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화 풍향 계측기
“통영도 아니고 둔덕면 일대?”
“예. 본래 산달도 일대로 갈음하려는 걸 그쪽으로 틀었답니다.”
거리도 거리지만 땅값만 비교해도 무려 서너 배 이상 차이가 나는 만큼, 별로 좋은 딜은 아니었던 것이다. 뒤늦게 사무실에서 자초지종을 전해 들은 복만이가 분노를 금치 못했다.
“아니, 지금 장난하나? 그래도 대충 단가가 맞아야지 무슨 똥땅을 줘?”
“신현면 고현리에 있는 포로수용소 쪽 땅은 전부 군용으로 활용할 예정이라. 차후 반환 계획이 없다는군요. 그거라도 받든지 아니면 다음 차수에 넘기고 몇 년 더 기다리라고 합디다.”
“아니, 힘 좀 써 달라 있는 돈 없는 돈 지원해 주었더니 이건 뭐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아무리 설유하 씨 오빠라 해도 이건 좀 선 넘는 거 아닙니까?”
사실 대토를 기대했던 것은 강태준만이 아니었다. 징발토지 보상으로 대토가 나오면 저번 MSG 일부터의 공을 감안해 필지별로 나눠 줄 것을 공언했던 만큼 공신들의 실망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던 것. 강태준이 쓴웃음을 지으며 뿔난 복만이를 달랬다.
“자자. 급발진하지 말고. 설인모 중령님께서 설마 우리 사정을 모르고 그리 처리했겠나. 중령님께서도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신 게지. 일단은 전부는 아니라도 일부라도 돌려받는 게 중요하지. 그리고 문제 될 게 또 있나?”
“그리고 추가로 문제 될 게 있습니다.”
“뭔데?”
“중동 발전 쪽에서 이쪽 일대로 풍향 계측기를 설치한다는 이야기가 들리고 있더군요.”
“풍향 계측기는 또 왜?”
“근래 근해 침몰 사고가 잦지 않습니까? 구조물에 주는 파랑의 영향은 해역마다 달라서 데이터 측정용으로 필요하다고 하던데, 정부 쪽 협조를 얻었나 꽤 설치에 적극적이라더군요.”
강태준이 떨떠름한 얼굴로 이마를 찌푸렸다.
“그거 뭔가 악의적이군. 갑자기 풍향 계측기를 왜?”
“잘 모르겠습니다. 사고를 막으려면 파고나 조류, 유속과 관련해 정확한 데이터가 필수적이라는데 의도가 좀 불순해 보여서 말이지요.”
“뭔가 앞뒤가 안 맞는데? 풍향 계측기라는 건 보통 대규모 플랜트 건설 시에 대형건축 구조물이나, 연돌 설치 전 단계에 설치하는 게 아닌가?”
“예. 그래서 소형 해상 풍력 개발사업을 추진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환경영향평가 및 경제성 평가용으로 발전사업허가 신청 시 계측기를 통해 1년 이상의 풍향 자원 측정자료를 확보해야 하니까 말이지요.”
“사실이라면…… 심각한 문제군.”
갑자기 심각해진 분위기. 혼자 분위기 파악을 못 한 복만이가 의아한 어조로 물었다.
“그게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발전소가 설치되면 좋은 거 아닌가요? 지역 경기에도 좋고, 땅값도 오를 테고. 전기 공급도 원활해질 테고”
“좋기는 임마. 발전소 설치라는 게 그렇게 단순한 건 줄 아나? 풍력발전소를 설치하면 이쪽 어장은 다 망한 것이나 다름없어”
“아니 왜요?”
“임마, 입장 바꿔 생각해 봐. 풍력발전기를 설치하면 이쪽 일대가 전부 회전날개 돌아가는 소리로 맨날 윙윙 시끄러울 텐데 그걸 참고 배기겠냐?”
“전 참을 만하던데요.”
“그건 니가 둔감해서 그리고 임마. 물고기는 인간보다 음파에 훨씬 민감하다고. 인간으로 치면 옆집에서 매일 고성방가를 질러 대는 꼴이지.”
어장 한가운데 고정식 기상탑 형태의 구조물을 설치하게 되면 풍력발전기로 인한 소음이 발생하는데, 이런 발전기는 감속기 등 기계소음과 바람을 가르는 공력 소음이 주를 이룬다.
특히 저주파의 영향권으로 인해 어류의 생태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어장이 형성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는 소리. 그 말에 김요한이 조심스럽게 대꾸했다.
