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화 환급 보증
그 모양을 안쓰러운 듯 지켜보던 강태준이 다시 말했다.
“이야, 저건 손이 아리겠는데요.”
“그래두 겨울에 비하면 양반입니다. 겨울철 꽁꽁 언 선체를 잘못 만지면 철판에 손이 달라붙는데 까딱 잘못하면 살갗이 그대로 뜯어지거든요. 그래도 먹고 살려면 뭘 가리겠습니까? 그래도 요샌 일감이 늘어서 숨통이 트였으니 물 들어올 때 열심히 노 저어야죠.”
말은 겸손하게 하지만 사실 최명률은 일찍이 일제강점기 옛 다나카 조선소에서부터 일을 배운 장인이다. 다나카 조선소는 발동기를 장착한 근대식 목선을 대한민국에서 최초로 제작한 회사로 바닥부터 차근차근 노하우를 익힌 최명률은 꼼꼼하고 야무진 솜씨로 정평이 나 있었다.
실제로 이 회사가 작년 한 해 수리한 선박을 보면, 2톤 이상 나무 선박을 43척, 2톤 이하 소형선박까지 합하면 백여 척 이상.
대광이 정직원이 30명 정도밖에 되지 않는 영세한 조선소라는 것을 고려하면 실로 엄청난 수주량이 아닐 수 없다.
그렇게 야드를 걷던 강태준의 시선을 사이로 새로 제작 중인 배 한 척이 눈에 띄었다.
“오. 새로 만들고 있는 겁니까?”
“아, 이번에 어선으로 쓰일 선박인데 저희가 수주한 배지요. 조선소 재건 이후로 처음으로 맡는 신조선입니다.”
“호오, 그렇습니까. 바닥 모양이 일반 배와는 구조가 좀 상이하군요.”
선체의 기초라 할 수 있는 용골을 슬쩍 더듬어 보니 목재가 단단하고 잘 말라 있다. 전통 선박 형태를 띤 목선이랄까. 약 20톤급으로 보이는 배는 마치 호박의 속을 파낸 듯 둥글넓적했다. 강태준으로서는 간만에 보는 양품이었다.
“재질이 철도 침목용 크루랑 비슷하네요. 바닥재인 참나무는 곱장쇠 같은데.”
강태준이 호기심을 보이자 최명률이 뿌듯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오호, 전문가만큼이나 재질을 알아보시네요. 네 맞습니다. 하단 돛단배 제조방식에 가거도에서 사용하는 전통 기술을 응용해 봤습니다.”
“가거도라면 흑산도 근처 말입니까?”
“예. 그쪽은 태풍이 잦고 바람이 세서 선박을 뭍으로 끌어 올리기 쉽도록 바닥이 둥글게 만들거든요.”
“흠. 그게 도움이 됩니까?”
“이렇게 안을 둥글게 설계하면 평소엔 어선으로 사용하던 배를 금어기나 어업이 뜸한 시기엔 구조만 간단히 변경해 화물선 같은 걸로 전용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못질을 최대한으로 쓰지 않고 결구하여 제작하면 견고함도 그만입니다.”
“호오. 두 가지 용도로 겸용 가능하다라. 근데 장부 이음으로 일일이 파트를 제작해 맞추려면 시간이 많이 걸리지 않습니까?”
“뭐 요새는 목공장비가 많이 좋아져서요. 예전에는 이런 배를 제작하려면 일곱 명 이상 달라붙어도 꼬박 6개월가량 시간이 걸렸습니다만, 요즘은 같은 크기의 어선도 2~3개월이면 만들 수 있습니다. 뭐, 그사이 노하우도 좀 생겼죠. 예를 들면 소금에 황토물을 들이면 좀과 부식에 강해져서 오래 사용할 수 있다든지 하는 말입니다.”
