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화 밀수품의 향방
탕!!
절체절명의 순간 총소리와 함께 무력화된 녀석이 손칼을 떨구며 이내 신음을 흘렸다.
“강 사장, 아무리 바빠도 항상 뒤를 조심해야지요.”
총을 쏜 것은 다름 아닌 신명부 검사였다. 강태준이 감사를 표하자, 윙크한 신명부가 연기를 뿜은 권총을 후 부는 시늉을 했다. 뒤늦게 달려든 특전사 요원들이 갑판장을 결박하는 사이 강태준이 감사를 표했다.
“나이스 샷입니다. 총기는 언제 배우셨습니까?”
“이래 봬도 군필이여. 법무관 때 배웠지요. 그럼 내 오늘 밥값은 한 건가?”
“아무렴요. 수고하셨습니다.”
뒤따라온 방첩대원들이 선내를 제압하니 전 선장 역시 완전히 체념한 듯 고개를 떨구었다. 강태준이 서둘러 확성기를 통해 항복을 권했다.
“선박은 모두 점거되었다. 항복해라!!”
조타실이 점거당하고 선장이 인질로 잡히게 되자 전의를 잃은 녀석들도 하나둘 무기를 내려놓았다.
바다 한가운데서 포로가 된 녀석들을 한 방에 몰아넣은 강태준이 어창을 열었다.
하지만 생각과 달리 텅텅 빈 어창에 복만이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에게, 밀수품들이 어디로 간 겁니까? 설마 아까 다 버린 건.”
“이 새끼들 중간에 설사했군, 이거 많이 성가신데.”
“설사요?”
“밀수품을 수중 투하해서 숨기고 입항 신고가 끝나면 건져 내는 거지.”
“그럼 어떡합니까?”
“일단 추적은 나중에 해야지. 먼저 여기 남은 것부터 회수하자고,”
일에는 순서가 있는 만큼 일행은 배 밑바닥을 망치로 두들겨 가며 상세히 뒤졌다. 엔진 기름과 먼지가 뒤엉킨 공간을 뒤지던 그때 강태준이 배 밑창 발라스트(배의 균형을 잡기 위해 물을 채워 놓은 통) 속에 만들어진 비밀창고를 찾아냈다.
“여기로군. 소리가 달라.”
공간이 빈자리엔 둔탁한 소리 대신 통통 튀는 소리가 나기 마련. 아니나 다를까. 꽁꽁 밀봉된 갑판 마루를 잡아 뜯자, 숨어 있던 공간에 라디오, 선풍기, 냉장고, 전축 등 전자제품을 비롯해 모직 원단을 비롯한 고급 직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증거품이 확인되자 적발된 밀수선은 감시선과 밧줄로 연결해서 여수항으로 예인하기로 했다.
“시발, 살살 좀 하슈.”
“뭐야, 이 자식들이. 물 한 번 더 먹여 줘?”
붙잡힌 밀수선 선원들이 저항했지만 몇 번 쥐어박히고 나니 잠잠해졌다. 세관 감시정으로 옮겨 태우면서 회수한 물량을 확인해 보니 도합 칠천만 원대. 밀수품 가운데 일부는 통영 세관에 인계하기로 했지만 서남현을 비롯한 세관원들은 아직 만족한 기색이 아니었다. 터무니없이 적은 금액에 밀수품 목록을 확인한 신명부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이거 회수량이 생각보다 적네.”
“아니, 적다고? 이거 장난하십니까? 목숨 걸고 범인 잡았더니. 무슨 그따위 망발을…….”
발끈한 광필이가 버럭 성질을 내자, 당황한 신명부가 진화에 나섰다.
“아니 말뜻을 곡해하지 말게. 애초에 예상한 밀수액에 못 미친다는 거지.”
“그러게 고작 이 정도 수준이면 언론에 이슈화되기 힘들지요.”
강태준도 찬찬히 고개를 끄덕였다. 고작 칠천만 원어치라면 굳이 이런 노고를 들일 이유가 없지 않은가.
언론에 관심을 끌려면 더 큰 결과물이 필요한 법. 강태준이 다시 말했다.
“어딘가에 중간에 싣고 온 물건이 더 있겠지요.“
“과연 그럴까?”
“어창 바닥에 묻은 엔진 오일 자국이나 운반용 크레인까지 장착된 것을 보면 이게 전부일 리 없습니다. 이 정도 배는 대형 수화물도 충분히 싣고 내릴 수 있는 배 아닙니까. 단순 운반용으로 쓰기엔 좀 아깝죠.”
그 말이 솔깃한지 신명부가 서둘러 물었다.
“흠. 그렇다면 어디 다른 물류 보관창고가 있다는 말인가?”
“아마 충분히 가능성 있지 않겠습니까? 일단 창고가 한 개는 아닐 테니까요.”
어딘가 확신 어린 강태준의 말에 동조한 수사관들이 곧바로 취조를 시작했다. 하지만 놈들은 마치 입이라도 맞춘 것처럼 협박에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무리 어르고 달래도 입을 다물고 답이 없으니 도저히 회유할 방법이 없는 것이다.
