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화 나가사키 출장
하지만 사장이란 자리는 원래 외로운 법. 그렇다고 강태준이 할 일을 대신할 수 없는 일 아니겠는가. 푸념을 들어 주던 강태준이 말을 돌렸다.
“알겠습니다. 그보다 해남 조선소 쪽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알아보니 자본 잠식 상태가 심각하더구만. 아무래도 발주 취소 건으로 크게 물린 거 같아. 일단 모든 부채를 떠안기는 힘들고, 파산한 후에 기술자만 빼 올지 같이 갈지 고민 중이야.”
그러자 잠시 생각하는 척하던 강태준이 슬쩍 의견을 찔렀다.
“그러지 마시고 그냥 그 회사 태동에서 인수하는 건 어떻겠습니까. 작년까지는 적자가 한 번도 없었다던데요. 발해원양에서 털도 안 뽑고 먹으려고 압력을 넣었다는 소문이 있더군요.”
“이억수가?”
“예. 심증만이지만. 정황상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애초에 멀쩡히 발주했던 물량이 취소되는 것도 그렇고. 부산에서 그런 짓을 할 양아치는 드무니까요.”
이마를 좁힌 양재문의 표정이 심상찮게 변했다. 최근 발해원양의 상승세가 예사롭지 않은 만큼 태동으로서도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 없었던 것. 강태준의 말이 일리가 있다 여긴 양재문이 팔짱을 끼었다.
“뭐. 이억수 그놈이면 그러고도 남긴 하지. 확실히 발해가 해남을 인수하면 좀 찝찝하긴 하겠군. 그러잖아도 요새 줄 좀 탔다고 기가 팍 살아서는 우들을 띄엄띄엄 보는 거 같던데.”
“그러니까요. 그럼 적어도 인수는 막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잠시 고민하던 양재문이 곧 결단을 내렸다.
“좋아. 경쟁자 좋은 일은 할 수야 없지. 그럼 인수가격 검토해서 보고 올리게. 이거 경비 절감하기에도 빡빡한데, 지출이 추가로 더 늘겠구먼.”
“알겠습니다. 바로 수행하지요.”
“아, 그 외에 자네가 추가로 해 줘야 할 일이 있네. 일본에서 도입하기로 한 독항선 말일세. 아무래도 문제가 생긴 거 같아.”
독항선이라니 그 부분은 이미 논의가 끝난 이야기 아닌가?
강태준이 의아한 듯 물었다.
“문제라니 또 뭡니까?”
“그래 인도 기일이 다가오는데 인수 검사가 계속 연기되고 있더군. 아무래도 느낌이 안 좋아.”
“저번에 대략적인 논의는 끝나지 않았습니까?”
“급하게 귀국하느라 조항에 최종 인도일을 명시하지 못했지 뭔가. 그 부분에 관해서는 합의가 안 되서 일단 “Later”로 처리했거든. 그 때문인지 몰라도 납기가 지연되고 있어 아직도 인수 검사 일정도 안 잡혔고. 그래서 말인데 자네가 한번 다녀오는 건 어떻겠나. 기분이 뭔가 싸한 게 꺼림칙해서 말이야.”
“아무래도 사장님께서 직접 출장 가시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직접 진행하신 일이라 네고하기도 좋고, 그쪽에 압박을 주기에도 그편이 나을 거 같은데…….”
“사실 그러려고 했는데 하필 다른 일정이 생겼지 뭔가. 난 자리를 비울 수 없는 입장이라. 신규 어선매입 사무는 총괄부문장인 자네가 대신 움직여 줘야 할 거 같네.”
“꼭 제가 가야 합니까?”
“왜 이래? 이런 일은 부장급 실무자 선에서는 처리하기는 부담스럽지 않겠나. 대신 세부적인 사항은 전적으로 위임하겠네.”
강태준이 탐탁잖은 표정을 지었다.
“어깨가 무거운데요. 구매대금이 한두 푼이 아닌데.”
“밥값은 해야지. 강 부사장. 그리고 배와 관련해서는 자네만큼 전문가가 없잖은가. 이미 그쪽에 부사장급이 방문할 예정이라 통보를 해 뒀네. 이제 와서 대상자는 변경하는 건 곤란하지 않겠나?”