최명률의 얼굴에는 자부심이 가득했다. 해방 후 최명률은 일본인이 운영하던 조선소를 우선 불하받으면서 사업에 첫길에 발을 내디뎠지만 자리 잡기까지의 과정은 쉽지 않았다. 전쟁으로 인해 기술부사관으로 강제 징집당한 데다 전후 거제로 돌아와 보니 조선소 부지 전체가 잿더미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거액의 빚만 떠안고 죽을 위기에 몰린 최명률이었지만 다행히 해군에 몸담던 동안, 강선 수리법을 배우게 된 것이 전화위복이 되었다. 뒤늦게 공조덕트 공사 시 사용하는 리벳팅 공법과 선체 작업용 철판 TIG 용접이 널리 퍼지기 시작하며 강선을 만져 본 경험이 선박 수주에 큰 도움이 된 것이다.
“흐음. 그렇다면 본격적으로 신조선 건조로 뛰어드실 계획은 없습니까? 그럴 역량은 충분해 보이시는데.”
“하하. 글쎄요. 과연 역량이 될지. 이 목선 하나 수주하는 것도 무지 힘들었거든요. 원자재를 구할 길이 없어서 부산 등지를 돌며 목공소란 목공소는 다 다녀 보고, 인건비를 줄이려고 회사 회계장부까지 몇 번을 들여다봤는지. 매번 더 그러라고 하면 자신이 없군요. 사실 아직은 그만큼 수요가 있을지도 미지수 아니겠습니까? 어선 운영하는 선주 입장에서 일본이나 미국 쪽의 중고선 도입해 수리하는 것이 훨씬 경제적이니까요”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죠. 강판이나 철골 등 원자재는 저희 쪽에서 싸게 공급해 드릴 수 있습니다.”
“하하. 말씀은 감사하지만 형편 좋은 말씀이십니다. 일단 소형선박 정도야 웬만한 중소규모 조선소에서도 제작 가능하지만, 대형은 다릅니다. 작업 여건상 도크 문제도 있고 해서 우리 같은 소규모 조선소 입장에서 쉽지 않아요. 무엇보다 수주를 해도 은행 보증이 안 해 주니 그림의 떡이죠.”
“보증을 안 해 준다니 그건 또 무슨 소립니까?”
강태준을 따라온 광필이의 질문에 최명률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게 작년에 고성의 해남조선소에서 어업지도선 3척을 16억에 수주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는 돈 벌었다 다들 부러워했는데 이게 웬걸, 3척 중 고작 1척만 은행 보증(RG: 선수금환급보증)을 발급받았지 뭡니까.”
“네? 그럼 나머지 2척은요?”
“나머지 2척은 은행 측이 보증을 거부해 시작도 못 했죠. 그나마 1척도 수수료를 8%로 올려 줘서 겨우 보증을 받았는데 남은 예금에 조선소 땅까지 담보로 맡기는 불합리한 조건이었습니다. 그것도 6개월 동안 사정 끝에 겨우 발급받았답니다.”
그 말에 어이가 없어진 강태준이 되물었다.
“아니, 은행에 신규 대출을 해 달라는 것도 아니고, 사업 확정된 걸 보증만 해 달라는 건데 그것도 안 된다고요? 그럼 그 회사는 어떡하라는 겁니까?”
“뭐 어떡하긴 어떡합니까? 남은 두 척은 낙찰을 받고도 은행 보증을 받지 못해 최종 계약이 무산되었지요. 계약 무산 책임을 지고, 위약금 2억 원(계약금의 5%)까지 물게 생겼다던데 그래서 회사가 지금 부도 위기라 하더군요.”
“허, 그건 좀 너무하는군요.”
“어이가 없는 일이죠. 해남조선이면 한 해 매출이 10억이 넘었던 회사인데, 은행 보증(RG)을 받지 못해 선박 계약을 생으로 날려야 한다니 이건 불합리하지 않습니까?”
이쪽에서 이야기하는 선수금 환급 보증(RG : Refund Guarantee)은 조선 업체가 선박을 제때 건조하지 못하거나 파산했을 경우 선주로부터 받은 선수금을 은행이 대신 물어 주는 지급 보증을 말한다.
