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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양재벌 강태준-175화 (175/361)

175화 경영권 분쟁

울컥. 가까스로 화를 참은 김정욱이 다시 힘주어 말했다.

“그래도 못 해요. 사람 목숨 가지고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심장 쫄려서 더는 못하겠습니다.”

“새끼. 왜 그렇게 새가슴이냐. 뭐 양심이 찔리느니 뭐 그런 거야? 언제는 시키는 대로 잘하더만. 여기서 주연배우가 하차하면 어쩌라는겨?”

“대본이 말이 되어야 몰입을 하지 않습니까? 이제 대역을 구하든지 맘대로 하십시오. 전 이 일에서 손 떼겠습니다.”

잠시 그를 올려다본 주맹덕이 심드렁한 어조로 대꾸했다.

“그래. 그럼 하지 마.”

“정말입니까?”

“안 하겠다는 놈 억지로 시킬 수야 없지 않나. 나도 그렇게 경우 없는 사람은 아니야. 근데 솔직히 심원효 그놈한테는 알 권리가 있지 않나? 무려 심 사장 아들인데 말이야?”

그 말에 밝아지려고 했던 김정욱의 낯빛이 다시 창백해졌다.

“뭐라는 겁니까? 그게.”

“듣자 하니 그놈 생각보다 다혈질이라매? 쭝꿔 놈들이랑 어울리면서 머리도 굵어졌을 텐데. 지 사촌 형이란 새끼가 계모랑 붙어먹다 아비 대가리 깨진 거 걸 알면, 대체 어떻게 나올려나?”

하얗게 변했던 김정욱의 표정이 일그러지더니 이내 붉은색으로 변했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합니까?”

“우들이 좀 조사해 봤는데, 원효 그놈아가 생각보다 파이팅이 있더라고. 지 아비랑 다르게 노빠꾸 기질도 있고 말이야. 거기서 질 안 좋은 친구들이랑 어울린 모양이더라.”

마치 기다렸다는 듯 주맹덕이 불쑥 서류봉투 하나를 건넸다.

서류에 들어 있는 것은 사진 몇 장.

심원효가 얼굴에 칼집이 난 녀석과 대화를 나누는 장면에 김정욱의 눈이 커졌다.

“연장 잘 쓰게 생긴 친구지? 듣자 하니 발골 전문가로 유명하더구먼. 심원효 그노마 성깔 있던데. 사건의 진상을 알게 되면 어떻게 움직일 거 같아?”

“이런 개새끼가……! 니들이 죽였잖아. 난 안 죽였어!”

숨이 가빠진 김정욱의 볼이 푸들거린다. 금방이라도 한 대 칠 것만 같은 기세의 김정욱. 그러나 주맹덕은 여전히 여유로움을 잃지 않았다.

“어이쿠야 뭣 하면 한 대 치겠다? 아이고 무서워라!”

“시키는 대로 했잖아. 니들이 죽여 놓고 나보고 뭐 어쩌라고?”

“그래서 넌 아무 책임이 없다고? 그쪽까지 유도한 건 니 책임 아닌가? 법정 가면 너도 살인 방조죄야 인마.”

이를 악문 채, 멱살을 틀어쥐는 김정욱의 손길. 그러자 싸늘해진 주맹덕이 낮게 경고했다.

“존말할테 이거 놔라. 손모가지 부러진다.”

흔들림 없는 눈에 허탈한 듯, 옆 의자에 털썩- 주저앉는 김정욱.

얼굴을 감싸 안은 그가 이내 체념한 기색으로 물었다.

“나보고 대체 어쩌라는 거요?”

“좋은 쪽으로 생각해라. 이미 우린 한배를 탄 셈이야. 길어야 몇 주면 끝나는데 그걸 더 못 해? 주총 마치고, 인수, 인계받을 때까지만 참아. 넌 그냥 오더대로만 행동하면 돼.”

김정욱이 이를 악물며 담배를 물었다.

“그래서, 지금 나보고 바지사장하면서 회사 조지는 꼴 보라 이겁니까?”

