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화 대광 조선소
공예품처럼 생긴 화과자는 감탄이 나올 만큼 화려하면서도 앙증맞게 생겼다. 강태준이 토끼 모양으로 세공된 화과자를 들여다보며 입맛을 다셨다.
“유하 씨가 좋아하겠네. 나 혼자 먹기 아까운데.”
“그 말 나올까 봐 추가로 몇 개 더 사 왔다. 걱정 말고 들어.”
“그래요? 그럼 사양 말고 어디 들어볼까요?”
귤 모양으로 된 녀석을 입안에 넣어 보니 팥의 달달함과 과일잼의 달큰한 향이 올라온다. 단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무난할 법한 맛에 강태준이 품평했다.
“맛있네요. 이거.”
“원효 그 자식은 벌써 구속되었다며? 먹는 거 아주 까다로운 놈인데, 구치소에서 밥이나 제대로 먹는지 모르겠구먼.”
“듣자 하니 기가 아직 팔팔한 게 잘 지내는 듯싶던데요. 사실 양 전무님 출국 날 저도 중정 쪽에서 불려갔는데 그거랑 관련 있는 거 같아요.”
“중정에서? 널 왜.”
“이사회 소집 전에 알아 둬야 게 있다면서 부르더라고요. 비자금이 들어갔다고 하던데, 경고 차원인 듯싶습니다.”
화과자를 오물거리던 양재문의 얼굴이 소태 씹은 양 변했다.
“중정 쪽에서 태동산업 지분을 갖고 있었다고?”
“지분이 얼마나 되는지는 모르죠. 차명으로 돌린 게 상당수니 그걸 다 일일이 파 볼 수도 없고.”
“그래서 얼마 정도 되는데.”
“대략 10프로 내외인 듯합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1, 2프로 정도 더 많겠죠.“
“거 골치 아프구먼, 심 사장 이 인간은 대체 무슨 배짱으로 자금 세탁원 노릇까지. 확실히 물린 돈이 있다면 개입의 여지는 충분하겠네.”
고개를 흔드는 양재문에 강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말인데. 심 사장…… 단순 사고사가 아닐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돈이 엮인 만큼 이 판을 누가 짠 것이라면 다른 의도가 개입했을지도 모른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말인데 일단 임시주총을 연기하는 건 어떨까요?”
그 말에 잠시 침묵하던 양재문이 대꾸했다.
“그건 절대 안 돼.”
“예? 하지만 지금 상황은 여러모로 오해받기 딱 좋은 상태입니다. 심원효도 그렇고 대부분 저희 쪽을 의심하고 있습니다.”
“이건 오히려 기회 아닌가. 일단 경영권을 확보하면 지들이 무슨 짓을 해도 소용없지 않나.”
“형님! 상대가 누군지 아직 확인되지 않은 상황에 섣부르게 말려드는 건 위험합니다. 노림수가 정확히 뭔지는 몰라도 결코 좋은 의도는 아닐 겁니다.”
“그러면 우리도 그걸 역이용하면 되지.”
“형님!”
그 말에 양재문이 되려 설득하듯 말했다.
“어차피 이판사판일세. 자네도 알지 않나. 심원효 그 녀석 절대 이 회사를 경영할 생각 따위 없다는 걸. 톡 까놓고 말해 위에서 정리까지 해 줬는데 받아먹지 못하면 그것도 바보 아닌가?”
“형님. 세상엔 공짜가 없습니다. 심원효 입장에서는 저희 쪽이 설계했다 의심할 수 없지 않습니까. 놈의 성정으로 보면 결코 그냥 물러서진 않을 겁니다.”
강태준의 걱정스러운 말에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한국에 지연도 없는 놈이 깜방에서 뭘 어떻게 하겠어. 아무리 해외에서 날고 기던 놈이라도 여긴 홍콩 놈들 나와바리가 아니라고.”
“이미 알고 계셨습니까?”
“나도 알아볼 대로 알아봤지. 아무리 밖에서 막 나가는 놈들이라도 여기는 한국이야. 게다가 주총 연기할 명분도 딱히 없잖은가…… 우리가 쫄 이유는 없어.”
횡령 문제도 그렇고, 이런 문제는 시간을 끌수록 결국 파산이다.
시간이 흐르면 회사가 개판이 될 확률이 높은 만큼 빨리 대표이사를 선임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양재문이 요지부동 움직이지 않자 강태준은 한숨을 쉬었다.
“휴우…… 할 수 없군요. 그럼 임시주총 때까진 당분간 몸 사리시고, 절대 혼자는 다니지 마십쇼…….”
“내 한 몸 건사 못할 놈은 아니니 걱정 마라. 나 아직 안 죽었어.”
“그러면 이거.”
강태준이 꺼낸 물건은 국방색에 튼튼해 보이는 조끼였다 여러 겹으로 겹쳐진 질긴 섬유로 된 조끼는 옆구리를 끈으로 조이게 되어 있고 두 개의 큰 주머니가 밴드가 앞쪽에 달려있다.
“묵직한데 이게 뭐냐? 평범한 옷이 아닌 거 같은데.”
