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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양재벌 강태준-160화 (160/361)

160화 무역협회

강태준이 해결책을 고민하는 사이, 시간은 정처 없이 흘러갔다.

답답한 상황에 뭐라도 하고 싶었지만 생산 라인 복구는 그렇게 쉽지 않았다.

전문가들이 붙여 대책을 논의해 보았지만 제대로 된 원인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머리를 싸맨 강태준이 고민하는 사이 광필이가 새로 만든 서적 묶음을 한 아름 가지고 왔다.

“아이구야 형님도 이거라도 보면서 머리 좀 식히십시오.”

“이게 뭔가?”

“아, 이거요. 방 과장 쪽에서 보낸 따끈따끈한 신상입니다.”

무심코 앞을 뒤집어 보니 여우가 포도를 노려보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이솝 우화?”

“구관이 명관이라지 않습니까. 요사이 학부형들 사이에 교육 서적이 인기라서요.”

“호오, 그래?”

백종섭이 그린 그림이라 설까. 그림체가 시선을 끈다. 강태준이 슬쩍 책장을 넘겨 보자 마침 아주 유명한 일화가 나타났다.

-욕심 많은 여우 이야기

여우 한 마리가 먹을 걸 찾아 숲속을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있는데, 어디선가 음식 냄새가 났다. 가까이 가보니 고목 나무 구멍 속에 빵과 고기가 숨겨져 있지 않은가.

배가 고팠던 여우는 순식간에 음식을 해치웠지만, 그 뒤가 문제였다. 욕심 많게 식사를 마치고 나자 배가 너무 불룩해져서 구멍에 꽉 끼었던 것이다.

아무리 해도 구멍에서 탈출할 수 없자, 여우는 당황해 우는 소리를 냈다. 그 소리에 근처를 지나던 친구 여우가, 그 모습을 발견하곤 다가와 어찌 된 영문인가 묻자 여우가 자초지종을 털어놓았다. 그러자 동족은 자초지종을 듣곤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럼 배가 꺼질 때까지 거기 있을 수밖에 없겠네.”

결국, 여우는 며칠간 쫄쫄 굶다 자연스레 배가 홀쭉해져서야 나무 구멍에서 겨우 나올 수 있었다.

다 아는 이야기였지만 역동적인 그림체와 표정이 어우러져서인지 꽤 흥미롭게 느껴졌다.

‘백 화백이 화풍이 좀 변했군.’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게 변화한 탓일까. 이전 그림에 비해 훨씬 둥글둥글하다.

기존의 따스한 감성은 여전했기에 강태준으로서는 나쁜 변화로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책을 덮고 난 강태준의 머릿속에 자연스레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강태준이 노기철을 서둘러 호출했다.

“노 이사, 내가 곰곰이 생각해 보니 원당을 한꺼번에 너무 많이 넣는 게 문제가 아닐까?”

“네? 설마 그렇게 간단한 문제일 리가…….”

“아니 기계설비에 문제가 없다면 가동 시 사용 방법에 원인이 있었는지도 몰라. 일단 시도해서 나쁠 것 없지 않나?”

강태준이 즉시 공장장을 불러 몇 가지 아이디어를 전달하고 시행토록 일렀다.

“일단 원당의 양을 단계적으로 조절하는 게 순서일 거 같군요. 원당을 한꺼번에 너무 넣어 원심기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한다면 반대로 너무 적게 넣는 것도 문제가 될지 모르니 말입니다.”

“흠. 그러면 얼마나 넣을까요?”

“일단 처음 넣던 양의 절반 정도로 양을 낮춰 봅시다. 그래도 안 된다면 그 반 이하로 가동해 보고. 최악의 경우 처음부터 다시 분해 조립하는 수밖에요.”

사람들 역시 반신반의했지만 다른 대책이 없었다. 운전원들이 균형을 맞춘 다음 다시 원료를 넣었다. 우웅 소리가 나며 원심분리기가 회전하기 시작하자, 모두 침을 삼켰다

이번에도 안 된다면 정말 방법이 없다. 정말 기계를 다 뜯어서 재조립하려면 엄청난 수고가 들 것은 자명한 일.

우웅 소리와 함께 정말로 하얀 설탕이 분말처럼 쏟아져 나오자, 사람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하지만 지금껏 삽질한 노기철과 설만식은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하…… 진짜 되네요. 이렇게 간단히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인 줄은…….”

“원래 답은 가까이 있는 법이지. 그보다 균질도 부분은 아직 문제가 있군.”

강태준은 쏟아지는 설탕을 한 줌 집어 맛을 보았다. 백색의 무취인 가루에서 느껴지는 달큰한 맛. 다른 사람들 역시 호평이었다. 광필이가 중얼거렸다.

