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화 농사의 과학
“아직 연구 단계라더니 생각보다 따뜻합니다.”
“온실 효과가 괜찮더군. 바람이 새는 부분은 군수용 텐트 갑파를 덧댔더니 방열 효과가 올라가더이다. 한겨울에 반팔을 입어도 될 정도야.”
너스레를 떠는 최목수의 말대로 2인치 파이프로 된 서까래용 밴딩은 미군에서 나온 건설폐기물을 재활용하였다고 했다. 기둥 구조를 재차 확인한 강태준이 중얼거렸다.
“기둥 설치를 잘하긴 했는데 이 대나무는 뭡니까?”
“그게 파이프 확보량이 부족해서 대나무로 지지력을 보강했어. 클램프는 천 영감님께 부탁했지. 모양은 좀 투박하긴 해도 튼튼하게 잘 나왔더군…….”
“잘했네요. 일단 안전이 최우선입니다. 근데 패드 대용으로 가마니를 올리는가 보군요.”
“네. 그냥 패드보다는 일단 이게 싸게 먹히더라고.”
“차광망까지 전부 피복하는 거요?”
“예. 그렇습니다.”
작업 중이던 곳을 살펴본 강태준이 뭔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저거 피복을 한 다음에 가마니를 붙이는 것보다는 가마니부터 먼저 올리는 게 나아 보이는데요?”
“응? 순서를 바꾸라고?”
“데. 차광망 위에 가마니를 씌우는 것보다는 반대순서가 낫지 않습니까? 나중에 낡은 차광망만 교체하고 뜯어내면 패드도 갈 필요 없이 사철로 피복 작업만 해 주면 될 거 같은데. 작업이 좀 번거롭겠지만 말이야.”
“아, 생각도 못했군. 그렇게 하면 안쪽의 보온재도 재활용할 수 있을 거 같네요. 이런 바보같이.”
최달건이 스스로 머리를 쥐어박는 반성하는 동안 같이 온 일행은 구경에 여념이 없었다. 강태준의 입장에서는 농활 봉사 때마다 흔히 광경이었지만 60년대 당시에는 겨울에 오이와 참외를 키우는 것만으로도 신기해 보였던 것이다.
“대단한데요. 이거. 겨울에도 신선한 채소를 먹을 수 있다니.”
“대단할 게 뭐 있나. 500년 전에도 하던걸.”
“500년 전이요?”
“그래. 창순루라고 해서 구들 위에 집을 지었거든. 삼면에 벽을 쌓고 기름종이를 발라 안을 데우고, 습도 조절을 위해 물을 주기적으로 뿌리거나 가마솥과 온실 안을 연결하는 관으로 수증기를 공급하기도 했지. 세조 때 어의인 전순의가 쓴 산가요록에 나오는 내용이야.”
지금 그 책이 발견되었던가? 청계천 헌책방에서 발견되었던 걸로 아는데…… 아마 반쯤 훼손돼서 아까워했더랬지. 혹시 발견이라도 하면 엄청난 일이 될 텐데, 강태준이 머리를 굴리던 그때 그 말에 춘삼이가 중얼거렸다.
“우와 신기하네요. 독일의 유리 온실이 처음인 줄 알았더니 그게 사실이면 우리가 서양보다 수백 년은 앞선 게 아닙니까?”
“그러니까 지금 온실로 생채를 기르는 게 특이할 것은 없지. 그보다 우리 우 박사님께서는 어디 계시는지?”
“어비로 생육 비교 시험테스트 중일세. 3월까지는 대량납품에 필요한 토질 조건을 맞춰야 한다더군.”
“아, 양배추 납품 건 때문에 말이군요.”
“그려 주한미군 쪽에서 말하길 정기 납품권을 유지하려면 토양 상태가 무척 중요하다 강조하더군. 중금속 함량부터 PH, 염도까지 기준이 겁나 까다롭다니까…… 코쟁이 놈들. 대충 넘어갈 법도 한데 적당히란 게 없어.
춘삼이가 슬쩍 물었다.
“그 조건이 많이 까다롭습니까?”
“뭐 세부적인 것은 잘 모르겠지만 최소 기존에 일본 쪽에서 수입하던 채소와 같은 품질로 맞춰야 한다고는 하더라고.”
“일본과 같은 조건이라 쉽지 않겠네요.”
강태준이 웃으며 대꾸했다.
“뭐 생각하기에 따라 다르지. 아무리 좋은 품질이라도 채소나 야채는 선도가 생명인데, 현지에서 갓 생산한 제품과는 비비기 힘들지 배나 비행기로 날아온 물건보다는 훨씬 신선하게 먹지 않겠나. 그 점 때문에 미군도 납품을 허락한 거지.”
“아 그런가요?”
