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화 현지답사
강태준이 일행을 이끌고 찾아간 장소는 아산만 근처에 세워진 공세리 성당.
70년 전통을 자랑하는 성당은 뾰족한 첨탑과 높은 천장을 가진 전형적인 중세식 건축물이었다. 낙엽이 쌓인 공간 뒤로 300년 묵은 거목들과 붉은 벽돌이 어우러져 고풍스런 느낌을 주었다.
“흠. 아담하니 이쁘구먼. 이 일대도 자네 공사 부지인가?”
“그건 아닙니다만 다만 이 지역 천주교 신부께서 열성적으로 성당을 문화재 시설물로 재건하려고 노력 중입니다. 사실 인근 주변 성지순례 길이 있다면 관광지로 좋을 것 같아서 한번 시찰하려고요.”
“성지순례라고? 그게 관광객 유치에 도움이 되나?”
“하하. 저도 딱히 종교인은 아니라서 정확히는 모릅니다만 없는 것보다는 낫겠죠. 듣기로는 여기는 예전 병인박해 때 순교자를 모시는 곳이라더군요. 피정 일정과 관련해서 성당 측과 이야기를 해 두었는데 천주교 측에서도 상당히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호오. 그런가? 별별 구상을 다 하는군.”
“예부터 충청도 일대에서 거두어들인 세곡을 저장하던 지역이라 부지도 넓거든요. 듣기로 드라마나 영화 세트장으로도 인기 있는 장소라 하더군요.”
그 전에 미리 성당 측과 안면을 익혀서 나쁠 것은 없었다. 공세리 성당을 지나 방문한 곳은 신정호수 일대였다. 호숫가를 걷는 내내 흘러나오는 잔잔한 물소리에 물소리가 어우러져 편안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여기도 경관도 나름 수려한데 은근히 운치가 있구먼.”
“네. 듣자 하니 고인이 되신 심 사장님께서 아주 오래전에 일부 지역을 매입하였더라고요. 예전에 데이트하던 장소라나? 은근 로맨틱 가이였다고 들었습니다.”
“그 사람 부동산 보는 눈이 있구먼. 좀 친하게 지낼 걸 그랬어. 근데 여기는 뭘 지을 건가? 여기는 수원지다 보니 개발상 제약이 많을 거 같은데.”
“그래서 주위에 테마공원을 조성해 그 안에 식물원을 구상해 보고 있습니다.”
차강진으로서는 처음 듣는 소리였는지 대단히 흥미로워했다.
“식물원이라 그건 또 무슨 소린가?”
“가든 센터 같은 거 말입니다. 이곳에 토종 식물뿐만 아니라 다양한 원예식물을 관람할 수 있으면 어떨까 해서요. 계절별로 튤립, 수선화 같은 원예종 구근들을 제공해 축제를 열면 꽤 눈요기가 될 거 같지 않습니까?”
팔짱을 낀 차강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구상은 그럴듯하지만 과연 통할런가? 투자비도 문제지만 원예 단지를 조성하려면 상당히 기간이 걸릴 것 같은데…….”
“일반적으로는 그렇겠죠. 하지만 이쪽에서는 치트키가 있지 않습니까?”
“치트키? 거 무슨 소리인가?”
“이곳에 이순신 장군 사당이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박정명 각하께서 이 근방에 관심이 아주 많으시거든요. 그래서 대통령 특별지시로 대대적으로 현충사도 개수할 예정입니다.”
“음, 그래. 나두 신문에서 그 기사 본 적 있지.”
“예. 마침 영부인이신 옥진수 여사와 정권 실세인 김필중 부장께서도 충남 부여 출신 아닙니까. 거기에 이순신 사당이라 민족정신을 고취할 교육 체험 장소로 최적이지요. 문교부와 협의만 잘하면 수학여행 장소로 지정되는 건 어렵지 않을 거 같은데 말입니까?”
박정명이 이순신 빠라는 것은 사실 모르는 사람이 없을 만큼 유명한 이야기다. 집권자 입장에서 역사적인 영웅을 내세워 충의를 강조하는 것만큼이나 정권 입맛에 맞는 건 어디 있겠나. 게다가 이순신이라는 인물은 성역화 조성사업을 해도 이견이 없을 국가적인 위인인 만큼 강태준의 말에는 설득력이 있었다.
“대단한데, 어떻게 그런 구상까지. 자네는 다 계획이 있구먼.”
“호텔 부지에 대해 사업성을 검토하다 보니 별생각을 다 해 봤지요.”
“허허. 그럼 주변 지역 조사도 하였고, 지형 및 지질조사, 표본도 수집도 이쯤이면 대충 마쳤을 테니, 이만 돌아갈까?”
그 말에 강태준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에이 무슨 말씀을 이왕 여기까지 온 건데 영인산 정도는 타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응? 굳이 산행을?”
“에이 이쪽 일대가 예로부터 그렇게 영험하다지 않습니까. 예전에 기우제도 지냈다던데, 혹시 압니까. 산신령께서 사업을 도와주실지.”
“흠. 그럴까 그럼?”