“달구먼요. 이거 불순물도 없고 꽤 괜찮은데?”

“시제품과 비교해도 별로 안 꿀리겠는데요.”

“그럼 조금만 더 개선해 보자고.”

다행히 결정 크기가 들쑥날쑥한 문제는 정량을 조절하자 해결할 수 있었다.

고무적인 첫 생산에 모두 흥분을 감추지 않았다.

“생산 가능 물량은 최대로 어느 정도인가?”

“원료만 제때 들어온다면 일일 최대 24톤 정도는 생산할 수 있습니다.”

강태준으로서는 희소식이었다. 설탕은 MSG와 달리 보향성이 좋아 수분 8% 이하로 관리할 경우 세균 오염이나 변질, 부패만 없다면 별다른 유통기한 없이 판매할 수 있는 식품인 동시에 뛰어난 물성을 가지고 있어 다방면에 걸쳐 활용된다.

“24톤이라 꽤 되는데?”

“이건 시작에 불과합니다. 설비만 추가로 들여오면 물량이야 차차 늘릴 수 있으니까요.”

“예. 국민 소득이 증가함에 따라 수요가 매년 두 자릿수 증가하고 있습니다. 특히 제과 제빵 등, 요식업과의 연계하여 시장지배력을 높일 수 있습니다.”

55년에 오성제당에서 새로 들인 설비가 50톤이니, 규모의 경제가 중요한 소비재 시장에서 충분한 경쟁력을 갖출 만한 크기다. 더욱 호재인 것은 이런 소비재 판매는 실로 무시무시한 현금 창출 능력을 자랑한다는 점이다. 후일 오성이 반도체산업에 10년 넘게 천문학적인 적자를 보면서도 과감하게 투자를 계속할 수 있던 있었던 배경에는 특유의 안정성과 현금 창출 능력을 바탕으로 캐시카우 역할을 한 것이 지대한 원인 중 하나였다.

“바로 판매 투입 가능하겠나?”

“품질은 전혀 문제없습니다만 단가를 얼마로 잡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다만 아직 원료 수급이 원활치 않아서. 한 다리 건너서 원료를 조달하다 보니, 품질도 일정하지 않고, 재료비도 비쌉니다.”

“그렇다면 무역협회에 빨리 협조를 구해 봐야 할 것 같군”

“무역협회 쪽은 워낙 오성 쪽 입김이 커서, 과연 저희 쪽에 협조하겠습니까?”

“오성은 지금 제 본진 지키기도 정신없을걸. 회장이 갈려 나간 판에 그런 일에 신경 쓸 만한 겨를이 있겠나?”

강태준의 호언대로 가입은 생각보다 쉬웠다. 본래대로라면 무역협회에서 최고 지분을 가진 오성그룹 덕에 가입 자체가 어려웠지만, 여러 방면으로 기름칠을 해 둔 데다 마침 가장 걸림돌이던 오성 그룹 쪽이 직격탄을 맞는 덕에 제어하기 어렵게 된 것이다.

‘그래도 이병구가 계속 집권하고 있었으면 어림도 없었겠지.’

이병구가 오성그룹 회장직에서 물러나면서 무역협회 역시 큰 홍역을 겪었다. 기존의 친 오성파 위원들도 물갈이되어 권력의 공백이 발생한 것이다.

반면 준비 없이 오성그룹의 경영권을 인계받은 이재철은 거센 도전에 직면했다. 기존의 가신단과 대주주들은 이재철의 경영 능력에 의심을 품고 있던 데다 정작 후계자를 서포트해야 할 이재철 파벌 역시 내부의 주도권 싸움으로 진흙탕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이런 여러 가지 사정을 고려할 때 제아무리 오성이라도 외부 협회장직까지 제대로 챙기는 건 무리였던 것이다.

과연 강태준의 예상대로 무역협회 공관에 도착하자 천경물산 사장을 맡은 이원준이 인장이 찍힌 허가서를 내밀었다.

이원준은 천경물산 사주인 이원석의 동생으로 강태준과도 몇 번 면식이 있었다.

“자. 여기 가입 허가증일세. 축하하네, 자네도 이제 우리 협회 식구로군.”

“생각보다 일정이 빠르네요. 심사가 꽤 난항일 줄 알았는데 말이죠.”

실제로 무려 세 번이나 가입 신청을 반려할 정도였으니 감회가 남다를 법하다.

이원준이 호탕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하하. 타이밍이 좋았다네. 다만 환영식은 부득이하게 생략할 것 같으니 양해 부탁하네. 요사이 무역협회가 완전 아싸리 판이라 사정이 영 안 좋아서 말이야.”

“그게 무슨 소립니까?”

“밀수 건에 얽힌 회사가 많아 시끄럽거든. 이번에 직격으로 맞은 과징금 액수를 합하면 장난이 아니거든.”

