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양재벌 강태준-188화 (188/361)

188화 대표 선출

임시주총 회의장.

임시주총 직전까지도 비어 있는 한 자리. 시간이 돼도 나타나지 않는 주연들 덕일까. 시간을 끌 이야깃거리도 다 떨어진 마당이라 회의장은 술렁이고 있었다.

“대체 왜 이렇게들 안 오는 건가?”

“이 중요한 때 지각이라니. 이 사람들이. 정신이 있는 건가, 없는 건가?”

시간이 다 되어 가는데도 오늘의 주인공들이 안 나타나고 있자 분위기가 나빠지는 것은 당연했다. 지연되는 회의에 불만을 토하는 사람들.

“이런 젠장? 김 이사는? 그럼 언제 시작하라는 건가?”

“글쎄요. 좀만 기다려 주시면…….”

“이봐 언제까지 기다리라는 거야? 여 한순호 이사 이거 뭐야? 언제 시작하는 거야 이거?”

“자중을!! 모두 자중을 부탁드리겠습니다.”

주주들의 눈빛을 보니 모두 인내심이 폭발하기 직전이다.

사회자를 맡은 한순호 이사가 성난 여론을 다독이며 땀을 삐질 흘렸다.

‘아니, 아무리 다 된 밥이라도 그렇지. 김정욱 이 인간이, 벌써부터 사장 흉내 내는 건가?’

다 정해진 결론에 숟가락을 얹는 행위라도 일단 제대로 모양새는 갖춰야 하지 않나.

속으로 불평하던 그때. 비서 하나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귓속말을 전한다.

“뭣이? 그게 진짠가?”

응? 흠칫- 하는 한 한순호 이사였지만 여전히 시끄러운 회의실 안의 분위기는 눈치채지 못했다. 귓속말을 전달받은 한 이사가 이내 전달받은 쪽지를 무의식적으로 확인한다. 핏기가 사라진 입술에 고개를 드는 한 이사. 무언의 압박에 눈가가 파르르 경련한다.

잠시 후 입술을 깨문 그가 진행봉을 두드리며 주의를 모았다.

“자, 자. 여러분 주목해 주십쇼! 에…… 본래 오늘 단독으로 대표이사 후보로 나서기로 하셨던 김정욱 이사님께서…… 일신상의 사정으로 인해 임시주총의 참석이 어려워 대표이사 후보 출마 등 일체의 주주 권리를 포기하시기로 하셨습니다!”

갑작스런 폭탄선언에 어안이 벙벙해진 이사들이 일제히 사회자를 바라보았다.

“뭐? 그게 무슨?”

“그럼 대표이사는 누가 되는데?

이렇게 되면 후보가 없어지는 꼴 아닌가? 그렇게 되면 주총을 연 이유가, 혼란으로 소란이 커지려는 순간, 회의장 문이 벌컥 열리더니 우르르 쏟아져 들어온 검은 양복들. 순식간에 회의장을 빙- 둘러싸는 모습에 주주들의 몸이 굳는다. 미처 사태를 파악하기 전 춘삼이가 휠체어를 밀며 들어왔다.

“양 전무님?”

“양 전무가 어떻게?”

휠체어에 앉은 채 멀쩡히 살아 있는 양재문의 모습이 숨을 헙~ 하고 들이키는 이사진들. 뒤이어 양복을 빼입은 강태준마저 모습을 드러내자 혼란에 빠진 이사진들.

마치 귀신을 보는 듯이 두 명을 번갈아 돌아본다.

“뭐야? 강 선장까지? 혼수상태라지 않았나?”

“아니, 잠깐만, 그럼 며칠 전 장례 치른 건 대체 누구고? 그럼?”

이게 대체 무슨 영문인가. 죽었던 사람이 살아나다니. 술렁이는 회의장에서 소음이 잦아들지 않자 양재문이 얼굴을 찡그렸다. 양복을 쫙 빼입은 강태준이 손을 들어 좌중을 진정시켰다.

