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화 이주 대책
뜻밖의 제안에 강태준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제가 말입니까?”
“예. 아무래도 강 사장님께선 이쪽 지역 일대에 꽤 덕망이 높은 사업가이시기도 하고, 무엇보다 윗선과 좀 연결고리가 있지 않으십니까. 아무래도 행정부서에서 직접 나서는 것보다는 작업 처리 과정이 좀 매끄럽지 않을까 해서 말이죠.”
“흠…… 그건 그렇지만. 이런 일은 필연적으로 잡음이 일 수밖에 없는 문제인지라. 좀 고민이 되는군요.”
“그래서 이렇게 부탁드리는 것 아니겠습니까? 필요한 지원은 얼마든지 하겠습니다.”
실제로 철거일 자체야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일전에 박 여사 도움으로 미래건설 밑에서 부산 하야리아 부대 지원 사업에 꼽사리로 낀 것을 시작해 고물상을 운영했기 때문에 파괴된 건물이나 노후된 주택에서 철거 용역을 해온 노하우가 있었다. 하지만 문제의 본질은 이번 일은 지금까지의 작업과는 궤가 다르다는 것이다.
‘사람들을 삶의 터전에서 억지로 쫓아내는 일이니까.’
세상일이란 것은 이상적으로만 돌아가진 않는다…… 게다가 이주 지원금이 나온다고 해도 또다시 이주 대상이 된 실향민들이 그 액수로 만족할지 미지수.
더욱이 지원금을 떠나 지역에 애착관계가 형성된 상황이라면 더 격렬하게 반발할 것이다.
철거 작업의 특성상 보금자리를 잃게 된 철거민들은 피해의식 때문인지 감정적으로 극히 격앙되는 경우가 많다. 여기서 동원된 용역과 물리적 충돌이라도 일어난다면……
금세 허락할 줄 알았던 강태준의 반응이 영 미지근하자 되려 몸이 달아오른 진중보가 한마디 덧붙였다.
“만약 도와주신다면 저희 부산항만공사 측에서 위판장 일과 관련해 최대한 편의를 제공해 드릴 생각입니다.”
“그렇다면 한 가지만 여쭙지요. 혹 철거 과정에서 벌어지는 사태에 대해 민, 형사 면책을 해 줄 수 있겠습니까?”
“물론입니다. 그 부분은 정부 쪽과 이미 협의가 되어 있습니다.”
강태준은 다시 장고에 빠졌다. 이렇게 자신 있게 말할 정도라면 이미 어느 선까지 개입할지까지 대략적인 가이드라인이 나왔을 터. 한참 생각을 거듭하던 강태준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좋습니다. 그럼 용역계약 초안을 보고 싶군요. 저희 쪽 업무 분장이 어디까지인지 구체적인 내용을 제공해 주시면 검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긍정적으로 생각하신다니 감사합니다.”
“저, 아직 확정된 건 아닙니다. 세부 내용과 주요일정부터 보내 주십시오.”
철거 용역 일을 기정사실로 하려는 진중보였지만 신중한 강태준은 철저하게 선을 그었다. 혹시나 문제 될 법한 일이 생긴다면 그땐 미련 없이 털 생각이었던 것이다.
철거 건을 검토해 보겠다는 말을 임원들에게 전달하자, 광필이가 성가시다는 듯 머리를 훌훌 털었다.
“태준 형님도 참, 지난번 기억을 잊으셨습니까? 테러로 황천길 갈뻔했는데, 이젠 좀 조용히 살아야죠. 이런 일은 잘해 봐야 본전인데 욕먹을 짓을 하는 건 좀…… 사실 우리 백경의 이미지에 먹칠하는 짓거리 아닙니까?”
“뭐, 굳이 우리 회사 이름으로 철거를 집행할 필요는 없겠지.”
“그러믄요?”
