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화 열려라 참깨!
바닷물이 고였다 증발했다가 반복되면서 생긴 소금기가 굳어져 뚜렷하게 남은 것. 주변을 살피니 과연 옅게 불을 지핀 흔적이 있었다. 강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 흔적이 맞구먼.”
“분명 이 길로 지나간 지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실마리를 잡자 절로 기운이 나는 일행들. 해가 완전히 지기 전에 서둘러 산 중턱으로 이어지는 곳을 따라가 보니 단층 사이로 움푹 패진 동굴 모습을 드러냈다.
과연 호리병처럼 생긴 동굴 하나가 떡하니 버티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곳이 있었군요.”
“먼저 선객이 있을 수 있으니 조심하게.”
잔뜩 긴장한 선발대가 어두컴컴한 공간 안으로 들어가자 날은 급속히 어두워졌다. 사내들이 공간 속의 어슴푸레함에 익숙해질 즈음, 공간 안에 각종 가재도구가 나타났다.
작은 배가 숨겨진 공간 뒤편에는 그물과 경유, 가솔린과 윤활유 드럼통들이 잔뜩 실려 있었고, 얼기설기 만들어 놓은 좁다란 사다리 하나가 절벽과 연결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뒤로 검은색 철문 하나가 보였다.
침식으로 인해 붉게 부식된 철문의 위용에 위를 올려다본 일행이 침을 삼켰다.
“이건 규모가 상당하군요.”
“윈치랑 도르래까지 달려 있군. 저 위에 걸쇠로 밧줄을 걸어서 당기는 모양이야.”
해발 150미터 높이의 절벽 위로 난 출입구라니. 밑으로 널빤지를 깐 방첩대원들이 걸쇠에 밧줄을 걸어 당기자 덜커덩 소리를 내며 문이 내려왔다.
그리고 어디선가 흘러오는 달큰한 향. 드디어 숨겨져 있던 비밀 창고가 모습을 드러냈다.
수백 평은 족히 넘을 법한 공동 안에 산처럼 쌓인 포대들.
석양의 붉은 빛이 비치자, 하늘에서 빛이 새어 들어와 왕관을 씌운 것처럼 반짝반짝 빛났다.
포대 더미 위에는 선명하게 OTSA 라는 글자가 쓰여 있고. 그 옆에는 열대가 넘는 발전용 디젤 엔진과 원당에 필요한 각종 설비가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다.
피혁 더미는 물론 전자기기, 냉장고, 고급 가전제품, 건열 멸균설비, 의료기구, 테라코타, 유리, 플라스틱 소비재, 차량용 엔진, 샷시, 조향장치, 타이어와 튜브, 부속품까지.
장엄하리만치 엄청난 물량에 홀린 듯 말을 잃은 사람들. 정적을 깬 것은 광필이가 홀린 듯 중얼거렸다.
“많이도 해 먹었구만. 시발…… 이게, 다 얼마요?”
“어디 안 도망가니 그건 나중에 계산해도 돼. 물 들어오기 전에 먼저 가벼운 것부터 옮기자고……”
이번 사건이 벌어진 걸 오성에서 눈치채기 전에 서두를 필요가 있다. 동원된 인력은 무려 오십여 명. 압류한 밀수선과 남은 배를 동원했음에도 불구하고 적재량이 부족해서, 배 서너 척이 추가로 동원되었다.
운반용 윈치와 인력 50여 명이 동원되었음에도 짐을 싣고 나르는 데만 꼬박 사흘 밤이 넘게 걸렸다.
그제야 한숨을 돌린 강태준이 회수한 총액을 재차 점검했다.
“대충 총액이 얼만지 확인해 봤나?”
“물량이 너무 많아서 정확히 추산하기 어렵습니다. 현재 확인한 바로는 사카린만 트럭 30대분이 넘고, 가전제품 320대, 발전용 디젤 엔진, 자동차 조향장치, 샷시 부품과 엔진을 포함해 50여 대 이상을 비롯하여 당구 회전기 80대, 고가 대리석을 비롯한 건설자재 200여 톤 정도입니다. 시가로 환산하면, 거진 220만 달러가 넘을 거 같습니다.”
“엄청나군.”
춘삼이의 대답에 광필이가 시니컬하게 대꾸했다.
“계속 헛짓거릴 해도 안 걸리니 간이 커질 대로 커진 게죠. 애초에 이 공장용 디젤 엔진은 수입 금지 품목에 속하더군요. 엔진 로토 넘버를 삭제하고 쓰려고 했던 모양입니다.“
“아주 기둥뿌리 하나는 뽑아 잡쉈구먼.”
그렇게 착착 환수가 진행하는 사이, 일이 어디까지 진행되었는지 꿈에도 모르는 대기조들은 약속된 일자에 나와 부두를 서성이고 있었다. 예정된 앙륙 시간이 오버되자 초조해진 운반책들이 사태를 파악하기 위해 부산을 떨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건가. 지금쯤 도착해도 한참 늦은 시간인데.”
