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화 만용의 대가
반쯤 체념한 눈빛을 앞에 두고, 강태준이 조곤조곤한 어조로 타일렀다.
“대체 왜 그러셨는지 모르지만 이번 일은 많이 과했어요. 민간인 사찰도 모자라 기업인 암살사건 개입이라니. 이게 무슨 깡패집단입니까. 애초에 그러라고 만든 조직이 아닌데 말이죠.”
“나는 시키는 대로만 했을 뿐, 모르는 일이야.”
“허, 끝까지. 거 인정을 모르는 사람이군요.”
그 말에 강태준이 한숨을 쉬더니 느닷없이 의자를 걷어찼다. 뒤로 나자빠진 주맹덕을 보며 구둣발로 팔을 잘근잘근 밟았다.
“꺼억!! 끄아아아아아!”
“지금 나랑 농담 따먹기 하십니까? 이 일을 전부 설계한 게 그쪽 아닙니까. 어디서 되도 않은 말장난입니까? 사람 기분 나쁘게?”
투두둑- 온몸에 힘이 빠져나가는 주맹덕. 구둣발에 기도가 눌린 주맹덕이 숨이 막혀 끅끅거린다. 얼굴이 붉게 변한 녀석이 웁웁거리는 모습에도 가만히 녀석을 내려다보는 강태준. 팔에 올린 발에 힘을 주자 뿌득 소리와 함께 관절이 기괴한 방향으로 비틀린다.
“끄억…… 끄어어억!!”
“몸이 마비가 되긴 했어도 좀 아픈가 보군요. 이 이상 제 손을 더럽힐 필요는 없을 거 같으니. 나머지는 맡기겠습니다.”
“오키. 살펴 가시게.”
강태준이 퇴장하자 채인철과 부하들이 주맹덕을 다시 일으켜 세우더니 입에 깔때기를 물린다. 휘휘 젓던 조강 시멘트를 대령하는 수하들. 그제서야 시멘트의 용도를 알아챈 녀석의 핏발 어린 눈동자가 공포로 얼룩진다.
“읍읍!!”
시멘트가 가득찬 드럼통에 대짜로 된 소주 한 병을 콸콸 털어 넣은 채인철.
발악하는 주맹덕이었지만 단단히 결박된 몸이 벗어날 길이 없다.
술을 잘 섞은 그가 바가지로 시멘트가 섞인 액체를 한가득 퍼 냈다.
“예전에 형씨 덕에 술 먹고 많이도 토했죠. 덕분에 병원 실려 갔던 적도 있는데, 그거 아십니까? 누군 추억이라고 부르겠지만 전 아주 X같았던 거.”
눈빛에서 느껴지는 악의에 부르르 떠는 주맹덕.
깔때기로 바가지를 기울이는 채인철에 버둥대는 그였지만 저항은 무의미할 뿐.
걸쭉한 액체가 뚝뚝 떨어지는 모습에 핏발이 선 눈빛이 처절하기 그지없다.
공포로 가득 찬 눈동자를 보며 채인철이 나직하게 말했다.
“한잔하시고, 잘 가십쇼. 선배.”
* * *
통통통~~~
이른 새벽의 푸른 공기가 너른 바다 위를 채우고, 시끄러운 엔진음과 함께 물살을 가르며 떠가는 동력선 한 척이 보인다. 하얀 포말이 사방으로 흩어지는 수면 위.
세찬 물보라를 튀기며 바다 위로 던져지는 드럼통 하나. 뚜껑 위로 살짝 삐져나온 시멘트 묻은 머리카락이 바람결에 흩날리더니. 이내 꼬륵 거품을 내며 수면 아래로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뱃머리에 서서 우두커니 그 전경을 바라보고 선 남자가 안색을 찌푸리며 담배를 태운다. 빼빼 마른 얼굴에서 느껴지는 근심. 수심에 잠긴 표정으로 앞을 주시하는 남자의 옆으로 다가온 이억수가 목례를 올렸다.
“어이, 대충 끝났나?”