“철거 용역 부분은 넙치 형님께 외주를 맡기고 큰 틀에서만 관리해야지, 듣자 하니 군복 납품일을 제외하고도 노는 입이 많다던데. 그쪽 입장에서야 밥 빌어먹을 일이 생기면 좋지 않겠나? 애초에 힘쓰는 일이라면 그놈들보다 더 잘할 놈들도 없고 말이야…….”
“흠. 그래도 전 별로 내키지 않는군요. 지역민과 트러블이 생기면서까지 리스크를 질 가치가 있는지 모르겠네요. 사실 철거 용역은 본질적으로 깡패짓 아니겠습니까?”
광필이의 대꾸에 춘삼이와 오재갑까지 어이없다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젓는 춘삼이에 오재갑이 이마까지 짚어 주며 걱정스럽게 물었다.
“음…… 진심이십니까? 어디 아프신 건?”
“어이, 임마, 왜 멀쩡한 사람을 환자 만들고 그래?”
“그게 네가 그런 말을 하니까 좀 안 어울린다. 야.”
강태준의 말에 너나 할 것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춘삼이와 오재갑. 광필이가 억울하다는 듯 항변했다.
“에이. 저를 뭘로 보시는 겁니까? 저도 검찰 쪽을 들락날락하다 보니 가급적 나쁜 일에 안 엮이는 게 최선이더군요. 뭐 필요하다면 폭력도 불사하겠지만. 호구지책으로 판자촌 짓고 사는 사람들 쫓아내는 건 좀 양심상 그렇잖습니까. 안 그런가. 재갑이?”
은근히 동의를 구하는 김광필이었지만 오재갑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글쎄요. 광필 형님께는 죄송한 일이지만 개인적인 사견으로는 찬성입니다.”
“뭐라고? 이런 피도 눈물도 없는 자식을 보게나?”
“그렇게 꺼림칙해 하지 마시고, 어차피 누군가는 해야 할 일 아니겠습니까. 굳이 외면한다고 판자촌 철거가 안 될 것도 아니잖습니까. 어차피 위에서 오더가 떨어진 이상 강제집행은 어떻게든 강행될 겁니다. 진중보 국장은 그나마 상당히 양심적인 사람이니 저희한테 이런 부탁을 하는 거죠. 그 사람도 나름 이런 게 이권이 많이 걸려 있다는 걸 모를 리 없을 텐데. 이렇게 부탁했을 때는 나름 의도하는 바가 있지 않겠습니까?”
강태준이 동감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단순히 철거 용역을 구하는 일이라면 우리한테 부탁하지 않았겠지. 백경이 수해 복구 지원 등으로 아무래도 기업 이미지에 신경을 쓰는 회사 아닌가. 사람들도 이쪽 분야에 경험이 있으니 여러모로 반발이 적을 거라 생각해 기대를 거는 게 아닌가. 그쪽에서는 주민 이주 시 최대한 잡음 없이 해결하고 싶은 거겠지.”
“형님. 그건 희망 사항이죠. 원래 잃을 게 더 없는 놈들은 악을 쓰는 법입니다. 개진상들을 보면 생각이 달라지실 겁니다.”
그 말에 강태준이 피식 웃었다.
“너는 참 뭔가 착각하는 모양이구나. 사실 우리가 나서는 게 철거민들 입장에서도 좋은 거다.”
“에? 그건 무슨 궤변입니까?”
“사태를 냉정하게 보자고. 우리가 안 나서면 아예 용역 깡패나 군바리들이 나설 가능성이 크지. 너는 이번 정권이 설마 이런 국책사업을 지역민 반발로 포기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뭐, 십중팔구 그럴 리는 절대 없겠죠…….”