원래 사업을 하던 사람들은 미신이나 점에 약한 만큼 은근히 솔깃하는 차강진.
슬슬 불길함을 감지한 안연복이 우물거리며 말했다.
“저는 식사 준비 겸 해산물 처리 때문에 좀…….”
“아, 안 이사는 식사 담당이니 열외로 하지요. 저희가 산을 타고 내려오는 동안 호텔에서 식사 준비 좀 부탁하겠습니다.”
안연복이 슬쩍 빠지자 옆에서 눈치를 보던 복만이가 손을 들었다.
“저. 저도 돕고 싶습니다.”
“응? 너는 왜?”
“그게 안 이사 혼자는 준비가 힘들지 않겠습니까?”
“에이, 괜찮아. 너는 이참에 살이라도 빼자고. 자자, 시간 없으니 빨리 움직이자고.”
강태준이 등을 떠밀자 뒷덜미를 잡힌 복만이가 죽상이 되었다. 등산 코스로 변해 버린 일정에 모두들 뜨악했지만 결국 코스는 강태준의 뜻대로 되었다. 능선을 타고 수목원을 지나 다시 상투봉과 닫자봉을 돌아 사방댐을 거치고 영인산성까지.
쉬지 않고 움직이는 강태준의 속도에 모두들 땀 범벅이 되었다.
“헉헉. 아이구야. 그만…… 그만 좀 쉬었다 감세.”
“에이 다 왔습니다. 아까도 중간에 쉬셨잖습니까?”
“이 사람아. 나 접대해 준다더니, 이 늙은이 죽일 일 있나?”
“이왕 온 거 정상까지는 가 봐야죠. 실제로 파산 직전에 몰려 여기 목매러 올라왔다 기운을 받아 대성한 사업가도 있답니다.”
“누굴 속이려고. 노인네 갖고 장난치면 못 써.”
“하하. 제가 왜 차 사장님께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정상에 큰 가뭄이 있을 시 기우제를 지내던 우물이 있다는데요. 기운을 나눠 받으려면 그 정도는 이쯤 와서 돌아가는 것도 아깝잖습니까?”
“끄응…… 알았네, 알았어. 내가 졌네.”
말이 길어질 것 같자 차강진이 먼저 다시 무릎을 박찼다. 사실 죽는다 소리를 하긴 했지만 여기까지 와서 돌아가는 것도 모양새 빠지는 일 아닌가. 봉우리 몇 개를 오르내리는 수고로움이 끝날 즈음 마침내 나타난 정상.
신선봉에 놓인 샘터를 발견한 사람들이 앞다퉈 우물물을 길었다.
“꿀맛이네. 이제 좀 살 것 같군.”
“크으 시원하구만.”
정상에서 가만히 땀을 식히고 있자니 문득 선선한 바람이 불어온다. 위에서 내려다보니 서해부터 시작해 나온 물길이 삽교천과 아산만이 굽이쳐 고래처럼 큰 무리를 이루고 있다.
“간만에 상쾌하구만. 이런 것도 와 볼 만하지. 안 그러냐 복만아?”
“헉헉…… 지는 그닥요. 바다 쪽은 몰라도 산하고는 영 안 어울리는 거 같은뎁쇼.”
말할 기운도 없다는 듯 탈진한 듯 혼이 나간 복만이. 못마땅한 듯한 얼굴의 광필이가 쯧쯧 하고 중얼거렸다.
“이것들이 근성이 부족하구만. 근성이, 자 보게 가슴이 탁 트이지 않는가. 사내라면 호연지기를 길러야지.”
“호연지기는 얼어 죽을. 이건 가혹행위입니다. 가혹행위…….”
“인마, 뭐시라고라?”
죽상을 한 복만이의 항변에 마주 끄덕이는 비서진들. 그 말을 아랑곳하지 않은 강태준이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자자, 그렇게 투닥거리지 말고 저기 하구를 보십쇼. 안상천이 아름답지 않습니까? 차 사장님.”
“거,…… 멋지긴 하구먼.”
차강진의 시선이 향한 곳엔 광활하게 펼쳐진 잿빛의 갯벌이 보인다. 바다를 품에 안은 갯벌 위 창공은 잡티 없이 창창했다.
햇살이 쏟아지자 보석처럼 반짝이는 해변. 멀리서 저어새 무리가 움직이는 모습이 생생하게 보였다 화려한 칠면초가 바람에 흔들리고, 망둥어 한 마리를 문 저어새가 튀어 오르는 순간 물방울과 함께 무지개가 번진다. 자연의 웅장함에 여운을 즐기는 그때 가만히 상념을 깬 강태준이 말을 이었다.
“보기엔 꽤 아름답지만 바로 저곳이 한국에서 조수 간만의 차가 가장 크기로 악명 높은 곳이죠.”
“그래. 나도 듣기는 했어. 해마다 홍수로 황해가 역류한다지.”
“예. 그래서 개인적인 소견이긴 합니다만 향후 기회가 된다면 안성천의 하구부터 삽교천까지 제방을 건설해 보는 것이 어떨까 구상하고 있습니다.”
