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화 고압세척기
“흠. 수압으로 따개비를 뜯어낸다라. 과연 얼마나 효용이 있을지…….”
“불가능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원래 공사현장에서도 부식된 녹이나 콘크리트에 붙은 이물질 제거용으로 많이 사용되지요. 마침 저희 쪽에서 하수관 뚫을 때 쓰는 역분사 노즐이 있으니, 속는 셈 치고 함 써 보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지만 확신이 없는 최명률은 조금 부담스러운 듯한 표정을 지었다.
“흠. 저희야 그러면 좋지만 비용 문제가.”
“그 점은 염려 마십시오. 분사 노즐이랑 물 펌프는 여분이 많으니까요. 일단 시범 삼아 한번 제작해 보고 일단 선박에서 바이오필름이 쉽게 생기는 부분부터 시범적으로 적용한 다음에 경과를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뭐 그렇다면야, 저희는 감사한 일이죠.”
최명률 입장에서는 밑져 봐야 본전이니 아쉬울 것 없고 강태준도 마찬가지.
만약 잘되면 새로 팔 아이템이 생기는 게 아닌가. 강태준이 곧바로 춘삼이를 보내 천 영감에게 의뢰서를 전달했다. 미군부대에서 사용하던 에어노즐 건 모양과 비슷하게 제작하여 물탱크가 달린 펌프에 연결하는 방식이었다.
의뢰가 들어간 지 며칠 후, 급조된 고압 세척기가 작업장에 도착했다. 자흡식으로 제작된 물건은 송출부 파이프에 수동조절용 헤드가 부착되어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물건을 장비를 본 최명률을 비롯한 사람들의 표정은 영 미덥지 못했다. 개조한 제품이 생각보다 더 투박해 보였던 것이다.
“기대했던 것보다 많이 아담하네요.“
“거~ 작다고 파워가 약한 건 아닐세. 15마력짜리 물 펌프에 150바(Bar)이상의 압력이니 필요에 따라 수압을 조절할 수 있도록 했네.”
천 영감의 호언장담에는 자신감이 서려 있었다. 예상대로의 결과물에 만족한 강태준이 곧바로 행동을 서둘렀다.
“뭐 일단 쏴 보면 알겠지요. 일단 테스트부터 해 보죠. 안전 문제도 있으니 장소 확보하고 거리부터 벌려 주십시오.”
“설마 자네가 직접 쏴 보려고?”
“저 말고 이런 걸 제대로 다뤄 본 사람이 아무도 없잖습니까? 어차피 테스트도 해 보셨을 텐데요.”
“그래도 사장이 직접 이런 일은 그렇지 않나. 밑에 애들 시키는 게 낫지.”
그 말에 옆에 있던 춘삼이가 걱정스러운 듯 제안을 올렸다.
“맞습니다. 사장님 차라리 제가 하겠습니다. 혹시 문제라도 터지면…….”
“괜찮아. 이런 건 원래 윗사람이 솔선수범해야지.”
혹시나 누가 실수해 물벼락을 맞았다가는 어떤 불상사가 벌어질지 모르지 않나. 15마력짜리 물벼락을 맞았다가는 살갗이 벗겨지는 것으로 안 끝난다.
강태준의 말대로 멀찌감치 떨어진 사람들이 한곳에 시선을 집중하자, 고글에 소방복까지 입은 강태준이 대기를 하고 배 앞에 섰다. 준비가 끝나자 천 영감이 신호를 보냈다.
쏴아아아아아아!!!~~
펌프에 전원을 켜고 노즐 방아쇠를 당기자 물벼락이 기세 좋게 뿜어져 나왔다. 배 바닥에 붙은 따개비 더미가 한꺼번에 쓸려 나가는 모습에 그간의 의구심은 곧 감탄으로 변했다.
배 바닥은 물론 선체 양측에 딱지처럼 덕지덕지 붙어있은 따개비가 한 방에 쓸려 나가자 배 바닥은 금세 깨끗해진 것이다.
“어마어마하구먼요. 이거.”
“세상에, 이렇게 쉬운 방법이 있었을 줄이야…….”
그 광경을 지켜보던 직원들의 입이 헤 하고 벌어졌다. 따개비와 씨름하면서 아등바등 밤샘 작업을 하던 것이 무색하게 이렇듯 순식간에 끝나 버리다니.
본보기로 시범을 끝낸 강태준이 조리 있게 설명했다.
“몇 가지 주의사항을 숙지할 수 있겠네요. 생각보다 노즐에서 느껴지는 압력이 있으니 꽉 잡아 주셔야 합니다. 그리고 사용 전에는 호스 연결 후, 일단 방아쇠를 당겨 호스와 펌프 내의 공기를 모두 배출시켜 줘야 하고요. 사용 중 호스가 꺾이면 역류 가능성이 있으니 이 부분 유념하십쇼.”