“뭍 쪽 일은 어느 정도 마무리되었습니다. 이쪽 신원은 말소했고. 배는 출항기록에서 제외했습니다.”
“증거인멸이라. 깔끔하게 잘했어. 김필중이 쪽은 뭐라는가?”
“남형욱이 자진 사퇴했으니 더는 추궁치 않겠다 합니다.”
“허어…… 승자의 여유인가. 그래? 아주 굴욕적이구만.”
남형욱이 실각이라니. 그간 투자한 돈을 생각하면 열불이 뻗칠 일이지만 일단은 이렇게 마무리되어 다행인 건가. 옥관열은 탁…… 탁…… 손에 들린 라이터가 의미 없는 불꽃을 일으켜 대었다. 불이 붙지 않는 라이터에 신경질적으로 담배를 꺾는 옥관열. 눈치 빠른 이억수가 서둘러 불을 붙여 주었다.
“설마 우리 누님에까지 화가 미치지 않겠지?”
“걱정 마십시오. 저희 선에서 커트했으니 추가적인 타격은 없을 겁니다.”
“조 국장. 그 녀석이 배신만 안 했어도 대충 둘러댈 수 있었을 텐데. 이걸로 중정 쪽은 손발이 완전히 날아가 버렸군. 남 부장도 아주 실망스러워. 이 정도까지 집안 단도리도 못하는 놈이었을 줄이야.”
“그래도 아예 뿌리까지 뽑힌 건 아니니, 앞으로 추가로 기회가 있지 않겠습니까?”
연기를 뿜던 옥관열이 낮게 심호흡을 했다.
“그래. 비선 라인 가운데 일부라도 살려서 다행인가? 이미 지나간 일은 잊어야겠지. 그보다 강태준이라고 했나. 이번 계획 파토 낸 녀석이.”
“예. 맞습니다.”
“아마 이억수 자네도 한 번 엮였었지 그래.”
“예. 인생 공부 좀 했지요. 약샥 빠른 것이 아주 주의해야 할 놈입니다.”
“그러게. 보통 놈이 아니더군. 가짜 장례식이라니. 하하. 한 방 먹었어. 나도.”
호기롭게 말하는 그였지만 속으로는 이를 갈았다.
이번 일에 끼친 손해를 생각하면, 잠이 오지 않을 정도. 하지만 사업가는 치고 빠질 때를 알아야 한다.
“일단은 돌아가자고. 항구로.”
먼바다로 시선을 던지는 옥관열. 너른 바다 위를 유유히 헤쳐나가는 바지선의 모습이 보인다. 광활한 바다가 매서운 바람에 춤을 추듯 일렁이고 있었다.
* * *
그로부터 6개월 후, 부산 시청.
강당 한가운데 열린 표창 및 감사패 전달식.
“짝짝짝짝.”
-수해에 기여한 공으로 이 표창을 수여함.
“수해복구에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으신 모든 분께 감사함을 전하며 수재민들이 예전과 같은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신속한 복구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상장을 받은 강태준이 고개를 숙이는 순간 좌우 양쪽에서 셔터가 터졌다. 이번 상장은 백경산업을 대표해 받는 상이다. 사라호에 이어 이번 불어닥친 설리 태풍에 기여한 공으로 상습 침수구역 등 피해지역 복구 및 수재민의 생필품 지원에 크게 기여한 점을 인정받아 표창장을 받게 된 것이다.
큼지막한 감사패가 전달되고 사방에서 다시금 찰칵 소리가 들렸다.
강태준에게 표창장을 건넨 부산시장이 인자한 미소로 악수를 건넸다.
“집중호우로 인한 피해지역 복구작업에 적극적으로 지원해 준 백경산업과 강태준 사장님께 부산시민을 대표해 감사를 전합니다.”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할 일을 한 것뿐 크게 기여한 것은 없습니다. 군경과 소방대원들 사회단체와 공무원 등이 합심하였기에 복구가 가능했던 거지요.”
“감사한 말씀. 다른 기업인들도 이런 마인드를 본받아야 할 텐데 말이죠.”
