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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양재벌 강태준-176화 (176/361)

176화 기브 앤 테이크

하지만 애초에 사업가가 곧이곧대로 말하는 걸 보았나. 강태준으로서는 굳이 편을 들 이유가 없었다.

“글쎄요. 홍콩에서는 꽤 인정받았던데요. 친화력도 나름 보통 이상은 되고, 일부 이사들 중엔 벌써 지지하는 놈들도 있고 말입니다. 의외로 잘 운영할지도 모르잖습니까?”

“허허. 그래도 사람이 격이 있어야지. 저번 장례식장에서 행패 부린 거 기억 안 나? 이 회사에 애정이 있는 놈이면 그따위로 애비 얼굴 팔릴 짓을 했겠나?”

“하긴. 뭐 짬으로 보나 실력으로 보나 우리 양 선장님보다 나은 분이 없지요.”

“그 말 무척 고맙군.”

강태준이 당연하다는 듯 잔을 기울였다.

“그보다 고작 그 말 하려고 이렇게 날 부른 게 아닐 텐데?”

“뭐 솔직히 말하겠네. 이번에 내가 대표이사가 된다 해도 나 혼자 모든 일을 다 할 수는 없지 않나. 그래서 자네가 부사장직을 맡아 주는 게 어떻겠나 해서 말이야.”

이미 여기 올 때부터 대충 예상했던 말이었지만 강태준은 짐짓 튕기듯이 말했다.

“그건 좀. 그렇네요. 저보고 러닝 메이트라도 하라는 겁니까?”

“시절이 하 뒤숭숭하니 태동에 좀 남아 달라 이거야. 그러니 독립은 몇 년만 유보하면 안 되겠나?”

“거 뭔 소리요. 갑자기 뜬금없이.”

강태준이 웃어넘기려고 했지만 양재문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뚫어지게 주시하는 눈빛에 강태준이 다시 표정을 고쳤다.

“그게, 티 났소?”

“내가 널 모르면 간첩이게. 니 멸치조업 한다고 수산업체 차린 거, 그거 독립 전 밑밥 깔기잖아. 게다가 듣자 하니 이번에 다이센 마루 쪽이랑 접선했다며? 이래도 오리발 내밀래?”

술잔을 입으로 가져간 강태준이 크으 소리를 냈다.

“대단하구만. 선배는 언제 거기까지 조사했나. 귀신도 못 속이겠구료.”

“임마, 니가 손절 타이밍 재는 거 대충은 눈치 깠지.”

“뭐 부정은 안 하겠소. 근데 사람이 모름지기 꿈을 꿔야 하지 않나? 냉정하게 말해서 태동산업은 내 회사도 아닌데 말리오. 심 사장도 죽은 마당에 의리 따질 이유도 없지요.”

“그러니 좀만 더 머물러 달라 이거야. 가뜩이나 회사 분위기가 흉흉한데, 너 같은 인재까지 술술 빠져나가면, 회사가 막 흔들리지 않겠나?”

술잔을 비운 강태준이 덤덤하게 지껄였다.

“그거야 운명이죠. 나 하나 없다고 망할 회사면 그냥 망하는 게 낫지 않나?”

“매정하긴.”

“나 원래 그런 놈인 거 몰랐나?”

“뭐 나도 정에만 호소하려는 건 아니다. 현실적으로 새로 회사 만들어서 굴리려면 시간도 오래 걸리고 힘들 거 아녀? 어업 면허 따는 것도 말이 쉽지. 견제가 어마어마할 텐데, 지금 시점에 위험을 감수할 이유는 없지 않나.”

“길고 짧은 거야 대 봐야 하는 거지요. 원래 사업이란 불확실성의 연속이지. 그게 인생의 묘미 아니겄소?”

“지랄은……잘 되니까 패기도 부리는 거지. 임마. 그렇게 허세 부리지 말고. 적당히 좀 해.”