“뭐. 그쪽이 까다로운 건 사실이지만 오히려 역으로 생각할 수도 있어. 까다로운 조건을 만족시킨다는 건. 다시 말해 우리가 생산하는 채소가 양질이라는 증명이나 다름없으니 말이야. 기생충 알이 득실대는 퇴비로 키운 채소랑 철저하게 품질이 검증된 채소 중에서 뭘 선호하겠나? 경쟁력 면에서 다르지.”
“에휴. 강 사장. 역시 말로는 못 이긴다니까?”
“이거 방해가…… 그럼 전 빨리 가 보지요. 뒷마무리까지 수고 부탁드립니다.”
“오키. 맡겨 두시라고.”
팔을 걷어붙이는 최달건을 뒤로하고 강태준은 맨 끝에 있는 비닐하우스 안으로 향했다. 구역별로 나누어진 오이밭에는 오이가 주렁주렁 맺혀 있었고 저 끝에서 장화에 밀짚모자를 쓴 중년 남자가 물비료를 뿌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우순해 박사님!”
“아, 오셨습니까. 사장님? 그리고 그 박사라는 호칭은 부담스럽군요.”
순박해 보이는 외양에 생활 근육으로 다져진 몸뚱어리가 건장해 보인다. 늠치물과 함께 톳처럼 생긴 무언가를 뿌리는 모습에 강태준이 관심을 보였다.
“박사님을 박사라고 하지 뭐라 합니까. 그보다 지금 시비 중이셨군요. 이건 처음 보는 비료네요.”
“아 듬북을 삭혀서 만든 비료인데 미네랄이 풍부해서 이렇게 종종 보조로 쓰고 있습니다.”
“듬북요?”
“하하. 제주도에서 나는 해조류인데 마침 많이들 가져온 게 있어서요. 수거 후, 4~5일 말려서 이렇게 하얗게 소금이 피면 그때 거름으로 쓴답니다.”
꽃처럼 서리가 진 것이 꽤 신기하게 생겼다. 춘삼이가 꺼림칙한 얼굴로 물었다.
“소금이 핀 물건이라. 굉장히 짤 거 같은데, 식물 생장에 장애가 되지는 않습니까?”
“작물마다 내염도가 다르기는 하지만 엷게 희석하면 안전하지요. 잎이나 뿌리가 약할 때는 사용을 권장하지 않고 가급적 생육 중기 이후에 사용합니다. 물론 단독으로 질소를 공급해 주려면 더 자주 살포를 해 주셔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긴 하지만요.”
염류 농도를 더 높일 경우엔 꼭 시험 살포를 해 본 후 농도를 높여서 사용한다고 한다. 과연 그런 노력의 영향일까 주렁주렁 열린 백다다기들은 하나같이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확실히 시비를 잘해서 그런지 다들 튼실하군요.”
“작년 7월 말에 심었으니 이제 수확이 곧 머지않았습니다. 오이는 과실 성장이 빠르고 생장효과를 확인하기 쉬워서 비료의 효과를 확인하기 쉽지요.”
벌써부터 성과라. 강태준으로서는 구미가 당기는 소리였다.
“액비가 화학비료랑 유의미한 차이가 있습니까?”
“화학비료와 천연 액비를 비교군을 나눠 실험해 봤지요. 일단 액비를 100배 희석하여 식재 2주 후부터 오이 수확 종료 시점까지 일주일 3회씩 매회 10리터(L)씩 뿌렸지요. 그래서 통계를 내보니 결과는 엇비슷합디다. 과실수는 두 평당 화학 비료구가 17개 정도. 액비 처리구가 16개 정도 나오더군요.“
“화학비료를 쓴 것이 근소하게 위이긴 하군요.”
“하하. 꼭 그렇게 만도 볼 수 없죠. 사람이나 오이나 다 개별 차가 있지 않습니까. 아무리 비등한 조건을 갖추려고 해도 차이가 없을 수는 없으니 실질은 비슷한 거죠. 오히려 액비 공급만으로 화학비료와 비슷하게 생육할 수 있다는 게 고무적이지 않습니까?”
우순해는 액비를 발효시키는 과정을 보여 준다며 창고로 안내했다. 창고 안으로 들어가니 코끝을 찌르는 비린내와 함께 썩은 내가 물씬 풍겼다.
코끝이 어질해지는 악취에 춘삼이를 비롯한 사람들은 곧바로 코를 틀어막았다.
드럼통을 열자 거의 형체가 보이지 않게 변한 액비가 있었다.
반쯤 액체화되어 흉물스러워 보이는 모습에 헛구역질을 하는 사람들이었지만 강태준은 아무렇지도 않게 물건을 살폈다.
“꽤 잘 삭았군요. 얼마나 된 겁니까?”
“대략 2개월쯤 된 물건입니다.”
“2개월 만에 이 정도까지 발효시켰다고요?”
깜짝 놀란 강태준의 말에 우순해가 대답했다.
“생선을 푹 뭉그러질 때까지 끓인 다음에 갈아서 발효시켰거든요. 생선을 통째로 담글 때보다 속도가 빨라지긴 합니다…….”
