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화 멸치 공장
게다가 줄을 아무리 잘 서도 일을 하다 보면 문제가 터지기 마련. 이번처럼 사건이 터질 때 입 싹 닫고 짬때리기를 하면 피를 보는 것은 결국 기업가 쪽이다.
“부위원장 노릇을 하면 정치권의 압박에서 자유로울 수 없지. 무엇보다 기여금 액수만 몇 배는 내야 할걸. 오너라도 회사 공금을 횡령하지 않고서는 감당하기 힘들어.”
“독이 든 성배군요. 하긴 근데 좀 어이없네요. 협회원 가운데 8할이 넘게 밀수에 엮이다니 이건 좀 아니지 않습니까?”
“애초에 그 정도면 양호한 거지. 꿀단지에 꿀벌이 꼬이지 않으면 이상하지 않나. 애초에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긴 셈이니…… 그러니까 정권 쪽에서도 이번 사태를 빌미로 길들이기를 하려는 거 아니겠나?”
처음엔 책임 전가에 급급했던 군부 정권에서는 밀수와 관련된 수사를 진행하면서 기업들이 착복한 액수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밀수로 착복한 이익금이 적어도 몇천억 원대였으니 지금껏 바보짓을 해 왔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던 것.
일의 심각성을 깨달은 군부 정권은 강도 높은 세무 조사를 단행했고, 덕분에 유보금을 초과하는 엄청난 액수의 과징금을 부과받은 무역 협회로서는 양자택일을 강요받았다.
기득권을 지키는 대가로 자기네들끼리 과징금을 감당하던지,
과징금 분담을 위해 기여금을 받고서라도 협회원을 늘려 부담을 줄이던지. 그 말을 전해 들은 복만이가 중얼거렸다.
“이야, 그러면 선심 쓰는 척해도 결국 자기들 잇속 챙기기 군요.”
“그러니 딱히 천경물산이나 이원석 의원 쪽에 고마워할 필요도 없어. 그쪽도 이참이 오성 대신 영향력을 늘릴 기회였다고 생각했을 테니.”
“뭐, 우리가 할 역할은 정해져 있다는 건가요. 혹 눈치 없이 나대지 말고 거수기 노릇이나 하라는 말 아닙니까?”
“뭐, 적당히 처신을 잘해야지. 오는 정이 있어야 가는 정도 있지 않겠나?”
말을 듣던 김복만이 짜증스럽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에휴, 역시 정치질은 제 적성이랑 안 맞습니다. 입바른 소리는 잘하면서 이용할 생각뿐이라니. 뭔가 맘에 안 드는군요.”
“하하. 세상이 그렇게 생긴 걸 어떻게 해. 살다 보면 익숙해질 걸세. 우린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면 되는 거야.”
상대의 꿍꿍이가 어떻든 강태준으로서는 환영할 일. 무역협회에 가입하는 대신 원당 조달 루트를 확보했으니 그 뒤는 알 바 아니지 않은가, 언더독 포지션에 있는 강태준으로서는 기존의 기득권 세력이 망하든 말든 솔직히 알 바 아니다.
‘암튼 이 정도면 응징은 제대로 한 셈인가?’
풍원이 자연 소멸하며 조미료 점유율이 다시 50프로를 회복했다는 보고를 받은 강태준으로서는 나름 뿌듯한 성과였다. 하지만 이어진 추가 보고서를 읽은 강태준의 얼굴이 굳어졌다.
서류에 적힌 어획량을 앞뒤로 살핀 강태준이 서류를 가져온 춘삼이에 탐탁잖은 얼굴로 물었다.
“음. 거제 쪽 멸치 어획량이 왜 이러지? 요새 멸치조업이 꽤 호황인 걸로 아는데.”
“그게, 저도 이유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다른 업체들과 비교하면 선방한 편이라고…….”
“투자비 차이가 얼만데 지금 장난하나? 임대한 배만 4척에, 운용비가 기천만 원이야. 이러면 최소한 적자운영은 보지 않아야 하는 거 아닌가.”
이번 조업의 성공을 위해 항해사인 김요한까지 별도로 파견하지 않았나. 그도 그럴 것이 멸치조업에서 가장 일반적으로 쓰이는 권현망 어업은 끌배 두 척이 중심이 되어 날개로 된 그물을 끌어 잡는 어법으로 끌배 2척, 어탐선 1척, 가공선 1척 등 최소 4척의 선단이 필요한 사업이다. 여기다 보조선까지 붙는다면 한 번에 최소 5~6척이 출어하는 셈. 출항에 소요되는 비용이나 인건비를 고려할 때 조업 성과가 지지부진하다면 사업을 전면 재검토해야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6척 중 4척이 연차 10년도 안 된 배야. 더욱이 이번에 뽑은 선원들은 전문가들로 엄선했다고 했는데, 조업 환경이 나쁘다고도 볼 수 없잖나?”
“그게…… 사실은 손발을 맞추려면 좀. 시간이 걸리지 않겠습니까?”
당황한 춘삼이의 대꾸에도 강태준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걸로는 안 돼. 지금 당장 어로장을 만나 봐야겠어.”