피식- 웃고 마는 양재문이 찬찬히 그를 타일렀다.

“부사장 자리 줄 테니 경영 수업하면서 제대로 배워서 나가라고, 외국 상사 쪽이랑 거래도 터 봐야 알지. 어획물 판매랑 차관 도입이랑, 선박 도입하려면 걸리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닐 거 아냐?”

“허야, 우리 양 전무님께서 세상에 날 그렇게까지 생각해 주는 줄은 꿈에도 몰랐군.”

“뭐. 나라고 왜 독립 생각 안 해 봤겠나. 뭐 나도 솔직히 내 사업 키우고 싶은 욕심은 굴뚝같지. 하지만 내 그릇으로 감당하기에는 너무 위험해. 리스크 수준이 지금까지와는 규모가 다를 테니 말이야.”

말은 그럴듯했지만 강태준의 입장에서는 딱히 와닿는 말은 아니었다. 전생에 조직 생활의 명암이라 그런 건 신물 나게 경험해 보지 않았나. 잘 나가는 조직을 떠나 자기 사업을 하려는 것도 결국 그런 까닭.

‘하지만 전혀 틀린 이야기도 아니지 짧은 기간에 너무 성장해 버렸으니.’

지금이야 탐나는 젊은 선장이라는 메리트가 있지만 강태준이 직접 수산업체라는 키를 잡는다면 그 모든 장점은 위협 요소로 돌변하게 될 것이다. 충분한 경력과 능력을 갖춘 젊은 라이벌의 등장을 반가워할 사람이 없지 않나.

잠시 생각을 정리하던 강태준이 뭔가를 깨달은 듯 이내 미소를 지었다.

“오늘따라 혀가 길구만요. 천하의 양 선장님께서 왜 저자세로 나오시지? 설마 대표이사 선출 건 관련해서 뭔가 물밑 거래가 있었습니까? 예컨대 선장급과 재계약 조건 같은 걸 내세워서 우호주주들 설득한다거나?”

“뭐, 너 빼고 다들 동의했다. 니가 우리 회사 에이스잖냐.”

순순히 인정하는 양재문에 강태준이 어이없다는 듯 흥 소리를 냈다.

“허이구야, 이거 배신감 쩌네요. 이거 완전 봉이 김선달일세. 내가 계약 연장 안 해 주면 어쩌려고 그런 공수표를 받아 냈대?”

“임마 그래서 지금 말하잖냐. 잘 챙겨 줄게.”

“립서비스는 사양이요.”

“원하는 게 뭔가?”

강태준이 손가락을 동그랗게 말며 중얼거렸다.

“뭐 거두절미하고 쩐이지 뭐. 부사장으로 승진하면 연봉도 좀 올라야 마땅하지 않겠나?

“얼마 원하는데?”

“뭐 대충 지금의 세 배는 줘야 내가 좀 면이 서지 않을까?”

“아니, 이런 날강도 같은 놈이 있나? 세 배?”

“나같이 고급 인력 부려 먹으려면 그 정도는 감수해야지.”

“정말 그 돈 주면 남는 긴가?”

“뭐 성의를 보여 주면 생각은 해 보겠지. 나도 사업가니 계산기부터 두드려 봐야것소.”

양재문 선장이 잔을 들며 말했다.

“알았다. 알았어. 준다 줘. 그럼 내 없는 동안 주주들 동요하지 않게 잘 부탁한다. 반대파 놈들이 부재중이라 작당 모의하면 좀 많이들 귀찮아질 테니.”

“그게 걱정되면 본인이 남으면 되지. 벌써부터 업무 떠넘기긴 너무하잖소?”

“하아, 나 참 내 믿을 놈이 너밖에 더 있냐? 인마. 이왕 도와줄 거 선심 좀 써.”

간절한 눈빛에 강태준이 못 이기는 척 잔을 들었다.

