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화 밀수선 사냥
‘이렇게 무리를 하다간 배가 견디지 못해. 언젠가 크게 터질 텐데 말이야.’
지뢰밭을 지나는 기분에 전낙근은 솔직히 조마조마했다. 의뢰인 입장에서 볼 때 배 한 척에 밀수 물량을 많이 실을수록 이윤이 높아지니 당연히 과량 적재를 선호할 수밖에 없고, 배에 타는 선원들 또한 판매가를 비율대로 나눠 받는 만큼, 양자의 이해관계가 들어맞았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사고 예방, 해상 안전이란 말은 항상 뒷전으로 밀려났다. 배가 설사 침몰하더라도 몇 번만 밀수에 성공하면 도리어 이득이다 보니 조금만 적재를 적게 하도 윗선에서도 더 실으라 압박이 들어오기 일쑤였고, 신중파인 전 선장으로서도 어쩔 수 없이 밀수품을 많이 실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연료 게이지를 보던 선장이 마땅찮은 듯이 중얼거렸다.
“역시 패커드를 켜니 기름 오지게 잡아먹는구만. 휘발유만 세 드럼통 더 실었으면 속이 편할 텐데.”
“에이, 그건 수지가 안 맞죠. 연료 탱크 세 드럼이면 적재 무게가 600킬로인데 그게 돈이 얼맙니까. 어차피 예비용인데, 다 쓰는 경우도 없지 않습니까?”
“임마, 그게 보험이지. 잡혀서 뺏기고 나면 뒤도 없어.”
“선원들 주머니 사정도 생각해야죠. 이 배에 빚내고 탄 놈이 태반인데 그놈들도 밥값은 벌어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닌 오지랖 넓어서 좋겠다. 이러다 한 놈 시범케이스로 잡히지 않을까 몰라.”
“그게 우리만 아니면 되지요. 자, 벌써 목적지에 거의 도착했습니다.“
어둠을 가르며 나아가던 밀수선은 어느덧 근해에 가까워졌다. 배가 섬 근처로 들어오면서 희뿌옇게 가려져 있던 해안의 모습이 차츰 시야에 들어온 것이다.
목적지를 확인한 선장은 서둘러 가솔린 모터를 멈추었다.
배의 진동을 꺼지면서 요란했던 엔진 소리가 사라지는 순간, 마치 총체적인 휴식이 배를 감싸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농밀하게 어둠이 내려앉은 바다를 보며 전낙근 선장은 힐끗 시계를 들여보았다. 시간은 벌써 11시가 넘었다.
“얼추, 시간은 맞겠네요.”
“그러게. 얼렁 나오라고 하게.”
선장은 조타실 밖으로 나왔다. 살을 에는 듯한 바닷바람에 외투를 깊이 여몄으나 모터의 굉음은 여전히 추위를 타고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흉포했던 바다는 잠시 숨을 고른 아기처럼 쌔근쌔근 잠이 들었지만 오랜 선상 생활로 야행성이 된 선장의 눈은 더욱 똘망해졌다.
북극성 주위 깔려 있던 구름이 걷히자 별빛이 반짝이는 것이 보이자 거짓말처럼 부드러워진 물살에 마음속의 불안도 다소 가셨다.
“바다가 잔잔해지는군.”
“그러게요. 호재입니다.”
하지만 선장은 다시금 결심을 굳히고 있었다. 그래, 사람이 물러설 때를 알아야지. 이것만 하고 손 터는 거다.
등대의 불빛들이 함몰되어 희미해지는 가운데 조타실 유리창으로부터 흘러나온 섬광이 번뜩였다. 선실 위로 달린 전구에서 희미한 불빛이 어지럽게 불타고 있었다.
달빛에 비슷한 파장에 홀려 뜨거워진 전구로 달려든 날벌레가 치칙 소리를 내며 불덩이로 화해 사그라들었다. 마치 마지막 생명의 불꽃을 태우려는 것처럼.
* * *
비슷한 시각, 먹먹한 구름에 하늘이 가려 별 하나 없이 어두운 밤.
저 멀리 삼덕항 쪽에서 새어 나오는 빛이 바다의 물살을 어루만지자 등대가 보내는 신호가 길게 출렁였다.
세 번은 길게 네 번은 짧게 교대로 번쩍거리며 깎아지른 바위를 붉게 물드는 가운데 숨을 죽인 채 해안선를 주시하는 눈동자들.
통영항에서 발산된 빛은 서서히 퍼져 나가며 존재감을 드러냈다. 잠시 후 바다에 내려앉은 빛들이 별무리가 지듯 침전하고, 반딧불처럼 반짝이는 라이트가 철렁이는 바다 위를 규칙적으로 핥았다. 그때 때마침 강태준 일행에게 치칙~ 무전기 소리가 들렸다.
