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화 수산어시장
춘삼이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말했다.
“공민당이 야당 텃밭에서 승리하다니, 민심만 봐서는 도저히 승산을 장담할 수 없었는데 말입니다. 역시 선거란 까 보기 전에는 모르는 일이군요.”
“그러게. 열 길 물속은 알아도 사람 속은 모른다더니, 사람들도 참 의뭉스러운 데가 있다는 말이여.”
그 말에 강태준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하하. 그게 아니지. 실상은 영호남 쪽으로 구호물자가 우선 배정되었기 때문이 아니겠나? 밀가루가 태풍 피해를 본 남부지역에 집중적으로 살포되었으니 말이야.”
“오, 그 생각은 전혀 못 했군요.”
“지금 판도는 박정명의 치밀한 노림수가 먹혔다는 거지. 절대로 우연이 아니야.”
63년 여름 태풍 셜리가 호남평야에 상륙한 것은 군부 정권으로서는 예상치 못한 악재였다. 쌀농사는 대흉년을 기록하며 곡물 가격은 폭등했고 매점매석이 판을 쳤다. 부랴부랴 물가 통제에 나선 박정명이었지만 시장을 안정시키기엔 역부족.
국고에 쌓인 재고로는 9월을 넘기기 힘든 상황이었으니 민심은 요동쳤고 지지율은 급락했다.
그때 기적처럼 박정명을 살린 것이 미국에서 공급된 잉여 농산물이었다.
“수재가 닥쳤다지만 어차피 서울 놈들은 대부분 살 만하니까 좀 어렵긴 해도 못 버틸 정도는 아니지. 그래서 과감하게 남부 쪽으로 몰빵한 거야.”
“구호물자를 영호남에 우선 배정한 것이 신의 한 수였군요.”
“맞아 원래 배곯으면 밥 주는 놈이 상전인 게지. 당장 온 식구 굶어 죽게 생긴 마당인데 민주주의니, 자유니 통일이니 전부 개풀 뜯어 먹는 소리 아닌가. 농촌을 밀가루로 범벅해 놓았으니, 안 뽑으려야 안 뽑을 수가 없지. 게다가 보안 정국도 한몫해 간첩 사건이니 뭐니 뒤숭숭했으니 말이야.”
“맞습니다. 뭐 거기에 반공 영화도 대대적으로 홍보하면서 표를 뿌렸더군요. 라디오에서도 얼마나 말이 많았습니까? 맨날 간첩이니 북괴가 넘어온다느니 설레발은…….”
광필이의 말에 오재갑이 시니컬한 어조로 대꾸했다.
“빵과 서커스인가. 어디서 들은 말이 생각나는군요.”
“암튼 야권 후보들이 단일화만 했어도 승패는 장담하기 어려웠겠지. 하지만 선거에서 이겼으니 뭐.“
강태준의 그 말에 김광필이 뻔뻔하게 말했다.
“그럼 내도 충분히 상 받을 자격이 있구먼. 이번에 철거반 지휘하느라 힘들었으니 암튼 우들도 여당표에 일견 기여한 셈이 아니겠나? 안 그래 춘삼아?”
“지가 뭘 압니까? 아이구 머리 아파. 역시 정치는 너무 어렵습니다.”
학을 떼는 춘삼이의 모습에 강태준이 귀엽다는 듯 머리를 헝클었다.
“하하, 차차 익숙해지면 되지. 사실 나랏님이 누가 되든 무슨 상관인가. 등 따시고 배부르면 만사 오케이지. 우들은 돈만 잘 벌면 되지 않겠어.”
“그러게. 국민은 잘 먹고 잘사는 게 최고고, 기업인은 돈을 잘 버는 게 제일이지. 그래야 일자리도 생기고 경제가 순환하는 거 아니겠나?”
그 말에 오재갑이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요. 듣자 하니 수해로 또 어묵이 무쟈게 팔렸다고 하더군요. 점유율도 벌써 10프로대를 넘었답니다.”
“그거 고무적이구먼.”
“맞습니다. 황철득 그 양반이 은근히 요식업 쪽에 재주가 있더군요. 노친네, 이번에 벌써 10호점을 냈답니다.”