“저도 딱히 그런 형식적인 절차는 거추장스러운데 잘되었군요.”

“뭐, 여유도 잠시뿐일세. 정식 협회원이 되었으니 맡을 일이 산더미일걸세. 마침 간사 자리가 하나 공석이거든. 원래 미래 정헌범 총무가 일을 맡고 있었는데 불미스러운 일이 있어서 말이야.”

강태준이 입을 삐쭉였다.

“방금 입회한 회원보고 간사를 맡아 달라니…… 이건 좀 너무하네요.”

“뭐, 알잖나. 요새 인재난이 심각한 거. 아침에 자네같이 유능한 사람이 왔으니 써먹어야지. 자네가 원한다면 뭐 더 높은 자리도 줄 수 있는데 말이야. 예컨대 부위원장이라던지…….”

“정중히 사양하겠습니다. 신입회원 주제에 나대봐야 타겟만 되지 않겠습니까? 그 정도로 염치없지는 않습니다. 게다가 말씀은 감사하지만, 이쪽도 그다지 여유 있는 상황은 못 되어서 말입니다.”

“이거 섭섭하구만. 남들은 감투를 못 써서 안달인데…… 무슨 남자가 그렇게 야망이 없나?”

“에이, 욕심부릴 처지가 아닙니다. 이제 겨우 걸음마 뗀 장사치에 과분하신 요구이십니다.”

“이 사람 대충 이야기는 들었네. 오성이 조미료 사업에서 철수하게 생겼다지. 이제 무주공산에 깃발만 꽂으면 되는 일인데, 그 정도야 아랫사람들에게 맡겨도 되는 일 아닌가.

승전고를 울렸으니 전리품만 챙기면 되지 않느냐는 소리였지만. 강태준은 흔들리지 않았다.

“하하, 원래 전쟁은 승리 그 자체보다 전후 처리가 훨씬 더 중요한 법이죠. 방심했다 밥그릇 엎는 경우가 한두 번입니까. 엄한 놈이 밥줄에 숟갈 얹기 전에 굳히기 들어가야죠. 염미 증강제용 다시마의 열수 추출 연구부터 글루탐산 생성 연구까지 돈 들어갈 일이 많아서요.”

“그 시장을 다 먹겠다니 욕심도 많구먼. 나도 숟가락 하나 얹는 정도는 안 되겠나?”

“뭐, 성의 표시가 확실하다면야 고려해 볼 수도 있지요.”

“됐네. 마음에도 없는 소리는. 내 강 사장이랑 사업 같이했다 기둥뿌리 뽑힐 일 있나? 얼굴에 욕심이 덕지덕지 묻은 양반이 퍽 이나 양보를 하겠구먼.”

“하하. 들켰습니까?”

“그보다 근래 여성복 판매가 좀 저조해서 그런데 마땅한 방법이 없겠나? 재고는 많은데 판매가 영 그래서 투자자로서 그쪽 고견을 듣고 싶군.”

“그 부분은 저보다는 그쪽이 프로 아닙니까? 정 뭣하면 패션쇼라도 해서 주의를 끄는 것도 방법이지요.”

마침 백화점 리모델링도 마쳤으니 적절한 타이밍이다. 패션쇼와 관련해 이런저런 논의를 마친 강태준이 밖으로 나오자 기다리던 복만이가 그를 반겼다.

“표정을 보니 협상이 괜찮았던 거 같군요. 꽤 반응이 좋았나 봅니다.”

“뭐. 나쁘지는 않더군. 오히려 반기는 분위기던데. 그렇게 콧대 높던 협회가 단번에 오케이를 할 줄이야. 꽤 몸이 달았더군.”

“밀수 사태로 협회 임원진들이 대거 해임당하거나 사퇴했으니 그쪽도 나름 골치겠지. 그래서인가 부위원장 자리를 주겠다 떠보더라고.”

“어, 그건 좋은 기회 아닙니까. 이참에 영향력을 높일 수 있는 시점 아니겠습니까? 이러다 어디 건설부나 경제부처 장관 같은 걸로 추천 들어오는 게 아닙니까.”

“아서라. 쓸데없이 감투 써 봐야 책임만 늘 뿐이지. 직급이 높아지면 구린 곳이 많아지는 법이지. 아닌 말로 윗대가리랑 친하게 지내 봐야 비자금 셔틀밖에 더 하겠나?”

사실 무역협회가 강태준에 문호를 개방한 것은 일종의 고육지책이었다. 사카린 사태의 여파로 태양, 미래, 청우 등등 내로라하는 주요 업체들이 죄다 밀수사건과 직, 간접적으로 연루되는 바람에 협회의 기능이 반쯤 마비될 지경에 이른 것이다.

-다음 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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