“그렇지. 말이 안 통하면 진짜배기 전문 용역반이 투여될 텐데 그땐 이주민들이랑 대화 같은 게 성립될 거 같아? 군이 투입되면 그 즉시 속전속결로 밀어젖히고 볼 텐데, 그때는 무조건 갈등이 벌어질 수밖에 없어. 그러다 엄한 놈 하나가 다치기라도 해 봐라. 그땐 다 피바다 되는 거야.“
반박할 말이 없어진 광필이도 입을 다물었다. 민주적 기반이 취약한 군부 정권은 경제 개발을 통해 실적을 내는 데 사활을 걸었다. 그런 만큼 경제 개발 과정에 장애물이 발생한다면 대화보다는 폭력적인 수단을 선호할 확률이 높은 것이다.
숙연해진 분위기에 강태준이 다시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어찌 되었든 우리가 나서는 것이 그나마 판자촌 주민들을 위하는 길이지. 정부 쪽에서는 사정이 어찌했든 일단 내쫓기로 마음을 먹었으니까. 시위가 격해지면 시유지를 불법으로 점거한 폭도들로 몰아 조지려고 할 거고. 그때는 정말 피도 눈물도 없는 상황이 벌어지지 않겠나.”
시무룩해진 광필이가 땅이 꺼지라 한숨을 쉬었다.
“그건…… 하, 부인할 수 없겠습니다.”
“그런 최악의 사태를 피하려면 우리 같은 민간업체가 나서는 편이 모양새가 좋지. 게다가 여기서 잘만 풀리면 우리도 혜택이 볼 부분이 많지. 그야말로 종합수산업 위탁관리 업체로 도약할 기회 아닌가.”
이런 상황에 욕먹는 게 두려워서 굴러온 호박을 포기하는 건 좀 아깝다는 것이 강태준의 생각이었다. 애초에 수산위판장이라 함은 수산물 위탁 판매부터 냉동, 냉장, 제빙은 물론, 어선 급수, 주차 관리 등등 엄청난 파급효과가 있는 사업들이 연계되어 있지 않은가. 더욱이 항만국장인 진중보에게 빚을 지워두는 것도 향후 사업 전개를 위해서도 좋다.
“그거뿐만이 아니겠지요. 이주한 주민들이 머물 주택들은 누가 짓겠습니까. 한 세대당 7평씩 연립주택을 만들더라도 최소 수천 채는 필요할 텐데 말입니다. 추후에 거제대교를 지으려면 우리도 공사 실적이 필요하지요. 실적 없이 공동 시공사로 참여하긴 어려우니까요.”
이어지는 오재갑의 논리에 결국 승복한 것은 광필이었다.
“뭐. 분하지만 형님 말씀이 맞군요. 이만큼 위판장 조성과 주택 건설 경험을 토대로 실적을 쌓기도 쉽지 않으니 말입니다.”
“이해해 주니 고맙구먼. 그럼 광필아.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이참에 쓸 만한 지역 업체 중 혹시 매물로 나온 중소 건설사가 있는지 알아봐.”
“건설사요? 굳이 필요하겠습니까? 기존에 철거반들을 쓰면 될 텐데요. 최 목수도 있고 말입니다.”
“이번 위판장 사업은 예전과는 아무래도 규모부터가 다르지 않나. 건축 설계도 해야 하고, 최 목수가 아무리 유능해도 혼자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지. 더욱이 최 목수한테는 시킬 일이 따로 있으니. 아무래도 상가나 빌딩 등 건축과 토건 설계 용역 실적이 있는 건설사를 인수하는 편이 여러모로 좋을 거 같아.”
“알겠습니다. 형님. 그럼 인수 계획을 타진해 보겠습니다.”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던 중 잠시 손목시계를 확인한 강태준이 대꾸했다.
“좋아. 그럼 난. 선약이 있어 나갈 테니 너한테 뒤를 맡기마. 너무 늦게까지 회사에 있지 말고, 퇴근 일찍 해라.”
“옙, 살펴가십쇼.”
“가시죠. 사장님.”
