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화 테러리스트
그러자 강태준이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솔직히 하버드 로스쿨이라면 남들은 못 가서 안달 난 곳 아니겠습니까? 기회가 있다면 무조건 붙잡아야죠. LLM이면 1년인데 단기로 바람 쐬고 갔다 오는 것도 좋지 않을까요?”
“그게…… 사실 1년이 아니라 그 이상이 될 확률이 높아서. 사실 SJD까지 갈까 욕심이 있어서요.”
“SJD라면? 한국으로 치면 박사과정 말입니까?”
“네. 바 시험(BAR EXAM)이 끝난 후에는 연구원 자격으로 체류를 연장할까 생각이 있거든요. 하버드, 스탠퍼드, 예일 같은 탑급 로스쿨에서는 LLM을 마치고 트랜스퍼 없이 JD 과정을 거칠 수 있다더군요.”
3년이라 강태준의 입장에서도 조금 부담스러운 기간이었다.
“흠. 굳이 박사과정까지 꼭 해야겠습니까?”
“LLM 과정은 사실 수박 겉핥기 수준이지. 진짜 공부라고는 할 수 없으니까요. 게다가 제대로 실무를 배우고 활동을 하려면 JD 학위가 필요해서요.”
JD 과정을 수료하려면 LLM에서 추가로 2년을 다녀야 학위취득이 가능하다. 실제 현지인 학생처럼 꼬박 3년과 동일한 기간을 채워야 하는 것이다.
“허어. 그 정도면 학비도 만만찮을 텐데. 무엇보다 머물 장소는 있습니까?”
“국비 유학생의 경우 학비는 미 정부에서 전액 지원해 주거든요. 제 어릴 적 친분이 있던 미국인 교수님이 계셔서 딱히 비용 걱정은 없을 거 같아요. 이참에 추천서도 써 주신다고 해서 아마 그쪽 집에 홈스테이할 가능성이 커요.”
“흠. 3년이라, 그건 너무 긴데…….”
“집에서도 제가 고집부리면 밀어주기야 하겠지만 다시 생각해 보라고 만류하긴 하더라고요. 일단 혼기가 찼으니 결혼이 우선이 아니냐고…….”
강태준은 가만히 설유하를 주시했다. 불안한 듯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는 행동이 이 말을 꺼내기까지 꽤 용기를 낸 것이 분명했다. 강태준이 웃으며 핀잔을 주었다.
“3년간 독수공방이라니. 그건 인간적으로 가혹한 이야기 아닙니까?”
“뭐 태준 씨가 반대하면 깨끗이 포기할려구 했죠. 그때까지 기다려 달라는 건. 뭐 제가 생각해도 너무 욕심이 많으니 말이에요.”
애써 웃는 척을 했지만 하는 설유하였지만 시무룩한 기색은 숨길 수 없었다.
그러자 강태준이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잡았다.
“에.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야지 않겠습니까. 유하 씨. 난 유학 찬성입니다.”
“에? 진짜로…… 그래도 될까요?”
설유하가 고개를 들자 부드럽게 머리칼을 쓸어 넘겨준 강태준이 부드럽게 꼭 손을 쥐었다.
“인생은 하고 싶은 일만 하고 살기에도 짧은 기간이죠. 솔직히 유하 씨가 곁에 없으면 많이 서운하겠지만. 인생은 길잖아요. 저는 기꺼이 기다릴 수 있습니다.”
“진짜로 그래도 되나요?”
“뭐 사람이 이런 기회가 인생에 자주 오진 않잖습니까. 공부도 다 때가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제 욕심으로 앞길을 막고 싶지는 않아요.”
목이 메는지 감격한 설유하의 눈이 그렁그렁해진다.
“태준 씨…….”
“본인이 정말 하고 싶은 일이라면 해야죠. 뭐 마누라 군대 보낸 셈 치죠. 정 보고 싶으면 제가 찾아갈 테니 말입니다.”
“고마워요. 태준 씨. 정말.”
“에휴, 이런 걸로 울지 말고. 유학 가면 외롭고 힘들 텐데, 이렇게 나약한 맘 먹고 타국서 버틸 수 있겠어요? 또 화장 번지겠네.”
“어. 진짜?”
당혹감에 설유하가 허둥대자 강태준이 손수건으로 눈가를 살짝살짝 닦아 주며 물었다.
“그럼 유학 일정이 언제입니까?”
“한 8개월 뒤요. 내년 가을학기가 8~9월에 시작하니 미리 가서 적응해야죠.”
“아직 한참 남았네요.”
“준비할 게 많죠. 유학 가기 전까지 영어성적표도 제출해야 하거든요.”
“영어시험이요?”
“토플이라고 미국 ETS(Educational Testing Service)에서 개발한 시험이 있는데 이번에 첫 시험이라네요. 저희도 시험 대상자예요.”
“첫 시험이라, 일종의 테스트 베드 개념이군요.”
