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화 덫에 걸린 쥐
빤히 아는 이야기였지만 시치미를 떼는 오재갑이었다.
“오 이사라니? 갑자기 무슨 말씀을.”
“뭐 자꾸 새삼스럽게. 우리 같은 배 타기로 합의 본 거 아니겠나? 단도직입적으로 말함세. 내 옆에서 자네가 좀 도와줬으면 해.”
“저는 임원 달기엔 아직 나이가 어려서. 연차가 많이 이르지요.”
“나이가 밥 먹여 주나? 자네 정도면 자격은 차고 넘치지. 나이만 똥구녕으로 처먹은 노친네들이 어디 한둘인가. 쓸모없는 똥차는 빠르게 비켜 줘야지.”
벌써부터 개편을 시사하는 김정욱에 기가 차는 오재갑이었지만 답변은 달랐다.
“그래도 그건 좀 경우가 아닌 거 같습니다만.”
“이 사람 답답하게. 자네도 남잔데 야심이 있어야지. 실무진으로서 경험할 일은 다 거쳐 봤는데 이제 경영일선에도 참여해 봐야지.”
“그 점은 저도 희망 사항이긴 하지만. 일단은 주총이 끝난 뒤에 이야기하는 게 순서 아니겠습니까?”
“그래. 일 끝나고 이야기해도 늦지 않지. 뭐 달라지는 건 없겠지만 말이야.”
말은 그렇게 했지만 이미 자기의 당선을 확신하는 분위기다. 룸미러로 뒤를 힐끗 본 오재갑이 확인해보니 김정욱의 차 뒤로 경호 차량 두 대가 뒤따르고 있다.
‘많아야 6~7명이군.’
나름 준비를 해 놓긴 했지만 충분히 예상범위 내. 그렇게 오재갑이 처리할 상대를 어림하는 동안 도로 앞으로 포장 작업 중인 작업자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아스팔트 포설작업을 하는지 탠덤롤러가 다짐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갑작스런 장애물에 김정욱이 성가신 듯 이마를 좁혔다.
“아니, 하필 이런 때. 뭔 놈의 공사를 이렇게 요란하게 하나?”
“도로 침수문제로 저번부터 말이 많았던 터라. 이참에 보수공사 중인가 봅니다.”
“젠장. 그걸 왜 지금 하냐고. 어이, 좀, 좀 차 좀 빼지!”
빵빵 경적을 울리는 차량에 난처해 보이는 작업자들. 계속 경적이 울리자 견디다 못한 텐덤롤러가 뒤로 후진을 했다. 그러나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후진 중 실수로 철거작업을 하던 안전표지판이 갑자기 떨어져 나간 것이다.
튕겨 나온 지지대가 차량을 향해 날아오자 당황한 김정욱이 소리를 질렀다.
“이런 미친!”
파이프가 차량 측면을 긁고 지나가는 순간 끼익 소리와 함께 방향을 튼 차량이 길게 타이어 자국을 남겼다.
조금만 늦었어도 차량 유리창 정면으로 파이프가 박힐 뻔했던 터, 아슬아슬하게 세이프다.
숨을 몰아쉬는 운전기사의 행동에 모두들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허어. 이거 십 년 감수했습니다.”
“이런 미친놈이? 안전관리도 제대로 안 하나?”
열이 난 김정욱이 뒷골을 짚으며 차에서 내렸다. 차량 상태를 확인해 보니 문에 대문짝만하게 긁힌 자국이 선명했다. 혈압이 오른 김정욱이 뒷골을 부여잡고 열을 냈다.
“아 젠장, 스크레치 났잖아. 시발. 이게 얼마짜린데.”
“죄…… 죄송.”
“임마. 이게 죄송하다고 끝날 일이야? 엉?”
“저, 참으시고. 일부러 그랬겠습니까?”
삿대질을 하며 성질을 내는 김정욱에 죽은 듯 고개를 숙이는 작업자들.
험악한 분위기를 중재하는 오재갑에 뒤따라 나온 경호 차량에서 내린 사람들이 어깨에 힘을 주고 그 모양을 지켜보았다. 그렇게 모인 인원에 주의가 쏠린 사이 갑자기 공사장 근처에서 피슝 소리와 함께 갑자기 마취총이 연이어 쏘아졌다.