선주는 RG 발급 확인 후 대금 지급을 시작하고 조선 업체는 이 자금으로 원자재를 구매하는데 영세업체의 경우 RG를 발급받지 못하면 재룟값을 구할 방법이 없는 만큼 배 건조 자체가 곤란해지는 것이다. 그간 불만이 많았던지 최명률이 하소연했다.
“사실 한국의 조선소들은 규모는 영세하지만 배 만드는 기술은 상당한 곳이 많습니다. 특수선을 제외한 어지간한 선박은 이미 자체 제작할 능력이 있지만 문제는 자금 융통이 어렵다는 것이죠.”
“그 정도로 환급 보증받기가 어렵습니까?
“사실 저희도 작년 11월 국가가 발주하는 어업지도선 2척을 수주할 기회가 있었지만 해남 쪽 사태를 보고 눈물을 머금고 포기했죠. 받아 놓고 보증을 못 받으면, 말짱 황이니까요.”
못내 아쉬운 듯 말을 흐리는 최명률의 행동에 강태준으로서도 뭔가 위로할 말을 찾기 어려웠다.
“선박보증 발급이 그렇게까지 어려울지는 미처 몰랐습니다.”
“아휴, 태동같이 건실한 기업이야 전혀 문제없죠. 애초에 급이 다르니까요. 저희 같은 영세한 조선소들 입장에선 은행에서 RG(선수금환급보증)를 발급받지 못하면 수주를 취소하거나 포기하는 것 외에는 달리 방도가 없습니다.”
“중소형 조선소들이 받아야 할 RG 자금이 제대로 순환하지 않고 있군요. 대기업이 자금을 독식하는 거야 하루 이틀이 아니지만 이건 좀 아니라고 보이네요.”
“맞습니다. 대마불사라고. 부실 덩어리인 대형 조선소 쪽엔 수십억 세금을 마구 쏟아부으면서 좀 성장하려는 조선소는 규모가 작다는 이유만으로 나 몰라라 하다니. 솔직히 너무한 거 아닙니까?”
정부에서는 해운 산업 진흥이라는 명목하에 조선장려법을 제정하여 건조비의 40% 이내에서 보조금을 지급하고 융자는 50% 이상 가능하다고 선전했지만 예산 부족으로 실제 집행은 지지부진한 수준이었다.
RG를 빵빵하게 받는 대형 조선소들은 로비력에 있어 압도적이기에 해외에서 발주를 받을 만큼 역량 있는 경쟁자를 고사시키는 전략을 썼다.
그래서 이들은 해외발주를 받은 사업자가 수주계약을 따내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RG 자금을 틀어막아 자금줄을 틀어막은 뒤 경영난에 처한 회사를 헐값에 인수해 덩치를 불려 나갔던 것이다. 이렇게 파산한 조선소 직공들은 건설 일용직이나 조개잡이 일당직으로 내몰리면서 임금인상이 동결되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었다.
‘비열하긴 하지만 효과적인 방식이지.’
정경유착이 일반화된 사회. 이것이 바로 60년대 한국의 실상인가. 하긴 방법만 고도화되었을 따름이지 미래에도 이런 유착관계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씁쓸한 이야기였지만 반대로 생각해 본다면 강태준으로서는 어쩌면 기회라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RG만 발급받을 수 있다면 신규 선박 건설은 가능하다는 말씀이시죠?”
“뭐 자금회전만 제대로 된다면 몇 척이라도 만들 자신이 있습니다만, 하하 누가 그런 보증을 해 주겠습니까?”
“그렇다면 제가 한번 알아봐 드리지요. 사실 저희 회사에서도 조선소 일에 관심이 없지 않으니까요.”
“하하. 정말이십니까? 그렇게 해 주신다면 제가 절이라도 드리겠습니다.”