“회사 사정이 영 별론데 배는 제대로 살 수 있습니까?”
“빠듯하긴 하지만 국책 은행 쪽에서 이미 받기로 내정된 차관액이 있다네. 여신심사는 요식행위 수준이니 지급 보증만 받으면 충분히 인수 가능할 거야. 자네가 다녀오는 동안 대략적으로 처리해 놓을 테니 너무 걱정 말게.”
은근하게 또 업무를 강요하는 양재문에 강태준이 한숨을 쉬었다. 설유하의 출국이 얼마 안 남은 마당에 또 출장이라니. 이거 얼굴 볼 시간도 없다. 하지만 피할 수도 없는 일 아니겠는가?
“무던히도 부려 먹으십니다 그려. 알겠습니다. 언제면 됩니까?”
“가급적이면 내일이라도 당장.”
* * *
일행이 도착한 곳은 나가사키 조선소.
자이언트 캔틸레버 크레인이 당당하게 선 가운데 규슈 북서쪽으로는 규슈에서 흐르는 강물이 있고 이나사야마산 전망대 반대편 언덕배기엔 번화가가 보였다.
다음날, 정말로 하루 만에 출장을 나온 강태준은 피곤한 듯 이마를 쓸었다.
“이건 아주, 노린 거군. 진짜로 당일로 보내 버리다니.”
“어쩔 수 없지요. 하하. 약점을 잡혀 버렸으니까. 뭐 이참에 바람 좀 쐬지요.”
사실 바로 출발까지는 할 생각이 없었지만 어로장으로 김요한을 빌려 간 원죄가 있는 만큼 은근히 압박을 넣는 양재문에 결국 출발하게 된 강태준. 덕분에 하루를 꼴딱 서류를 파악하느라 밤을 새우게 된 강태준으로서는 죽을 맛이 아닐 수 없었다. 반대로 비교적 멀쩡해 보이는 최선종은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반대로 쾌활하기 짝이 없었다.
“좀 추울 줄 알았더니, 오늘은 날씨가 괜찮잖습니다. 그래도 해풍이 꽤 부드러워서 다행입니다. 보아하니 여기도 입지조건이 좋군요.”
“그럴 만도 하지. 최 부장도 알겠지만 원래 함선을 건조하던 곳이니 말이야.”
이번에 수행비서를 맡은 최선종은 강태준처럼 수산대 출신으로 원래는 해운국 소속으로 공무원 일을 하다 이번에 양재문이 사장이 되며 스카웃 되었다.
갓 들어온 신입을 수행비서로 맡긴다는 것이 좀 거시기하기는 했지만, 애초에 해운국에서 오래 쌓은 짬 때문인지 꽤 여유로워 보이는 모습이었다. 그 외에도 일행에는 경호원 세 명도 따로 동행하고 있었다. 이들은 경호를 위해 특별히 엄선한 인재들로 그중 가장 눈에 띄는 사람은 이번에 영입한 해병대 출신 미군 부사관이었다.
“미스터 핸더슨. 거 부담스러운데 좀 떨어져 줄 수 없나?”
“안 됩니다. 미스터 강. 미스터 최가 신신당부했습니다. 어떤 위험 요소가 있을지 모르니 불편하시더라도 참으십시오…….”
“그래도 이렇게까지 바싹 붙어 있으면 내가 숨 막히고 답답하다니까. 게다가 이쪽은 치안도 괜찮은 동네 아닌가. 미군부대 군사시설까지 즐비한 곳에서 무슨 사고가 있겠어. 이건 야쿠자도 아니고 너무 눈에 띄지 않나?”
“원래 위험은 일상에 숨어 있는 법입니다. 보스.”
“이봐. 이렇게 어릿광대처럼 구경거리가 되는 건 사양이라고.”
결국 강태준은 핸더슨과 아웅다웅한 끝에 약 10m 정도 거리를 두는 걸로 합의를 보았다.