“액젓 담그는 방법이랑 별 차이는 없네요.”
“하하. 실상 대동소이합니다. 음식물로 사용하는 액젓이 액비에 비해 더 신선하고 고급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다른 농가에서는 액비나 퇴비 제조에는 살짝 맛이 가거나 유통기한이 지난 액젓을 사용하고 있는 경우도 많지요.”
그러나 진한 냄새에 복만이가 코를 잡고 인상을 썼다.
“근데 이 냄새는 도저히 안 되겠습니까? 속이 느글거리는군요.”
“그러게요. 이거 엄청 독한데요. 이거 수르스트뢰밍도 한 수 접어 줄 거 같은데…….”
고양이조차 얼씬하지 않을 만큼 강렬한 악취에 어쩔 줄 몰라 하는 사람들. 온몸으로 악취 고통을 호소하는 모습에 우순해가 멋쩍게 웃었다.
“하하, 죄송합니다. 저희도 악취 땜시 좀 고민이 많습니다. 액비 유통기한이 짧은 데다 중간에 변질되는 경우가 많아 골머리를 썩이고 있지요.”
“그렇다면 소금양을 늘리면 되지 않습니까?”
“물론 시도는 해 봤죠. 염분을 더 첨가하는 방법으로는 별로 효용은 없었습니다. 그러면 EC(염류농도)가 높아져서 식물이 수분을 흡수하지 못하더군요.”
염류 농도가 턱없이 낮으면 식물에 필요한 양분이 부족하고 너무 많으면 뿌리가 양분을 흡수하지 못한다는 게 그의 설명이었다.
“흠…… 숯가루라도 좀 섞으면 나을 거 같은데요.”
“이미 하고 있지요. 사실 냄새보다 더 큰 문제는 부패입니다. 지금은 날이 추우니 이만하지만, 날씨가 더운 여름에는 산패속도가 너무 빨라서 생물 비중이 60% 이상이 되어야 하는데 삭는 속도가 빠르다 보니 아깝게 버리는 양이 많습니다.”
냉동고를 설치하는 방법을 떠올려 봤지만, 그건 너무 비용이 나가 수지에 맞지 않는다. 강태준이 다시 물었다.
“그거참 골치네요. 대안이 없습니까?”
“설탕이라도 추가하면 좀 달라질 거 같긴 합니다, 설탕이란 게 PH를 낮추는 데 직빵이니까요. 다만 비용이 비용이다 보니…… 생각만 그치고 있지요.”
어색하게 눈치를 보는 행동에 잠시 고민에 잠긴 강태준. 설탕을 비료에 투여하는 것은 불가능한 방법은 아니지만 가성비를 생각하면 배보다 배꼽이 큰 셈. 한참 머리를 굴리던 강태준에게 문득 좋은 생각이 스쳤다.
“설탕을 쓰는 건 좀 비용상 어려울 거 같고, 당밀을 첨가하는 건 어떻습니까?“
“당밀요?”
“뭐 미생물 발효 시에 당밀을 많이 사용하지 않습니까. 당밀은 발효를 촉진하고 발효 시 발생되는 냄새를 줄여 주는 역할을 한다더군요.”
“흠, 애초에 성질이 비슷하니,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것 같습니다.”
“어분에 건조효모를 넣고, 당밀을 첨가해 봅시다. 근처 민간요법으로 냄새 제거에 천매암이 효과가 있다고 하니 그것도 넣어 보지요.”
밑져야 본전이니 시도해서 나쁠 것이 없지 않은가. 실험에 들어간 지 며칠 후 표정이 밝아진 노기철이 보고를 올렸다.
“사장님, 연구결과 확실히 악취가 현저하게 개선이 되었습니다. 페하(PH)와 미생물 함량이 현저히 줄어들었더군요.”
“부패도도 감소해서 꽤나 개선되었습니다. 확실하게 악취가 많이 감소되어 보관도 더 용이할 거 같습니다.”
발효 미생물의 탄소원으로 사용되는 당밀이 정말로 악취 감소에 효과가 있었던 것이다. 천매암 분말을 첨가하자 9할 이상 냄새가 감소했다고 했다. 강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효과가 있어서 다행이군요. 우 박사님. 그럼 액비는 하루에 어느 정도 생산이 가능합니까?
“음. 지금은 시범단계지만 재료만 있으면 하루에 몇백 톤도 만들 수 있습니다. 다만 화학비료를 전량 액비로 대체할 수는 없어요. 액비 연구가 아직 끝나지 않았고 토양에 특정 양분이 과잉 공급되는 단점도 있어서 아직은 주의가 필요합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되도록 서늘한 곳에 보관 창고를 따로 짓는 게 좋을 거 같군요.”
냉동고는 어렵더라도 일단은 액비가 빨리 부패하지 않도록 온도를 조절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겠는가. 강태준은 곧바로 철거반원들을 불러, 작업에 들어갔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