최명률과 이야기를 하는 사이 일행은 어선이 있는 곳까지 인도되었다. 마침 뭍으로 올린 배 위에서 잠수사가 따개비를 일일이 긁어내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그걸 본 최 사장이 혀를 쯧쯧 차며 타박했다.
“규석이 이 녀석, 왜 이리 꾸물대. 맡긴 지가 언제인데 하루 종일 밑 작업만 할 거냐?”
“아이구야 일단 도장을 다시 하려면 따개비부터 벗겨야 하는데, 이놈의 따개비가 얼마나 단단한지 칼로 용을 써도 잘 안 떼집니다.”
“아유 무식한 놈이. 임마, 따개비가 말랐으면 물이라고 뿌리고 해야지. 그걸 생짜로 뜯어내?”
“아이구야. 저도 할 건 합니다요. 그러잖아도 한석이 그 녀석이 바께스로 떠 온다 켔는데. 이 자식 대체 언제 오는 건지. 중간에 또 어디로 샜나?”
억울한 듯 변명하는 얼굴은 이미 땀투성이다. 안쓰러워진 강태준이 최 사장을 제지했다.
“자자, 날도 더운데 고생이 많습니다. 근데 원래 따개비는 잠수사가 떼지 않았습니까. 이렇게 뭍에서 제거작업을 하는 건 근래 처음 보네요.”
“그게 이번에 해무청에서 고시한 내용인데 이번에 항구 수질 오염을 이유로 항구에서 100톤 이하의 선박의 경우 다이버를 동원한 선박 청소를 전면 금지한다지 뭡니까.”
일반적인 조건하에 물이끼는 1~2%, 미역 같은 해조류는 10% 이상, 따개비나 홍합 같은 어패류는 무려 40프로 이상의 선속 저하를 가져온다. 그렇기 때문에 선박의 연료비와 수명을 고려해 선저 부착물인 조개류나 해양생물의 신진대사를 방해하는 방식 도료를 쓰지만 완벽한 대책은 되지 못했다.
결국 선체 검사 시 들러붙는 어패류를 손쉽게 제거하기 위해 다이버를 고용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 방법을 죄다 막아 버린 것이다.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그럼 대책이라도 있어야 할 거 아닙니까? 전형적인 탁상행정이군요.”
“진짜 너무하죠. 대형 선박은 가능하고 소형은 안 된다니 이게 무슨 말 같잖은 소리인지. 규제도 좋지만 현실과 맞아야 하는데 수리소 일정들이 죄다 뒤로 밀렸습니다요.”
“해무청 쪽에 클레임을 넣어 봤습니까?”
“네. 다른 조선소들도 합심해서 항의서를 넣었지만, 민원처리에 시간이 걸린다는군요. 당분간은 어쩔 수 없을 듯싶습니다.”
“흠…… 이거 골치네요.”
출항을 위해 선박 청소를 맡긴 강태준 입장에도 별로 달갑지 않은 일. 칼로 따개비를 제거하는 방법은 선박 코팅을 손상시키거나 혹시나 모를 파손을 초래해 선박 안전에 부담을 주기 때문. 거기에 닻을 내려 체인을 배열해서 세척하고 염분으로 부식된 페인트를 벗겨 내는 시간을 고려하면 시간이 더 지연될 확률이 높다.
잠시 고민하던 강태준이 문득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그렇다면 고압 세척기를 이용해 보는 건 어떻습니까?’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미국이나 일본에서는 고압 세척기를 이용하여 어선 바닥에 붙어 있는 따개비를 제거하더군요. 그러니 우리도 사용해 보는 건 어떻겠습니까?”
넓은 면적을 빠르고 말끔하게 작업하기 위해서는 고압 세척기만 한 것이 없지 않은가. 입항 시 선박에 붙어있는 따개비가 떨어지거나 평형수를 뺄 때 같이 나오는 바이오필름 제거에도 용이한 만큼 작업 시간을 단축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