잠시 후, 차 키를 받은 춘삼이가 차를 끌고 왔다. 청년이 된 춘삼이는 제법 눈치가 빨라져서인지 시키지 않아도 이젠 비서 역할을 곧잘 했다고 할까.
3시간을 넘게 달려 강태준을 태운 차량이 목적지인 용당동으로 도착하자 차에서 내린 춘삼이가 입을 벌리며 감탄했다.
“여기가 용당동이군요. 근데 이게 다 한 회사 소유입니까?”
“그래, 동 전체가 거대한 물류단지라고 할 수 있지.”
엄청난 규모의 합판 공장 앞엔 수북하게 쌓인 목재들이 끝도 없이 늘어서 있고 입구 앞에는 용당 목재라는 간판이 당당하게 붙어 있다. 바로 이곳 용당동은 한때 세계 최대 목재 가공업체이자 1963년 당시 국내 재계 규모 1위를 찍었던 용당 목재상사의 보금자리였다.
신선대 부두와 함께 굽이치는 용마산자락. 부두 앞 용당세관을 보니 감흥이 새롭다.
마침 기다리고 있었는지 도착한 안연복과 최달건이 강태준을 맞았다.
“아. 오셨습니까? 사장님.”
“아이고, 안 선생까지. 제가 좀 늦었군요.”
“아닙니다. 저희도 이제 막 와서 물건을 확인하는 중이었습니다.”
“그러게, 목재 종류가 너무 많아서. 고르기가 쉽지 않겠더군.”
혀를 내두르는 최달건이 뒤를 돌아보며 허허 웃었다. 그도 그럴 것이 1만 평이나 되는 저목장엔 편백과 소나무는 물론 나왕과 금강송, 자작나무 등 갖가지 나무들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강태준이 자리를 옮기자 井자형 평적 저목 형태로 적치된 목재들은 대부분 통풍에 유리하게 자연건조가 되도록 켜켜이 쌓여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 주변으로 5톤 트럭 십수대와 굴착기, 지게차, 셀프로더 등이 쉴 새 없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근데 목재 사업자나 양묘 소장은? 아무도 없습니까?”
“일이 있어서 잠시 외근을 나갔다는군요. 담당자 올 때까지는 잠시 기다리라고 하길래 구경도 할 겸 둘러보는 중입니다. 근데 이쪽 목재는 대부분 건조가 덜 끝난 거 같아서 딱히 쓸 만한 것들은 없길래 눈요기 중이었습죠.”
안연복의 대답에 춘삼이가 갸우뚱거렸다.
“그렇습니까? 제가 보기에는 이 정도면 훌륭해 보이는데요?”
“그게 실내용 목재는 수분 함량이 12프로 이하여야 하거든. 게다가 한옥 부재용 목재는 조제 과정에서 마감 절단되는 부위를 고려하여 10㎝ 이상 여척을 둔 목재로 수급해야 하기 때문에 좀 까다롭지.”
“수분 함량이라. 그게 많이 중요한가요?”
“중요하지. 함수율이 높으면 나중에 마르면서 나무가 갈라져 버릴 수도 있으니까. 목재가 뒤틀리면 미관에도 좋지 않을뿐더러 목재로서 가치가 떨어지지, 게다가 속에서 벌레가 자랄 우려도 있으니 이런 건 꼼꼼히 살펴봐야 하거든.”
일행이 최달건의 설명을 경청하는 사이, 뒤에서 인자한 목소리가 들렸다.
“하하. 그거야 당연한 일 아니겠나. 여기 있는 물건은 아직 박피랑 약재 처리가 덜 된 원목들뿐이니까. 한옥용 부재는 보관 단계부터 별도로 적재되어 있네.”
일행이 뒤를 돌아보니 양묘 소장과 함께 온 노인 한 명이 빙그레 웃고 있다.
하관이 얇고 인자하게 생긴 노인을 보는 순간 최달건이 소리를 질렀다.
“스승님!”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