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화 내 손 안에 있소이다.
“이건 뭐요?”
“그 마크를 보여 주면 아마 알아서 할거요.”
설명하기 귀찮다는 듯, 제 말을 마친 거지가 고개를 돌려 사라진다. 고맙다는 말도 없이 사라지는 행동에 어이없는 주맹덕이였지만 시비를 털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산지항이라. 예전에 밀수로 이름 높았던 곳이군.’
주맹덕은 지체할 새 없이 바로 산지항으로 향했다. 밤 거미가 내려앉은 시점 선착장에 도착하자, 지령을 받았는지 사람들이 옹기종기 기다리고 있는 모습들이 왜인지 모르게 익숙하다. 나이대는 20대부터 50대까지. 호리호리한 샌님부터, 젊을 점 힘 좀깨나 썼을 법한 아재까지. 각양각색의 사람 중엔 심지어 애를 밴 여자까지도 있었다.
잠시 후, 수첩을 들고 탑승객을 확인하던 브로커.
녀석이 임산부를 위아래로 보더니 탐탁잖은 표정을 했다.
“이거이거, 계약위반이야. 이건 내용물이랑 다르잖아?”
“뭐가유?”
“승객에 배 속의 애는 포함 안 하나. 이건 사정이 다르지, 적어도 30만 원은 추가로 줘야겠는데?”
그 말에 함께 동행인이 하나가 어이없다는 듯 항의했다.
“아니,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왜케 비싼가?”
“뭘 그런 걸 물어보고 그러나. 당연히 리스크 관리 차원이지. 혹시 중간에 양수라도 터지면 어떡하나? 더욱이 요사이 간첩 놈들이 몰려와서 단속이 심해졌소이다.”
“그래두. 너무 비싼 거 아니오.”
“그럼 저걸 타는 건 어떻소이까?”
은근히 부두 옆에 놓인 추레한 목선 하나를 권하자 남편으로 보이는 사내가 당혹스러운 듯 항의했다.
“저건 좀 작지 않소?
“냉동기 기계로 사이에 틈이 있어서. 사람 둘 정도는 들어가기엔 딱이지. 좀 고생스럽겠지만 그래도 걸리는 것보다는 낫지 않은가?”
“그런 말도 안 되는 제안이 어디 있소?”
“이거 와 이러나. 뱃멀미는 좀 하겠지만 감시를 피하기엔 딱이요. 아니면 여성분은 따로 선원들이랑 같이 타겠소, 그러면야 좀 편하게 가기는 하겠지만 말이오.”
위아래로 몸매를 살피는 눈길이 아주 음습한 것이 노골적이기까지 하다. 눈빛에 견디다 못했는지 뒤로 슬그머니 몸을 숨기는 임산부의 모습에 사내가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추가금을 지불하겠소. 좀 더 편한 자리로 부탁하겠네.”
“뭐. 그렇게 나오셔야지.”
‘이런, 천박한 놈들. 같으니.’
역시 선원들이란. 속으로 경멸하는 주맹덕이었지만 여기서는 저놈들이 갑. 가격 흥정이 계속되었지만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이 속속 탑승했다.
가격에 따라 두당 적게는 10만 원부터 20만 원까지. 2~15t짜리 거룻배나 발동선은 좀 더 쌌지만 자리는 훨씬 비좁았다. 약속된 탑승객들이 모두 올라타자 이쪽으로 다가오는 브로커. 쪽지를 확인한 브로커가 발동선을 가리키며 말했다.
“음, 그쪽은 추가 인원인가…… 당신도 어서 들어가소.”
“나는 못 타. 저딴 쓰레기 말고 제대로 된 배로 주게.”
주맹덕의 당돌한 요구에 브로커가 피식 웃었다.
“뭔 소리야. 이 사람이, 이게 무슨 유람선인 줄 아나?”
“추가금까지 지불했는데 돈값은 해야 하지 않나. 이건 상도의가 아니지. 어선을 통한 입항은 애초에 실패 확률이 높지 않은 걸로 아는데. 브로커와 접선이 되면 밀항자들을 데리고 이동해야 할 텐데 중간에 문제가 생기면 어쩌라고.”
“허. 이것 참.”
주맹덕이 말을 덧붙였다.
“보아하니 현지 브로커가 누군지도 모르는데 이런 어설픈 계획에 동참할 수야 없지.”
“하하. 그건 걱정 마소. 우린 이제껏 한 번도 잡혀 본 적이 없으니까.”
“그거야 모르는 일이지. 걸려서 배를 침수라도 시켰다면 애초에 증거가 남지 않을 테니까?”
그 말에 급 안색이 굳는 브로커였다.
“지금 우리가 거짓말을 한다는 거요?”
“어찌 되었든 난 못 타. 딴 걸로 주시게.”
