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화 선수 교체
그렇게 최종적으로 점검을 끝낸 강태준이 사무실로 돌아와 치하의 인사를 건넸다.
“그간 관리를 꽤 잘하셨군요. 배 상태도 나쁘지 않구요.”
“그럼 밥 먹고 하던 일인데 왜 못하겠습니까.”
“다만 딱히 문제 될 것이 없는데 조업 상 실적은 왜 그런지 모르겠군요.”
약간 불쾌한 듯 눈썹을 치켜올리는 어로장이었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선주님?”
“요사이 실적이 영 시원찮아서요. 출항 횟수는 계속되는데 실적이 개선되지 않고 있다던데요. 솔직히 이번에 내려온 이유는 그 때문입니다”
뼈를 때리는 말에 송 어로장이 얼굴을 굳히고 변명했다.
“일시적인 현상입니다. 근래 해류 온도가 일정치 않아서 해파리가 늘어나는 바람에 고기잡이가 신통치 않은 건 사실이지만. 하지만 선주님도 선장 출신이니 잘 아시지 않습니까? 물때가 잘 맞을 때가 있으면 아닐 때도 있는걸.”
“흠. 지금이 한창 성수기 아닙니까. 다른 때라면 모르겠지만 그건 변명으로 들립니다만?”
“추궁을 하려거든 정당한 근거가 필요하지 않습니까? 이쪽에서 출항하는 다른 배들과 비교해도 꽤 괜찮은 실적인 듯한데.”
팔짱을 낀 어로장의 말이 딱히 본인이 잘못했다는 인식은 없어 보인다. 무례한 행동에 눈치를 보는 직원들이었지만 강태준의 표정은 고요했다.
깍지를 낀 강태준이 잠시 뜸을 들이더니 슬쩍 본론을 꺼냈다.
“그러십니까? 그러면 한 가지 다시 여쭤보고 싶군요. 제가 일전에 일본에서 구매해 드린 어탐기는 제대로 쓰고 있습니까?”
움찔한 어로장이 동요했지만 이내 침착하게 말을 돌렸다.
“그거야 당연하지 않습니까. 무슨 말이 되는 소리를?”
“글쎄요. 근래 설치한 어군 탐지기의 성능을 생각하면 실적이 개선되지 않는 점이 이상해서 말입니다.”
“지금 내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거요?”
목소리가 커진 어로장의 표정이 험악해졌다. 그러나 이미 심증을 굳힌 강태준. 강태준이 손을 까닥했다. 춘삼이가 미리 준비해 두었던 항해 기록지와 어획량을 정리한 자료를 갖다 바쳤다. 강태준이 서류를 내려놓자 어로장의 눈이 의아함으로 가득 찼다.
“이게 뭐요?”
“일본 근해에서 어군 탐지기를 사용했을 때 어획량 변화 데이터를 그래프로 표현한 겁니다. 어군탐지기가 어획물 수효 향상에 직접적인 도움이 된다는 증거랄까요. 만약 어탐기를 제대로 사용했다면 최소한 가시적인 성과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허, 지역이나 사람의 차이도 있는데 게다가 과장이 섞여 있을 줄 누가 아오. 게다가 설비에 익숙해지려면 적응 기간도 필요한 법이지.”
“설치한 지 근 두 달이 넘었으니 테스트 기회는 충분히 준 것 같은데요? 제가 괜히 한 대에 12만 원이 넘는 어탐기를 산 줄 아십니까? 사용 방법까지 손수 번역해서 매뉴얼까지 만들어 드렸는데, 그래도 사용을 못 하는 거면 역량보다 의지가 부족하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게다가 다른 곳은 꽤 사용한 흔적이 있는데 어탐기 부근만 지문이 안 묻어 있더군요.”
그 말에 자존심이 상한 어로장의 목소리가 거칠어졌다.
“허, 탐정 나셨군. 그래서 선주님께서는 지금 내 조업 방식에 불만이 있으시다 이 말인가?”
“시대가 변하고 있으니 더 이상 주먹구구 방식은 지양해야지 않겠습니까. 경험이나 연륜도 중요하지만, 데이터 없이 감만 믿고 투망한다는 건 비합리적입니다. 최소한 성공 확률을 높일 노력은 해 봐야지 않습니까? 이건 직무유기라고밖에 볼 수 없군요.”
“호오, 그러십니까? 그렇게 잘나신 분이라면 입으로만 씨부리지 말고 직접 시범을 보여 주시는 게 낫지 않겠소이까? 그렇게 잘났다면 충분히 성과를 보일 수 있을 텐데 말이요.”