“명심하겠네.”
천 영감도 고개를 끄덕이며 주의를 주었다.
“안전모랑 수경은 필수로 착용하고 항상 2인 1조로 움직이시게나. 누전되지 않게 주의해야 해. 욕심이 난다고 오버해서 사용하면 모터가 타 버리니 연속 분사는 30분 이상 지속하는 건 지양해야 해. 하루 최대 가용 시간은 8시간일세. 전원 스위치를 끈 후에도 고압 분사건의 방아쇠를 당겨 펌프 내 잔존 압력을 제거해 줘야 해…….”
그 후 강태준은 이틀간 조선소로 출근하면서 대광의 수리공들에게 안전수칙과 사용법을 숙지시키기로 했다. 대략적인 교육이 끝날 무렵, 기다렸던 수리도 빠르게 진척되었다.
새로 페인트칠까지 마쳐 깨끗해진 하부면에 강태준이 한결 후련한 표정을 지었다.
“다들, 수고하셨습니다.”
“덕분에 작업이 빨리 끝났군요. 멸치 어선은 바로 출항 준비할 수 있도록 항구에 올려두겠습니다. 혹시 여유 있으면 회식이라도 같이 갑시다.”
“제안은 감사합니다만 오늘은 사양하겠습니다. 제가 요새 일이 밀리는데 많아서 임시주총 준비도 해야 하고, 남은 업무가 많거든요.”
“아, 그래요? 좀 아쉽군요. 사실 해남과 관련해서 별도로 부탁을 여쭙고 싶었는데 말이죠.”
“해남 조선소 말입니까?”
“예. 사실 해남 조선소 성 사장이 저랑 절친한 사이거든요. 회사가 파산 아니면 다른 회사에 넘어가게 생겼다는데 남의 일 같지 않더군요. 혹 강 사장께선 인수에 생각 없나 해서 말입니다.”
뜻밖의 제안에 강태준이 대답했다.
“흠…… 조선소 인수까지는 좀 그 부분은 아직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만.”
“그럼 지금이라도 한번 고려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저희야 형편이 안 되니 언감생심이지만 강 사장님께서는 능력 있으신 분이잖습니까. 성 사장 그 사람 알아주는 선박 전문가입니다. 분명 도움이 될 겁니다.”
“거, 참…….”
난감해진 강태준이 고민하는 사이, 저 멀리서 손을 흔드는 얼굴이 눈에 띄었다.
“태준 씨!”
홀연 듯 등장한 설유하가 강태준을 발견하더니 다짜고짜 품 안으로 뛰어들었다. 엉겁결에 포옹을 한 강태준에 눈이 휘둥그레지는 사람들. 뒤늦게 모인 인파를 깨달은 설유하가 얼굴을 붉혔다.
“어머. 실례. 너무 반가워서 그만.”
“유하 씨가 여기까진 갑자기 웬일입니까?”
“헤헤. 휴가 냈지요. 광필 씨한테 연락했더니 바로 가르쳐 주던데요.”
강태준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광필이가? 둘이 언제부터 그렇게 친한 사이였습니까?”
“뭘 새삼스럽게 예전에 법률관계 검토할 때 몇 번 만났었죠. 사람 서글서글한 게 인간성 좋던데요. 종로에 백화점 갔을 때도 이것저것 챙겨 주고. 덕분에 가족들도 알아요.”.
“그 녀석이 그런 기질이 있었나?”
“뭐 그보다 밥은 먹었어요? 나 좀 배고픈데. 여기까지 내려오느라 한 끼도 못 먹었거든요.”
“아. 그래요? 근데 일단 이야기가 안 끝나서.”
강태준이 최명률을 돌아보자 그가 어쩔 수 없다는 듯 눈을 찡긋했다.
“이거 선객이 있으셨다니. 아무래도 오늘 논의하긴 그른 것 같군요.”
“상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지요. 추후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럼 기다리겠습니다.”
강태준이 부드럽게 손짓하자, 눈치 빠른 춘삼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희는 먼저 실례, 항구 쪽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강태준이 지갑에서 돈을 꺼내 넉넉히 쥐여 주었다.
“저기 밖에 남은 경호 인력들 데리고 한 끼 든든히 먹이게.”
“하지만 다 빠지는 건 조금 문제가. 경호에 구멍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내 몸 지키는 거야 여기 최 중사랑 특전사 서넛이면 충분하지. 다들 며칠 새 쉬지도 못했으니 숨 돌릴 틈은 줘야지. 여차하면 내 한 몸 뺄 수는 있으니 걱정하지 말고.”
춘삼이가 고개를 돌리자 최 중사가 쾌활한 어조로 가슴을 탕탕 쳤다.