“하하. 다들 여건이 안 돼서 그렇지 마음은 한결같을 겁니다. 그나저나 태풍 피해는 어떻습니까? 지난번과 비교하면 좀 낫습니까?”
“59년의 사라 호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심각하긴 합니다. 그런데 솔직히 이번 일을 겪고 나니 도시 내 소하천과 지하도는 물론 홍수에 대비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하지만 대대적인 정비를 하려면 자금이 확보되어야 하는데 워낙 시예산이 부족해서요. 보다 근본적인 대책을 세우지 않고서는 향후 비가 내릴 때마다 수해가 반복될 텐데 말이지요.”
“고충이 많으시겠습니까. 미약한 힘이지만 저희 백경산업에서도 침수 예방 활동에 미력하게나마 힘을 보태도록 하지요.”
“아이구, 감사드립니다. 바쁘신 분을 붙잡고 무슨 넋두리인지. 일단 이리로.”
곧이어 수해복구에 앞장선 부산 길천마을 이장을 비롯해 부산 1117공병단, 부산시 의용 소방대, 부산경찰서 서면지구대 등 단체원 103명이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자. 치즈!”
“예. 웃어 주세요.”
수해 복구 관련 기념사진 촬영이 끝나자 간단한 다과와 함께 제공되었다.
춘삼이가 잠시 후, 기자에게 슬쩍 다가가더니 수고비를 찔러 주며 귀엣말을 건넸다.
“우리 사장님 기사 좀 잘 써 주십쇼. 가급적 얼굴도 큼지막하게 나올 수 있게, 잘 부탁합니다.”
“아이고 여부가 있겠습니까? 우리 강 사장님이야 워낙 화면 빨이 잘 받으시니 당연히 전면에 나오시도록 해야죠.”
슬쩍 액수를 확인해 본 일행이 대번에 표정이 환해지더니 사양 없이 봉투를 챙겼다.
춘삼이가 자리로 돌아오니 혼자 잔을 홀짝이던 광필이가 불만스레 툴툴거렸다.
“어이 춘삼아, 그거 너무 많이 찔러 주는 게 아닌가? 기자란 것들은 우릴 봉으로 아는 놈들인데, 버릇 잘못 들이면 골치 아파.”
“에이, 그래도 적당히 기름칠은 해야죠. 게다가 저 자슥, 김삼현이라고 천화일보 기자인데 보통 놈이 아니라서요. 한국대 출신 중견기업 사장 아들내미인데 반골 기질이 강한 놈이라. 대놓고 꼴통으로 유명해요.”
“허이구야, 귀한 집 자식이로구만. 그런 자식이 왜 기자질을 하고 있어?”
“하하. 원래는 오성일보 쪽에서 사쓰마와리(경찰 사건기자)로 활약했다는군요. 몇 번 특종 기사를 쓰기도 했고요. 근데 저번에 밀수 사건을 단독으로 보도하려다 윗선이랑 트러블이 생기는 바람에 천화일보 경제부 쪽으로 옮겨갔다는군요.”
“그럼 천화일보로 옮기고 나선 좀 철이 들었다는가?”
“아이고 그럴 리가요. 거기서도 저격 기사를 써서 몇 놈 골로 보냈지요. 암튼 한번 꽂히면 놓지 않는다고, 완전 미친놈으로 소문이 자자하더이다. 재벌 사냥꾼이라는 별명까지 붙었는데 워낙 뒷배도 있고 실력도 출중하다 보니, 회사 내에서도 골칫거리인 모양이더군요.”
천화일보가 부산 3대 메이저 신문사긴 하지만 한국대 출신이 들어가기엔 수입이나 위상 면에서 손색이 있는 곳. 한마디로 말해서 지가 원하는 기사를 쓰려고 회사를 낮춰 간 또라이라는 거다.
‘재벌 사냥꾼이라. 꽤 거창한 별명이군.’
하지만 적의 적은 아군인 법 아니겠는가. 무엇보다 오성일보에 들어간 주제에 오성을 대놓고 까려다 나왔다는 소리에 강태준은 은근히 호감이 갔다.