“네네. 성적이야 그닥 중요하진 않겠지만 체면상 잘 보는 게 낫지 않겠어요. 유학 전 영어연습도 되고, 같이 유학 가는 사람들이랑 스터디도 짜서 준비하려고요.”
토플이라. 대체 언제적 이야기던가. 예전의 기록이 새록새록 떠오른 강태준이 곧바로 기억을 지웠다.
“그럼 앞으로 더 시간이 없겠네. 그럼 쓸데없는 이야기는 고만하고. 우리 데이트나 제대로 합시다.”
“바쁘다면서요. 들어가 봐야 하는 거 아니에요? 낼모레 주총도 있는데…….”
“하하. 오늘 일은 내일로 미루면 되죠. 하루 정도야 뭐. 다 잊고 놀아 재끼자고요.”
머뭇거리는 설유하의 손을 잡은 강태준이 서둘러 그녀를 잡아끌었다. 해금강을 지나는 바람의 언덕부터, 신선이 놀던 자리라는 신선대까지. 수양버들을 배경으로 노을이 질 무렵 강태준이 마지막으로 방문한 곳은 가조도의 도장포 마을로 노을이 아름답기로 유명한 곳이었다.
태양이 지는 모습과 함께 붉은색 빛의 산란이 더욱 두드러지자 황금빛 노을이 물결 위를 비추는 모습이 보인다. 바람이 부는 언덕 위에서 바다를 바라보니 빛이 물드는 모습이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와아. 이쁘네요. 반짝반짝 빛나는 게 보석 같아요.”
“하하. 그건 사실 먼지랍니다. 사실 먼지가 많을수록 노을이 아름다워 보인다고 하네요.”
“그래요? 한국에 이렇게 이쁜 곳이 있는지 처음 알았어요.”
바람에 날리는 머리칼을 다잡는 설유하에 강태준이 미소를 지었다.
“사실 나중에 돈 많이 벌고 나면 이쪽 일대를 관광단지로 개발할까 생각 중입니다.”
“관광지라고요?”
“예. 이쪽에 연륙교를 세울 작정이거든요. 근방에 교량이 생기면 거제도 섬 신세에서 완전히 벗어날 테니, 사람들도 많이 몰려올 겁니다. 특히 저기 외도 쪽은 관광농원으로 꾸며서 유람선을 띄울 생각입니다.”
“관광농원이라 멋지네요. 생각만 해도 근사하겠는걸요.”
“예. 이곳 거제야말로 자연이 준 선물 아니겠습니까. 외도에 지중해처럼 그리스풍 신전을 세우고. 선샤인, 야자수 같은 아열대 작물이랑 은환엽유카리, 스파리티움, 마호니아 같은 희귀식물들을 잔뜩 심으면 아주 그럴싸할 거 같아서요.”
“와. 그렇게 되면 진짜 사람들이 많이 오겠는데요.”
바람을 받으며 설유하는 꿈꾸듯이 눈을 감았다. 실제로 이곳 외도 일대는 후일 관광명소로 탈바꿈했을 만큼 관광지로서의 잠재력이 충분하다. 비춰 오는 석양이 저무는 모습에 넋을 잃은 강태준. 노을빛 덕일까. 앵두빛의 입술이 더욱 탐스러워 보인다. 문득 자연스럽게 포개지는 입술.
잠시 후, 얼굴이 빨개진 설유하가 허둥지둥했다.
“아휴, 너무 늦었네. 빨리 돌아가야겠어요.”
“제가 바로 모셔다드리겠습니다.”
홧홧해진 표정을 가린 설유하가 못 이기는 척 뒷좌석에 앉았다. 날은 벌써 저물어 어둑어둑해지는 시간. 잠시 후, 어깨로 느껴지는 감각에 옆자리를 돌아보니 어느새 설유하는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피곤했나 보군.”
“그럴 만도 하시죠. 서울에서 한달음에 오셨으니. 보스께서 복이 많으십니다.”
“하하. 그런가?”
운전기사를 맡은 최 중사의 말에 강태준이 가만히 그녀를 들여다보았다. 하긴 먼 길 오느라 피곤하기도 했겠지. 머리칼을 쓸어 본 강태준이 슬쩍 담요를 덮어 주었다.
그사이 최 중사는 혹여나 깰세라 조심스럽게 선착장으로 차를 몰았다.
가조도를 넘어 거제로 넘어간 일행은 다시 고현항으로 향했다. 인적은 거의 없이 한적한 와중에 공사 중이라는 팻말이 있었다. 물류 확장을 위해 조선 도크와 의장안벽을 축조하는 중. 공사용 컨테이너들이 차곡차곡 적재되어 있는 모습에 강태준은 미심쩍은 표정을 했다.
“음? 뭔가 이상한데? 지금쯤 배가 들어오기로 되어 있지 않나?”