“뭔가 일이 틀어진 거 아닌가. 김 부장 쪽에는 연락이 없나?”
“예. 아직은. 딱히 아무 언질이 없었습니다.”
“말도 없이 늦다니. 이런 정신 나간 새끼들을 봤나. 지금 당장!”
“아. 저기 옵니다.”
초조감에 손톱을 물어뜯던 변 선장이 서둘러 접안 장소로 다가갔다. 저 멀리 익숙한 배가 다가오는 모습을 보던 변 선장의 안색이 그제서야 밝아졌다.
하지만 접선을 위해 배에 올라탄 그가 발견한 것은 세관 조사관들이었다. 올라탄 면면들을 확인한 서남현이 이죽거리며 말했다.
“이야, 대단한데, 어차피 찾아갈 생각이었는데 이렇게들 떼로 몰려와 주시다니, 정말 영광이구먼.”
사람들이 사태를 파악하기 직전 부두를 포위한 사이렌과 함께 우르르 달려 나왔다.
“이, 이게 무슨 짓이오.!”
“변 선장, 당신을 밀수 혐의로 체포하겠습니다. 당신은 변호인을 선임할 수 있으며…….”
철컥!
대기조를 비롯한 밀수 관계자들이 전원 체포되었다. 같은 시각 검찰 역시 난리가 났다.
여수지검 부장실로 들이닥친 신명부가 이곳저곳을 들쑤시기 시작한 것이다.
갑작스런 사태에 당황한 김 부장이 소리를 질렀다.
“자네. 뭔 짓이야. 이게.”
“여기부터 여기까지 서류 전부 옮겨.”
도착한 수사관들이 박스에 짐을 챙기는 모습에 깜짝 놀란 김 부장이었다.
“신 검사, 이게 무슨 짓인가! 이거 하극상이야!”
“저는 범죄자 따위를 선배로 둔 적이 없습니다만? 혹시 저를 잘 아십니까?”
“뭐야? 이 위아래도 모르는 새끼가?”
부르르 떠는 김 부장이 멱살을 잡자 신명부가 단숨에 손을 꺾었다.
“아악! 이 자식 감히!”
“워어, 옷 구겨지게. 새 옷인데 너무한 거 아닙니까? 영장 발부도 받았으니 할 말이 있으시면 취조실에서 하시죠. 애꿎게 저한테 화풀이하지 마시고요.”
신명부가 꺾은 손을 집어던지자, 김 부장이 신음했다.
“너 이 자식! 두고 봐!”
“두고 보라는 놈치고 무서운 놈 없더라고요. 거 살펴 가십쇼. 선배님!”
얄밉게 이죽거리는 신명부의 모습에 부르르 떠는 김 부장.
하지만 서슬 퍼런 형사들의 연행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다음날 일본 NHK 뉴스에는 ‘오늘 하오 7시경 대마도 해안에서 정체불명의 괴선박이 한국의 소형 무역선을 격침시켰다’고 보도했다.
기다렸다는 듯이 같은 시각, 국내 신문들이 연일 기사를 쏟아 내었다.
-오성그룹의 계열사였던 오성식품이 동년 2월 일본에서 사카린의 원료를 밀수해 들여온 사실이 밝혀져 충격을 주고 있습니다.
-이번 밀수 건은 기업과 정계과 연루된 권력형 비리 사건으로 역대 최대의 규모로 밀수 전반은 오성 이병구 회장의 차남 이재무 씨가 주도한 것으로…….
-이들은 해상에서 수화물을 바다에 빠뜨려서 직접 물건을 빼돌리는 수법을 이용하였다고 합니다. 물에 가라앉지 않게 하려고 공기가 든 포장재를 여러 겹으로 싸 물에 뜨게 만들기도 했고요…….
오성에서는 즉시 성명서를 내며 반박에 열을 올렸지만, 이번 일을 다시없는 기회라 여긴 언론은 직접 밀수 시연까지 해 보이며 열을 올렸다. 오성식품이 미쓰비시와 공모하여, 사카린 약 102톤 건설자재로 밀수한 정황이 명명백백히 드러나자 전 국민이 충격에 빠졌다.
“시부럴. 그럴 줄 알았당께. 이런 개후레잡놈의 자식들. 앞에서는 수입 금지라는 걸로 해 놓고. 뒤에서 호박씨나 까고 앉았다고.”
“정부가 문제여. 아닌 말로 세관이며 검사장까지 짜고 해 먹은 거 아닌가. 매국노 자식들 같으니라고.”
“군인 놈들도 별거 없구먼. 그놈이 그놈이지 모리배들이 득시글하니, 나라 꼴 아주 잘 돌아간다. 범죄자들만 천국이여.”