“거 지독하구만. 이 새끼들. 미리 입 맞췄나? 아주 사람 신경을 살살 긁는구먼.”
“거 말 안 들으면 본보기로 한 놈 조져 버리는 건 어떻습니까? 어차피 범죄자 시키들. 한둘 죽는다고 문제 될 것도 아니고요. 이빠이 물 먹여 놓고 볼기라도 치면 뭐라도 나올까도 싶은데.”
감정기가 다분한 광필이의 반응에 신명부가 고개를 저었다.
“마음은 이해 가지만 그건 역효과일세. 우리가 깡패인 줄 아나. 그러다 한 놈 가기라도 하면 과잉 수사니 뭐니 지랄 떨 게 뻔하다고. 더욱이 눈깔 야리는 꼬라지를 보게. 저놈들은 고문한다고 회유될 놈들도 아니야.”
“그 점은 저도 동감입니다. 뭐 간부급은 답이 없을 거 같으니 일단 말단부터 공략해 보는 건 어떻겠습니까. 형량으로 회유해 보는 것은요.”
폴리바게닝을 하자는 서남현의 제안에 신명부가 고개를 저었다.
“허허. 물어봐야 소용없어. 다 털어놔 봐야 되려 형기만 늘어날 텐데, 제 발등 찍을 바보가 어디 있겠나. 더욱이 혈혈단신이면 모를까. 다들 가족이 인질로 잡힌 이상 회유가 쉽지 않을 걸세.”
“졸렬한 방법이군요.”
“뭐 그만큼 효과적이겠지. 범죄자 놈들도 지 새끼는 함함하지 않겠나.”
밀수를 의뢰하는 화주들도 바보가 아닌 이상,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뽑을 때부터 까다로운 검증 과정을 거친다. 특히 이번처럼 이문이 많이 남는 대형 선박의 경우 뒷조사 같은 건 필수. 어떡할지 난감하던 그때 강태준의 시야에 압수한 선원수첩이 들어왔다.
해수에 젖어 낡았지만 가죽으로 장정을 입힌 것이 꽤 정성을 들였다.
호기심이 생긴 강태준이 수첩을 뒤적이며 물었다.
“이건 뭡니까?”
“아 그거 놈들이 쓰던 항해일지일세. 별거는 없고 일기처럼 써 놨더군.”
“뭐 나온 건 없습니까?”
“딱히 특별할 건 없던데. 그냥 일상 이야기더라고 일기를 쓴 장소나 시간은 쏙 빼놨더군.”
강태준은 가만히 앉은 채로 수첩을 슬쩍 넘겼다. 심심풀이로 적어 둔 수기에는 시시콜콜한 이야기가 적혀 있었다. 가끔 뒷담화도 까고, 선을 넘나드는 농담이 적힌 것이 은근하게 재미가 있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수첩의 내용을 하나하나 꼼꼼히 살피던 강태준은 뭔가 특이한 점을 발견했다.
선원들 가운데 반절 이상이 전라남도 여천군 추도 출신이라는 사실이었다.
“이거 좀 이상한데요. 선원들 출신지가 겹치는데.”
“음? 그게 이상한가? 애초에 손발이 맞으려면 서로 친분이 있는 사이를 뽑는 게 맞지 않나. 뭐 한 쪽이 뽑히면 서로 끌어 주기 하는 경우도 있고.”
“그래도 연고 없는 인선은 없지 않겠습니까. 혹시 모르니 추도 근처에서 배부터 띄워 보죠. 혹시 모르지 않습니까?”
“응. 생각해 보니 그렇네?”
그 말이 그럴듯하다고 여긴 사람들도 이에 동조했다.
밑져야 본전이니 강태준 일행은 일단 감시선을 추도 앞바다로 가서 자그마한 목선을 띄워 보기로 했다.
동경 128도, 북위 34도로 향한 배가 주변을 샅샅이 뒤졌다.
“흠. 이런 건 모래 위에서 바늘 찾긴데?”
“물 위를 살펴보십쇼. 놈들의 근거가 멀지 않다면 십중팔구는 기름 흔적이 보일 겁니다.”
기름은 수심이 낮아 함미가 바닥에 닿아 움직임을 멈출 때 유출되는 경우가 잦다. 게다가 섬 같은 곳에 간다면 반드시 추가로 보급받을 연료를 근처 어딘가에 구비해야 하는 만큼. 해안에 내려준 기름을 섬 위 초소까지 운반해야 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
더욱이 기관실의 커다란 탱크 중 빈 연료탱크에다 밀수품을 비닐에 싸서, 기름이 들어 있는 통 바닥에다 가라앉혀 놓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이럴 경우 물건을 꺼낼 때 필연적으로 기름이 새기 마련이고 흘러나온 연료는 조류에 의해 긴 띠를 형성하게 된다.
아니나 다를까. 바다가 잔잔해질 무렵 방울방울 떠오르는 기름띠가 감시선 쪽으로 흘러오는 것이 아닌가. 뻘과 모래가 대부분인 앞바다였지만 추도 인근 바다는 자갈로 뒤덮여 있는 해안선 해도를 통해 미리 확인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과연 기름이 유출되어 퍼져 나가는 가시광선이 무지개처럼 빛나고 있었다.