“방탄조끼입니다. 6.25때 쓰던 M1951의 개량형이죠. 미군 통해서 입수한 물건인데 강화섬유로 특별히 제작한 물건이랍니다. 안쪽은 FRP로 만든 도론 플레이트를 넣어 방검력을 높였습니다.”
“너도 참 대단하다. 뭘 이런 것까지.”
“사람은 목숨줄이 두 개가 아닙니다. 그러니 조심하시라고요.”
양재문은 그거까지는 사양하지 않았다. 양재문이 떠난 자리를 보던 강태준에 오재갑이 슬그머니 말을 건넸다.
“주주들한테 이야기 돌려 봤습니다만, 며칠 연기하는 게 다더군요. 주총은 아무래도 예정대로 진행될 거 같습니다.”
“뭐 이왕 이렇게 된 거 최대한 우호 지분 포섭해 봐.”
그로부터 며칠 후, 모두가 잠든 깊은 야밤, 서울구치소에서 교도관이 방문을 문을 두드린다.
“38호 나와!”
“아 지금? 귀찮게…….”
자다 깬 듯 비척거리며 조사실로 향하는 심원효. 취조를 맡은 강영두 과장이 앉은 가운데 양복을 깨끗하게 빼입은 비서 하나가 앉아 있다.
그 모습에 반쯤 잠에서 깬 심원효가 성가신 어조로 투덜대었다.
“야밤에 무슨 일인가. 고문도 아니고 이거 인권침해야.”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시급을 다투는 문제라…….”
대낮의 취조 분위기와는 180도 다른 느낌에 동행한 비서가 막 서류를 건넸다.
“오, 조사 결과 벌써 나왔어?“
“말씀하신 대로 강태준과 관련된 건을 개인적인 것부터, 업무적인 부분까지 뭐 하나 빼놓지 않고 죄다 수집했습니다.”
(按照您的吩咐, 關於姜科長, 關於姜太俊, 從私人 到他業務上的 所有資料 個不漏的 全部给你 收集齊了.)
서류철 보던 그가 믿기 어렵다는 듯 중얼거렸다.
“이게 전부 사실이라고?”
“예. 아무래도 이 인간이 전략을 담당한 게 맞는 듯 보입니다.”
서류에 든 건 조사실에서 나란히 걸어 나오는 강태준과 주맹덕의 모습이 보이고.
다음 사진에는 텅 빈 포구에 나란히 앉은 양재문과 강태준이 여러 각도에서 찍혀 있었다.
“아무래도 양 전무 라인에서 제보한 게 확실한 듯합니다. 그래서 작전 들어간 거 같고요. 심 사장님 돌연사도 이쪽이 개입했을 여지가 큽니다.”
“그러면 그렇지. 씨부랄……!! 이 잡것들이, 감히 날 감히 놀려 먹어?”
제 성질에 못 이겨 서류를 와락 집어던지는 심원효. 분한 듯 연신 씨근덕거리는 심원효에 비서가 다급히 말했다.
“시간이 없습니다. 임시주총 일정이 벌써 잡혔습니다. 모레 오후 다섯 시. 아마도 양재문을 대표이사로 선임할 예정입니다.”
“뭐야? 그거 분명히 지연시키겠다고 했잖아?”
“그게 저희 쪽 이사들이 연락을 안 받아서…… 아무래도 눈치를 보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화가 머리끝까지 뻗친 심원효가 씨근덕대며 지껄였다.
“개같은. 내 돈 받아먹고 감히 수작을 부려? 이런 상도덕도 없는 새끼들이.”
“어떻게 합니까. 대표가 선임되면 다 끝입니다.”
숨을 고른 심원효가 다시 물었다.
“최변한테는 연락 없나? 보석은 아직도 불가능하데?”
“어떻게든 손을 써 보는 중이긴 한데 당분간은 어렵지 않을까 싶습니다. 보석으로 풀려난다 해도 후보로 입후보하는 건 이미. 좀 어렵지 않을까 합니다.”
코너에 몰린 심원효의 눈이 희번덕거렸다. 위에서 돕고 있다면 승산이 없는 노릇. 허탈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던 심원효가 제 꼴이 우스운지 갑자기 웃어 재꼈다.
“흐흐흐…… 하하하하하!”
심원효의 돌발 행동에 움찔하는 사람들. 잠시 후 웃음을 멈춘 심원효의 눈빛이 싸늘하게 변했다.
“아놔, 얌전히 해결 보려고 했더니 이거 꼭지 돌게 만드는구먼. 근데 X발. 나로서는 안 움직일 수 없네.”
“대장…… 그렇다면.”
“이렇게 두 눈 뜨고 다 뺏길 수는 없지 않나. 좋아…… 까짓거 내 칼춤 한번 춰 주지…… 춰 준다고. 당장, 애들 대기시켜. 연장 잘 쓰는 놈들로.”
여차하면 바로 쑤시고 들어간다.
희번덕거리는 눈깔에는 이미 이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 * *
다음 날, 거제시 끝자락에 위치한 대광조선소. 4만 3000㎡(1만 3000평)의 야드선박 건조작업장엔 20t이 안 되는 소형 어선 일곱 척이 보인다.
