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화 짬때리기
덕분에 남형욱 앞으로 불려 간 조 국장은 그야말로 사정없이 조인트를 까이고 있었던 것이다.
“임마, 작전이 완전히 뽀록났는데 이제 어쩔 거야?”
“출장소는 이미 폐쇄했다고 합니다. 증거자료는 소각했으니 너무 염려 마십시오. 어차피 이번 일은 독단적으로 벌인 일로 처리하기로 했으니, 뭣 하면 잡아떼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건 희망 사항이지. 김필중을 너무 만만히 보는 거 아닌가. 놈이 움직였다는 건 이미 눈치를 깠을지도 몰라.”
그러자 조 국장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렇다면 일단 육 국장부터 불러 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상황에서 가장 위험한 사람은 육 국장일 텐데요.”
“이미 불렀어. 근데 이 자식은 왜 이렇게 꾸물거려?”
그 순간 똑똑 소리와 심각한 표정의 군인 하나가 안으로 들어온다.
귓속말을 건네는 부하의 행동에 남형욱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이내 분기를 삭히지 못한 그가 쾅 하고 책상을 내리쳤다.
“제길! 육 국장이 이미 잡혔다는군.”
“예. 벌써 말입니까?”
“특무대 놈들이 움직였어.”
표정이 변한 조 국장의 얼굴이 하얘졌다.
“설마 김필중이 직접 지휘를?”
“직접은 아니겠지만 아마 윤관용 특무부대장을 대신 움직였겠지. 동기인 정호근이가 그쪽 입김이 세니까. 암튼 이제는 시간 싸움일세. 조만간 특무대에서 수사가 들어올 텐데 걱정이군.”
“육 국장이 강단이 있는 사람이 아닙니까? 당분간 시간을 벌어 줄 수는.”
“놈들 고문 실력은 알고 있지 않나? 아무리 강인한 사람도 매에는 오래 못 버텨. 육 중령도 오래 못 버틸 걸세.”
“허…… 그럼 큰일 아닙니까. 지금까지 벌린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닌데.”
본인이 더 당황해 허둥대는 조 국장에 어이없는 남형욱이었지만 그도 걱정이 태산이긴 마찬가지였다. 사실 그간 중정이라는 방패를 빌미로 독단적으로 벌인 사업만 수십 가지 아닌가. 국가나 대의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찍어 눌렀지만 만약 특무대가 작정하고 턴다면 그때는 생각도 하기 싫은 일이 벌어질 것이 자명했다.
“그래서 아무래도 이번 사건은 누군가 책임을 져야 할 것 같아. 사실 이번 사태가 고작 주동자 목 하나로 끝날 일이 아니지 않겠나?”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말없이 상대를 물끄러미 주시하는 남 부장. 속뜻을 파악한 조 국장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넙죽 엎드린 그가 비통하게 읍소했다.
“부장님!! 전 지금껏 충성을 다했습니다. 지금까지 실망시켜 드린 일이 없잖습니까?”
“그럼, 자네 충성심이야 더할 나위 없지. 그래서 부탁하는 거 아닌가. 자네 말고 이렇게 궂은일을 해 줄 사람이 어디 있겠나?”
그 말에 목소리가 떨리는 조 국장이었다.
“부장님. 전 억울합니다. 사실 이번 사건은 제가 주관한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전 협조 차원에서 상황 보고만 받았을 뿐이고 계획부터 실행은 주맹덕이가 주도한 겁니다. 게다가 저도 이제 나이도 있고 남은 가족이…….”
“내가 그걸 왜 모르겠나. 하지만 어차피 내가 끝나면 자네도 끝이야. 어차피 싫든 좋든 자네 역시 지휘자로서 책임을 면할 수 없네. 무엇보다 작전 중 자네 명의로 진행한 사업도 있지 않나? 자자 일어나게. 일단 일은 끝마쳐야지.”
어깨를 두드리며 은근슬쩍 떠넘기기를 시전하는 남형욱에 말문을 잇지 못하는 조 국장.