빈정거리는 어로장의 태도에 기분이 상한 듯 춘삼이가 버럭 성을 냈다.
“어로장님 아무리 연배가 위라지만 선주님께 이 무슨 망발입니까!”
“이봐. 애송이. 그쪽은 조용히 하는 게 좋아. 난 네놈한테 물은 적이 없는데 말이야.”
춘삼이가 어로장을 도전적으로 노려보자 어로장이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한참 동안 뜨거운 시선을 교환하던 둘에 강태준이 한숨을 쉬었다.
“그럼 좋습니다. 어로장님께서 어탐기를 사용하지 않으신다니, 제가 직접 어탐기를 사용해서 투망해 보지요. 단 제가 출항 후 만선을 한다면 앞으로 내 말에 절대로 토를 달지 않는 걸로 합시다.“
“뭐, 그 정도 가지고서야 되겠소. 내 모가지도 걸지. 대신 반대의 경우엔 나도 뭔가 얻는 게 있어야 하지 않나?”
강태준이 어깨를 으쓱했다.
“뭐, 그쪽이 무슨 짓을 하든 앞으로 터치하지 않죠. 계약기간도 종신까지 보장하겠습니다. 그 정도면 되겠습니까?”
“사장님! 그건!”
“좋소이다. 약속은 지키시겠지? 비겁하게 뒤로 빼지 마시구라. 그럼 기간은?”
“출항 후, 사흘 내. 이왕이면 문서로 남기는 건 어떻겠습니까? 나중에 딴말 나오지 않게 말입니다.”
“그거야말로 내가 바라는 바요.”
양쪽이 서약서에 서로 나눠 쓴 후, 오른손 엄지로 인주를 묻혀 문서에 지장을 찍었다.
“기간은 사흘이요. 그 안에 만선하지 못하면 조업에 더는 간섭하지 않는 겁니다.”
“그야 물론이오.”
강태준은 곧바로 선원들을 소집했다. 출항을 하려면 합도 맞춰 봐야 하고 준비할 것이 많았다. 하지만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어로장이 빠지고 난 이후, 선원 중 대다수는 부두에 나타나지 않았던 것이다. 총인원의 반도 되지 않은 숫자에 어이없어진 강태준이 불려 온 요한이를 보며 물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건가?”
“그게 어로장 휘하 간부 선원들이 이번 조업을 보이콧하고 있습니다.”
“뭐라고?”
“그게, 어리고 경험도 없는 선주의 명을 쉬이 따를 수는 없다는군요. 아무리 설득해도 안 오더이다.”
김요한 말로는 선장과 간부급 선원들 전원이 못하겠다며 총파업을 선언했다고 했다. 마치 작정이라도 한 듯 핑계를 댄 녀석들의 강짜에 어이가 없어진 강태준이 웃었다.
“아니, 이 사람들이. 거참, 추잡하게 노는군.”
“아니 선주가 무슨 동네북입니까? 이건 명백한 하극상입니다.”
분노한 춘삼이의 반응이 자못 격렬했지만, 강태준은 그닥 화를 내지 않았다.
“놔둬. 이 노친네가 꽤 인망이 있나 보군. 원래 현장에서 몇십 년간 동고동락했던 양반이니. 아직 검증되지 않은 나보다는 그쪽을 신뢰하는 게 더 합리적이겠지.”
“하지만 사장님, 이대로는 조업 자체가 어렵습니다.”
“걱정할 필요 없어. 일단 파업에 가담하지 않고 남은 인원들부터 불러 모으게.”
“네?”
“못 들었나? 일단 배부터 띄워야 하니 사람이 있어야지. 그래야 전략이라도 짤 게 아닌가?”
강태준이 다시 사람들을 호출했지만 사태는 별반 나아지지 않았다. 초사와 1항사를 제외하고는 2항사와 3항사가 전부 결석이었다. 갑판장 이하 주요 베테랑들 역시 아프다거나 급한 일이 생겼다는 핑계를 대고는 코빼기도 비추지 않았던 것이다.
“설마, 이게 다인가?”
“허…… 완전히 2진급만 모였구만.”
모인 사람들이 자조적으로 한탄했지만 달리 반박할 사람은 없었다. 축구로 치면 벤치 멤버만 모인 셈이랄까. 하나 강태준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불러와 놓고 태업하는 것보다는 이게 나아. 이참에 걸러서 다행이지. 지금부터 그쪽 둘이 임시 선장을 맡도록 하게. 요한이랑 그쪽 2항사, 이름이 뭐지?”
“차도윤입니다.”
“그럼 도윤이 자네가 선장을 맡게.”