“능력 좋은데? 손주 재롱 볼 나이에 노익장이 대단하시구만. 그건 그 정도로 하고 참, 세브란스 문제는 어떻게 되었나?”
그러자 이번엔 오재갑이 대답했다.
“일단 예비 작업은 순조롭습니다. 일단 거제군 쪽을 설득해서 시유지를 불하받기로 했습니다.”
“오, 안 준다고 뻗대더니?”
“뭐, 장성량 쪽에서 압력을 넣었죠. 거제 일대도 이번 태풍으로 인해 특별재난구역으로 지정되지 않았습니까. 처음에는 지역민들의 건강을 위해 의료서비스와 응급의료물자를 지원한 덕에 의구심을 한결 덜어낸 것 같습니다.”
“좋아. 일단 이참에 확 밀어붙여서 기정사실로 만들어 버리자고.”
세브란스 측과는 수술치료에 협조해 준 대가로 병원 건립을 약속하긴 했지만 애초에 건립비 전액을 약속한 적 없지 않은가.
애초에 50인 병상이나 되는 병원을 전액 감당하는 건 아무리 백경이라도 물리적으로 무리.
“장성량 씨가 잘해 줘야 할 텐데 말이지.’
이번 병원 건립은 거제대교를 구축의 예비 단계다. 도로가 아니라 다리를 건설하려면 집권당인 공민당은 물론 의회의 협력이 절실한 만큼 밑밥을 제대로 깔아 두어야 했다.
사실 거제는 후일 대통령까지 오르는 김공일 그 양반의 근거지인 만큼 만날 구실을 찾고자 일부러 이번 시상식에까지 참석한 강태준이었지만 또 허탕을 친 것이 자못 아쉬운 점이었다.
‘이번에도 못 만나다니 아예 따로 날을 잡아야 하나? 얼굴 보기 힘들군.’
야당 출신이라 그런지 접점이 없어서인가. 혹은 일부러 피하는 건지 계속해서 엇갈리는 두 사람. 똑같이 멸치어장 선주 아들이라 어릴 적 집안끼리는 교류가 꽤 있었다고 들었는데 말이다.
어찌할까 고민하던 그때 뒤에서 헉헉대는 목소리가 들렸다.
“아이구야. 여기 계셨군요. 간만에 뵙습니다. 강 선장님.”
고개를 돌려보니 다름 아닌 진중보 항만 국장이었다. 간만에 보는 지인의 인사에 강태준도 반가움을 금치 못했다.
“아니, 이게 누구신가, 진 국장님 아니십니까? 이참에 승차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하하. 감사합니다. 근데 승진하고 나서 보니 봉급은 쥐꼬리만큼 늘었는데 업무량만 늘었습니다. 이게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참.”
뼈가 있는 대답에 강태준이 살갑게 웃었다.
“공직에 계신 분들이 거진 다 그렇죠. 일은 많고 업무는 과중하고 그래도 차차 나아지지 않겠습니까. 듣자 하니 공무원 연금법도 개정한다는데.”
“기대는 합니다만 극적인 변화는 없겠지요. 허허.”
“그보다 어떻게 오시게 된 겁니다. 여기는?”
“항만공사 관련해서 기관 대표로 왔습니다. 수해복구 관련해서 논의할 부분도 있고 해서요.”
“그랬군요. 요새 항구 쪽은 어떠십니까?”
“태풍 뒤처리 땜시 정신없죠. 다행히 연초 호안공사가 꽤 진척된 덕에 피해를 많이 줄일 수 있었습니다.”
“그거 불행 중 다행이군요.”
“거의 몇 년을 가까이 질질 끌던 일인데 이제야 좀 궤도가 잡혀갑니다. 이제야 겨우 충무동에서 남부민동 간 도로가 뚫렸으니까요.”
호안공사란 유수에 의한 파괴와 침식으로부터 해안가를 보호를 위해 제방 앞 사면에 설치하는 구조물 공사를 말한다. 공사를 맡았던 부산 축항합자회사는 해안매립을 위해 남부민동 호안공사를 먼저 시작했지만 6.25 전쟁으로 중단되어 파행을 거듭했다. 그러던 중 중앙정부의 재정지원을 받아 올해 초에야 절반 정도 완공이 된 것이다.