"몽돌 해변에서 동북 방향으로 80톤급 토탈 선박 출현! 쾌속정으로 분선하고 연안에서 낚시선이랑 랑데부할 예정인 듯합니다.”
“알았다 오바.”
밀수선이 우도 서쪽 바다로 들어선다는 소식에 조마조마하던 사람들도 숨통이 트인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깨가 뻐근한지 팔을 돌린 광필이의 목소리에 옅은 흥분이 감돌았다.
“거, 빨리도 왔구먼. 기다리느라 목 빠지는 줄 알았네.”
“슬슬 준비해. 감시선 출동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서 수사관님?”
“일단 제 동기에게 연락해 두었습니다. 지금 욕지도에서 출발했다니 밀수선이 포착되는 대로 바로 들이칠 겁니다.”
드디어 격전인가. 사람들의 얼굴에 긴장감이 감돈다.
사람들을 불러 모은 강태준은 서 수사관과 협의한 실행 계획을 반복해 설명했다.
“작전은 아주 단순합니다. 분선이 시작되면 황 서방이 일단 빌린 어선으로 주의를 끌고 적들이 정신이 팔린 틈에 서 수사관이 분선이 이루어지는 현장을 덮쳐 주십시오. 그 사이 저희는 본선을 잡겠습니다.”
“예, 알겠습니다. 하지만 놈들은 생각 이상으로 거친 놈들인데, 엄호가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감시선도 합류하는데 같이 보조를 맞추는 건.”
“그 점은 걱정 마십시오. 저희 쪽도 나름 베테랑들로 모았으니 서 수사관님께서는 일단 분선에 오른 놈들부터 제압해 주시면 됩니다.”
어차피 감시선은 길막 용도 이상으로 쓰기 힘든 만큼, 이번 작전의 키는 강태준이 본선을 어떻게 잡아내느냐에 달려 있다. 추격의 핵심을 맡을 강철선 뒤엔 군용 고무 보트를 달아 방첩대원 4명이 같이 탑승하기로 했다.
“본선 속도가 얼마나 되는지는 모르지만, 디트로이트 엔진을 단 우리 배보다는 빠르지 못할 겁니다. 분명 발각되면 대마도 해역으로 전속으로 도망칠 테니 달아나기 전에 붙잡아야 합니다.”
“알았습니다. 저흰 그럼 분선을 제압하는 즉시 뒤따라가겠습니다.”
그 말에 혼자 뻘쭘하게 듣고 있던 신명부가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그럼 나는 뭘 하면 되나? 여기서 이렇게 죽치고 시간만 때우는 건 뭣한데.”
“신 검사님은 서 수사관님과 동행해 주십시오. 직접적인 교전은 피하시고요. 그 전에 일단 무기부터 배급해야겠군요.”
“무기라고?”
강태준의 눈짓을 주자 복만이가 기다렸다는 듯 쇠로 된 트렁크 하나를 텐트 안에서 꺼냈다. 쇠로 된 트렁크 안에는 잘 손질된 총기 3자루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방첩대원들에게 카빈 소총을 나눠 준 강태준이 권총 하나를 신명부에게 건넸다.
“혹시 모르니 방호용입니다. 검사님도 하나 가지고 계십쇼.”
“이건…… 콜트 디텍티브. 아닌가?”
“알고 계시는군요. 6연발 콜트 리볼버로 주로 육군 장성들에게 주로 지급되는 물건이지요.”
차가운 쇠의 감촉에 얼떨떨해진 신명부가 조심스럽게 총열을 살폈다.
“이거, 짭 아니지?”
“당연히 진짜죠. 암시장에서 구한 물건이긴 하지만 준 민트급입니다. 군대는 갔다 오셨죠?”
“뭐 다녀오긴 했지. 근데 쏴 본 지 오래돼서 모르겠구먼.”
“꽤 비싼 값을 주고 사 온 거니 오발 위험은 없을 겁니다. 최후의 수단이니 신중하게 쓰십쇼.”
총열을 살핀 신명부가 안전장치를 점검했다. 과연 권총 안에는 총알 두 발이 장전되어 있었다.
조심스럽게 총을 확인한 신명부가 꺼림칙한 어조로 말했다.
“근데 이거 완전 본격적인데.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혹시라도 인명피해가 발생하면.”
“어디까지나 방위 차원입니다. 특공선에 타는 놈들을 평범한 짐꾼으로만 보면 오산입니다.”
“그래도 이건 좀 과잉 대응 아닌가 싶어서…….”
“놈들을 쉬엄쉬엄 보지 마십시오. 조직에 몸담았던 흉악범이 어디 한둘이 아닌데 몇 놈 담그고 왔는지 어찌 알겠습니까? 강도나 살인을 저지르고 도망친 놈들도 있으니 위험합니다. 애초에 밀수 자체가 잡히면 중형을 피할 수 없을 테니까요. 그러니 일전을 각오해 두십쇼.”
