가 생기기 전에 수작을 부린 거고.”

“설마 그런 양아치 같은?”

그러자 오재갑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니, 일리가 있어요. 요새 미쓰시오 상사의 재무 상태가 그렇게 좋지 않다는 소리를 듣긴 했거든요. 전문경영인 입장에서 볼 때 회계연도 마감 일정이 촉박한데 실적이 그닥이라고 한다면 고양이 손이라도 빌리고 싶겠지요.”

“재갑이의 말이 맞아. 금융기관 입장에서 보면 선박채권은 원리금 상환 리스크가 크거든. 높은 확률로 위에서 불량채권이 되기 전에 처리하라는 압박이 있었겠지.”

“그럼 저쪽에 저따위로 나오는 게 전부 계산된 행동이란 말입니까?”

“뭐 중개자에게는 알려 주지 않았을 테니 박 사장은 몰랐을 수도. 아니면 처음부터 그럴 생각은 없는데 일이 꼬였을 수도 있겠지. 선사가 배를 준비해 두더라도 자금난에 배를 찾아가지 않거나. 배를 발주해 놓고 인수일을 미루는 게 한두 번이 아니지 않겠나. 심 사장이 급사해 태동이 휘청하니 미쓰시오 측에서는 걱정이 태산이었을 텐데 누군가 뱃값을 내겠다고 하니 일단 뒷감당은 나중에 한다고 생각하고 얼씨구나 하고 팔아 버렸겠지.”

상사 쪽 전문경영인들이야 계약실적이 무엇보다 중요하지 않은가. 선박 대금을 회계연도 실적으로 잡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싶었을 테니 말이다.

“거, 괘씸한 놈들이군요. 이럴 바엔 차라리 계약을 해지하고 위약금을 받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차라리 계약을 파기하고 다른 상사에 의뢰하는 게…….”

최선종 부장의 말에 고개를 젓는 강태준이었다.

“우리가 먼저 계약을 취소하긴 어려워. 법리적으로 따진다면 아무 문제가 없거든. 기한을 정해 배를 인도하기로 된 게 아니니 애매하지. 더욱이 재판관할 문제가 커.”

중고선을 도입할 때 종합상사가 거래를 중개해야만 외화를 빌릴 수 있는 만큼 상사와의 거래에서는 관할 심판에서 대한민국 법원은 배제되어 있었던 것이다.

-다음 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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