* * *
강태준이 어로장을 포함한 선장급들을 호출한다는 말에 곧바로 거제 쪽이 부산스러워졌다. 갑작스런 호출에 모두 의견이 분분했던 것이다. 갑판장인 김호범이 말했다.
“강 사장이 보자고 했다고? 웬일이래?”
“조미료 사태도 끝났으니 이쪽으로 관심을 돌리는 게 아니겠습니까?”
“거, 그 양반 꽤 깐깐하다며. 별로 달갑지 않은데…….”
“에이, 사장 얼굴을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잖습니까. 이제 인사할 때도 되었죠.”
“하긴 한 번쯤 볼 때는 맞지. 그렇게 따지니 긴장되는걸.”
“긴장될 게 뭐 있나. 잘못한 것도 없는데, 어이, 김요한 항사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댓빵이 여기 오는 이유가 뭔지 짐작하는 바 없나? 자네 직속 선배라지 않았나? 같이 배도 타 봤고. 혹 언질 받은 건 없나?”
어로장을 맡은 송범성의 질문에 김요한이 어깨를 으쓱했다.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공사 구분이 확실한 분이라 그런 건 개인적으로 말씀은 안 하시죠. 뭐 일단은 현장 점검차 오시는 게 아닐까요?“
“그런가? 보너스라도 두둑이 챙겨 줬으면 좋겠군.”
“그럴깝쇼?
퍽이나. 헛꿈을 꾸는 선원들을 보며 김요한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절대 아무 이유 없이 오실 분이 절대 아닌데…….’
강태준의 기대치로 보면 턱도 없이 부족한 실적인 만큼 솔직히 걱정되는 김요한이었지만 굳이 사기를 깎을 이유가 없다. 속으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하던 차에,
“사장님께서 도착하셨답니다.”
“벌써? 빠르군.”
부둣가를 통해 도착한 강태준이 도착했다는 말에 부두에 몇몇 간부 선원들이 도열했다. 나이 지긋한 송 어로장이 인사를 올렸다.
“처음 뵙습니다. 어로장님.”
“저도 선주님을 이렇게 뵙는 건 처음이구료. 김 지배인께선?”
“종로 쪽 일 때문에 내려오지 못했습니다. 그간 일이 바빠서 그간 잘 챙기지 못했군요. 송 어로장님이라고 하셨죠? 저도 김 지배인에게 대충은 전해 들었습니다. 이쪽 일대 터줏대감이시라던데. 가장 실력 있는 분이라면서요.”
“허허, 그 정도는 아닙니다.”
“그럼 일단 어선의 상태부터 점검해 볼까요? 멸치공장도 궁금하고.”
강태준은 멸치 선단을 쭉 한 바퀴 둘러보았다. 기선권현망에 쓰는 배는 5척이 한 개의 선단을 구성한다. 어탐선이 선두에서 멸치어군을 탐지하면 그 뒤로 본선 2척이 양쪽에서 그물을 끌고 멸치를 어획하는 방식이랄까. 광필이가 꽤 꼼꼼하게 본 탓인가 배 상태나 어구들은 모두 멀쩡했다.
선착장 주변에는 멸치를 판매하는 상가가 모여 있는데 구조라를 거점으로 활동하는 배들이 잡은 생물들이 판매되고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던 중 멸치털이가 한창인지 구령에 맞춰 목소리가 들렸다.
“에야나, 차이야!! 에헤야…… 차이야…….”
구령에 맞추어 채 치는 그물에 사방으로 비산하는 은빛 살덩이들. 거친 숨소리와 바깥으로 흘러나오는 땀과 코를 찌르는 비린내 등이 뒤섞여 오묘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 멸치를 터는 사람들 뒤에는 봉투를 든 사람들이 머리가 떨어진 멸치를 하나씩 줍고 있었다. 풍겨 우는 비린내에 춘삼이가 코를 씰룩였다.
“워 비린내, 이 냄새는 당최 익숙해지지 않네요.”
“이게 바로 돈 냄새라는 거지. 곧 구수하게 느껴질 날이 올 걸세.”
“그럴까요?”
순서대로 하역된 멸치는 차에 실려 제조 공장으로 향하는 길. 강태준도 길을 따라 차에 올라탔다. 일제 강점기에는 목선으로 근거리 어장에서 조업했지만, 현재는 어업근거지가 멀어진 까닭에 어획된 멸치는 삶아서 운반한 후, 곧바로 육상 건조장으로 옮겨 냉풍기로 말려지는 작업을 거치는 것이다.
“여기는 겁나 덥군. 사우나를 열어도 되겠어.”
“이렇게 더우면 뭐. 살찔 틈이 없겠습니다.”
춘삼이의 말대로 난닝구 차림의 직원들이 땀을 뻘뻘 흘려가며 큼직한 국자로 가마솥을 젓고 있다. 조금 전까지 펄떡거리던 멸치를 펄펄 끓는 소금물이 가득한 솥에 넣어 끓이자 비릿하면서 고소한 멸치 특유의 냄새가 공장 안을 가득 찼다.