“사건 터졌으니 마무리는 지어야지. 회사 정리하고 나면 니 몫도 짭짤할 테니 너무 서운해하지 말라고. 그다음에는 니 좋아하는 젊은 숙모랑 짝짜꿍하든 살림을 차리든 맘대로 해. 신경 안 쓸 테니까.”

“염병, 그 말을 나보고 믿으라는 거요?”

“안 믿으면 어쩔 건데? 여기서 선택지가 있다고 보나?”

같잖다는 듯, 코웃음을 치는 주맹덕에 말문이 막힌 김정욱이 으득 이를 갈았다.

“이번이 마지막입니다. 더는 이용할 생각 마십쇼.”

더 듣고 싶지 않다는 듯 일어서는 그의 행동에 주맹덕이 봉투 하나를 건네주었다.

“뭡니까. 이게.”

“보약이야. 요새 밤일이 시원찮다며. 벌써부터 그러면 쓰나.”

얼굴이 울그락붉으락해진 것이 실로 볼만한 광경. 간신히 화를 누른 김정욱이 들고 있던 쇼핑백을 물 위에 신경질적으로 확- 던져 버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밖으로 나갔다.

문을 쾅 하고 닫는 모습에 혀를 끌끌 차는 주맹덕의 귀에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어우야, 너무 자극하셨는데요. 지부장님. 저 시키 눈빛으로 사람도 죽이겠습니다. 저놈.”

“그럴 리가. 쓰레기 주제에 겁은 많아가지고는.”

뒤를 밟듯 그림자에서 나타난 요원이 낚시터 옆에 털썩 걸터앉았다.

“속 좁은 자입니다. 수틀리면 무슨 깽판을 칠지 모르니 당분간은 살살 달래서 쓰시는 게.”

“모르는 소리. 저런 병신은 위에 개길 깜냥도 없어.”

“그래도.”

“일단 아쉬운 대로 쓸 때까진 쓰다 버려야지. 실전에 투입할 작전팀은 준비 끝났나?”

“예. 일부는 포섭했고 나머진…… 설득 중에 있습니다.”

“어떻게든 꼬드기게. 나중에 탈 없을라면 고기 방패가 필요하니까.”

“옙.”

주맹덕은 담배를 들고 불을 붙였다. 부산지부를 총괄하는 지부장급이 결코 낮은 직위는 아니지만 이렇게 큰 프로젝트를 총괄할 기회는 좀처럼 주어지지 않는다.

사실 현재 중정을 둘러싼 암투는 몹시도 치열했다. 증권파동으로 나가리 되었던 김필중이 세를 회복하면서 호시탐탐 부장 복귀를 노리고 있는 상황. 현 중정부장인 남형욱이 자리를 보전하려면 새로운 자금줄을 마련하는 수밖에 없다.

즉 주맹덕이 실적을 올린다는 건 김필중 파벌과 척을 지는 선택이라는 것. 위험부담이 없지는 않지만. 이번 일만 잘 처리하면 무조건 패밀리에 들어가는 거니. 쾌속 승진이 기다리고 있다.

‘반역도 성공하면 혁명이고, 실패하면 역적이지.’

줄을 타려면 확실하게 타야 하지 않을까. 아무리 김필중이 이인자라지만 현직 프리미엄은 무시 못 한다. 뇌를 파고드는 니코틴이 아드레날린 분비를 활성화시키자 옅은 쾌감이 세포를 자극했다. 저릿하기 그지없는 감각에 일렁이는 눈동자는 옅은 흥분으로 번뜩이고 있었다.

* * *

태동산업 이사회 회의실.

심회장 유고 직후 처음으로 모인 자리. 회의용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양재문과 심원효가 마주 앉아 있다. 일선 실무진들이 착석하자. 사회를 맡은 김정욱. 잠시 양재문과 심원효를 번갈아 쳐다보곤 슬쩍 입을 열었다.

“다들 모였으니 본론으로 들어가지요. 일단 사장직이 공석인 만큼 경영상 공백을 막기 위해 이번 달 내로 임시주총을 개최할까 합니다.”