“흠. 그건 섣부른 판단 아니겠습니까. 풍향 계측기를 설치하려면 최소 기백 만 원은 족히 깨칠 텐데. 이런 도서 지역에 투자하기엔 별로 수지맞는 사업이 아니지 않습니까? 게다가 풍력발전은 바다에 자켓 등의 기초구조물을 설치한 후 기상탑을 올려야 하기 때문에 육상풍력 대비 고비용일 텐데요.”
나름 근거 있는 추론이었지만 강태준이 고개를 저었다.
“사업의 주체가 꼭 민간이라는 법은 없지 않나. 물론 해상 풍력발전의 경우 계측기를 먼저 설치한 사업자에게 해당 지역에 대한 개발 우선권이 주어지는 만큼 지역 선점 목적일 가능성도 있어. 하지만 일단 사업 대상지로 선정되면 실제 사업 집행까지는 시간문제야.”
“수익성이 없다 해도 말입니까?”
“정책 집행은 수익성 외에 다른 요소도 중요하지. 표심 확보나 국가 균형 발전이라는 측면을 고려할 경우 지역개발 선전용으로 쓸 만하지 않나. 솔직히 정치자금 조달용 사업인지도 의심스러워.”
“아, 그렇군요. 그렇게 따지면 초기 투자를 제외하면 비용이야 큰 문제가 되지 않을 수도 있겠네요. 정작 어떤 규모로 할지는 정해지지 않았으니 말입니다.”
“그래. 실제로 어떻게 사업을 구체화할 건지는 아직 확정된 게 아니니까. 다만 문제는 이게 우리 쪽에 날린 견제구인지 진짜 실현 가능한 사업인지는 제대로 알아봐야 할 거 같아. 뒷배 없이 그 정도 규모 있는 사업을 벌일 수는 없으니까.”
“진짜로 그렇다면 어디서부터 파야 할까요?”
“마침 여당에서 거제 지역 전략 공천 내정자가 있다고 하니, 아무래도 이번 사업 진행이 총선 일정과 연관이 있지 않을까 싶군. 그게 사실이라면 준비를 해야겠지.”
“직접 만나 보시려고요?”
“상대가 원한다면 반응해 주는 게 도리 아니겠나? 가능하면 만날 자리를 만들어 보자고.”
김요한이 걱정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사장님이 그렇게 빠지시면 이제 어로장 일은 누가 합니까?”
“그거야 요한이 자네가 해야지. 내일부터 정식으로 인수인계 받아.”
“네? 차도윤 선장님이 아니라, 제가 말입니까?”
자기보다 한참은 고참들이 줄줄이 대기 중인 마당에 자기가 방향키를 잡다니.
화들짝 놀란 김요한의 반응에 강태준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뭘 그렇게 놀래? 둘 다 승진한 지 얼마 안 되었으니 니가 해야지. 어군 회유 경로나 이곳 지형은 대충 숙지한 거로 아는데.”
“그렇지만 제가 그 자리를 차지하는 건. 좀 그런데요. 선배분들도 아직 정정하신데.”
“우리 회사는 실적주의야. 실적이 우선이지 나이가 밥 먹여 주나. 사실 어군 탐지기 하나 제대로 볼 수 있는 사람도 아직 자네밖에 없지 않나. 게다가 처음부터 잘하리라고는 기대하지 않네. 시행착오를 해도 상관없네. 대신 많이 못 잡으면 적게 가져가면 되지.”
“그게 더 부담되는 말씀입니다만.”
“큰 권리에는 큰 책임이 따르는 법이지. 어차피 거쳐 갈 일 아닌가. 나중을 위해서라도 실전 감각을 익혀 두는 편이 나을 거야.”
사실 멸치조업은 연근어업 가운데 가장 까다로운 축에 속한다. 참치연승을 하던 김요한에게 이 일을 시키는 것은 참치조업의 방향이 연승에서 트롤어법으로 변화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
향후 연승에서 트롤어법으로의 기술 변화는 돌이킬 수 없는 흐름인 만큼. 앞으로를 위해서라도 이 감각을 익혀 두는 편이 절대적으로 나았다.
물론 처음에는 경력자인 차도윤이나 김재덕 선장에게 시키려고 했던 마음이 없지는 않았지만, 중간에 몇 번 허탕을 치는 꼴을 보니 완전히 마음이 돌아선 것이다.
‘뭐 일단 서툴기는 해도 받아들이는 게 빠른 이쪽이 더 발전 가능성이 크겠지. 이참에 술 먹고 딴짓하는 버릇도 고치면 일석이조고.’
낙후된 조업 방식에 습관이 굳어 버린 선장들을 따로 조련하는 것보다 차라리 약간 모자란 신입을 키워 쓰는 게 낫다는 것이 강태준의 생각,
어로장이 되면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질 테니 딴짓할 시간도 없을 것이고 말이다.