“관심이 가는군. 다음에 기회 될 때 한번 따로 불러와. 면상 좀 보게.”
“옙. 다음에 귀띔해 놓겠습니다.”
“그보다 다음 일정은 어때?”
슬쩍 수첩을 살핀 춘삼이가 대꾸했다.
“음. 시청 업무가 끝나면 용당목재 차강진 사장과 미팅이 있고, 다음에는 부산지역 출판기념회, 그 뒤에 상공회의소 사람들과 오찬이 있습니다. 아무래도 수산 발전기금에 대해 논의가 오갈 거 같습니다.”
“젠장. 지원금 분배 논의라니. 벌써 골이 땡겨 오는구만.”
“그만큼 사장님의 신임이 크시다는 거겠죠.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르는 법 아니겠습니까.”
함께 온 오재갑의 발언에 광필이가 자못 불만스러운 듯 툴툴거렸다.
“거참 양 사장님, 예전 전무 시절하곤 완전 딴판이신데요, 이건 거의 일 떠넘기기 수준 아닙니까? 본인은 생색 나는 일만 하시면서. 그렇게도 성실하신 분이셨는데 좀 많이 변하셨습니다.”
“아프셔서 그렇지. 대수술 후에 회복한 지도 얼마 되지 않았잖은가. 당분간은 봐주자고.”
“웬일로 그렇게 마음이 약해지셨습니까. 형님이 그렇게 나오니 완전 호구잡히는 거죠. 그 양반 저번에 골프 치는 거 보니 쌩쌩하던데 말입니다.”
광필이의 말에 심기가 불편해진 강태준이 눈을 부라렸다.
“임마. 너 자꾸 기어오르는데, 이게 진짜, 호구맛 좀 볼텨?”
“아이구야. 아랫것들 보는 눈도 있는데, 공식 석상에서 폭행은 참아 주십쇼.”
“하, 안 때린다 안 때려. 체면을 신경 쓰다니. 니도 사회인 다됐구먼.”
너스레를 떠는 광필이에 슬며시 주먹을 내려놓는 강태준. 그러자 오재갑이 문득 생각난 듯 말했다.
“에이, 광필이 형님도 참. 어제저녁부터 상 탄다 호들갑이셨잖습니까? 머리에 포마드도 바르고. 아까 보니 꽤 감격하시는 거 같던데.”
“아니 진짜요? 광필 형님께 그런 감수성이 남아 계셨을 줄이야.”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춘삼이의 말에 광필이가 겸연쩍게 웃었다.
“임마, 나도 감성이란 게 있어. 개근상 말고 상 타는 건 처음이거든. 그래서 니는 하나도 안 떨리던?”
“글쎄요. 전 상 같은 건 하도 많이 타봐서. 별로 감흥은 없던데요. 돈으로 주는 것도 아니고 그깟 종이 쪼가리 따위에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 말에 광필이가 약간 빈정이 상한 듯 영 재수 없다는 눈으로 오재갑을 흘겨보았다.
“와 재수탱이, 이런 무미건조한 새끼를 봤나. 그래 니 똥 굵어서 좋겠다.”
“제가 원래 좀 잘났긴 합니다만?”
“하하, 그만 놀려라. 중요한 건 포상이 아니라 인정이지. 현 정부에서 우리의 공로를 인정해 줬단 사실이 중요한 건 아니겠나?”
“그건 글치요. 김필중 부장님도 이제 한시름 놓겠습니다. 어찌 되었든 대선에서 이겼으니. 이제 고생 끝 행복 시작 아니겠습니까. 호남이 여당을 지지할 줄이야. 이건 이변입니다.”
군복을 벗고 대권에 도전한 박정명은 윤병선을 제치고 결국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두 후보 간 유효득표수 차이는 고작해야 15만여 표 차. 선거 승리의 일등공신은 놀랍게도 경상도와 전라도였다.
서울과 경기도 등 중부에서는 고전했지만, 농촌인구가 많은 경상남도와 전라북도 그리고 제주도 등 남부 지방 일대에서 압승을 거두었던 것이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