“알았소. 대신 이 빚은 이자까지 받을 거요.”

“고럼. 야. 다들 잔 들고 건배하자고! 태동산업의 순항을 위하여!!”

“위하여!”

선창을 하며 시원하게 잔을 비우는 일행들. 장난스레 서로의 잔들을 채워 주는 얼굴들이 훈훈하기 짝이 없다. 양재문을 바라보는 강태준을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 * *

같은 시각 다시 부산 분실 사무소. 냉커피를 홀짝이고 있는 주맹덕이 새 차에 관심을 두는 중에 육동길 정보국장은 뭔가 파일을 훑어보고 있었다.

“차 새로 뽑았소? 삐까뻔쩍하네.”

“활동비 모아서 산 거야. 아, 자꾸 만지지 말라니깐? 잘못하면 코팅 벗겨져.”

“어차피 좀 타면 중고 될 거. 뭘 그렇게 비싸게 굽니까.”

조 국장이 뽑았다는 새 차에 주맹덕이 호기심이 들었는지 계속 차를 살핀다. 그러다 실수로 주머니에 찬 열쇠가 차에 긴 스크레치를 낸 주맹덕.

헉! 얼른 조 국장을 돌아보는 주맹덕. 침으로 벅벅 닦아 보지만 오히려 기스는 선명해질 뿐. 아직 사태를 눈치채지 못한 조 국장은 슬쩍 파일에 시선을 박고 있다.

다시금 조 국장을 돌아보는 주맹덕. 슬그머니 딴청을 피는 동안 조 국장이 다시 물었다.

“그래서 다른 계파 애들 동향은 어때?”

“어? 어, 걔들…… 아 걔들이야 다들 어디 붙을까 재느라 바쁘지요.”

내심 똥줄이 타는 주맹덕이었지만 둔감한 조 국장은 계속 서류에만 시선을 주고 있다. 그사이 끼룩거리며 날아가는 왜가리에 조 국장이 그걸 보며 걱정스러운 듯 담배를 꼬나문다.

“근데 괜찮겠냐. 양재문을 몰라도 그 자식까지 커트해 버리는 건. 김필중이 가만있을까.”

“그래서 깡패 새끼들 쓴다는 거 아입니까. 여차하면 뒤탈 없게.”

“암튼 컨트롤 잘하자. 일을 이만큼이나 벌여 놨는데, 까딱 어그러지기라도 하면 너나 나나…… X되는 거야.”

다 읽은 파일들을 드럼통 안에 넣어 불에 붙인다. 재가 되어 사라지는 불티에 조 국장이 박수를 쳤다.

“대본 좋다. 그럼 이렇게 진행하는 걸로 하고…… 바로 들어가지? 양재문이 오늘이 출국일이랬지? 그럼 지금부터 작전 개신가?”

“옙.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서둘러 사라지는 주맹덕의 모습에 조 국장이 흐뭇한 어조로 육동길에게 말했다.

“새끼 예전 같으면 어리버리 떨었을 텐데 요샌 빠릿해졌어. 그래도 짬이 늘었다는 건가?”

“그러게요. 활동비라도 늘려 줘야 하나.”

그가 호응하자, 내심 잘해 줄까 생각이 든다. 그러나 그런 생각도 잠시 차에 올라타려는 순간. 길게 스크레치가 난 모습에 정신이 대략 멍해진 조 국장.

잠시 후 얼굴이 울그락불그락해진다.

“주맹덕 이 개새끼가!!”

* * *

같은 시각, 양재문은 강태준과 나란히 김포공항 출국장 게이트 쪽으로 걸어오고 있다.

“증말…… 그만 좀 하라니까. 오는 내내 뭔 오바를…….”

“내가 미안해서 글지.”

“아 그렇게 미안하면 가질 말든가?”

강태준. 가벼운 한숨과 함께 슬쩍- 주위를 살피는데 어수선한 출국장 곳곳에 심상치 않은 기색의 사내들이 잠복 중인 것이 보인다.