“아, 그럼 이번에 구호물자가 상대적으로 빨리 배급된 것도 그런 연유가 있었겠군요.”
“네네. 덕분에 가대기 작업이나 목도 작업 같은 원시적인 하역방식은 탈피했으니 말입니다.”
“이야, 고생이 많았겠군요. 큰 공을 세우셨습니다.”
강태준의 칭찬에 기분이 좋아진 듯 말이 많아지는 진중보였다.
“고생은 제가 아니라 밑에서 했지요. 뭐. 이제 시작입니다. 항만 시설은 이제 고작해야 10프로 정도 부분 개통된 수준이라. 아직도 물류 이동이 원활하지 않습니다.”
“흠. 그렇습니까? 제가 보기에는 꽤 개선된 거 같은데.”
“수요 증가를 성장이 따라가지 못하니 그게 문제죠. 시멘트공장과 비료공장 건설에 따른 기자재와 수입 물자 수요가 급증했거든요. 항만하역 수요가 급속도로 늘어나는 중이라. 다만 인근 수역이 뻘층 깊이가 최고 45m라서 연약 지반을 보강하기 위한 공사가 필수적인 상황이에요. 설계 용역사와 시공사 쪽에서 시공방법을 두고 의견이 분분한 상황입니다.”
“연약지반 정지작업이 필요하다는 말인가요?”
“예. 제가 무늬는 항만국장이지만 해상 토목공사에 대해선 문외한이라 참…… 저보고 어떤 공법을 선택해야 할지 문의 중인데 각자 장단점이 있어 선택이 곤욕스럽습니다요.”
“그걸 뭘 고민까지 두 개 다 선택하시면 되지요.”
강태준의 대수롭지 않은 말에 눈을 크게 뜨는 진중보였다.
“두 개 다요?”
“흠. 저도 직접 공사 지역을 본 것은 아닙니다만 뻘층을 없애는 데 굳이 한 가지 공법만 쓸 이유는 없지요. 그때그때 사정에 따라 병행하는 것도 방법입니다.”
“오, 그렇습니까?”
“네네. 저도 미군 쪽 공사를 감독하던 중에 배운 겁니다. 일단 해수면 아래 모래 다짐 말뚝(SCP)을 박는 해상 SCP 공법과 모래 다짐 말뚝 위에 사석을 얹어 뻘층을 없애는 강제치환 공법이 대체로 효과적인 방식이라네요. 전문 업체에 의뢰해 검토보고서를 받아보시면 공법상 문제점과 장단점 등을 쉬이 파악하실 수 있을 겁니다. 원하신다면 실력 있는 곳으로 소개시켜 드릴 수 있습니다.”
강태준의 말에 대번에 표정이 밝아지는 진중보였다.
“아, 정말 감사합니다. 그간 막막해서 어쩌나 했는데 역시 전문가랑 이야기하니 답이 나오는군요. 자주 찾아뵙고 조언 구하겠습니다.”
“전문가는 무슨. 대충 수박 겉핥기 정도죠. 그보다 무역항 쪽이 확실히 커지는군요. 그럼 어민들이 되려 소외감을 느낄 수도 있겠는걸요.”
“네네. 사실 그 점도 고려대상이긴 하지요. 아무래도 무역항만 신경을 쓰면 어민들 반발도 있고 해서 조만간 북항은 무역항, 남항은 어항으로 개발하는 신 정비계획을 발표할 예정입니다.”
은근슬쩍 정보를 흘리는 진중보에 강태준이 눈을 빛냈다.
“아, 그거 고급 정보인데요. 규모는 어떻게 됩니까?”
“뭐 부지는 대략 1만 8,000여 평 정도. 최종 목표는 100톤급 선박 20척 이상 동시에 접안할 수 있는 규모로 건설할 예정입니다. 위판장에서 아마 하루 최대 3,200톤, 연간 100만 톤 이상을 소화하는 게 목표죠.”
“어마어마하군요. 그 정도면 국내가 아니라 해외 유수의 항구에도 비견될 규모인데요. 냉동 공장, 위판용 정수 시설 등 갖출 게 한두 가지가 아니겠고 말이죠.”