“하하. 저희를 믿으십시오. 이래 봬도 이런 쪽으로는 전문가입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중사님만 믿겠습니다.”
경호 인력 셋을 제외한, 나머지 인원들은 함께 철수하기로 했다. 사람들이 떠나는 모습에 자연스럽게 팔짱을 낀 설유하.
다시 차에 올라탄 강태준이 향한 곳은 장승포동에 있는 대룡포라는 음식점이었다.
1세대가 흥남에서 청요릿집을 하다 1·4 후퇴 때 거제까지 내려와 자리를 잡고, 개업해 성업 중인 곳으로 나름 이 근방에서 맛집으로 이름난 곳.
일제 강점기 시대 상해 같은 느낌을 주는 고즈넉한 분위기에 설유하가 신기해했다.
“흠, 오래된 곳이라더니. 진짜 오래되었나 보네요.”
“하얀 백 짬뽕으로 유명한 곳이죠. 나름 맛집입니다.”
식당 내부는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어 연식에 비해 허름한 느낌이 들지 않았다. 홀 안쪽에 좌식 테이블에 들어간 강태준이 짬뽕과 유산슬을 시켰다. 잠시 후, 양배추와 해물이 가득 든 하얀 짬뽕이 나오자 슬쩍 수저로 국물을 맛보는 강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뭘 넣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깔끔하네.”
“그러게. 양배추를 넣어서인지 맛이 시원하군요.”
시장이 반찬이라서일까 적당한 감칠맛이 식욕을 돋웠다. 하지만 식사에 열중한 강태준과 달리 깨작대는 설유하. 그 모습이 신경이 쓰인 강태준이 젓가락질을 멈추었다.
“왜요? 짬뽕이 입맛에 안 맞습니까?”
“아니에요. 맛있어요.”
“그럼 왜 이렇게 못 들어요. 체했습니까? 아님. 속이 불편하다거나?”
“그런 거 아니에요.”
“흠, 완전히 고해성사할 분위긴데…… 솔직히 털어놔 봐요. 뭐 숨기는 거 있죠?”
강태준이 종용하자 눈치를 보던 설유하가 수저를 얌전히 내려놓았다. 차로 입술을 축인 그녀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사실…… 며칠 전에 미국 유학 제의가 왔어요.”
“유학이요?”
“예. 최근에 국무원 사무처 법제국이 법제처로 개편되었거든요. 올해부터 법제 업무 관련 기관의 법제 역량 강화를 위한 관학 교류 목적으로 유학생 선발을 한다더라고요. 법원 내부인사로 뽑는다는데 저도 응모해 볼까 해서요.”
“흠. 유학이라? 미국에서 딱히 배우고 싶은 분야가 있나요?”
“많지요. 특히 기업 법무에 대해 심도 있게 배워 보고 싶어서요.”
“회사법 쪽이겠군요. 그럼. 배울 게 한둘이 아닐 거 같은데. 확실히 한국에 필요한 분야기는 하지요.”
“누적된 판례는 아직 적지만 앞으로 수출입과 관련된 분쟁이 증가하면 상사업무가 폭증하겠죠. 그렇게 되면 기업 관련 송사나 국제 분쟁도 늘어나지 않겠어요?. 그래서 문제 발생 시 선례나 법리가 어떤지 깊이 파 보고 싶은 생각이 있지요.”
“흠. 지망하는 학교는 있습니까?”
“하버드 로스쿨이에요. 정부 기관 사이에 이야기가 끝난 부분이라 아마도 그쪽으로 쿼터가 배정될 가능성이 크다고 하더라고요.”
사실상 내정자가 입교하는 방식이기 때문에 해당 지원자는 하나의 학교밖에 지원하지 못한다. 해당국 법원과 로스쿨 입학처와 입을 맞춰서 선발하기 때문. 예컨대 법원 내부적으로 누군가를 유학 선발 인원을 뽑았다면, 그 사람만 특정 학교에 지원 자격이 있다는 것이다.
“혹시나 엉뚱한 사람이 뽑히는 걸 방지하기 위함이죠.”
“대단하군요. 그럼 내정만 되면야 입학은 기정사실이나 다름없군요.”
“뭐 그렇긴 하지요. 근데 제가 예전에 쓴 논문이 꽤 좋은 평가를 받아서인지. 그쪽에서 절 좋게 본 모양이에요. 지원만 하면 뽑힐 확률이 높다는데, 혹시 태준 씨 생각은 어떤가 해서 여쭙고 싶네요.”
“음…… 솔직한 심정으로는 뭐 유하 씨를 한동안 못 본다 생각하니 좀 서운하네요. 하지만 커리어를 위해서는 좋은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
“에. 정말요?”
반대를 예상했던 설유하로서는 꽤 긍정적인 대답이었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