“조용히, 조금만 조용히 해 주십쇼. 여러분. 양 전무님께서 드릴 말씀이 있는답니다.”

나직한 목소리에 거짓말처럼 잠잠해지는 사람들. 마이크를 건네받은 양재문이 아무렇지도 않게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일단 늦어서 미안합니다. 회복이 덜 돼서 시간이 좀 소요되었소이다. 간만에 보니까 아주 반갑구먼. 의문이 많겠지만 다 사정이 있어서 그러니 묵혀 둔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당면한 과제부터 처리합시다. 나도 주주로서 참석 자격이 있는 거겠지?”

“예, 그렇긴 합니다만.”

“그럼 뭐 이제 주총을 시작해 볼까? 한 이사?”

한쪽으로 쏠리는 시선들. 그러자 한순호 이사가 머뭇거렸다.

“저 아직 몇 명이 불참하셨습니다.”

“어차피 올 사람 다 온 거 아닌가? 사실 심원효랑 김정욱 이사 빼면 또 누가 있다고? 그냥 시작하게.”

양재문의 독촉에 잠깐 술렁이던 사람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주총이 시작되고 기본적인 브리핑이 시작되었지만 모두들 듣는 둥 마는 둥 집중하지 못했다. 그렇게 표면적인 회사 실적과 앞으로의 방향성에 대한 보고가 끝나자, 사회를 맡은 한순호 이사가 아까 가져온 쪽지를 읽어내리기 시작했다.

“아. 자자. 여기 양재문 전무께서 새로이 대표이사 후보 신청을 하셨습니다. 누…… 누구! 이의 있으신 분…… 계십니까? 부사장직에는 강태준 이사가 같이 입후보하신답니다.”

강태준이 손을 까닥하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얼른 마이크를 대령하는 한순호 이사. 마이크를 건네받은 강태준이 조용히 말을 했다.

“그동안 사고도 있고 해서, 보안상 잠수를 탔습니다만 지금은 모든 문제가 깨끗이 해결되었습니다. 그간 본의 아니게 속인 것에 대해 사과드리겠습니다.”

“그러면 김정욱 이사와 심 이사는? 둘은 어찌 된 거요?”

“아. 김정욱 이사와 심원효 이사님께서는 대의를 위해 위임장과 서면동의서를 함께 제출하셨습니다. 돌아가신 심 사장님의 부인이신 최미령 여사님께서도 주주 권리를 저희에게 위임하시어 힘을 보태 주시기로 했습니다.”

서류 가방을 꺼낸 춘삼이가 기다렸다는 듯 위임장을 내밀었다. 한번 보라는 듯 돌아가는 서류에 당황한 듯 눈치를 보는 이사진들. 이게 당최 무슨 영문인지 알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자 아직 궁금증이 가시지 않은 누군가 조심스럽게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두 분은?”

“일련의 불미스러운 사태에 대해 책임을 통감, 당분간 모든 공직을 내려놓고,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시겠다고 했습니다. 원하시면 이 자리에 모실 수 있습니다만, 굳이 그게 필요할까요?”

빙그레 웃으며 깍지를 끼는 강태준이 다리를 꼬자 무표정하게 서 있던 양복들이 슬쩍 인상을 쓴다. 호두를 까듯 손가락 마디를 꺾으며 우두둑 소리를 내는 경호원들에 등골이 서늘해진 이사들.

대놓고 무력시위를 하는 강태준에 사회를 맡은 한순호 이사가 오한이 난 듯 이마에 난 땀을 닦는다. 짧지 않은 침묵이 지나고 강태준이 온화한 미소를 띠며 주위를 돌아보았다.

“특별히 대표선임에 반대하시거나 이의가 있으신 분이 계시다면 지금 말씀하십시오.”

“아니. 우린 되었네. 그냥 궁금했을 뿐이니.”