“오!! 진짜로군.”
“역시나, 이 근방에 경유지를 두었군요.”
“알겠네. 일단 잠수부들을 보내 뒤져 보기로 하지.”
고무된 서남현 수사관이 통영 쪽 동료들을 보내 수색을 서둘렀다. 잠수부들이 부표에 묶인 밀수품을 찾아내는 동안 밤이 깊어지자 강태준은 편광 렌즈를 사용해 기름띠를 살폈다.
길게 뻗은 줄이 마치 흔적처럼 길게 해안가로 이어지는 모습에 강태준은 조심스레 위치를 표시해 두었다.
다음날 현지 출신 안내인을 구한 강태준은 기름띠가 알려 준 길을 따라 추도 인근 바다로 향했다. 거북이처럼 웅크린 섬은 나무로 무성했다.
수목이 우거진 협곡의 모습에 조심스레 우현으로 키를 돌린 강태준이 방향을 선회하며 접근하기 시작하자, 듬성듬성 암초가 보였다. 코를 훌쩍이던 광필이가 우려하듯 말했다.
“진짜 이 길이 맞습니까? 생각보다 뱃길이 너무 좁은데요.”
“보기에만 그렇지 뒤로 통로가 있겠지.”
과연 우측 바위 옆으로 틈새가 보이는 곳으로 배를 살살 돌려보니 숨겨진 뱃길이 모습을 드러냈다. 바다로 향해 있는 길 양쪽을 기암절벽이 마주 보듯 쪼개져 있는 것이 화산석과는 또 다른 느낌을 주었다.
불쑥 솟아오른 절벽을 몇 미터 사이에 두고 둥둥 떠 있는 강철선은 연못 위에 놓인 장난감처럼 느껴졌다. 근처의 물은 투명해서 물속에 유유히 돌아다니는 물고기들이 보일 만큼 맑았다. 엔진소리를 내는 배가 스리슬쩍 다가가자 불청객에 깜짝 놀란 물고기 떼가 쏜살같이 뒤로 내뺐다.
절벽은 퇴적층의 층리들이 바닷물의 영향으로 깎이고 풍화되어 뼈를 드러내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니 모양은 변화무쌍한 것이 묘한 느낌을 자아냈다.
목재 색깔의 뾰족한 규화목이 있는가 하면 어떤 곳은 마치 조각가가 칼로 인위적으로 잘라 낸 것처럼 파편이 떨어져 나가 있을 정도. 때아닌 절경에 강태준도 순수하게 감탄을 내뱉었다.
“이야, 이거 장관이로군”
“이 동네에서는 바다로 통하는 관문으로 유명하지요. 여기 주민들은 흔히들 용궁 가는 길이라 부르는데 여기서 기원하면 뭐든지 이루어진다는 말이 있습니다.”
“여기서? 딱히 기도하는 곳은 없는데.”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광필이가 의아해하자 안내인이 으쓱했다.
“뭐 바다에 던져 바치면 그게 바로 공물 아니겠습니까? 예전에 날이 궂을 때는 사람을 공물로 바친 적도 있다고 합니다.”
“그건 좀, 으슬으슬하군요.”
“심청이가 무덤에서 깨어날 소리로군. 여기서 야밤에 던져지면 진짜로 용궁 가시겠어.”
아니면 머리가 깨지던가.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는 강태준이었지만 생각은 길지 않았다. 자갈이 깔린 해변에서 몇 미터 앞에 도착하자 닻이 바닷물에 빨려 들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파도로부터 방파제 역할을 하는 바위에 배를 접안시킨 강태준은 일행과 함께 산자락을 향해 움직였다.
나무로 우거진 틈새를 지나오자, 나무 사이 가파른 해안 절벽이 고개를 내밀었다. 드문드문 보이는 오래된 흔적을 지나 좁고 가파른 산을 가시투성이 소나무와 후박나무 가지들이 얽힌 빽빽한 숲을 지나가자 짙은 회색과 점들이 뒤섞인 색깔의 바위들이 보였다.
“여기서부터는 흩어져서 찾지. 어차피 작은 섬이니 탐색하다 보면 뭐라도 나올 걸세.”
작은 섬이니만큼 광필이와 서남현 등이 각자 조를 맡아 나누어 움직이기로 했다. 얼마나 뒤졌을까. 날은 점점 저물자 주변 해역의 바닷물이 빠지면서 사도에서 장사도까지 이어지는 바닷길이 슬쩍 모습을 드러냈다.
계속되는 조사에 강태준이 땀을 식히며 잠시 바위 위에 걸터앉은 사이. 어디선가 흥분한 목소리가 들렸다.
“여깁니다!”
흥분한 춘삼이가 찾아낸 것은 사람의 발자국이었다. 쿵쿵쿵 찍혀진 무게 있는 발자국은 움푹 패진 데다 하얗게 색깔이 입혀져 더 뚜렷하게 보였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