‘암튼 이번 건수는 백 프로 떠보는 거 같은데.”
아무튼 이번 낚시가 강태준의 관심을 끄는 거라면 확실히 성공이다. 뒷배가 누군지 몰라도 이런 제스처를 보낸다는 것은 어쩌면 만나 보고 싶다는 신호 아니겠나. 과연 얼마 지나지 않아, 강태준의 뒷배가 밝혀지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넙치 형님께 사람을 보내서 확인했습니다. 발전소 건립을 주도하고 있는 사람은 공민당 소속 통영군 지구 당협 위원장인 장성량이라고 합니다.”
“장성량? 어디서 들어 본 사람인데?”
“전국 경제인 연합회 이사라네요. 통영군 명진리에서 태어나 일본 주오대학 법학과를 졸업한 재원이라는데 이 지역에서 꽤 오랫동안 사회활동을 해 왔더군요.”
춘삼이의 말에 강태준이 기억을 더듬었다.
“아! 기억나는군. 출항식에서인가 예전에 이억수 그 양반을 볼 때 한번 명단에서 봤던 거 같아.”
“네네. 약력을 보니 조선 금융 조합 연합회 이사, 수출공단 사장 등을 역임했고, 전국 경제인 연합회 임원으로 근무하다 이번에 마산 창원 아닌 통영 지역구로 배정받았답니다.”
“전형적인 정치인 루트군. 그럼 이번에 통영군 인근에 개발사업을 추진하는 연유는?”
“아무래도 지역개발과 일자리 창출이라는 명목으로 정치자금 확보하려는 목적이 큰 거 같습니다.“
“그럼, 일단 자리 주선해 봐.”
당에서 직접 자금을 만들라고 명이 떨어진 건가? 장성량의 대략적인 인간관계에 대해 숙지한 후, 강태준이 미팅을 청했다.
과연 그쪽에서도 기다리고 있었던 듯 바로 연락이 왔다.
약속 장소는 구조라 항구 근처의 허름한 멸치회 전문식당이었다. 태준이 도착하자 서글서글하니 사람 좋은 눈매를 한 장성량이 호들갑을 떨며 먼저 악수를 청했다.
“이거, 이거 명성이 자자하신 강 사장을 뵙게 돼서 영광일세.”
“저야말로 미리 찾아뵙지 못해서 송구합니다. 이번에 새로 공천받으신다 들었습니다. 이제 뱃지 달 일만 남았군요.”
“하하. 이제 시작인데 민망스럽구만. 그보다 경남지역 경제인 연합회 쪽에는 왜 얼굴을 안 비추나. 자네를 보고 싶은 사람들이 많은데 말이야.”
“하하. 저 같은 신출이 가 봐야 가방 모찌 노릇밖에 더합니까. 저 외에도 쟁쟁하신 지역경제인들이 많은데, 풋내나는 신출이 나서면 모양새가 좋지 않지요.”
“허허, 이 동네서 자네를 우습게 보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대구 하면 오성, 통영 하면 백경 아닌가.”
“무슨 말씀을. 누가 들으면 오해하겠습니다. 천하의 오성과 비교 대상이라니. 아직 그 정도는 아니죠.”
“하하. 이 사람 겸손하기는. 어찌 되었든 천하의 돈병구 콧대를 뭉갠 건 자네가 처음 아닌가. 그것만으로도 세계기록감일세.”
서로 덕담을 나누며 강태준은 곁눈질로 주도면밀하게 훑었다. 풍채 좋은 아저씨처럼 보이지만 장성량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지금은 별 볼 일 없어 보일지 모르지만. 앞으로 경남지역 맹주가 될 인물.
차후 국회 농림위원장을 역임하며 거제 지역에서만 4번에 걸쳐 당선된 장성량은 그야말로 3공화국 전성기 때는 실세 중의 실세로 군림했던 거물. 비록 박정명 사후 정치활동 규제에 막혀 활동에 제한을 받긴 하지만 이후에도 지역 유지로서 발휘한 영향력은 상당했다.
“그럼 여기 멸치회무침이랑 멸치찌개가 아주 유명하니, 어떤가?”
“뭐. 가릴 게 있겠습니까? 위원장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시죠.”
“그럼 아주머니. 늘 내던 거로 주이소.”
잠시 후 멸치회무침과 머위대를 넣고 국물이 자작해질 때까지 끓여 준 멸치찌개가 등장했다.
멸치회무침에 상추를 싸서 한 입을 무니 입안에 퍼지는 특유의 향이 오감을 자극한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