삶은 후 건져 낸 멸치는 잘 말려진 뒤 ‘백경 수어’가 인쇄된 포장 상자에 담긴다. 상장할 물건들이 줄지어 포장을 기다리는 가운데 똥머리에 수염을 길게 기른 노인 하나가 지팡이를 짚고 직원들에게 훈수를 두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임마, 잘못 포장하면 어떻게 해. 중멸이랑 대멸도 구분 못 해?”
“그게 애매꼬리 해서 구별이 잘…….”
앳된 모습의 직원이 무안한 듯 머리를 긁으며 묻자 노인이 한심하다는 듯 핀잔을 주었다.
“임마 딱 봐도 씨알 크기가 다르잖나. 소멸은 손가락 한 마디 반이구, 중멸은 두 마디 반이 넘잖나. 말린 순서대로 빼라고 몇 번을 말해? 이거 봐 물기 덜 빠진 거 가져가서 팔면 장사가 돼겄어?”
“아, 깜빡했구먼요. 그게 일이 바쁘다 보니.”
“임마. 정신 못 차려? 이렇게 다 버리고 말아먹으면 니들이 물어 줄 거야 엉?”
주눅이 든 직원이 우물대자 다시 호통이 떨어진다. 가라앉은 분위기를 확인한 강태준이 얼른 다가갔다.
“거 요란들 하시구만. 사람 좀 고만 잡으십쇼. 영감님.”
“아이구야 도련님! 언제 오셨습니까?”
갑작스럽게 깜짝 놀란 노인이 인자한 표정으로 변해 손을 비빈다.
“이거 못 볼 꼴을 보였군요.”
“아이고. 최 영감님은 언제 또 나와 계셨습니까? 몸도 편찮으신데 좀 쉬시지.”
“무슨 서운은 말씀을. 지도 아직은 쌩쌩합니다요. 아니, 이놈들, 말도 안 끝났는데 어딜 도망가!”
강태준과 말을 나누는 사이 이때다 싶어 슬그머니 발을 빼는 직원들의 행동에 강태준은 쓴웃음을 지었다. 최형묵은 강태준의 집안이 쫄딱 망하기 전에 집사로 일했던 인사로. 집안이 풍비박산이 나기 직전까지 집안의 대소사를 맡았던 사람이다.
그 후에 강태준의 집안을 나와 머슴 일을 전전했다가 강태준이 돌아왔다는 소식이 들리자 제일 먼저 귀향한 것이다.
‘솔직히 나는 사실 제대로 기억하지도 못하지만 말이야.’
몸이 제대로 바뀌기 전의 일이다 보니 강태준으로서는 최형묵이 이렇게 살갑게 대하는 것이 솔직히 조금 부담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실제로 강태준을 업어 키운 지낸 사람인 데다 집안 창고를 맡을 정도로 신뢰를 얻었던 인물이었던 탓에 여러모로 큰 도움이 되고 받고 있었다.
“집사님이 있어서 한결 든든합니다. 신출내기 직원들 관리하느라 고생이 많군요…….”
“어인 말씀을. 지가 이제 늙어서 다른 건 못해도 살아온 깜냥이 있지 않습니까? 이놈들이 정신을 어따 놨는지, 어느 것이 상품인지 구분도 못 하는지라. 감시 안 하면 정신 놓고 농땡이나 피운답니다. 저번에도 술 먹다 늦게 출근해서 대폭 혼냈습니다요.”
“하하, 일머리가 생기려면 아직 한참은 배워야죠. 어디 보자…… 상품이 꽤 잘 말랐네요.”
“최대한 불량이 없도록 신경 쓰고 있습죠. 아직은 부족한 점이 많지만요.”
가만히 멸치를 살펴보던 강태준. 수북이 쌓인 소쿠리 하나에서 바싹 마른 멸치를 꺼낸 강태준이 길이를 가늠하며 물었다.
“흠. 이렇게 완전히 말리는 데는 얼마나 걸립니까?”
“날이 창창할 때는 만 하루 정도? 더 빨리 마를 때도 있지만, 물기가 안 빠지면 비린내가 나서 가능하면 넉넉히 말리는 편입니다.”
냄새나 색깔로 보나 강태준으로서는 솔직히 성에 차지 않았다. 어획된 멸치는 신선도 유지를 위해 잡는 즉시 삶고 육지로 빨리 이동해 말려야 하는 만큼. 건조 과정이 핵심. 거기서 어떻게 삶고 말리느냐에 따라 멸치 가격이 결정된다. 한 발의 멸치 양은 1.5㎏ 위판 박스 한 상자 반. 냉정하게 말해서 이것은 잘해 봐야 중급품 정도였다.
‘이 정도 수준으로는 이득 보기 쉽지 않겠군.’
불 조정과 삶는 시간이 오류가 있는지 품질이 들쑥날쑥하다. 마음 같아서는 냉풍 건조기라도 들여놓고 싶었지만 생각만큼 어획량이 많이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일단 조업 실적부터 개선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판단이 들었던 것이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