마음 한편이 불편해지는 강태준이 멈칫했지만 이내 아무렇지도 않은 듯 표정을 바꾼다.

순간, 양재문이 의아해하자 강태준이 모르는 척 어깨를 턱- 잡는다.

“뭐?”

“선물 좋은 거 사 오십쇼…….”

“실없긴. 알았다 인마.”

가라는 손짓을 하는 강태준에 양재문이 선글라스를 쓰곤 씩- 웃어 보인다.

대기 타던 직원들이 출국 게이트로 들어서는 양재문을 향해 일제히 목례를 올리자 손 인사를 날리고는 안으로 사라진다.

출국 게이트로 양재문이 사라지자 잠시 후 중무장한 보안 요원들과 함께 다가온다, 심상치 않은 기색을 눈치챈 강태준이 다시 물었다.

“뭐요? 나한테 뭔 볼일이라도 있소?”

“당신이 강태준 선장?”

“그렇소만?”

“가 보면 아니까, 같이 어디 좀 갑시다.”

막무가내로 끌고 가려는 보안 요원에 춘삼이가 앞을 제지하고 나섰다.

“아니, 사람들 데려가려면 이유부터 고지해야지. 이유가 뭡니까?”

“씁…… 엔간하면 그냥 조용히 따라오지? 쓸데없이 처맞기 싫으면?”

여차하면 끌고라도 갈 기세의 보안 요원들이 인상을 썼지만 춘삼이는 물러서지 않았다.

흉흉한 모습에 강태준이 괜찮으니 가만있으라는 손짓을 해 보인다.

보안 요원들에게 둘러싸여 어디론가 끌려가는 강태준.

강태준은 사이좋게 공항 안쪽 사무실로 정중히 안내되었다.

강태준이 자리에 앉자 테이블 저편으로 한가로이 잡지를 뒤적이고 있는 주맹덕이 보였다. 그 모양에 어이가 없다는 듯, 쳐다보는 강태준이었다.

“아니 뭐요, 지금? 사람 초대해 놓고 이건 매너가 좀 아닌 것 같은데?”

그 말에 슥 하고 명함을 내미는 주맹덕.

명함을 살피는 강태준이 주맹덕을 위아래로 흘겨보고는 떨떠름한 얼굴로 말했다.

“대원출판? 나도 책 출판을 하는 몸이지만 댁이 출판사 직원하고는 영 거리가 멀어 보이는데?”

“뭐 나도 그렇게 생각하긴 하지만 일단 받은 게 그건데 어떡하나. 명목상 직함이니 따지지 말라고.”

“음. 그래. 그쪽이 대단하신 분들인 건 알겠는데 갑자기 이런 식으로 납치는 아닌 거 같은뎁쇼. 이게 무슨 시츄에이션이지?”

전혀 겁먹어 보이지 않는 태도가 유독 거슬리는지 읽고 있던 신문을 탁- 덮는 주맹덕.

여전히 편안한 태도의 강태준에 눈을 맞춘다.

“국가 안보와 연계된 사안이라. 자네도 대충 알아야 할 거 같아서.”

강태준이 택도 없다는 듯 콧소리를 냈다.

“이것 보게? 내가 그런 걸 왜 알아야 합니까. 나라 지키는 게 내 업무가 아닌데. 내가 무슨 공직자라도 된다는 말이요?”

“뭐 말로는 백날 해도 소용없을 테니. 자 봐.”

주맹덕이 앞쪽에 놓여 있던 파일 하나를 강태준 쪽으로 던지듯 쭉- 밀어준다.

자신의 앞으로 미끄러지는 파일을 탁- 잡는 강태준.

파일 맨 앞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게 심원효의 사진. 찬찬히 파일들을 넘겨 보는 강태준의 표정이 굳어진다.

-다음 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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