“벌써 대표이사를 선임하자고?”

“원래가 어떤 조직이든 간에 오야붕 자리가 비면 힘을 못 쓰는 법 아니겠습니까? 사람으로 치면 대가리가 비어 버린 거랑 마찬가지죠.”

까칠한 얼굴을 한 심원효가 탐탁잖은 어조로 물었다.

“흠. 장례가 끝난 지 얼마가 되지 않았는데, 이렇게 서두를 필요가 있소?”

“심익태 사장님께서 벌여 놓은 일이 워낙 많아서. 성락원 투자 건과 페리 운항사업 등 조속히 처리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사업을 계속 추진하려면 예산을 집행해야 하니, 빨리 대표부터 세울 필요가 있지요.”

“그 부분은 김 이사 말이 맞네. 우리가 이래 손 놓고 있으면 슬슬 허파 디비진 새끼들이 도전해 오지 않겠습니까. 그라면 이 바닥 또 시끄러워져.”

한 수 거드는 양재문의 말에 다들 동의하는 분위기에 자리에 참석한 이사 하나가 말을 덧댄다.

“그럼 뭐 더 끌 거 없이 임시주총서 대표이사와 새로 등기이사를 선임하는 것으로 하는 건 어떻겠습니까?”

“뭐 공백을 오래 끌어서 좋을 일이 없겠지. 다들 동의하는가? 어떤가 태준이? 자네 생각은?”

양재문의 말에 동의한 강태준도 고개를 끄덕였다.

“뭐…… 저도 여러 선배님들과 같은 생각입니다. 애초에 그룹 대표 자릴 오래 비워 둬서 좋을 거 없겠지요.”

“저도 찬성입니다.”

이견이 별로 없어 보이자 김정욱이 이사들을 둘러본다.

“그래. 그럼 다들 동의한 걸로 알고, 다음 주 임시주총서 후임 대표이사를 선출하고, 등기 이사를 선임하는 것으로 정리하겠습니다.”

동의하는 듯 고개를 끄덕여 대는 이사들.

그러자 심원효가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거 대충 얘기들 끝나셨음 난 좀 일어나겠습니다. 제가 공사가 보통 다망한 게 아니라.”

“왜? 그냥 갈라고? 그러지 말고 간만에 임원진들 모시고 밥이나 같이 묵지?”

“거 됐습니다. 솔직히 우리가 낯짝 맞대고 정답게 밥 먹을 사이는 아니잖습니까?”

“에헤…… 싸가지. 뭔 말을 그러고 험하게 허냐?”

그 말에 힐끔 김정욱을 살펴보던 심원효가 무뚝뚝하게 답했다.

“저는 되었으니 친한 사람들끼리 친분 나누십쇼. 그럼 바빠서…… 이만.”

“어이, 그럼 같이 감세.”

심원효가 자리를 피하자 뒤따라 빠져나가는 사람들. 주차장으로 나온 양재문이 강태준과 나란히 걸어가며 말을 이었다.

“심원효 저놈의 싸가지 시키가. 위아래도 없구먼 저거.”

“아무래도 지 뜻대로 안된다고 성질내는 거겠죠. 국내에서 세를 규합할 시간이 없을 테니.”

“그래도 하 어수선했는데 빨리 진행돼서 다행이군. 그래서 내 우리 강 선장한테 좀 미안한 부탁을 해야 쓸 것 같은데…….”

“그게 뭡니까?”

“딴 게 아니고…… 모레쯤 해서 일본 좀 다녀오려고. 중고선 도입 검토차 협상 중이었는데 갑자기 사고가 터지는 바람에 마무릴 못 짓고 왔거든.”

“시기가 좀 거시기한데 대표이사 선출 후에 가는 게 어떻습니까? 시기가 좋지 않습니까.”

“며칠이면 돼. 금방 다녀올라니까. 그러니, 강선장에게 비밀리 부탁하는 게 아닌가, 심원효 그 자슥이 뭔 사고를 칠지 모르니까, 다른 애들 귀엔 안 들어가게 허고…… 그보다 우리 오랜만인데 점심 식사나 함 할까?”