‘깡깡’ 하며 쇠 때리 소리가 힘차면서도 정겹게 느껴지는 곳, 160t급 예인선의 바닥 부분을 조립하는 작업이 한창이었다. 소형선의 경우 육지로 인양하여 선가(船架)(배를 땅 위로 끌어올리거나 끌어올려서 싣는 데 쓰는 설비)에서 수리하는 과정이었다.
조선소의 인부들이 녹을 닦아 내고 찌그러진 부분을 망치로 때려 펴는 작업이 동시에 진행되는 찰나, 갑작스런 방문객에 놀란 최명률 소장이 서둘러 인사를 올렸다.
“아니 강 선장님! 이런 누추한 곳까지는 어인 일로?”
“하하, 아닙니다. 간만에 바람도 쐴 겸, 작업 좀 구경하러 왔습니다.”
“아이구, 전 혹시 일정이 누락됐나 싶어서 가슴이 덜컥했습니다. 요새 기억이 깜빡깜빡하거든요. 나이가 들었는지 수첩에 안 적어 두면 머리가 영.”
“에이, 무슨 약한 말씀을…… 그보다 엄청 분주하군요.”
그러자 최명률이 겸연쩍은 얼굴로 머리를 긁으며 말했다.
“예. 예전보다는 확실히 경기가 좋아지긴 했지요. 요새 선박 수리 의뢰가 꽤 늘었습니다.”
뿌듯한 표정을 짓는 최명률의 말처럼 과연 줄줄이 놓인 철까치 위로 작업 전인 배들이 수북하다. 소위 깡깡이 아지매라고 불리는 아주머니들이 열심히 페인트칠을 하는 모습에 춘삼이가 신기한 듯 중얼거렸다.
“조선소는 금녀의 구역인 줄 알았더니, 이모님들도 생각보다 꽤 많군요.”
“하하. 도장이나 청소에는 필수적인 인력이죠. 힘쓰는 일은 좀 그렇지만 이런 부분은 여자가 끼워 줘야 합니다. 남자는 덩치가 커서 정화조나 탱크 청소를 하기 힘들거든요. 세심한 부분에는 아무래도 여자가 남자보다 낫지요. 이 조선소에도 30명 가운데 일고여덟 명은 여잡니다.”
노동력이 많이 필요한 파트는 대부분 남자들이 담당하지만 여공들의 지분도 무시할 수 없다. 특히 칠을 하고 남은 부분을 메꾸거나 도장 작업을 하기 전 필수적인 청소작업도 아지매들의 몫. 춘삼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고생스러우실 텐데. 대단하네요.”
“하하. 사실 돈이 많고 적고를 떠나서 이 일 자체가 고역스럽죠. 하루 종일 좁은 공간에서 매일같이 쓸고 닦고 그것도 못 할 짓 아니겠습니까. 그래도 박봉에 잔말 없이 일해 주니 고마운 거죠. 퇴근하고도 식구들의 저녁밥 챙기랴. 장 보랴. 독합니다요. 아주.”
“어머니라는 게 위대하군요.”
“네네. 그래서 인사권 정도는 제가 직접 챙기고 있습니다.”
쉬운 작업 어려운 작업 나누어 배치하는 것도 사실 민감한 문제라 가만 내비두면 문제가 생긴다고 했다. 반장들로서는 조져라. 죽어라 일을 막 정신없이 시켜 놓고, 사고가 나면 위아래로 조인트 까이기 일쑤.
강태준은 전생에 고생하셨던 어머니의 얼굴을 문득 떠올렸다. 어머니는 때때로 커다란 배 바닥까지 내려가 탱크 청소 작업을 하곤 했다.
맨홀처럼 습하고 통풍조차 안 되어 페인트 신나 냄새가 진동하는 공간. 눈이 맵고 정신이 몽롱해지는 장소에서 랜턴 하나에 의지하여 일하다 보면 때때로 정신을 잃거나 숨 막혀 쓰러지곤 했던 어머니.
파김치가 된 몸으로 돌아오면 밥을 짓고 시장에 나가 쉴 틈이 없더랬지. 그렇게 잠시 회상을 끝낸 강태준이 다시 물었다.
“그건 그렇고, 선박 괴임용으로 쓰는 반목은 무슨 재질입니까? 그거 굉장히 단단하던데.”
“필리핀에서 수입한 아피통이 주로 쓰입니다. 그게 수분 함량이 적어서 단단하고 잘 뭉그러지지 않거든요.”
“오, 그런가요? 혹시 저희도 따로 구할 수 있겠습니까?”
“뭐 그거야 쉽지요.”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조선소를 둘러보는 중 어디선가 치직 들려오는 불꽃 소리. 산소 접합기로 용접을 하는 가운데 다른 쪽에서는 용접한 이음면에 들러붙은 슬래그를 망치로 두드려 하나씩 떨어뜨리고 있다. 쉴 새 없이 망치를 두드리는 작업자들의 머리 위로 비 오듯 구슬땀이 쏟아졌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