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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양재벌 강태준-159화 (159/361)

159화 수크로오스

계약의 조건은 2년 거치 8년 상환, 연 생산량 23만 톤, 설비에 들어간 비용은 3,200만 달러 정도도 이자율 연리 4.5%. 당시 이자율이 보통 6∼6.5%였음을 감안하면 상당한 특례다.

식품 업계를 장악하려는 이병구의 큰 그림이었지만 이렇게까지 밀수 문제가 커진 이상 전면 백지화는 피할 수 없었다.

아니 신사업은 고사하고 밀수에 대한 책임을 질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누가 설계했는지 모르지만. 아무래도 이번 건은 우리의 완패인 듯하구나.”

“박정명도 우리에게 약점을 잡힌 게 있지 않습니까. 이렇게 헌신짝 버리듯 저희를 내버릴 수는 없습니다. 제가 어떻게든 윗선과 접선을 시도해 보겠습니다. 아버님.”

맏아들인 이재철이 의사를 표했지만 이병구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의미 없다. 쓸데없는 짓 하지 마.”

“하지만 아버님. 이건 합의와 전혀 다른…….”

“박 의장 의중이야 뻔하지 않나. 우리보고 독박을 쓰라는 거겠지 순진하게 약속을 믿은 내가 바보였다.”

“그래도 이대로 당하실 겁니까? 차라리 우리도 반격을…….”

분통을 터트리는 이재철에 이병구가 타이르듯 말했다.

“경거망동하지 마라. 사람은 물러날 때를 알아야 하는 법. 지금 군부정권과 함께 자폭하면 전부 끝이다.”

“그럼…….”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지. 재무한테는 미안한 일이지만 아무래도 누군가는 독박을 써야겠구나.”

상대도 정권의 존폐가 걸린 사안인 만큼 일반적인 방법으로 대응할 리 없는 만큼 이쯤에서 물러나야 한다. 다음 날, 사건의 책임을 지고, 이병구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저는 이번 사태의 책임을 통감하며 오성식품과 경산대를 국가에 헌납하고, 회장직에서 은퇴할 것을 선언하는 바입니다.

오성그룹 회장직은 이병구의 장남인 이재철이 승계한다는 속보였다 곧바로 둘째인 이재무가 구속되었다.

사안은 그렇게 대략적으로나마 마무리되었으나 결과를 접한 김광필은 여전히 시니컬했다.

“거참, 난리 블루스네. 은퇴가 무슨 면죄부도 아니고. 은퇴하면 단가?”

“뭐 이번 사건으로는 둘째인 이재무 씨가 밀수의 책임을 지고 수감되었다는군요. 오성그룹 임원진도 반이나 갈려 나갔습니다. 어차피 책임질 사안이니 이참에 구조조정까지 단행한 모양입니다.”

안연복의 대꾸에 광필이가 혀를 내둘렀다.

“회사 살린다고 친아들을 깜빵까지 보내다니, 거 비정한 인간일세.”

“결과만 보면 합리적인 선택이지. 회사가 날아갈 판에 그 정도 출혈이면 잘 막은 거 아닌가?”

“그러게요. 옛말이 하나 틀린 게 없습니다. 작은 도둑은 잡아도 큰 도둑은 못 잡는다더니 딱 그짝 아닙니까? 솔직히 자기들이 방조한 죄도 없지 않잖습니까?”

“뭐. 나라까지 훔친 인간들이 보통내기겠나?”

강태준이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했다. 대놓고 표현하진 않았지만 돌아가는 사정을 보면 군사 정권이 연루되었다는 추측이야 충분히 가능한 수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정명은 지지율에서 큰 이득을 보았다. 밀수 특별 수사 본부를 설치하고, 발 빠르게 밀수에 관한 대책을 발표해 국민의 신뢰를 확보한 까닭에 모든 어그로가 전부 오성그룹으로 쏠려 버린 것. 김필중이 특별반을 마련해 성역 없는 수사를 천명하면서 야당 인사들의 비리들을 일제히 터트리는 바람에 밀수와 연루되어 이득을 챙긴 야당 인사들이 되려 타겟이 되어 버린 것이다.

“이번에 옷 벗는 놈만 열 명이 족히 넘는데, 아주 작심했더군요. 칼질 제대로 하더이다.”

“살을 깎고 뼈를 취하는 전략이지. 똥 묻은 개랑 겨 묻은 개가 싸우면 어찌 됐든. 겨 묻은 놈이 이기는 법 아니겠어? 진흙탕 싸움이란 게 그런 거지.”

“군바리들 주제에 잔머리는 잘 쓴다니까요. 지금쯤 신 검사만 노났겠군요. 듣자 하니, 이번에 밀수 특별 대책 반장으로 임명됐다네요.”

