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화 설계자들
소위 말해 합법적으로 처리하기 힘든 일을 처리하기 위한 부서. 목적은 꽤나 거창했지만 정치라는 격랑의 소용돌이에 표류하면서 CIA처럼 독자적인 자금을 가진 첩보조직을 만든다는 구상은 처음부터 삐걱거렸다.
100079실 역시 마찬가지. 창립 초창기엔 어떻게든 떼를 써서 아지트까지 확보했지만 막상 건물을 받아 놓고 보니 그다음이 문제였던 것이다. 그렇게 허송세월하길 무려 3년. 그간 마음에 맺힌 것이 많은 주맹덕이 조 국장을 흘겨보며 비아냥거렸다.
“뭐 자업자득 아니겠습니까. 누가 돈 대신 아지트 달라고 떼쓰지만 않았어도. 활동비 모자랄 일은 없었을 텐데 말입니다.”
“그러게 누구한테 낚이지만 않았어도. 3년간 이런 화장실도 없는 곳에서 근무하진 않았을 텐데 말이여.”
같이 맞장구를 치는 육동길에 궁지에 몰린 조 국장. 양쪽에서 몰려드는 비난에 내심 민망해진 조 국장이 슬쩍 헛기침을 했다.
“크흠. 뭘 옛날 일을 되짚어서 무슨 소용이 있나. 이제 준비 끝난 거 같은데 슬슬 브리핑 시작할까?”
“옙.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슬라이드 영사기가 돌아가자 어둠 속, 스크린에 심익태의 얼굴이 나타난다. 태동산업 출범식에서 커팅식을 하는 심 사장. 환하게 웃는 모습과 함께 지평호에 탄 채로 견시를 하고 있는 장면이 나타났다.
“뭐 다 아시겠지만, 이 사람이 바로 심익태 사장입니다. 원양어선 업계의 거두이자 태동산업의 사주 겸 대주주죠. 보름 전 성락원에서 확인차 갔다가 실족사로 사망했습니다.”
슬라이드를 다시 돌리자, 머리가 깨진 채 처참하게 널브러진 모습이 나타나고,
그로테스크한 화면에 욕설을 하며 고개를 돌리는 조 국장. 옆에 있던 육동길 역시 처참한 모습에 신음을 토했다.
“거 위액이 올라오는 거 같군. 속이 안 좋아.”
“어후, 대가리가 심하게 깨졌구먼. 근데 이 자식 디진 걸로 뭘 하겠다고?”
“그게, 심익태가 불의의 사태로 죽어 버리면서 태동그룹 후계자 자리가 공석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태동산업 후계자 결정에 개입할까 합니다.”
“후계자 결정에 개입한다? 뭐 태동에 우리 입맛에 맞는 바지사장을 세우겠다는 뭐 이런 얘기인가?”
“예. 대충 비슷합니다.”
“어떻게?”
“뭐 여러 가지죠. 일단 일차적으로는 임시주총을 노려 우리 측 인사를 대표이사에 선임하는 게 우선이죠. 경영권을 확보하면 그 뒤에 유상증자로 실적 부풀리기 해서 털어먹거나 아니면 배당으로 뽑아 먹는달까? 단계별로 계획을 짜 두었습니다…….”
“흠. 쉽지 않아 보이는데, 태동산업이라는 기업이 그렇게 무리를 하면서 확보할 가치가 있나?”
“예. 태동산업은 국내 최초로 원양어선 사업에 성공한 아주 건실한 기업입니다…… 현재는 150톤급 이상 4척, 100톤급 3척 등 총 7척 배를 보유하고 있고. 이를 바탕으로 최근 리조트 사업부터 홍콩 쪽과 연계해 대규모 납품 계약을 따낸 상황이죠.”
주맹덕이 손짓하자 영사기가 돌아간다. 연도에 따라 가파르게 우상향하는 수익 그래프에 조 국장이 경탄했다.
“확실히 회사 전망이 좋기는 하구만. 이렇게 표로 보니 성장 속도가 장난 없군.”