조 국장이 다시 변명하려고 했지만 눈빛부터 달라진 남형욱을 보니 말이 나오지 않는다. 눈가에 경련을 숨기지 못하는 조 국장이 용기를 내어 항의하려는 순간. 남형욱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어깨를 토닥였다.
“이번 일, 어떻게든 자네 선에서 매듭짓도록 해. 일이 끝나면 후사하겠네. 선택은…… 자네 몫일세.”
서둘러 가 보라는 듯 축객령을 내리는 남형욱. 하릴없이 부장실을 나오는 조 국장이었지만 머릿속이 하얘진 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설마 이 나보고 희생양이 되라는 소린가?
충격에 휘청거리는 그를 부축하는 수하들. 이윽고 걱정스럽다는 눈빛으로 말했다.
“국장님 괜찮으십니까?”
“혼자. 혼자 있게 해 주게. 좀 더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
새파랗게 질린 얼굴빛을 본 부하들이 순순히 물러났다. 홀로 남은 사무실 안 억울함에 고개를 주억거리는 조 국장.
지금 빵에 들어가면 나올 수 있을까.
어느덧 나이 마흔. 여기서 숙청되고 나면 운 좋게 복권이 되더라도 과연 기회가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다.
사실 자기가 여기까지 올라온 것은 순전히 운. 능력 면에서 볼 때 아랫것들과 비교해서 하등 나을 것이 없지 않은가. 복귀를 기약할 수 없다고 생각하니 땀이 축축하게 젖은 손이 떨려 왔다.
‘다음. 다음이라니…… 다음 따윈 없어!’
인생의 기회는 매번 오지 않지 않는다. 설마 이 꽃보직을 내려놓고 빵에 가라고?
하지만 여기서 남형욱의 말을 거스를 깜냥도 되지 않는다.
초조해진 얼굴로 서성이던 중 다시금 울리는 전화벨 소리.
따르릉…… 따르릉 울리는 소리에 짜증이 난 조 국장이 서둘러 전화를 받았다.
“누구신가?”
“저, 강태준입니다. 저 기억하시죠? 조 국장님.”
“아니, 강 선장, 자네가 이 번호로는 어떻게?”
내선 번호로 걸려온 전화에 화들짝 놀라는 조 국장.
“그건 대외비고, 그보다 잠시 시간 좀 내주시겠습니까? 특별히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 * *
반나절 후, 제주로 향하는 연안여객선을 탄 주맹덕. 선착장에 내렸을 즈음엔 벌써 날이 저물었다. 한낮이 훨씬 지나 열기가 가신 선착장 주변은 짭짤한 갯내음과 함께 엶은 물안개가 끼어 있다. 순서대로 내리는 사람들이 어깨를 풀며 부두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이구야. 피곤하네. 목도 뻐근하고.”
“요놈의 배는 왜 이렇게 흔들리나?”
“목선이 다 그렇지. 그보다 엄청 늦었구먼. 거, 출출한데 밥부터 먹을까? 아침부터 한 끼도 못 먹었지 않나?”
“그래야지. 아까 파도 땜시 속 다 게워 내느라 위장이 텅 비었어.”
흰소리를 뱉는 여객들 사이 끼어 온 주맹덕. 낚시꾼 차림의 여객들은 도합 20명 남짓. 시시덕거리는 사람들 사이 함께 몰려드는 인파에 자연스럽게 일행으로부터 떨어졌다. 포구엔 그가 타고 온 여객선 외에 낡은 동력선 몇 척이 정박해 있었다…….
‘아직 별도의 검문은 없군. 아직 탄로 나지 않은 건가?’
부산에서부터 여기까지 한 번도 검문을 당하지 않았던 만큼 내심 안심하는 주맹덕. 긴장을 푼 그가 주위를 둘러보니 선착장 방파제를 따라 술집과 여관, 이발소, 구멍가게를 포함 식당들이 한 줄로 늘어서 있었다.