위판장을 지으려면 사무실, 창고, 집, 주차 시설, 폐수 처리장은 물론이고 어선 급수 시설에 도크까지 어마어마한 투자가 필요한 법. 강태준의 말에 진중보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한두 해로 끝날 공사는 아니죠. 아마도 3단계에 걸쳐서 조금씩 확장할 예정입니다.
“그럼 사업을 수행할 조직도는 정해졌습니까?”
“예. 대충은. 총무부, 판매부, 기술부 3개로 편제될 예정이라서요. 각 부서 아래 각각 3개의 과를 두고 별정직을 제외한 임직원을 각 50명 정도 뽑을 생각이니 아마 공사에 동원되는 인원까지 포함하면 1,000여 명이 넘겠지요.“
강태준이 머릿속으로 가만히 위치를 가늠해 보았다.
“남향이면 부산항 1부두 쪽이네요. 그 정도 규모면 기존 부지로는 감당하기 어려울 거 같은데. 인근 침수지역 매립도 염두에 두고 계시겠군요.”
“네. 바로 보셨습니다. 해안가 근처 판자촌을 철거하고 그쪽 주민들을 서구 신평동으로 이주시킨 후 바다를 일부 매립해 종합 수산 센터를 조성할 계획입니다.”
신평동은 조개모래라고 부르는 지역으로 유명한데 이곳은 예로부터 배수가 잘되는 땅이다. 사라 호 태풍으로 인해 남부민동과 남항동이 피해가 컸는데 그때부터 집을 잃은 이재민들이 이듬해부터 신평동으로 옮겨와서는 한 세대 당 일곱 평 남짓한 집을 짓고 살게 된 것이다. 용케도 그런 생각을 할 줄이야. 강태준 생각으로도 꽤 괜찮은 구상은 분명해 보였다.
“좋은 생각입니다. 그래서 슬럼화된 동네를 철거하고 부지를 확보하겠다는 말씀이신가요?”
“예. 신평동 일대는 대부분의 국유지인 데다. 호복구라는 산이 둘러져 있어 강한 바람을 막아 주는데 안성맞춤입니다. 게다가 낙동강의 만입으로 인해 간척지가 조성되어 농사를 짓기 살기 좋은 곳이죠.”
일제 강점기에 장림동까지 직선으로 제방을 쌓아 농지를 조성한 곳인 만큼 강 만입부가 농사짓기 좋은 일터라고 할 수 있다.
“흠. 하지만 말처럼 단순한 문제로 접근해서 안 될 거 같은데요. 특히, 정부에서 무상으로 농사지을 땅을 분배한다고 해도 순순히 나갈 사람들이 아닐 텐데 말입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해안가에 남아 있던 사람들에게 별도로 공동 주거지를 마련해 줄 생각입니다. 아마도 그쪽 공사에 필요한 예산은 중앙정부와 협의가 되어 있습니다. 많지는 않지만 이주지원금도 편성이 되어 있고요.”
“흠. 그 정도로 과연 납득하겠습니까? 거기서 판자촌을 짓고 살 정도면 돌아갈 고향이 없는 무연고자들이거나 이쪽에 겨우 자리 잡은 사람들일 텐데…… 그런 사람들이 순순히 나갈 것을 기대하긴 어렵지 않겠습니까. 더욱이 토착민들과의 알력도 불가피할 테고 말이죠. 무엇보다 모두가 농사짓기를 강요받는다면 반발이 클 수밖에 없지요. 주민들이 먹고 살 수 있도록 별도 조치를 강구하여야 할 것 같습니다.”
강태준의 대꾸에 진중보가 쓴웃음을 지었다.
“예. 저도 그 말에 십분 동감합니다. 하지만 정부 시책상 강제 이주 집행은 불가피할 거 같습니다. 사실 중앙정부에서는 강제로라도 철거를 집행할 것을 계속 종용하고 있거든요. 그래서 말인데 우리 강 사장님께서 주민 이주에 좀 힘을 써 주실 수는 없을까요?”
훅 들어오는 제안에 의외인 듯 진중보를 마주 보는 강태준이었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