“그러믄 당연하지. 뭐 본인이 안 나오겠다는데 강요할 수야 있나? 허허,”

꽁무니를 빼는 이사들. 다들 별다른 반대는 없었다. 사실 속으로 불만이 있다 해도 이 분위기상 뭔가 반론을 꺼내기 어렵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달은 것이다.

“그럼 여러분, 대표이사와 신임이사 선출을 시작할까요?”

투표가 시작되고 얼마 후, 한순호가 투표 결과를 발표했다.

“투표 결과 찬성 19표에 반대 5표, 기권 3표! 정관상 출석 의결권의 과반수와 총 발행주식 50만 주 가운데 의결권주 28만 4324주 중 18만 9500주의 지지를 받아 대표이사 선임요건을 충족했습니다. 이로써 태동호의 신임 대표이사로 양재문 전무가 선임되셨습니다!”

“자 모두 박수!!!”

지휘봉을 치는 한순호의 발표에 바로 터져 나온 박수 소리들. 오재갑을 시작으로 모두들 따라서 박수를 치기 시작한다.

휠체어에 탄 채 양재문이 웃는 낯으로 인사를 나누었다. 무심한 표정으로 좌중의 이사들을 차례로 훑어보는 강태준. 마치 이 순간을 눈에 담아 두겠다는 듯 무심한 행동에 화들짝 놀란 이사들 역시 서둘러 박수를 쳤다.

“스벌. 이게 똥강아지도 아니고 이 무슨.”

“인상 피지 말고, 웃으십쇼. 거참!”

이건 좀 아니라는 듯 투덜대는 인간도 없지 않았지만 옆구리를 쿡 찔러 오는 손에 곧바로 표정을 바꾼다. 강태준의 시선이 좌우로 향하자, 이번에 찍히면 끝장이라는 듯 이제껏 손을 움직이지 않던 사람들 역시 손이 떨어지라 박수를 쳐 댄다.

짝짝짝짝!~~~

* * *

임시 출장소, 임시주총 결과 발표를 앞둔 시점.

아직 짓지 못한 가건물 안. 고요함과 적막감이 감도는 가운데, 주맹덕은 혼자서 술을 홀짝이고 있다.

“이번 일만 마치면 승진은 떼놓은 당상이로군.”

설렘과 긴장감이 가득한 하루. 양주가 들어가니 긴장이 풀리며 근육이 이완되자, 머릿속에 펼쳐지는 상상의 파노라마에 기분이 좋아지는 주맹덕.

그래, 여기서 승진하면 이 빌어먹을 폐건물과도 안녕 아니겠는가.

잠시 후 점차 가까워지는 구둣발 소리에 술잔을 내려놓는 주맹덕. 은근슬쩍 표정을 바꾸는 주맹덕에 다가온 부하가 공손하게 목례를 올린다.

아까의 미소가 사라지고 근엄한 표정이 된 주맹덕이 애써 덤덤하게 물었다.

“빠르군. 태동산업, 이사진 선출은 끝났나?”

“그게…… 지금까지. 아무런 연락이 없습니다.”

“응? 그렇게 늦어질 리가. 임시주총이 끝나는 즉시 연락을 하라 신신당부하지 않았나?”

“사실 오늘 아침 저희가 심어 놓은 빨대 쪽도 갑자기 연락이 끊어져서.”

“그게 무슨 소리야? 연락이 끊기다니?”

목소리가 커진 주맹덕에 망설이던 부하가 떠듬거리며 말을 이었다.

“그게…… 사실 최미령 쪽도 이상합니다. 경호를 맡긴 놈들까지 모두 묵묵부답이라서. 심원효 쪽도 출소 직후 모처로 이송한다는 보고 직후 한 번도 연락이 없었습니다.”

“야, 이런 병신 같은? 그걸 지금 보고하면 어떡하나!”

“그게, 평소에도 보고가 늦는 경우가 종종 있어 단지 일시적인 현상인 줄로만…….”

“이 새끼야, 그게 말이야 방구야, 당장 알아봐. 당장!”