“뭐. 뭐야?”
“기습입니다. 숙이십시오!”
갑작스런 태세 전환에 당황한 경호원들이 움직이기 전에 연이어 총을 맞은 동료들이 쓰러진다. 김정욱이 엉겁결에 고개를 숙이는 순간 번개같이 팔을 꺾은 오재갑이 그를 단단히 결박했다.
“오 선장, 이게, 무슨 짓이야.?”
“이야기는 나중에, 저랑 가 주셔야겠습니다.”
“자네 와 이라노. 억!!”
김정욱을 결박한 오재갑이 목 뒤에 주사기를 콱 꽂았다.
충격에 놀란 김정욱이 잠시 작살 맞은 물고기처럼 바들대더니 이내 축 늘어진다.
그리고 잠시 후, 의식이 암전했다.
* * *
아무도 없는 횡- 한 느낌의 아지트.
이윽고 정신을 차린 김정욱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10여 평 남짓한 방.
간헐적으로 들려오는 신음 소리에, 무거운 눈꺼풀이 저절로 들렸다.
“끄으윽…… 끄윽…….”
어두컴컴한 취조실 안 퀴퀴하게 곰팡이 냄새가 인상적인 방에는 마치 도살장을 방불케 하듯. 여러 가지 기구들이 널려 있었다.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공간에 황급히 돌아보니 사방에 죽사발이 된 경호원들이 마치 널다 만 빨래처럼 널려 있다. 배경음마냥 간헐적으로 들려오는 신음에 혼미했던 정신이 돌아온 김정욱. 곧바로 자신이 결박된 상태를 알아차렸다.
“?!!”
“오, 깨셨습니까? 혹여 아주 안 깨어날까. 걱정했지 뭡니까.”
상대가 깨어난 것을 확인한 강태준이 쾌활하게 인사를 건넨다. 급작스럽게 커지는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지만 재갈이 물려 있는지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강태준이 말했다.
“제가 이렇게 나와서 놀라셨나 봅니다. 뭐 칼빵 맞고 반쯤 죽다 살아났으니. 그렇다고 뭐 저 친구만큼 당하지는 않았지만 말입니다.”
강태준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려보니 온몸이 결박당한 채 고개를 축 늘어트리고 있는 심원효가 앉아 있다. 피투성이인 녀석의 발 앞에는 팽호상이 쭈그리고 앉아 있다. 피 묻은 연장을 흉물스럽게 터는 모습에 커지는 눈동자. 하지만 김정욱은 온몸이 묶여 있어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아, 신경 쓰지 마십쇼. 뭐 우리 원효 씨는 저쪽 분이랑 따로 볼일이 있어서요. 어째 우리 원효 씨가 팽 두목님 나와바리에서 허락도 없이 칼부림을 벌였지 뭡니까. 업계 불문율을 깨고 나댄 셈이니. 자업자득 아니겠습니까?”
“덕분에 아주 고생했지. 내 체면도 말이 아니고 말이야. 다른 건달 패들한테 참교육 차원으로라도 본보기를 보여 줘야 마땅하지 않겠나? 그보다 이 새끼 많이 약골이구만. 고작 이 정도도 못 버티나?”
무던한 눈, 고저 없는 목소리엔 아무 감정이 실려 있지 않다. 연장에 묻은 살점을 털어내는 팽호상에 바르르 떠는 김정욱. 양손 손톱이 뽑혀 나간 꼴로 기절해 버린 심원효에 강태준이 다가서서 말했다.
“재갈 좀 풀어 주죠. 이쯤에서 대화부터 해야 할 거 같은데.”
“어이 일어나 봐, 야, 이 새끼야. 안 일어나? 엉!!”
재갈을 뺀 부하 녀석이 찰싹찰싹 싸대기를 갈기자, 기침을 토한 심원효가 눈을 떨며 정신을 차렸다. 마치 벌침이라도 맞은 것처럼 눈이 부어 잘 보이지 않는 녀석의 입에서 바람 섞인 울음소리가 새어 나온다.
“사…… 살려 줘. 살려 주시게. 내가 잘못했소. 제발.”