저 조그만 배로 현해탄을 건너는 건 위험성이 높다. 파도에 배가 표류하면 그야말로 최악. 실제로 정확한 접선 지점에 가지도 못하게 될 경우, 승객을 버리고 탈주하는 경우까지 있었던 만큼 주맹덕은 이 부분에 대해서는 양보할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담당 브로커 역시 마찬가지. 설득이 통하지 않자 녀석도 팔짱을 끼며 대꾸했다.
“허, 그럼 어쩔 수 없겠구먼. 그럼 다음 물때까지 기다리던가. 당장 배가 없는 걸 어떡하라고. 타기 싫으면 말아야지. 아니면 돈을 더 내던가?”
“그걸로 부족하다 이 말인가?”
“야간에 택시를 타도 할증이 붙는데. 성능 좋은 배를 타려면 그 정도 양보는 기본 아닌가?”
“허, 그렇게 나오시겠다.”
이건 숫제 아주 벗겨 먹으려는 수작이 아닌가. 하지만 주맹덕 입장에서도 잠자코 당할 생각은 따위는 없었다. 얄밉게 실실 쪼개는 녀석의 면상에 주맹덕이 다짜고짜 주먹을 꽃아 넣었다.
퍽!!
“어때 좀 정신이 드나?
“이런 개새끼가. 감히.”
울컥한 브로커가 달려드는 순간. 손쉽게 녀석의 팔을 꺾어 버린 주맹덕.
딸깍. 안전장치가 풀리는 소리에 얼굴색이 변한 브로커가 사색이 되어 말을 더듬었다.
“이게 무…… 무슨 짓?”
“이거 실탄이야. 쓸데없는 개소리 말고 뒈지고 싶지 않음 당장 배 가져와.”
“그런 협박이 통할 거 같소? 날 죽이면 무사하지 못할 텐데?”
“몰라, 내가 지금 기분이 뭣 같거든. 여기서 날 더 자극하면 어떻게 될 거 같나?”
머리통에 총을 겨누는 행동에 눈동자가 흔들리는 브로커.
주맹덕의 눈빛에는 아무 흔들림 없다. 불안한 듯 입술을 깨무는 녀석에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자자. 이제 말로 합시다. 실례는 사과하지.”
“누군가?”
“배 주인일세. 사소한 오해가 있는 듯한데 그쯤 하지 않겠소? 암튼 그 자식을 죽이면 우리 쪽도 많이 곤란하니 선처를 부탁하지. 그 짝이 싸가지는 많이 없어도 나름 유능한 영업책이거든.”
선주라 자기를 소개한 남자에 주맹덕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그럼 배를 내줄 건가?”
“경우에 따라. 하지만 추가금이 필요하오.”
“뭐? 끝까지 가 보자는 건가?”
“내 말을 끝까지 들으시게. 지금 출항하는 무역선은 딱 한 대밖에 없소. 대신 좀 더 편히 갈 수 있도록 별도로 객실을 내주지. 그럼 어떤가?”
더 이상 양보는 없다는 듯 단언하는 남자에 주맹덕이 인상을 썼다. 기분이 별반 좋지는 않지만 싸워 봐야 손해 보는 건 본인 아닌가.
결국 총을 거둔 주맹덕이 품에서 엔화 뭉치를 던지자 액수를 확인한 선주가 휘파람을 불었다.
“화끈하시군. 역시 말이 통하는 분이구먼.”
“대신 나도 값은 받아야 마땅하지. 독실로 주시오.”
“좋소. 그 정도야.”
출항은 저녁 11시. 부두를 떠난 배는 지독하게 흔들렸다. 심하게 피칭을 하는 배에 멀미가 난 주맹덕은 ‘우엑’하는 소리를 내며 토를 했다.
“우웨에엑!!”
바께쓰에 속을 게워 내던 주맹덕의 얼굴은 몇 시간 만에 핼쑥해졌다. 이건 숫제 고통이 아니라 고문 아닌가. 밖으로 빠질까 객실은 잠가 놓은 상태.
얼마나 파도에 시달렸을까. 바다가 조금 잔잔해지자 객실 문을 연 선원이 식사를 들고 왔다가, 완전 맛이 간 주맹덕을 마주하곤 멈칫했다.
“쯔쯔. 괜찮소이까? 이거 완전 산송장일세.”
“누굴 놀리나? 그보다 지금 어디쯤인가.”
“막 쓰시마 해역을 지났소. 여, 밥이라도 한 끼 하시게. 앞으로 몇 시간은 가야 하니 배가 고플 거야.”
식판만 내려놓고 사라지는 남자에 널브러져 있던 주맹덕이 고개를 들었다. 식사로 나온 물건은 흰 쌀밥에 생선조림과 된장국. 반쯤 탈진해 식욕이 없는 주맹덕이었지만 기어이 엉금엉금 기어가 밥을 입으로 욱여넣었다.
‘도착 즉시부터 움직이려면 체력을 회복해 놔야 한다.’
지금 주맹덕으로서는 도착 즉시 비자금 환전부터 하고. 아지트로 도망칠 생각뿐. 마침 일본에는 수행차 몇 번 와 본 적이 있어 지리에 익숙한 만큼 숨어들면 잡기 어렵다.