서둘러 닦달하는 주맹덕에 부리나케 사라지는 부하들. 예감이 좋지 않은 것이 설마하니 벌써 들킨 건가?

설마 김필중이 선수를? 아니 그쪽에서 그렇게 빨리 알아차릴 수 있을 리 없다. 속으로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던 그때. 전화기가 울렸다.

따르르르릉.

불현듯 들려오기 시작하는 전화 연결음에 놀란 주맹덕. 떨리는 손으로 부리나케 전화기를 들자 딸깍- 소리와 함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들켰다. 주 과장, 양재문이가 살아 있었어. 자료 당장 소각하고 빨리 잠적을…….”

“여기 들어오시면 안 됩니다!”

“야 체포해!”

잠시 후, 덜커덕 소리와 함께 끊어진 전화 소리. 분기를 참지 못한 주맹덕이 거칠게 전화기를 집어 던졌다.

“이런 젠장!”

완전히 새 됐다.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넘긴 주맹덕이 억지로 화를 삭였다. 육동길까지 나가리가 되었다면 이번 작전은 실패가 분명하다. 그렇다면 지금 할 일은? 화를 삭인 그가 서둘러 부하를 호출했다.

“부르셨습니까? 지 부장님?”

“모든 자료 소각하고 사무실 정리한다. 출장소 폐쇄해.”

“예? 벌써 철수입니까?”

“철수가 아니라 폐쇄야. 아무래도 김필중 라인에서 눈치챈 거 같아.”

“아니, 그럼 어쩝니까?”

“작전은 여기서 중단하고, 난 해외로 도피한다. 정보원들한테도 별도 지시가 있을 때까지 전원 잠적하라고 전해.”

마치 이런 상황을 예측이라도 한 것처럼 주맹덕의 행동은 기민했다. 애초에 작전 수행 전 항상 최악의 상황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만큼, 돌발 상황에 대한 대비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부하들이 서둘러 활활 타오르는 소각통에 파쇄한 자료들을 욱여넣는 동안 그가 곧장 사무실 뒤편을 더듬었다.

‘그래, 여기 있군. 이걸 여기서 쓸 줄이야.’

비상 금고 안에는 위조 여권과 화폐 뭉치가 가득하다. 서둘러 내용물을 서류 가방에 한 번에 털어 넣은 주맹덕이 바로 영도로 향했다.

같은 시각, 대한민국 남산.

중정 회의실. 조 국장의 보고를 받은 남형욱의 표정은 그야말로 일그러져 있었다.

“양재문이 살아 있어? 어디 착오가 있는 거 아닌가. 죽은 사람이 어떻게 살아나?”

“그게 아무래도 페이크였던 거 같습니다.”

“이런 멍청한, 그거 하나 처리 못 해? 시체 확인은 했어야지.”

그 말에 송구한 듯 고개를 숙이는 조 국장이었다.

“죄송합니다. 설마 이미 의원 쪽에서 거짓말을 할 줄은 사망진단서까지 받은 상황이라 깜빡 속았습니다.”

“그걸 변명이라고 하나? 자네가 마지막까지 확인을 했어야 마땅하지 않나?”

“죄송합니다.”

다 된 밥에 재를 뿌리는 것도 모자라. 아주 홀랑 태워 먹다니.

권력형 비리가 연루된 살인사건이 중정과 연관 있다는 정황이 폭로되자 중앙정보부 쪽은 책임 문제로 완전히 난장판이 되어 버렸다. 특정 기업인을 의도적으로 살해하고 회사를 사유화하려 했다는 말에 박정명이 직접 남형욱을 불러 추궁하기까지 했던 것이다.

자기는 모르는 일이라 얼버무리긴 했지만, 변명은 궁색하기 짝이 없었다. 당장 해임될 위기는 넘겼지만 이런 사건은 사실 여부를 떠나 조직 통제에 문제가 있다 비춰질 수밖에 없는 법. 여기서 혹시 자기가 손을 댔다는 것이 알려지라기라도 한다면…….

-다음 화에 계속-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