“싸가지 없는 새끼가, 아직도 입이 살았네. 아니, 여기가 네 안방이냐, 어찌 사전 양해도 없이 남의 집터에서 칼질을 하냐. 몸으로 때워야 하지 않겠니?
“제발 살려 주십쇼, 사, 사장님, 아니 두목님!
“내 가오가 덕분에 구겨졌는디, 그냥 그렇게 퉁칠 수야 없제. 우리 값은 제대로 치러야 하지 않나?”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는 손에 부들거리는 심원효. 피범벅이 된 입가에 앞니가 나가 있는 것이 더욱 볼품없어 보인다. 당당했던 기개는 어디 가고 한순간에 추레해진 녀석에 창백하게 질린 김정욱.
이윽고 슬그머니 라이터를 당긴 강태준이 안쓰럽다는 듯 녀석을 타일렀다.
“어이, 그러게 왜 그러셨습니까? 보니까 저랑 양 전무님을 아주 담그려고 하셨더군요. 아니면 애초에 선 넘지 말지 말던가?”
“미 미안하이, 내가 한 짓이 아니라네, 나랑 전혀 상관없는 일이네, 제발 믿어 주소. 강 선장.”
“이미 미안하다 퉁치기엔 늦었습니다.”
강태준이 가만히 물고 있던 담뱃불을 가슴팍에 지진다. 자지러지듯 비명을 지르는 심원효. 가만히 그 광경을 보던 팽호상이 턱주가리를 날리자 곧바로 잠잠해지는 녀석.
“아이구야. 돌대가리 새끼 이거, 손 아프네. 야 아귀야. 이거. 끌고 가.”
“옙. 형님.”
정신을 잃은 녀석을 의자째 옮기는 팽호상의 부하들. 강태준이 다시 의자를 당겨 재갈을 풀어 주자 질린 김정욱의 얼굴이 새하얗다 못해 하얗게 변했다.
“잠시만, 난. 난 모르는 일일세. 강 사장 무슨 오해가?”
“오해는 무슨. 우리 심 이사는 대충 두 시간 만에 불었는데. 어디 우리 김 이사님은 어쩔까나? 어디 맷집 한번 확인해 볼까요?”
곧바로 와락 얼굴에 검은 천이 씌워진다. 거부할 새도 없이 얼굴에 천을 덮고 물을 흘리기를 몇 번. 잠시 후, 젖은 천을 벗기자 밀랍인형처럼 변한 김정욱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녀석은 겁에 질린 것이 역력했다.
“커억…… 제발 그만!!!”
“아이구야. 이제부터 시작인데. 재미없게 와 이러십니까. 우리 김 이사님 이렇게 대가 약한 사람 아니잖아요.”
“제발…… 뭐든 하라는 대로 하지. 말로 하시게.”
“그럼. 거기 그대로 받아 쓰십쇼.”
어느새 코앞에 높인 탁자엔 서류 몇 장과 인주가 준비되어 있었다.
젖은 눈으로 내려다보니 익숙한 필체에 눈을 크게 뜨는 김정욱. 내용을 확인한 그의 손이 부들거린다.
“이건…….”
“심원효 이사도 자진 협조해 주셨습니다.”
짤막한 답변에 부르르 떨리는 손. 서슬 퍼런 눈동자에 하는 수 없이 베껴 쓰기를 하던 김정욱이었지만 인주를 막 찍으려는 순간 주저할 수밖에 없다.
슬슬 눈동자를 굴리며 눈치를 보는 행동에 강태준이 다시 재촉했다.
“지장도 찍으셔야죠. 계약서 안 써 보셨나? 어여 김정욱 씨. 걍 인정할 거 깔끔하게 인정하시고 편하게 갑시다. 예?
미련이 남은 듯 그가 사정하듯 애걸한다.
“그…… 그래도. 이보게 강 선장, 이건 좀 아니지 않나.”
“뭐라굽쇼? 지금 제가 잘못 들었습니까?”
“제발 믿어 주게…… 난. 진짜 이번 일과는 아무 관계없어. 내가 지금껏 심 사장님을 모신 게 몇 년인데…… 그런 내가 뭐가 아쉬워서 정보부 프락치 노릇을 해……? 응?”