품에 서류 가방을 안은 녀석이 억지로 눈을 붙였다.
잠시 후, 귀 뒤로 울리는 기러기 소리. 어둠이 남아 있는 갑판 위. 희뿌연 해무 너머로 저 멀리 등대의 불빛이 희미하게 보였다. 그러나 몽환 속의 즐거움은 오래가지 않았다.
촤악!!
몽롱한 상태에서 난데없이 찬물이 끼얹어지고. 얼음처럼 찬물에 정신을 번쩍 드는 주맹덕. 순식간에 바뀐 환경에 적응하기도 전에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렸다.
“정신이 드나?”
한쪽에서 웃통을 벗은 선원이 드럼통 속에 조강 시멘트와 물을 붓고는 열심히 저어대고 있는 중. 온몸이 박스 테이프로 칭칭 감긴 채,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 앞에 익숙한 실루엣이 눈에 띄었다. 군복을 입은 남자가 총열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행동에 절로 정신이 드는 주맹덕이었다.
“선배 깨셨습니까?”
“채 소령?”
“근 10년 만이군요. 진짜 안 변하셨네. 노빠꾸로 무모하신 성격도 말입니다.”
“네가 여기는 어떻게?”
“뭐, 선배가 싸지른 똥을 치우러 왔습죠. 중정을 사조직처럼 쓰시다니 간도 크십니다. 덕분에 난리도 아니었어요.”
꽁꽁 묶인 몸을 둘러본 주맹덕이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잘도 붙잡았군. 이건 자네 솜씬가?”
“아니요. 선배를 잡은 사람은 따로 있습니다. 그쪽한테 유감이 아주 많으신 분이죠.”
순간 그림자 뒤에서 나타난 인영이 시야에 잡혔다. 그 순간 소스라치게 놀란 주맹덕이 신음을 토했다.
“너, 너는!”
“안녕하십니까. 처음 뵙는군요. 주맹덕 씨.”
새로 나타난 사람은 다름 아닌 강태준. 뭔가 입을 열려는 주맹덕이었지만 참나무 토막처럼 빳빳해진 혀가 쉬이 듣지 않는다.
대퇴골이 따끔따끔한 것이 안면의 움직임이 부자연스럽다. 뻣뻣해진 얼굴로 주맹덕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내게…… 대관절 무슨 짓을 한 건가.”
“뭐. 쉬이 움직이지는 못할 겁니다. 식사에 복어 독을 미량 넣어 뒀거든요. 사실 이렇게 제 발로 찾아오실 줄은 몰랐네요. 파도타기는 즐거우셨습니까?”
“그게 무슨?”
“아, 그게 제가 선장이었습니다. 제주 근처에서 배만 몇 시간째 빙빙 돌리는데 끝까지 한 번도 안 나오시더라고요. 덕분에 아주 재밌었습니다. 바닥 기는 꼬라지가 끝내주던데. 혼자 보기 아까운 모습이더군요.”
흐릿한 눈의 시야가 회복되는 순간 그는 말문이 막혔다. 잠시 후 더듬대던 주맹덕이 다시 물었다.
“어떻게?”
“뭐, 매판원이 알려 줬지요. 그쪽이랑 대화했던 사람이 아주 얼굴을 잘 기억하고 있더군요.”
턱이 떨어지고도 남을 표정에는 절망감이 깃들었다. 그럼 지금까지 멍청하게도 손아귀에 놀아났단 말인가. 부들거리는 주맹덕이 아무 말도 못 하자 채인철이 빈정거렸다.
“고작 그 정도로 놀라면 어떡하십니까. 선배. 놀랄 일이 남아 있을 텐데 말입니다.”
채인철이 손짓하자 부하 몇 명이 녹이 슨 드럼통 하날 낑낑거리며 끌고 나온다. 뚜껑을 여는 순간, 그만 얼굴이 하얗게 질려 버리는 주맹덕.
드럼통 안엔 만신창이가 된 채, 벌거벗은 남자가 재갈이 묶인 채 꿈틀거리고 있다.
“육 국장?”
신원을 확인한 주맹덕이 경악성을 지르자 다시 드럼통을 옮기는 부하들. 드럼을 치운 그가 채인철이 짐짓 안타깝다는 어조로 투로 말했다.
“근성 있는 분이더군요. 아무리 회유해도 누구랑 붙어먹었는지 절대 안 불어서 어쩔 수 없이 좀 강압적인 수단을 썼지요. 뭐, 사실 굳이 불지 않아도 돌아가는 사정이야 모르진 않습니다. 그래도 확인차 본 거지만…….”
여전히 혀가 얼어붙어 움직이지 못하는 주맹덕 앞에 강태준이 서류를 쫙 뿌렸다.
그 앞에는 제복을 입은 사진들과 그의 신분증, 그리고 인사 기록표 등이 상세히 적혀져 있다. 이어 피범벅이 된 부하들의 사진들을 보여 주자 주맹덕이 부르르 떨었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