추정된 밀수품만 시가로 220만 달러. 국민소득이 100달러 미만이었던 한국에서 천문학적인 거금. 국민의 공분을 사기에 충분했던 것. 뒤늦게서야 중앙정보부에서 움직이려 했지만 이미 사태는 이미 수습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비슷한 시각, 국가재건 최고회의실, 크게 노한 박정명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분기탱천하여 화를 참지 못한 그가 책상을 내리쳤다.
쾅!!
“아니, 대체 뭐 어떻게 된 건가. 밀수사건이라니. 분명 문제없을 거라 호언장담하지 않았나?”
“그게 예기치 못한 돌발 사태가 발생해서. 밀수품이 털렸답니다. 신명부라는 평검사가 주도하여 수사한 모양입니다, 내부적인 정보를 빼돌려 수사 공조를 요청했는데 부산과 통영 쪽 밀수 특별반 수사관들이 대거 가담하는 바람에…….”
“바보 같은. 그걸 중간에 커트 못 했다고?”
“아무래도 물밑에서 기회를 노리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조력자도 있었고요.”
“조용히 처리할 수는 없겠나?”
“증거가 워낙 확실한 데다 법원에서 판사가 영장까지 발부한 관계로…….”
변명에 어이가 없어진 박정명이 중얼거렸다.
“일개 평검사가 주도한 작전에 탈탈 털렸다고? 그걸 나보고 믿으라는 건가?”
“각하. 그게 지금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여론이 들불처럼 번지고 있습니다. 사태가 더 번지기 전에 이 사태를 어떻게든 수습해야 합니다.”
“끄응…….”
박정명이 몰려오는 두통에 머리를 감싸 쥐었다.
사실 이런 밀수는 실제로 중앙정보부 쪽에서 방조한 것이나 다름없다. 오성 그룹은 밀수한 사카린을 팔아서 비자금을 조성하고, 이 중에 상당한 이익을 상납해 왔던 것이다.
집권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군부정권으로서는 정치자금확보를 위해 벌인 일이었던 만큼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것.
난감해진 상황에 신임 중정부장으로 보임한 남형욱이 결의에 찬 어조로 말했다.
“여론이 무척이나 좋지 않습니다. 각하. 상황이 이렇게 되었으니 일단 계엄을 때리고 언론부터 재갈을 물려야 합니다.”
“이보게 임자, 국민이 순순히 따르겠나 그걸?”
“정 안되면 외부의 적을 만들어 내부를 규합하는 것이 정석 아니겠습니까. 필요하다면 북에 대포라도 쏴서라도 시선을 돌리는 것이…….”
남형욱의 과격한 말에 박정명이 책상을 쾅 하고 내리쳤다.
“남 부장. 그게 말이 되는 소린가! 사태가 이 지경이 되었는데, 일을 더 키우자고?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있나? 이번 일이 이렇게 된 건 자네도 책임이 없지 않아?”
“각하! 죄는 달게 받겠사옵니다만, 지금은 국가적인 위기입니다.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함은 어쩔 수 없으니 어떻게든 이 상황을 타개하는 것이 우선순위 아니겠습니까.”
화를 삭인 박정명이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참모진들 역시 눈치만 볼 뿐 말을 아꼈다. 꿀을 먹은 것처럼 사람들이 시선을 피하자, 남형욱의 입가가 슬쩍 비틀렸다.
‘당연히 무슨 대안이 있을 리가 없지. 같은 배를 탄 마당에 말이야!’
대놓고 뒷돈이나 처먹은 주제에 딱히 생각나는 방안이 있을 리가 없잖은가. 합죽이가 된 방안에서 침묵하는 사내들이 서로의 눈치를 보며 눈빛을 교환했다. 대충 돌아가는 분위기를 눈치챈 박정명이 분노를 터트리려는 순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각하.”
새로 등장한 사람은 다름 아닌 김필중. 예상하지 못한 불청객에 남형욱이 눈살을 찌푸렸다.
“전직 중앙정보부장께서 여기는 어인 일로? 여긴 공적 직함도 없는 자가 사사로이 출입할 곳은 아닌데 말입니다. 주식 파동의 여파가 가실 때까지 당분간 자숙하라 하지 않았습니까?”
“공식 직함은 내려놓았지만, 아직 여당 상임 고문으로서의 지위는 남았지요. 더욱이 지금은 비상사태가 아닙니까?”
“그래도 이건 관례와 배치되는 일이…….”
양자의 다툼이 길어질 듯하자 손을 휘휘 저은 박정명이 둘 사이의 말을 끊었다.
“되었어. 쓸데없는 격식 따지지 말고. 임자! 뭔 대책이라 있으면 말해 보게. 무슨 복안이라도 있나?”
“복안이라기보다 걱정하실 필요가 없다는 말씀을 전하러 왔습니다. 오히려 이 상황이 반드시 저희에 악재인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게 무슨 말인가?”
멈칫한 박정명에 김필중이 공손히 준비했던 서류 더미를 내밀었다.
“이게 뭔가?”
“이 상황을 타개할 전략안입니다. 각하”
잠시 후, 서류를 살핀 박정명의 눈이 이채를 띠었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