국제부두 끝에서 바다 쪽 계단을 내려오자 바닷바람에 실려 온 쇳가루 냄새가 코를 간지럽힌다. 연안 터미널 옆 보세창고 부근 일대, 용담 포구로부터 벌낭 포구로 이어지는 길, 특히 용두암 주변 일대는 빼어난 경관과 더불어 예로부터 오래된 포구로 이름난 곳이었다.
선착장 주변에는 도선장이라 적혀 있는 간판이 눈에 띄자 주맹덕은 곧바로 매표소로 향했다. 어느새 양복 차림으로 갈아입은 주맹덕이 신분증을 내밀자, 어려 보이는 매판원이 사근사근하게 물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교토로 갑니다. 제일 빠른 배편으로.”
“음. 교토행이라. 대마도에서 시모노세키로 가는 배가 하나 있고. 하카타행 배가 있네요.”
“대마도는 경유할 필요 없는데요. 직행선은 없습니까?”
“직행선이요?”
“에. 사업차 가는 길입니다. 수출업무 출장 건으로 갑자기 미팅이 잡혀서. 최대한 빨리 출발해야 해서요.”
그 말에 매판원의 눈이 궁금한 듯 이채를 띠었다.
“오, 사업이라 분이군요. 혹시 무슨 사업을?”
“가발 수출을 합니다.”
“젊은 분이 대단하네요.”
곁눈질을 하는 것이 은근 관심 있는 눈치다. 쓰시마에서 일본 내부로 이동하려면 여객선을 갈아타야 하는 만큼 일본 경찰이 눈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뭐 그렇게 관심이 많은지 꼬치꼬치 캐묻는 매판원이었지만 주맹덕은 새 신분으로 위장 연습도 할 겸 화내지 않고, 성심성의껏 대답해 주었다. 그렇게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누던 중 매판원이 표를 끊어 주며 말했다.
“그럼 일 끝나고 귀국은 언제세요?”
“그거야 구체적으로 정하진 않았습니다. 사업상 아이템은 정해졌어도 가격 네고하는 기간도 있고 해서 딱 이렇다 확정하기는 그렇군요. 사업을 끝날 때까지 기다리면 한 한 달쯤? 그 이상 될 수도 있고요.”
“장기출장이군요. 아쉽지만 혹 다시 오면 꼭 들려주세요. 저 여기서 근무하거든요.”
추파를 던지는 모습이 제법 반반하다. 은근 호감이 가는 주맹덕이었지만 상황이 상황인 만큼 아쉬움에 혀를 찬 주맹덕은 스스로 어이가 없어져 웃었다.
‘무슨 망상을, 지금 이 급박한 타이밍에…….’
나이 처먹고 채신머리없이 뭐 하는 짓인지? 속으로 혀를 차는 주맹덕. 사실 정보과에 들어와 혼인을 전제로 만나던 여자와 헤어진 이후 인연이 없었다.
생각해 보면 솔로인지 벌써 3년이니만큼 여자 생각이 날 법도 했다.
지금 같은 상황만 아니었으면 한 번쯤 꼬셔 봤을 터지만 그는 목적을 잊지 않았다.
‘일단, 시모노세키 쪽으로 가서 잠수를 타면 되겠군.’
미리 가져온 지도를 보며 머릿속으로 도주 경로를 계산하는 주맹덕. 그렇게 대합실에서 않아 생각을 정리하던 중 공무원 몇 명이 들어오더니 대합실에 수배자 광고물이 붙이기 시작했다. 그 순간 소스라치게 놀라는 주맹덕이었다. 붙여진 광고물에서 얼핏 자기 사진을 발견했던 것이다.
-주맹덕.
-살인교사, 공무원 사칭
직업은 전직 출판인. 1미터 75센티의 키에 건장한 편.
눈은 크고 체구는 근육질의 얼굴에 이마가 넓음.
오른쪽 발이 왼쪽보다 약간 짧고, 도회적인 말투를 씀.