총기는 물론 방탄조끼까지 차례로 착용하고 나니 일행의 얼굴도 자못 비장해졌다.
무기를 보급받고 나자 이번 일의 위험성이 피부로 와닿았던 것이다.
강태준은 새로 개조한 10톤짜리 무안호에 올라 임전태세를 마쳤다.
광필이와 춘삼이를 비롯해 다섯 명의 방첩대원들이 함께 올라탔다. 목섬 측면에 정박한 서남현은 출동 대기 상태로 해상에서 대기하는 중이었다.
가라앉은 분위기를 띄우려는 듯 손목 붕대를 감던 광필이가 유쾌하게 외쳤다.
“설마 빠질 녀석들은 없지? 쫄은 놈이 있으면 지금 말해라.”
“아니, 무슨 서운한 무슨 말씀을. 밀수꾼 자식들한테 쫄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릴. 여봐. 아니들 그런가?”
“당연하죠. 너무 오래 쉬어서 몸이 근질근질하지 말입니다.”
“고럼, 아주 묵사발을 내줘야지요!”
자존심이 상했는지 발끈한 대원들이 한 소리씩 하자, 광필이가 우렁차게 소리쳤다.
“그럼 얼타지들 말고! 밀수꾼 놈들 불알이 오그라들게 만들어 주자고!”
“예!”
기합을 마치고 나니 약간 긴장이 가신 듯 표정들이 편해졌다. 잠시 후, 돌투성이 해변 뒤편으로 일렁이는 파도에 쓸려 목선 하나가 삐죽이 뱃머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포구도 아닌 벼랑이 있는 바위 근처 출항하는 20톤급 어선이라니. 이상함을 느낀 강태준이 미군 장갑차에서 빌린 적외선 탐조등을 켰다. 야간 투시경을 비추자, 저쪽의 실루엣이 드러났다.
“드디어 왔군요.”
“저건 백 프로 운반책이로군.”
낚싯배로 위장하긴 했지만, 어선이라기엔 명백하게 수상한 움직임이다. 주위를 경계하는 모습이 명백하게 어민들의 행동과는 거리가 멀다. 아니나 다를까. 그로부터 약 5분쯤 지났을 무렵, 낚시하는 시늉을 하던 배가 이윽고 구멍섬이 도달했다.
이윽고 저편에서 쾌속하게 구멍섬을 향해 전진하는 모습이 보였다.
다시 본선의 위치를 확인하자 저쪽에서는 엔진을 끈 채 쌍안경으로 배를 주시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날이 어두워서인가. 아직 누군가 숨어 있는지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애초에 여기서 잠복하고 자신들을 잡으러 온 배가 있으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게 아무것도 모르는 특공선은 본선에서 나와 서서히 구멍섬에 접근했다. 쾌속정 한 척이 섬을 한 바퀴 돈 다음 낚싯배 가까이에 멎어 시동을 끄는 것이었다.
구멍섬에서 벌어지는 일을 주시하던 강태준은 무전기를 들어 다시 주의사항을 숙지시켰다.
“자자, 놈들은 눈치가 아주 빠르다. 나포할 시간과 때를 잘 잡아야만 해. 서툴게 움직였다가 바다 쪽으로 튀면 상황은 아주 어렵게 전개될 수도 있어.”
분선이 이뤄지는 동안 황 서방이 빌린 어선은 천천히 느리게 구멍섬 근처를 향해 접근했다. 특공선은 대부분 자동차 G.M.C 엔진을 장착해 특수 조립한 만큼 특히 단거리 고속 운항에 능했고, 회전에 능하니 잡으려면 퇴로를 차단할 필요가 있었다.
유사시 도망갈 수 있는 길을 미리 차단하려는 의도.
어선을 가장한 밀수선 선원들은 부지런히 짐을 나르는 데 바빠 아직 상황을 눈치를 못 챈 것 같았다.
마치 태풍 전야와 같은 정적이 흐르고, 강태준에게 짧은 신호가 떨어졌다.
길게 두 번. 통영에서 감시선이 떴다는 신호에 강태준이 짧게 무전을 쳤다.
“지금이다!”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구멍섬 북쪽에서 멀찌감치 출발했던 통통배가 정북에서 방향을 선회했다. 본선과 구멍섬 사이에 끼어든 선박 역시 불을 환하게 밝혔다.
아무것도 모르는 듯 분선에 여념이 없었던 밀수선이 휘황한 빛에 화들짝 놀랐다.
“뭐. 뭐야? 저 자식들은!”
“설마, 짭새인가? 아무 징후도 없었는데.”
“얌마, 목소리 낮춰! 들킨다고!”
갑작스럽게 등장한 불청객에 당황한 밀수꾼들의 행동이 분주해졌다. 제 발이 저린 녀석들은 쾌속정을 구멍섬 안에 넣고 인기척을 숨겼다.
-다음 화에 계속-