“아놔. 이 아저씨가 아직까지 오리발은. 우리 다 알고 온 거거든요. 시간 없는데 참.”
어이없다는 듯 너털웃음을 짓는 강태준이 돌아보자 팽호상이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는다.
서로 마주 보는 눈.
“허어. 이러면 곤란한데.”
“어떻게 할까요. 팽 사장님.”
“글쎄요. 강 선장님. 어지간하면 저도 더 피를 보고 싶지는 않지만. 임시주총 개시가 코앞인데 어떻게든 빨리 해결을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긴.”
피곤한 듯 까슬해진 수염을 쓸어내리는 강태준. 강태준이 고개를 끄덕이 팽호상이 부하를 불렀다.
“야, 아귀야 그만 시마이하게 연장 좀 갖구 와라!”
“예. 형님.”
잠시 후, 아귀라 불린 녀석이 시퍼렇게 날이 선 도끼를 들고 왔다. 도끼를 건네받은 강태준이 도끼를 휘휘 휘두르자 희다 못해 푸르죽죽하게 변한 낯빛으로 떠듬거리는 김정욱이었다.
“자네, 뭘…… 뭘 하려는 건가?”
“아, 이거요? 지장 찍는데 손이 두 개는 필요 없잖아요. 결단력이 부족하신 거 같은데 의사결정을 좀 도와줘야 할까 싶어서요.”
“뭐……. 뭐라고. 이보게. 태준이!”
“좀 아프긴 하겠지만 혀 씹지 않게 조심하세요. 잘못하면 즉사할 가능성도 있으니.”
“그만, 그만둬!!”
장작을 패듯 그루터기 위에 팔을 결박한 부하들이 밧줄로 단단히 버둥거리는 손을 동여맸다. 파랗게 질린 김정욱이 발버둥을 쳐 보지만 장정들의 힘을 당할 수 없었다.
양손에 침을 뱉은 강태준이 도끼를 힘있게 그러쥐는 모습에 미친 듯이 발광하는 김정욱.
하지만 단단히 옥죈 매듭은 풀리지 않았다.
“자, 갑니다!!”
“으아아아아!! 사람 살려!”
콰직.
코앞에 찍힌 도끼날에 기절초풍한 김정욱. 그루터기 깊숙이 박힌 도끼날에 바지 밑으로 샛노한 액체가 흘러나왔다.
“어이쿠, 손이 미끄러졌네요. 다시 갑니다.”
“흐흐흑, 나 찍겠네…… 찍겠어!!”
반쯤 실성한 김정욱이 발작적으로 소리를 지르며 항복 의사를 표시했다. 그제서야 만족한 듯 도끼를 거두는 강태준. 사인을 끝낸 각서를 내밀고는 허탈한 표정을 짓는 상대에 강태준이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말로 할 때 진즉 그러셨어야지. 좀 좋습니까.”
“이제 되었지? 나 시키는 대로 했네. 이제 풀어 주시게.”
십 년은 늙어 버린 모습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김정욱에 강태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건 좀 힘들겠는데요. 아직 계산이 끝나지 않아서. 뭐 제가 아끼는 아우들이 둘이나 죽었는데 이대로 퉁 치긴 좀 섭하지 않습니까?”
“뭐?”
“그래도 서운한데 남은 깽값은 받아야지 않겠습니까?”
강태준이 너클을 끼운 손에 헝겊을 둘둘 감았다. 예열하는 운동선수마냥 목을 꺼드럭대는 강태준. 불길함에 목소리가 덜덜 떨리는 김정욱이었다.
“왜…… 왜 이래? 이제 다 끝났지 않나?”
“이렇게 끝나면 원효 녀석이 좀 많이 서운하지요. 잘못은 둘 다 했는데 혼자만 떡이 되게 처맞으면 좀 그렇지 않습니까?”
“제…… 제발! 웁웁…….”
“거 이빨 나갈지도 모르니 어금니 꽉 깨무십쇼? 아니면 평생 죽만 먹습니다?”
재갈을 물린 김정욱의 동공이 찢어질 듯 커지는 순간, 강태준의 주먹이 힘껏 아구창을 후려갈겼다.
퍽!~~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