“그 양반 솔직히 아주 계 탄 거지. 저번에 인터뷰 보니 말빨 좋더만! 말 지어내는 솜씨 보니 나중에 정치해도 되겠더라고.”

“하하. 그러게나 말입니다.”

상황이 어찌 되었든 백경 쪽 분위기도 훈훈했다. 이번 밀수사건으로 오성의 타격은 어마어마했다. 야심 차게 추진 중이었던 비료공장 설립 인가는 전면 취소되고, 오성식품의 풍원은 아지노모토와 협력이 취소되었으니 MSG 사업도 사형선고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경산대와 관련한 토지 수십만 평이 도매금으로 넘어갔으니 오성으로서는 뼈아픈 실책이었다.

“어찌 되었든 우리도 이번 밀수 사범 검거 공로로 성과금은 확실히 받았으니 상관없지.”

“그러게요. 보고만 있어도 배가 부르는군요.”

새로 건설 중인 풍미 조미료 공장은 저번 부지의 두 배.

강태준으로서는 경쟁자를 박살 낸 것만으로도 꽤 남는 장사라 생각했지만, 추가로 부수적인 소득이 적지 않았다.

원래 받아야 할 포상금 대신 밀수 품목 중 원당 장치와 관련된 설비는 강태준 측에서 인수하기로 정했다.

밀수품 처리 규정에 따라 공매 처리 시 낙찰자로 선정된 것. 거기에 양조나 음료 제조 공정에 사용되는 추출기, 사탕수수 원액을 추출하는 압착기, 식품, 음료 및 산업 발효 응용 분야를 위해 특별히 개발된 원심분리기까지.

이 엄청난 설비들이 죄다 밀수 품목에서 빠진 것은 공매로 걸어 봐야 제값 받기 힘든 특수설비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이왕 오성을 조지기로 마음먹은 만큼, 김필중 입장에서도 굳이 공매라는 수단을 동원하기보다, 자기 파벌로 분류되는 강태준을 밀어주는 것이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물론 이것은 김필중 입장에서 볼 때 지난날의 은의에 대한 보답이기도 했다.

사업가라면 고무적인 성과에 직원들은 모두 흥분했다. 하지만 김광필은 여전히 시니컬했다.

“선박 개조 시에 사용된 각종 경비와 인력을 생각하면 솔직히 받을 걸 받은 게 아니겠습니까. 세상은 기브 엔 테이크니 말입니다.”

“원래 등가교환이라는 건 세상에서 생각보다 잘 통용되지 않아. 그래도 이 정도면 적어도 위험수당은 받은 셈이지.

“뭐 따져 보면 그건 그렇긴 합니다. 암튼 돈 주고도 얻기 힘든 설비를 이렇게 빼앗기다니, 오성 쪽에서는 마음이 무지 쓰리긴 하겠네요.”

“뭐 애초에 수입 제한 품목 아닌가. 어차피 밀수 품목이 모두 압류된 마당에 지들이 뭘 어쩌겠나. 이편이 차라리 추징금도 덜 맞을 테니 우리한테 고마워해야지. 애초에 그쪽은 지금 그걸 살필 정신이 없을걸?”

강태준의 말에 김요한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깜빵 간 이재무가 그 소리를 들었다면 칼 들고 쫓아왔겠습니다.”

“애초에 그쪽이 깔짝대지 않았으면 처맞을 일도 없었을 테니 우리로선 정당방위지. 게다가 솔직히 원당 설비는 고철로 폐기되는 것보다는 가치를 아는 사람이 이용하는 편이 낫지 않나. 맞다 노 이사, 저번에 창고에 박혀 있던 밀수 품목 중에 일련번호 없는 것들. 그게 뭔지는 알아냈나?”

“예. 그게 수크로오스 원액 제조에 사용되는 석회첨가 여과기였더군요. 그리고 판을 이어붙인 듯한 물건은 스웨덴 알파라발에서 만든 제품을 참조해 카피한 건데, 가스켓 판 프레임형 열교환기라고 합니다.”

강태준의 귀가 솔깃했다.

“판형 열교환기라고? 그거 생각보다 귀한 거 아닌가?”

“예. 본래 증류에 주로 사용하는 설비랍니다. 해외에서는 매체의 농도와 점도가 높을 때 분리에 주로 쓰인다는군요. 설탕 정제나 감미료, 정제 바이오 에탄올 및 부식제 증발용으로 옥수수 침지액, 고염도 해수, 어장과 육수 등을 고농축할 수 있는 설비인데 단순한 유제품, 식품, 음료, 제약용으로도 사용되는가 봅니다.”

“호오. 용도가 꽤 다양한가 보군, 설치에 애로사항은 없고.”