“식사는 무슨. 점심 아직 멀었습니다.”

“그러지 말고. 먹고 가지. 내 어제 급 귀국해서 출출하구먼. 오늘은 내가 쏠게.”

어린애처럼 보채는 양재문이 끌고 간 곳은 소공동 뒤편 골목의 허름한 감자탕집이었다. 착석 후 익숙하게 주문을 시키는 양재문에 강태준이 한숨을 쉬었다.

“아따, 또 뼈해장국입니까. 맨날 좋은 거 먹는다더니.”

“인마. 음식 투정하지 말고. 이 정도면 진수성찬이지. 이게 술 먹고 속 푸는 데는 직빵이여. 자 어이 잔말 말고 들어.”

수저까지 챙겨 주며 강권하는 통에 하는 수 없이 국물을 뜨는 강태준. 다행히도 국물 맛은 꽤나 괜찮았다.

“그래도. 맛은 있네요. 최씨 아지매가 요리실력 하나는 끝내준다니까……”

“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허구헌 날 여깁니까. 양전무님, 담에는 좀 격식 차려서 먹읍시다.”

“거 까칠하긴, 근디 얼굴이 왜 그러나?”

“그냥 좀 요사이 피곤하네. 요새 잠을 설쳤더니 영.”

“그럴 일이 없는데 굳이. 설마 유하 씨랑?”

음흉한 얼굴로 변한 양재문이었지만 강태준은 손사래를 치며 부인했다.

“택도 없죠. 그쪽 집안이 얼마나 보수적인데. 혼인 전에 건드렸다간 경을 치고도 남습니다.”

“흐흐. 알았다. 그런 걸로 하자. 근데 큰일 앞두고 골골대면 쓰냐? 안 되겠다. 보약이라도 한 재 달여 먹여야지. 잘난 얼굴 더 상하면 국가적으로 손해가 막심하지 않겠나. 우리 동생 얼굴 하나는 국보급인데 말이여.”

“하하. 형님도 참. 말씀은 그렇게 하면서 낮술 권하는 건 무슨 심봅니까. 게다가 출장이 코앞이라면서요.

“이 정도는 그냥 물이지. 그냥 크으…… 이 맛이야.”

벌건 대낮에 낮술이라니.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 강태준이 핀잔을 주었다…….

“참, 형님도 작작 드시구려. 간도 안 좋다는 인간이 하루가 멀다고 술을 퍼마셔서 그래서 오래 살겠나?”

“인간은 원래 다 죽을 운명이야. 끽해야 백 년이지 무슨 천년만년 살겠나. 갈 때 가더라도. 어떻게 잘 사는 게 중요하지 않겠나?”

“개똥철학 죽이시네. 그 말 형수한테도 해 보지요?”

그 말에 웃음기를 지운 양재문이 진지하게 말했다.

“뭐 거두절미하고 본론으로 가자고 임시주총 열리면 나 지지해 주겠나?”

“흠. 형님이 경영권에 야심이 있는지는 몰랐는데?”

“그것보다, 태동산업의 장래를 심원효 그 자식에게 맡기긴 못 미더워서.”

“왜요?”

“심원효 그 자식 심익태 사장 장남이긴 해도 사장 달기엔 너무 어리지 않나. 무역회사에서 트레이드는 해 봤다지만 원양어업에 문외한인데 말이야.”

“그건 그렇지만, 장남의 지분도 무시 못 하잖습니까? 일단은 제 1상속인이니 말입니다.”

“지금이 무슨 조선시댄가. 사업체를 대대로 세습하게. 심원효 그노마가 대표이사가 되면 태동산업은 풍비박산 날 걸세. 근마는 자기 주머니만 생각하지 기업운영에 관심도 없으니 말이야.”

은근히 흉을 보는 것이 꽤나 감정이 실려 있었지만 강태준도 공감하는 부분이었다.

-다음 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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