오십 환짜리 크기로 인쇄한 사진 밑엔 10만 원이라는 현상금과 함께 주맹덕의 신체적인 특징들이 상세히 적혀 있었다.
‘아니, 벌써?’
벌써부터 꼬리 자르기를? 속으로 욕지거리를 지껄인 주맹덕이 슬쩍 주위를 둘러보았다.
별로 관심 있는 사람은 없었지만 누군가가 힐끔거리며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서둘러 짐을 챙긴 주맹덕이 챙이 유난히 넓은 모자를 눌러 쓰고는 곧장 대합실을 빠져나갔다.
대합실을 빠져나간 주맹덕은 바로 방파제를 따라 내려갔다. 방파제 아래는 마침 출어를 준비하는 어부들이 그물을 손질하고 있었고 가까운 머리 위로 갈매기 머리가 날고 있었다.
‘일단 수배령이 떨어진 이상, 일반적인 방법으로 입국은 불가능해.’
벌써 특무대 쪽에서 움직였는가. 주맹덕으로서는 생각이 많아졌다. 이렇게 되면 이미 일본 경찰에도 신원 정보가 넘어갔을 터, 무사히 입국한다 해도 수용소로 직행할 확률이 9할. 만약 운이 좋아도 감방에서 몇 달 푹 썩다가 한국으로 송환될 확률이 높은 것이다.
난감해진 주맹덕이었지만 다행히 그에겐 플랜 B가 있었다.
‘어쩔 수 없군. 엄석대 그놈이 뚫어 놓은 루트를 쓰는 수밖에. 분명히 조천항에서 예인선 선박을 타려고 했지?’’
아마 급한 일이 생기면 부두 하역 조합원들을 찾아가라고 했던가. 먼저 찾아가야 할 곳은 조천항 근처의 연북정이라는 장소로 한국 전쟁 시기에는 보급창고로 쓰이던 곳이었다.
하역작업이 계속되는 부둣가에 도착해 주변을 서성이고 있자니 벙거지 모자를 눌러쓴 거지 하나가 슬그머니 다가오는 모습이 보인다. 묘한 불쾌감을 주는 냄새에 본능적으로 코에 소매를 가져다 대는 주맹덕. 전혀 개의치 않는 듯 구린내를 풍기는 거지가 어눌하게 입을 열었다.
“첨 뵈는 양반인데, 여기는 어인 일로 오셨소?”
“33번, 33번 차를 타러 왔소이다.”
“흠. 여기는 차가 아니고 배를 타는 곳인디, 그보다 약속한 얼굴이 아닌 거 같은데?”
아래위로 훑는 행동이었지만 흐리멍덩 초점이 없다. 미심쩍은 듯 탐색을 계속하는 녀석에 주맹덕이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돈만 제대로 주면 되었지 뭘 바라나? 약속했던 승객이 바뀌는 거야 사소한 일 아니요? 시시콜콜한 설명까지 필요할 것 같지는 않은데?”
“뭐 그렇긴 하지만, 그래서 원하는 게 뭔가?”
“일본으로 가고 싶은데, 오늘 바로 출항 가능하겠나?”
“오늘은 좀, 이미 예약이 끝나서 많이 곤란한데.”
더러운 손으로 손에 감은 헝겊을 만지작거리던 남자가 손가락을 비빈다.
대충 원하는 걸 눈치챈 주맹덕이 준비했던 돈 봉투를 건넸다.
“사정이 있어서. 잔금은 별도로 치를 테니 부탁 좀 합시다. 시급을 다투는 일이라.”
“흠……. 예의를 아는 양반이군. 좋소이다. 그럼 통금 전에 여기로 다시 오시오.”
봉투 안의 액수를 세어 본 거지의 눈빛에 총기가 돌아오더니, 슬쩍 주소지가 적힌 쪽지를 하나 내주었다.
쪽지에 적힌 장소는 산지항. 쪽지 한켠에는 뭔가 불로 그을린 듯한 마크 하나가 새겨져 있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