“그러네요. 이쯤에서 마중 오기로 되어 있는데, 정기선도 아니고 갑자기 뭔 일이라도 터졌나?”
딱히 날씨가 악천후인 것도 아닌데…… 대체 무슨 일일지. 생각이 길어지는 그때. 갑자기 하얀 헤드라이트 빛이 환하게 비춘다.
“무슨?!”
눈 부신 빛에 시야가 가려진 강태준이 손을 드는 찰나, 엄청난 충격이 예고 없이 옆자리를 덮쳤다.
쾅!!~~~
끼이이익- 마찰음과 함께 해일처럼 다가오는 충격파. 직격탄은 피했지만, 좌석에 부딪힌 머리가 얼얼하다. 그러나 고통을 느낄 새도 없었다. 뒤따라오던 경호 차량이 휴지처럼 구겨져 버린 모습에 정신이 번쩍 들었던 것이다.
현장의 참혹함에 망연자실하기도 잠시, 트럭이 질주하며 돌진하는 광경에 최 중사가 손을 뻗으며 고함을 질렀다.
“조심하십쇼!!”
핸들을 급하게 꺾은 차량이 컨테이너 사이를 빠져나가고, 골목으로 꺾어 들어간 차량을 따라 트럭과 차량들이 맹렬히 뒤쫓는다. 엄청난 속도로 따라붙는 추격에 정신을 차릴 틈도 없이 입구에서 검은 양복을 입은 사람들이 우르르 모습을 드러내었다.
“최 중사 앞!”
“비켜라. 비켜!!”
연장을 든 녀석들이 달려드는 모습에 최 중사 역시 풀악셀을 밟으며 앞으로 돌진한다. 좌우로 벗어나는 사람들, 일부 녀석이 차에 치인 듯 그대로 퉁겨나간다. 그렇게 인의 장막을 벗어나는 순간 깜짝 놀란 설유하가 정신을 차리고는 놀라 비명을 질렀다.
“최 중사, 피! 피나요!”
“거, 피륙만 스친 것뿐입니다. 그보다 저놈들 대체 뭡니까?“
“중정 따까리 아니면 원효랑 관련된 놈들이겠지. 따돌릴 수 있겠나?”
빠르게 따라붙는 차량에 곁눈질을 하며 거리를 재보는 강태준. 흐르는 피를 대충 지혈한 최 중사가 빠르게 감소 중인 연료 게이지를 살피곤 이마를 좁혔다.
“퓰 탱크가 손상돼서 따돌리기 어려울 거 같습니다. 사장님 혹시 무기 있습니까?”
“없네. 그걸 대놓고 갖고 다니겠나?”
“그럼 지금 제가 손이 바빠서. 거기 의자 밑에 손을 넣어 보십쇼.”
최 중사의 말대로 차량 의자 아래를 살펴보니 구깃구깃한 봉투에, 리볼버 하나가 들어있다.
“콜트 M1911?”
“호신용으로 쓰는 물건이죠. 손에 익은 물건은 아니시겠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단 낫지 않겠습니까. 쏘는 법은 대충 아시죠?”
강태준이 고개를 끄덕이며 안전장치를 풀었다.
“알지.”
“지금부터 후진해서 트럭을 세울 겁니다. 차 빠꾸하면 무조건 도망치십쇼. 그래야 삽니다.”
“그럼 자네는?”
“제 한 몸이야 챙길 수 있으니 걱정 마십쇼. 일단 제가 주의를 끌 테니, 바로 밖으로 뛰어내리십쇼. 셋 셉니다. 하나둘…… 자, 바로 뛰십쇼!”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두 명이 후진하는 차량에서 뛰어내린다. 바닥을 굴러 아슬아슬하게 낙법으로 떨어지는 둘. 뒤쫓아오던 트럭이 승용차와 그대로 꽝 충돌했다. 충돌의 여파로 보닛에서 연기가 뿜어져 나오는 차량.
트럭에 탔던 조폭들이 머리를 짚으며 비척비척 밖으로 걸어 나온다. 그걸 본, 최 중사가 곧장 녀석을 제압하기 위해 덤벼들었다.
빠각!!
충격이 가시지 않았는지 흐느적거리는 놈들을 돌려차기로 기절시킨 최 중사. 그사이 저쪽에서 연장을 든 놈들이 달려오는 모습에 최 중사가 다급하게 소리를 질렀다.
“도망치십시오! 어서!!”
육박전이 이어지는 가운데 커터칼을 든 상대가 옆구리를 쭈욱 긋고 지나갔다. 그 순간 장갑 낀 손으로 칼을 붙잡은 최 중사가 손칼로 상대의 목을 순식간에 그었다.
“드루와. 이 새끼들아!”
분수처럼 흩뿌려지는 피에 주춤하는 녀석들. 피범벅이 된 칼로 파이팅 자세를 취하는 최 중사. 그걸 본 강태준은 미친 듯이 뛰었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