“예. 사실 규모로만 따지면 발해나 대흥 같은 후발주자들이 더 크지만, 수익률은 태동의 절반도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결국 사업의 승패는 설비와 전문성에 달린 법. 태동은 누구보다 우수하고 경험 넘치는 선장들을 다수 보유하고 있고, 실적까지 받쳐 주는 알짜 회사죠. 회사의 펀더멘탈도 견실합니다. 유보금을 포함하면 순 자산만 거의 200억 원에 달하는 수준이니까요.”
“200억? 그게 참말인가?”
“성락원 땅이랑 양재 쪽에 투자한 금액을 고려하면 그것도 소극적으로 본 수치입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차후의 성장 가능성입니다. 투자가 주춤한 작년에도 원양 어업 분야에서는 일 년에 50%씩 이상씩 성장해 그룹 전체 성장을 견인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매해 100만 불 이상 순이익이 발생한다는 것이죠.”
“호오. 그 정도로 건실한 기업이라니 미처 몰랐군.”
“그래서 제가 제안을 올리는 게 아니겠습니까? 심 사장의 협조를 얻어 자연스럽게 지분을 확보하려는 계획은 어그러졌습니다만, 아직 기회는 있습니다. 임직원이 1,700여 명에 네 개의 계열사까지 거느린 국내 수산업계의 일인자를 이 단계에서 그냥 포기하는 건 너무 아깝지 않습니까?”
육동길을 주시하며 슬슬 도와 달라는 눈빛을 보내는 주맹덕. 그러나 육동길이 망설이며 펜대를 돌리는 사이, 침묵을 깬 조 국장이 다시 물었다.
“그런 대어를 노리는 놈들이 한둘이 아니겠지. 그럼 후보 선수들은?”
“그건 여기 있습니다.”
슬라이드 사진이 크게 확대되며, 선장 모자를 쓴 채 배를 운항하고 있는 장면이 보이고 일본식 선술집에서 담뱃대에 불을 붙이는 모습이 클로즈업된다.
“가장 유력한 타자는 양재문으로 현재 태동산업 전무이사로 태동그룹 창립 멤버죠. 한국수산대 1기 출신으로 원양어선 선장으로 경력자입니다. 원양어선과 관계된 선박 쪽 네고와 유통 분야를 전적으로 관장하고 있습니다. 실질적으로 원양어업 전반을 지휘하는 것은 이 사람입니다. 특히 미일을 상대로 한 영업부서를 총괄하면서 스타키스트 쪽과의 거래를 전담하고 있습니다.”
갓 잡은 고기를 들고 환히 웃고 있는 모습을 찬찬히 살펴보는 조 국장. 근육질의 몸에 팔뚝에 불거져 나온 핏줄에서 나이답지 않은 활력이 느껴졌다.
“나이에 맞지 않게. 몸이 좋군. 체구가 단단한 게 한 따까리 하게 생겼어.”
“네. 지평호 선장으로 원양어업에 가장 먼저 뛰어든 베테랑이지요. 회사 내에서는 짬도 높고, 주요 사업을 맡고 있다 보니 지지율이 상당합니다. 보유 지분은 10프로 이내지만 영향력은 그 이상이라는 평입니다. 애초에 심 사장이 스카웃할 때 지분을 받고 합류했습니다.”
“대단한데?”
“공식 서열로는 세 번째지만 해무청이나 발이 아주 넓어 우호세력이 많고 강태준이나 오재갑 등 선단장급 인사들과 호형호제하는 사이죠. 사실 항해사나 기관사 같은 간부들은 양재문이 데려온 인사들이 대부분인 데다 한국수산대 선후배들이 주력이라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습니다.”
“그려. 그럼 다음 유력후보자는 누군가?”
영사기를 움직이자, 스크린에 누군가의 얼굴이 크게 투영된다. 한 젊은 청년이 안경을 쓴 채 증권사 책상에서 손님과 대담 중인 모습이 시야에 잡혔다. 외모를 유심히 보던 육동길이 입을 열었다.
“흠. 애송이로군. 근데 심 사장과 묘하게 닮았는데?”
“맞습니다. 심익태의 장남인 심원효입니다. 현재 태동산업 무역 부문 홍콩 지사장으로 활동 중이죠. 태동 입사 전에는 홍콩 쪽에 상사에 다녔는데 최종 직함은 이사급이었다고 합니다…….”