“다행히 마침 이번에 새로 뽑은 연구원 가운데 식품 회사 다니던 사원이 있어서 시행착오를 덜었죠. 이번에 프로세스 공정에 맞춰 어떻게든 욱여넣었습니다.”

뒤늦게서야 말뜻을 파악한 안연복이 입을 헤 하고 벌렸다.

“수크로오스라면 설탕 말입니까? 그럼 우리도 설탕 제조가 가능하단 말입니까?”

“예.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요. 마침 이번에 시운전 차원에서 소량 생산에 들어갔는데, 함 샘플을 보시겠습니까?”

과연 공장 안을 둘러보니, 사탕수수 줄기를 으깨 즙액을 짜내는 과정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강태준과 함께 견학 온 일행은 2천 650㎡ 규모의 공장 규모와 하루 생산량 25톤의 설비들이 위풍당당하게 서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던 강태준이 의문을 표했다.

“사탕수수라니 원료는 어디서 구했나?”

“뭐 당연히 미8군이죠. 그쪽도 나름 웰빙이니 뭐니 해서 수요가 좀 있더군요. 이렇게 즙액에 석회를 가하여 중화시킨 다음 걸러서 농축하고, 결정이 나오면 원심분리기에 걸러 당밀분을 분리하여 원료당을 얻습니다.”

“호오…… 신기하구만.”

강태준을 비롯한 일행 역시 처음 보는 설탕 제조 과정을 견학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일단 확보한 원료당을 물에 용해한 후 활성탄으로 정제하고 농축관에 보내어 감압상태에서 재농축하는데, 결정이 생기면 원심분리를 통해 모액과 분리하는 공정이었다.

박명선 사원이 시동 스위치에 손을 얹고 길게 호흡을 가다듬었다.

철컥. 떨리는 손으로 스위치를 켰다. 우웅─! 두 귀를 울리는 굉음과 함께 기계들이 가동됐다.

원당이 커다란 기계에 투입되자 불순물과 섞여 있는 이 원당을 원심분리기에서 쌀을 씻듯이 물로 씻겨 내려간다. 분당 1,800rpm 회전해서 불순물이 섞인 물과 설탕 성분을 분리하고. 분리한 설탕 성분을 결정화하는 것이다.

기대감으로 가득한 시선이 하얀 설탕이 쏟아져 나올 기계 출구로 쏠렸다.

공장 안은 원심분리기가 균형을 잃고 흔들리면서 엄청난 소음을 냈다. 액상 밀당이 흘러나오는 소리와 함께 사방으로 번지는 단내에 군침을 삼키는 사람들 하지만 잠시 후 사람들의 탄식으로 뒤섞였다.

“앗!!”

“실패다.”

연구원들은 탄식했다. 잔뜩 기대했던 설탕 가루 대신 불그스름한 액체가 그대로 콸콸 흘러나왔던 것이다. 강태준도 꽤 실망했지만 내색하지 않고 침착하게 물었다.

“정 기사, 아무래도 실패 같은데 이게 어떻게 된 건가?”

“아무래도, 제당 설비 설치 과정에서 미스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원심분리기가 수평 균형이 맞지 않은 것 같습니다요.”

“그럼 다시 균형을 맞춰 보게.”

기계공들이 달라붙어 균형을 맞추었지만, 결과는 여전했다.

그로부터 며칠간, 정인호, 박명선 등 새로 뽑은 시운전팀이 면밀히 공정상의 문제점을 검토하였으나 도저히 문제의 원인을 알 수 없었다.

“이상하구먼. 기계적으로는 문제가 없고, 재료 품질에도 이상이 없는데, 계속 실패라니. 정 안되면 일본 쪽에서 기술자를 불러 보는 건 어떤가?”

“기술자 파견을 지금 요청해도 비자 문제와 일정을 고려할 때 최소 3개월은 넘게 걸린답니다. 현재로서는 한일 간 영사관계가 제대로 작동되지 않아 비자 발급이 까다로운 터라. 게다가 일본 쪽에서 기술 유출 관련해 규제를 강화하고 있어 출국에 제한이 많다고 합니다.”

“이거 야단났군.”

몇 개월 동안 엄청난 돈과 노력을 쏟아부은 결과가 실패라니. 제작사에 국제 전화로 연락해 보았지만 직접 보지 않고는 이유를 알 수 없다는 답변만 반복할 따름.

지금 와서 원당 설비를 모두 다시 뜯고 재조립할 수도 없는 상황에 강태준은 골머리를 앓았다. 설탕 생산을 염두에 두고 수십 명이나 되는 직원들을 새로 뽑은 만큼 조업이 빨리 재개되지 않는다면 손실액은 기하급수적으로 커질 것이 분명했다.

-다음 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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