“하, 딱 이번만입니다. 의뢰주께서 원하시니 일단 물러나겠지만 혹시 문제가 발생한다면 반드시 제 말을 따라 주십시오.”
“알겠어. 알았네.”
진땀을 뺀 강태준이었지만 멀리서 강렬한 눈빛을 보내는 것이 은근히 신경 쓰인다. 힐끔 핸더슨을 돌아본 강태준이 설레설레 저었다.
“하이구…… 참나 이건 익숙해지질 않는군. 굳이 이렇게까지 오버할 필요는 없는데.”
“그거야말로 안전불감증이죠. 형님도 참. 된통 당하시고는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아무리 돈을 많이 벌어도 개죽음당하면 무슨 소용인가요?”
“맞습니다. 사장님. 저번에는 운이 좋았다지만 언제 또 돌발 상황이 터질지 모르지 않습니까. 생명을 요행에 맡기면 안 됩니다.”
함께 온 최선종의 말에 오재갑도 고개를 끄덕였다. 최선종이 웃으며 강태준에게 말했다.
“좀 까다롭긴 하겠지만 따라주시죠. 저 핸더슨은 미해군 UDT 출신으로 무공훈장까지 받았던 사람인 만큼 경호에 있어서 스페셜리스트입니다. UDT 교관단이 전출되어 교관 노릇도 했다는데 사생활도 모범적인 데다 철두철미해 평가가 높습니다.”
“누가 뭐라나, 넘 철저해서 그러지…….”
“형님, 누가 뭐래도 이건 저도 실드 못 쳐 드리겠네요. 굉장히 가려 뽑은 인원이니, 귀찮더라도 경호 문제에 관련해서는 순순히 지시에 따라 주십쇼. 안 그러면 형수님께 바로 일러바칠 겁니다.”
“재갑이 너까지, 허 참. 치사하긴. 알았다. 알았어.”
혹자는 과잉 경호라고 할지 모르지만 조심해서 나쁠 것 없다. 그러자 최선종이 말했다.
“그보다 이번에 사는 배는 일반적인 원양어선이랑은 많이 다르다던데요?”
“아 탑재 모선식 독항선 말인가?”
“예에. 탑재 모선이라, 모선과 자선이 한 몸이라 이런 뜻입니까?”
“맞아. 간단히 말하면, 모선이 자선인 캐처 보트를 탑재해 다니다가 어군을 발견하면 자선이 떨어져 나갔다가 따로 낚시를 투승하는 방식이야.”
옆에서 듣고 있던 최선종이 그 말에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호, 마치 새끼 품은 캥거루 같군요. 모선과 자선 두 대가 따로 움직인다라?”
“맞아. 탑재 모선식은 자선을 내린 다음에 모선과 다른 방향으로 주낙을 내릴 수 있지. 그러니까 배 한 척보다 더 많은 낚시를 바다에 놓아 어업 성과를 크게 높일 수 있다는 것이지. 한 척으로 두 척을 운용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이야기니까.”
그러자 최선종이 신기하다는 듯이 물었다.
“배를 두 척으로 운용하면 운행이 꽤 복잡해질 거 같은데. 그냥 차라리 멸치처럼 그물로 잡는 게 낫지 않습니까?”
“하하. 말 잘했네. 선망어업은 아직은 현실적으로 어렵긴 하지 어떤 고기든 비슷하겠지만 참치는 일단 덩치가 크고 빠르잖나. 더욱이 피부가 약해서 그물로 잡으면 상품성이 떨어져서 제값을 받기 힘들거든. ”
참치는 근육이 혈액을 많이 함유하고 있는 데다 혈액량이 많기 때문에 부패하기 쉽고, 사망과 동시에 체온이 50도까지 올라 몸 색깔이 점차 흑색으로 변한다. 그래서 잡는 즉시 머리와 내장을 제거한 뒤 영하 60도 이하의 저온에 냉동시켜 수송 및 유통해야 한다.