“아직 30줄도 안 된 것 같은데, 경영 수업인가? 역시 있는 집 자식은 부럽구먼.”
“뭐, 사장 아들이다 보니 일각에서는 능력을 폄하하는 부분도 있지만 나름 사업수완이 있다는 평이 다수입니다. 다만 무역상사 쪽에 다니면서 조금 위험한 친구들과 친해진 것 같긴 하지만요.”
“위험한 친구들?”
다음 스크린에 펼쳐진 것은 시커먼 거한들의 모임이었다. 화려한 샹들리에 장식 아래 결혼식 파티가 진행되는 중 주인공인 심원효 앞에 160여 명의 축하객이 둘러앉아 환담을 나누고 있다.
좌석 중간에 홍콩 무술영화 소속 조연배우의 얼굴도 보이는 가운데 건장한 몸의 남자들이 둘러앉아 있다. 사진들을 크게 확대하자 짙은 용 그림이 셔츠 뒤로 비춰 보인다.
“허, 이거 봐라. 보통 깡패놈들이 아닌데?”
“예. 심원효가 다니던 무역상사는 무역 일도 하지만 일종의 증권시장 브로커 역할도 겸하고 있었던 곳이더군요. 저희가 알아본 바로는 삼합회 계파인 14K 산하 조직에서 불법 자금 세탁을 담당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저 녀석은?”
“아무래도 삼합회랑 연계가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최소 간부급과 모종의 커넥션이 있지 않을까 사료됩니다. 아마 최근까지 교류를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게 확실한 정보인가?’
“심원효의 마누라도 화교 출신인데 아무래도 그쪽 고위 간부의 서녀 같습니다. 덕분에 꽌시가 중요한 홍콩 시장에서 두각을 나타낼 수 있었던 거고요.”
그 말에 조 국장이 의아한 듯 물었다.
“거참. 나름 한 가닥 하는 놈이란 건 알겠지만 좀 이상하군. 심 사장의 장남이라면 회사를 물려받을 위치 아닌가. 그런데 굳이 이렇게 무리수를 둘 이유가 있나?”
“그게 아버지인 심익태랑 후처 문제로 사이가 틀어졌답니다. 십여 년 전 심익태가 재혼할 때 엄청나게 반대했더랍니다. 그래서 홍콩으로 내쫓기다시피 강제 유학을 떠났고, 본사로 들어오지 못한 채 계속 외지에서 돌고 있던 거지요. 그래서 심익태랑은 임종 직전까지 계속 서먹서먹했다는군요.”
“흠. 집안싸움이라 좀 시시한 이야기군. 그래서 심원효 이 자식이 양재문 다음으로 후임 대표이사에 가장 유력하게 근접해 있다는 소린가?”
“예. 원래 짬으로 보면 한참 밀리지만 아들이란 프리미엄이 있지 않습니까. 아무래도 상속지분을 감안하면 가능성이 크지요. 물론 그 외에도 조카인 김정욱이가 있습니다만, 어디까지나 명목상이라서. 일단 친인척인 관계로 소량 지분을 갖고 있기는 하지만, 적통이 있다 보니 존재감이 희미한 수준이죠.”
스크린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고민에 잠기는 조 국장이 다시 물었다.
“경영권 확보라. 그래서 둘 중에 누굴 밀려는 건데?”
“김정욱입니다.”
그 말에 육동길이 어이없다는 듯이 물었다.
“응, 제삼자? 그놈은 존재감이 희미하다고 하지 않았나?”
“양재문이랑 심원효는 아시다시피 이미 친위세력을 가진 녀석들입니다. 아쉬운 게 없는 놈들이니 그닥 호락호락하게 저희에게 협조할 놈들이 아니지요. 게다가 김정욱이 그놈은 저희가 약점을 쥐고 있기도 합니다.”
“흐음…….”
계속해서 말이 없던 조 국장이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고개를 들었다.
“야, 너 자신 있냐? 만약 잘못되면 피바람 분다…….”