“저 위에 제방을 말인가?”
“네, 바다와 호수를 가로질러 관광버스가 달린다면, 생각만 해도 멋지지 않겠습니까?”
“제방 위로는 4차선 도로가 달린다라, 아우토반 느낌인데요. 그거.”
광필이의 대꾸에 숨소리를 회복한 차강진의 눈에 다시금 생기가 돌았다.
“흐음. 마치 활주로 같겠구먼. 홍수 피해도 엄청나게 줄어들겠어.”
“네네. 평택읍이랑 아산 사이를 자유로이 왕래할 수 있게 되면 유동 인구도 늘어날 겁니다. 그렇게 되면 그 안에 담수호를 조성해 주변의 평야를 십분 활용할 수 있어 농업 생산성도 올라갈 거고요.”
그 말에 오재갑이 공감이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창대한 계획이군요. 실현만 된다면 정말로 역사적인 사업일 듯합니다. 어디 보자, 대략 10리 정도 될까요? 생각만 해도 엄청난 길이군요. 어디 보자 배수갑문이 몇 개나 필요할지.”
“흠. 최소 10개는 있어야 하지 않을까, 홍수 피해를 막으려면 높이는 최소 30척(1척 30.3cm)은 되야 할 거 같은데.”
눈대중으로 대충 거리를 어림해 본 강태준의 말에 오재갑이 혀를 내두르며 말했다.
“30척이라 다섯 칸이면 그건 완전 장벽 수준인데요?”
“동원될 인원도 어마어마하겠지. 어디 보자, 진짜 지으려면 포크레인이나 불도저가 몇 대나 필요하려나? 로더에 덤프트럭은 기본이고 바지선, 예인선까지, 생각해 보니 장난 아니군.”
“돈도 돈이지만 한두 해로 끝날 공사가 아닐 거야. 조수간만의 차이가 크다면 그만큼 공사 난이도도 상당할 테고 말이지.”
차강진을 포함, 이런 쪽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도 저마다 한 마디씩 생각했던 바를 지껄였다. 실제로 아산만 공사는 70년대 추진 당시에도 관심을 모았던 국내 최대의 방조제 공사로 당시 국가 경제 규모에 견주어 봐도 전례 없는 대형 토목공사다. 마치 자기가 직접 사업을 진행하는 사람처럼 진지하게 지껄이는 말들에 강태준이 너털웃음을 지었다.
“뭐. 국책사업으로나 가능하지 당장 추진하기는 무리겠지만요. 언젠가는 투자하지 않겠습니까? 그럼 이제 땀도 뺐으니 슬슬 돌아갈까요. 일단 몸부터 씻고 식사들 해야 할 거 같은데?“
“그러고 보니 점심을 대충 간식으로 때워서 좀 시장하구만. 어쩐지. 출출하더라.”
“자자 그럼 해지기 전까지 돌아들 갑시다.”
기운을 차린 강태준 일행은 곧장 아산호텔로 향했다. 미리 예약해 둔 특실로 들어가기 전에 몸부터 씻을 요량. 산에서 기진맥진한 몸으로 온천물에 등을 지지자, 쭈뼛하니 등줄기로부터 청량한 기운이 차고 올라왔다.
“끄으으으.”
땀을 거하게 흘린 뒤라서일까. 탕에 들어가자 몸의 세포가 깨어나는 듯하다. 근육이 이완되며 온몸의 피가 활성화되는 기분. 결린 어깨를 풀던 차 사장도 그제서야 만족스런 반응을 보였다.
“후…… 이제야 살 것 같군. 아까는 머리가 어질어질한 게 승천하는 줄 알았지 뭔가.”
“그러게. 냉탕과 온탕의 조화가 기가 막히네요.”
과연 옛 명성이 어디 가지 않는지 뜨끈하게 지진 온몸이 눅진눅진하게 풀리는 기분.
강태준 역시 칼을 맞은 부위의 얼얼했던 통증도 한결 가라앉은 느낌이었다.
냉탕에 몸을 식히고 나오자, 한결 개운해진 몸이 가볍다. 목욕을 마친 일행이 한자리에 모이니 먼저 탕에서 나온 안연복이 별실에 상을 준비해 놓고 있었다.
“거,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오오. 이건가?”
삶은 문어를 썰어낸 문어숙회와 갯장어에 도미 껍질을 대나무에 고아 꼰 치쿠와,
거기에 새우 완탕, 튀김옷 위에 마치 흰 강에 떠오른 단풍잎을 얹은 가마보코.
노릇노릇 튀겨 낸 생선 고로케. 거품이 보글보글 이는 맥주가 한가득 준비된 상차림에 복만이의 입이 함지박만 하게 벌어졌다.
“여어, 안 선생, 제대로 솜씨 발휘 좀 했네요. 호사스럽구만요.”
“어인 말씀을, 이건 제가 특별 제조한 생맥주입니다. 술안주랑 같이 드셔 보십쇼.”
차가운 얼음 글라스에 맥주를 따르자 황금빛의 기포가 뿌글뿌글 뿜어져 나왔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