“더욱이 선망선으로 참치 같은 대형 어종을 잡으려면 엔진 출력이 좋아야 하는 것은 물론 배 안에 급속 냉동에 필요한 시설도 갖춰야 하구, 배 사이즈도 커질 수밖에 없고, 건조 비용이 어마어마하게 많이 들게 되어 초기 투자비가 더 들 수밖에 없지. 일반 연승 어선으로 잡은 참치는 상대적으로 상처가 적으니 단가는 더 높게 받을 수 있어.”
“제가 듣기로 정확히 말하면 일본서조차 선망선을 가진 업체는 별로 없습니다. 선박 사이즈가 큰 만큼 출항 시 소모되는 연료비도 장난이 아니거든요. 어구 탐지기는 기본에 헬기, 각종 레이더, 소나(Sonar 음파 탐지기)에 위성 통신장비까지 필요하니 장비 가격에 유지비도 장난이 아니고, 이윤을 내기가 쉽지 않아서요.”
오재갑이 말을 보태자 그제야 이해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최선종이었다.
“하이리스크 하이리턴이군요. 결국은 규모의 경제라. 결국 탑재 모선식은 현실적인 측면에서 절충점인 거군요. 한 번 낚을 때 그만큼 효율도 좋지만 고기가 가뭄이기라도 하면 회사가 휘청일 수밖에 없으니까요.”
“정확히 이해했구먼.”
그러자 이번엔 오재갑이 물었다.
“근데 그렇게 생산성이 높은 배가 매물로 나온 이유가 뭡니까? 솔직히 저도 다 이야기를 못 들어서요.”
“뭐 알잖나. 아까 말했던 것에 그 이유가 있지.”
“운용이 복잡하고 어렵다는 것 점이십니까?”
“일본인 선원들은 자선 탑승을 기피하거든. 참치같이 대형 어종을 작은 배로 미끼를 던져 잡는 것이 위험하니까. 해상에서 동선이 꼬이면 큰 사고가 날 수도 있지 않나. 그러다 보니 실용성과는 별개로 실제 활용에는 망설일 수밖에 없는 거지.”
그 말에 최선종이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
“그건 완전히 어불성설이군요. 애초에 그럴 거면 배를 건조하지 말았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고작 그런 이유로 몸을 사리다니 배때지가 아주 불렀군요.”
“뭐 위험한 일을 안 해도 먹고 살 만하니 더 이상 그렇게 위험을 무릅쓸 메리트가 없는 거겠지. 원양어선을 타면 집 한 채씩 생기던 예전과 달리 회사원들의 평균 임금이 오르면서 원양어업에 투신할 메리트가 사라지고 있으니 말이야.”
강태준이 쓰게 웃었다. 사실 한국전쟁 특수로 재건된 일본은 60년대 초중반 이미 패전의 참화에서 벗어나 세계 수위권의 경제 대국으로 급부상한 상태. 굳이 힘들고 위험하기까지 한 원양어업에 목숨을 걸 이유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일본 놈들도 향후 고민이 많겠군요. 쓸 만한 인력이란 게 그렇게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게 아니지 않겠습니까?”
“아무튼 일본도 대책을 마련하려고 노력 중이지. 그래서 요새는 자이니치 출신도 입교할 수 있는 단기 학교까지 만들었다더군. 부서를 갑판, 기관, 요리 세 부문으로 나눠 2~3개월씩 단기로 훈련 후 바로 실전에 투입한다고 해.”
“자이니치를 쓸 정도라. 확실히 심각하긴 하군요. 일본에서 한국인의 인식이란 부라쿠민보다 조금 나은 수준 아니었습니까?”
“그만큼 인력난이 심각하단 거지. 덕분에 조센징이랍시고 시비를 터는 놈들도 많아서 골치라는군.”
“좀생이 같은 놈들이군요. 지들이 필요해서 쓰는 주제에 참. 아주 옥수수를 털어 버려야 하는데 말입니다.”
마치 자기 일처럼 흥분하는 최선종에 강태준이 웃었다.
“하하. 성질하고는. 그보다 미쓰비시 쪽에서 담당자가 나오기로 했는데?”
“그러게 왜케 늦지? 아, 저기 오네요.”
오재갑 손짓에 따라 언덕 위를 보니, 저 멀리 훤칠하게 생긴 양복쟁이 몇 명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