“네? 선장직을요?”
“듣자 하니 배 탄 지 3년이 넘은 걸로 아는데. 아닌가?”
“그…… 그건 그렇습니다만. 단독 항행을 맡은 적은 없어서…….”
강태준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뭐 그런 걸 가지고. 뭐든지 처음이 어려운 법이니 요한이 자네가 보좌하면서 가르쳐 줘. 이의 있나?”
“넵. 저는 이의 없습니다.”
“하지만…… 혹 실수라도 하면.”
“걱정 말게.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대로 그대로 따르기만 하면 돼. 인원이 부족하니. 일단 부두에서 힘 잘 쓰게 생긴 몇 놈만 더 섭외해 오게나. 일단 쪽수는 맞춰야 하니 말이야.”
이 시대는 부둣가에서 일감을 찾는 사람이 넘쳐나는 시대다. 인력 소개소를 통해 인원수를 채운 강태준이 기어이 출항했다는 소식에 갑판장 이하 인원들이 옹기종기 모인 채 술자리를 갖고 있었다.
“선주 놈, 기어이 지들끼리 출항했다지?”
“거 놔둬. 새파랗게 어린 놈팽이가 돈 좀 벌었기로서니 기고만장해가지곤.”
“근데 성님, 정말로 이렇게 막 나가도 되겠소이까? 어로장님. 선주가 진짜로 만선이라도 했다가는…… 게다가 선주도 나름 이름 있는 선장인 데다 멸치잡이 선주 아들내미라면서요.”
갑판장의 우려 섞인 말에 송범성이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말 같은 소리. 조업이 그렇게 쉬우면 개나 소나 만선했지. 그게 참치랑 같은 놈인 줄 아나?”
“그…… 그래도.”
“하모, 이상한 도깨비 상자를 가지고 와선 무슨 만능열쇠라도 되는 줄 아는지. 내 30년간 이 해역에서 밥 먹고 산 사람인데 이리 무시해도 된다는 건가?”
“거 쓸데없는 소릴. 차포 떼고 얼마나 잘하는지 보자고요. 그러잖아도 사람 하나 보내 놨으니, 일 생기면 연락하지 않겠습니까?”
“그려. 선주도 존심이 있는데 바로 굽히겠나. 콧대가 납작해지고 나면 그때 현실 파악이 되겄지. 암튼 걱정 말고 한잔하십시다.”
서로가 잔을 나누던 선장들은 얼마 후, 긴장이 풀어진 듯 희희낙락했다.
하지만 그런 여유는 그렇게 오래가지 않았다.
밖으로 정탐을 나갔다 돌아온 선원이 호들갑을 떨며 달려온 것이다.
“거, 큰일 났습니다. 지금 새벽녘에 조업 나갔던 어선들이 돌아왔다는데요?”
“뭐? 벌써? 그게 가능한 이야긴가?”
“뭐, 조업이나 제대로 했겄소? 대충 뭐가 꼬여서 돌아왔겠지. 선주도 이참에 크게 데였을 테니 정신 차리지 않겠나.”
“아닙니다. 그게…… 만선했다 하는뎁쇼…….”
“뭐 만선이라고? 그게 뭔 소리야?”
깜짝 놀란 어로장 일동이 후다닥 부둣가로 나가 보니, 과연 강태준 일행이 돌아와 있었다.
“아니, 이럴 수가!”
배가 터질 정도로 쌓인 멸치가 퍼덕거리는 모습이 실로 장관이 아닐 수 없다. 눈이 휘둥그레진 선장들이 입을 벌리는 사이 사람들이 서둘러 멸치가 가득한 박스를 내리고 있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건가?”
할 말을 잃은 어로장이 우두커니 서 있는 모습에 김요한이 빙글거리며 대꾸했다.
“운이 좋았습니다. 어군 탐지기로 훑어보니 멸치 떼들이 한쪽에 몰려 있더군요. 덕분에 손쉽게 만선했지 뭡니까?”
“그런 말도 안 되는!”
엄청난 성과에 기가 막힌 어로장이 뭐라 덧붙이기 전에 김요한이 다시 대답했다.
“남아일언 중천금이니 약속은 지키시겠지요? 선주님께서는 안타깝지만, 어로장님과 더 이상 같이 가긴 어렵다는군요. 이 업계에서 위계질서는 확실히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마침 강태준이 마지막으로 조업을 마친 배 위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아무 말도 못 하는 어로장 일행을 내려다보며 강태준이 명했다.
“서면 약속대로 해고되었으니, 내일부터 나오지 마십쇼.”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