“어차피 버림패로 쓸 새끼들 재활용하는 건데요 뭘. 문제 되면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쯧, 니가 어떻게 책임져. 어디 짜바라도 아니고. 혹 잘못되면 니 목 건사할 수 있을 거 같아?”
“문제 되면 제 선에서 반드시 커트 치겠습니다. 한 번만 믿어 주십시오.”
망설이는 표정의 조 국장에 육동길도 한마디 덧붙였다.
“밑져야 본전인데요. 함 해 봐서 나쁠 거 없잖습니까?”
뭐가 문제냐는 듯 어깨를 으쓱이는 육동길 잠시 망설이던 조 국장이 이내 한숨을 쉬고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케이, 그럼 어디 맘대로들 해 봐. 대신, 단…… 난 모르는 일이다?”
“예, 당연히 그러셔야지요.”
“그럼 준비 잘해라. 이건 윗선에 보고할 테니.”
조 국장이 사라진 자리. 주맹덕이 육동길에 고개를 숙였다.
“고맙습니다. 선배.”
“너무 무리수 둔 거 아냐? 알지 조 국장 저 새끼 좀생인 거. 일 잘못되면 너만 피박 쓴다.”
“네. 하지만 불알 두 쪽밖에 없는 놈이 출세하려면 어쩌겠습니까. 이 정도 위험은 감수해야죠.”
“그래. 너도 사람인데 욕심이 나겠지. 근데 이 작전 이름이 뭐냐? 작전명 정도는 있을 거 아닌가?”
궁금해하는 육동길의 말에 주맹덕이 자신 있게 말했다.
“참수 작전입니다.”
* * *
같은 시각 광복동 부일 기원 앞,
건물 앞에 차를 세워 둔 채, 담배를 피우며 대국을 즐기는 사람들.
접수대 앞 벤치에 껄렁한 자세로 나란히들 앉아 있는 덩치들이 보인다.
뭔가 마음에 안 드는지 연신 한쪽을 노려보는 중인데 벤치 한쪽에서 한쪽 끝에 다리를 꼬고 앉아 누군가가 신문을 보고 있다.
탁- 신문을 넘기는 손길과 신문 너머로 얼핏 보이는 얼굴…….
반상을 내려다보고 있는 강태준이 손안의 돌을 굴리며 정성택과 마주 보고 앉았다. 대국은 벌써 중반을 넘어선 듯 반상 위에 빼곡히 늘어선 바둑돌들.
판세를 읽던 강태준이 성가시다는 듯 머리를 재차 쓸어 넘겼다.
“이런 좌변 대마가 거의 잡혔군요. 이거 답이 없는데?”
강태준이 머리를 흔들자 백돌을 쥔 정성택이 놀리듯이 이죽거렸다.
“뭘 그렇게 약한 소릴…… 한 번 삭감해 보던지.”
재차 포위망을 만들어 반격해 보지만 전혀 허점이 보이지 않는 대국.
뜸 들임이 길어지자 정성택이 약을 올렸다.
“에구 강 사장, 기력이 많이 줄었구만. 임마 뭐 하고 싸돌아 다니노? 대가리 완전 빠가 됐네.”
“컨디션이 안 좋아서 그렇죠. 요새 생각할 게 많아서.”
“왜 심 사장 일 때문에? 신경 꺼. 어차피 니 탓도 아닌데.”
“뭐, 옆에 사람이 죽어 나갔는데, 영 찜찜해서 말입니다.”
돌을 두던 정성택이 마치 달관한 어조로 말했다.
“그렇게 따지면 한도 끝도 없어. 사업하는 사람이 적이 한둘인가?”
“그렇긴 하지요. 하지만 만약 타살이라면…… 그만한 목적이 있을 거고. 그러면 직·간접적으로든 연관이 될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돌을 놓을 곳을 찾는 강태준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표정이 묘한 기색이었다.
“또 그런다. 왜 제대로 파 보려고? 이번 사건에 뭔가 꿍꿍이가 있다는 말인가?”
“만약 이번 일이 우연이 아니고 누군가 의도적으로 설계한 행동이라면 저로서는 대비를 안 해 둘 수야 없지 않겠습니까?”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